1985–1988

반알코올 캠페인

보드카와 싸운 국가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고르바초프 지도부가 집권 두 달 만에 시작한 첫 대규모 사회 개혁이었다. 1985년 5월 「음주와 알코올 중독 퇴치 조치」가 공포되면서 보드카 생산이 감축되고 판매 시간이 제한되었으며 주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정치국에서는 리가초프솔로멘체프가 캠페인을 가장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실적 경쟁 속에 몰도바·크림·그루지야의 포도밭까지 갈려 나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시는 나라

1984년,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기 직전, 소련의 1인당 실제 알코올 소비량은 약 14.2리터였다. 이는 성인 남성 1인당 연간 보드카 90~110병에 해당하는 양으로, 프랑스(13.5리터)를 넘어선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공식 판매량만 10.5리터였고, 나머지 3~4리터는 사모곤(밀주)이 채웠다. 전체 소비의 약 70퍼센트가 보드카 등 독주였다.

국가 재정은 보드카에 묶여 있었다. 보드카 소매가의 약 90퍼센트가 '거래세'였고, 주류 판매 수입은 전체 예산의 12~16퍼센트, 연간 약 500억 루블을 차지했다. 이 수입으로 빵·우유·설탕의 낮은 가격을 보조하는 구조였다. 술을 덜 팔면 식량 보조금 체계가 흔들렸다.

공중보건은 이미 비상 상황이었다. 1984년 러시아공화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61.7세, 여성은 73세였다. 11년이라는 성별 격차는 서유럽(4~7년)의 두 배 가까이였다. 외인사 사망자의 약 60퍼센트가 음주 상태였고, 한 해 710만 명이 강제해장소를 거쳐 갔다. 전국에 등록된 알코올 중독자는 430만 명이었다.

1958년과 1972년에도 반알코올 캠페인이 있었다. 1972년 캠페인은 보드카 판매 시간을 오전 11시~오후 7시로 제한하고 강제노동치료소를 도입했지만, 예산 손실을 감당하지 못해 1~2년 만에 흐지부지되었다. 알코올 소비는 계속 늘었다.

정치적 전환은 1982년 5월에 시작되었다. KGB 의장이던 유리 안드로포프브레즈네프에게 "음주와의 투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비망록을 보냈다. 정치국은 아르비트 펠셰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펠셰 위원회의 초안은 맥주·드라이 와인 생산 확대, 카페 네트워크 확충 같은 점진적 접근을 제안했으나,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 사망, 1983년 펠셰 사망으로 중단되었다. 위원장을 이어받은 미하일 솔로멘체프는 안드로포프의 규율 강화 노선에 맞춰 초안을 강경하게 수정했다.

안드로포프는 1983년 9월 값싼 보드카 '안드로포프카'(4루블 70코페이카)를 출시하며 민심을 달래려 했지만, 그 역시 1984년 2월 사망했다. 후임 체르넨코도 13개월 만에 숨졌다. 1985년 3월 11일 서기장에 오른 고르바초프 앞에는 이미 강경 초안이 놓여 있었고, 두 달 뒤인 5월 7일, 그것은 「음주와 알코올 중독 퇴치 조치」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었다.

「취한 예산」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

1984년 말, 소련의 1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은 공식 집계로 10.5리터, 밀주와 대용주까지 합치면 14리터에 달했다. 스탈린 시대의 두 배, 제정 러시아의 세 배였다. 1984년 한 해에만 거리에서 930만 명의 주취자가 경찰에 수거되었고, 음주 관련 범죄로 1만 3천 건의 강간과 2만 9천 건의 강도가 발생했다. 학자들은 경제적 손실을 연간 300억 루블에서 600억 루블로 추산했다. 사망률은 인구 1천 명당 1964년 6.9명에서 1984년 10.8명으로 치솟았다.

문제는 오래된 것이었다. 1982년 5월, 유리 안드로포프는 브레즈네프에게 음주 투쟁 강화를 촉구하는 비망록을 보냈다. 정치국은 아르비트 펠셰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회는 맥주와 포도주 생산을 늘리고 카페와 펍을 확충하자는 온건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1983년 5월 펠셰가 사망하고 안드로포프도 1984년 2월 세상을 떠나면서 이 작업은 흐지부지되었다.

1985년 4월 4일, 고르바초프 집권 한 달 만에 정치국은 미하일 솔로멘체프가 2년 반 동안 준비한 반알코올 대책 초안을 심의했다. 솔로멘체프의 제안은 급진적이었다. 보드카 생산을 1985년 2억 8천만 데칼리트르에서 1990년까지 1억 데칼리트르로 감축하고, 강화 포도주는 연 2천만 데칼리트르씩, 과실주는 1988년까지 전면 폐지한다는 계획이었다.

회의장에서 즉각 반론이 제기되었다. 재무차관 빅토르 데멘체프는 1986년에만 예산 수입이 40억 루블 줄고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결손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보드카 생산의 대폭 감축은 밀주 생산 증가, 공업용 알코올 절도, 추가적인 설탕 소비를 초래할 것입니다." 국가계획위원회보로닌도 "인구가 보유한 현금을 흡수할 상품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고르바초프는 두 경제 관료의 발언을 잘라버렸다. "당신이 지금 말한 것에는 새로운 게 하나도 없소. 우리 모두 국민 손에 쥐어진 돈으로 살 물건이 없다는 걸 알고 있소. 그런데 당신은 사람들에게 술을 먹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고 있소." 이어 "우리는 더 이상 이 취한 예산을 용납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그루지야의 전통 증류주 차차 생산을 예외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고, 게이다르 알리예프니콜라이 리시코프도 제재의 강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예고르 리가초프와 솔로멘체프가 강경안을 밀어붙였고, 고르바초프가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1985년 5월 7일, 「음주와 알코올 중독 퇴치 조치에 관한」 당 중앙위원회 결정과 각료회의 결정 제410호가 채택되었다. 이어 5월 16일에는 행정·형사 처벌을 담은 최고회의 간부회의 포고령이 공포되었다. 핵심 조치는 이러했다. 보드카와 주류 생산을 1986년에만 3천만 데칼리트르 감축하고, 주류 판매 시간을 평일 오후 2시부터 7시까지로 제한하며, 가격을 20~30퍼센트 인상한다. 공공장소 음주에는 50~100루블(월 평균 임금 190루블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의 벌금을 부과하고, 직장 내 음주자는 상여금 박탈·휴양소 이용권 몰수·주택 대기 순번 후퇴라는 불이익을 받는다. 주류 구매 연령은 21세로 상향되었고, 공원·기차·논문 심사 축하연에서의 음주가 금지되었다. 당원들은 '자발적으로' 금주협회에 가입해야 했으며, 「절주는 삶의 규범이다(Трезвость — норма жизни)」라는 구호가 전국을 뒤덮었다.

소련 국가가 처음으로 스스로의 재정 기둥을 잘라내기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계획이 아니라 경쟁이 된 감산

1985년 5월 결정은 애초에 향후 5년 동안 보드카 생산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충분히 야심 찬 계획이었다. 국가가격위원회 니콜라이 글루시코프 위원장이 각료회의에 제출한 계산에 따르면, 연간 10퍼센트씩 생산을 줄이고 가격 인상으로 재정 손실의 80퍼센트를 상쇄한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1986년에 들어서자 이 계획은 정치적 경쟁에 삼켜졌다. 예고르 리가초프와 미하일 솔로멘체프가 이끄는 정치국의 강경파는 1990년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1987년, 10월 혁명 70주년까지 절반 감축을 앞당기라고 압박했다. 그 결과 1985년에서 1986년 사이 절대알코올 생산량은 1억 9,900만 데칼리트르에서 1억 2,100만 데칼리트르로 39퍼센트 급감했다. 2년도 안 되어 생산이 반 토막 난 것이다.

이 약진은 보드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애초 안드로포프-펠셰 위원회가 권고한 방향은 독주를 줄이는 대신 포도주와 맥주 생산을 늘리는 것이었지만, 1986년의 분위기 속에서는 모든 종류의 알코올이 표적이 되었다. 포도주 생산량은 3년 사이에 거의 3분의 1로 줄었고, 맥주조차 생산량이 반감되었다. 이러한 전면적인 감산은 소련 남부 공화국들에 재앙이었다.

몰다비아에서는 21만 헥타르의 포도밭 가운데 8만 헥타르가 뽑혔다. 크리코바 와인 공장의 발렌틴 보듈 당시 수석 엔지니어는 "사람들을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와 포도나무를 찍게 했다"고 증언했으며, 포도밭을 지키려던 이들은 14-15년형을 선고받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6만 헥타르의 포도밭이 사라졌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손실보다 큰 규모였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로서 캠페인 이행을 감독했던 야코프 포그레브냐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크림에서 휴가를 보내던 리가초프를 마산드라로 안내했다. 150년 역사의 표본 와인을 보관하는 비노테카를 보고 리가초프가 말했다. '이 비노테카를 없애고 마산드라를 닫아야 합니다!'"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간신히 마산드라를 살렸다. 크림 주당 위원회 제1서기 빅토르 마카렌코도 이 증언을 확인했다.

그루지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수출용 와인의 상당 부분을 소련에 의존하던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사회주의 동맹국들도 타격을 입었다. 소련 대외무역성이 이들 국가로부터의 와인 수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파괴의 규모를 놓고 참여자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리가초프는 후일 인터뷰에서 1985년 소련 전체 포도밭 면적이 126만 헥타르, 1988년이 121만 헥타르로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고, 솔로멘체프는 2003년 인터뷰에서 "원래 기술용 품종이 92퍼센트였고 식용은 2퍼센트에 불과했으니 구조 전환을 권고한 것뿐"이라고 방어했다. 그러나 통계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러시아 공화국에서만 포도밭 면적이 1985년 20만 헥타르에서 1990년 16만 8천 헥타르로 줄었고, 연간 포도 수확량은 85만 톤에서 43만 톤으로 반감했다. 집단화된 수치 뒤에는 「에킴카라」처럼 영영 사라진 고유 품종들, 그리고 가장 처참한 대가를 치른 한 사람이 있었다. 전연방 포도재배·와인제조 연구소 「마가라치」 소장 파벨 골로드리가 박사는 캠페인을 막기 위해 포로스의 고르바초프 별장까지 찾아갔으나 실패했고, 1986년 12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구소와 여러분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내 자신이 역겹습니다. 의지를 잃었습니다."

국가가 술을 거두자 부엌이 증류소가 되었다

공식 주류 판매가 1985년 199만 데칼리터(순알코올 기준)에서 1987년 93만 데칼리터로 반 토막 나자, 소비에트 사회는 수백만 개의 사적 증류소로 응답했다. 1985년 사모곤 제조로 적발된 사람은 3만 명이었으나 1986년에는 15만 명, 1987년에는 39만 7천 명으로 폭증했다. 이 숫자는 적발된 경우만 센 것이므로, 실제 밀주 인구는 이보다 훨씬 컸다. CIA의 1987년 추산에 따르면 소비에트 성인 남성의 약 23퍼센트가 사모곤 생산에 관여하고 있었다.

밀주의 원료가 된 것은 주로 설탕이었다. 1985년 785만 톤이던 소련의 설탕 판매량은 1987년 928만 톤으로 18퍼센트 뛰었다. 소련의 경제학자들은 이 증가분 가운데 약 140만 톤이 사모곤 제조에 투입되어, 연간 1억 4천만에서 1억 5천만 데칼리터의 밀주를 생산했다고 추산했다. 이는 국가가 감축한 공식 보드카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상쇄하는 규모였다. 소련 무역장관 콘드라트 테레흐는 1987년 12월 각료회의에 보낸 보고서에서 "설탕에 대한 수요 급증은 1986년 하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1986년 7월부터 12월까지 설탕 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22퍼센트 증가했고, 1987년 상반기에도 16퍼센트가 더 늘었다. 소매 재고는 1986년 한 해에만 62만 5천 톤이 줄었고, 1987년에도 70만 톤이 추가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결국 1987년에는 전국적으로 설탕 배급제(타론)가 도입되었다.

설탕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보드카 대용으로 소비된 품목들의 판매량을 보면 상황은 더욱 암울하다. BF 접착제는 1985년 760톤에서 1987년 1,000톤으로, 자동차 유리 세정액은 6,500톤에서 7,400톤으로, 살충제 디클로르보스는 1억 1,500만 개에서 1억 3,500만 개로 늘었다. 모스크바에서만 오드콜로뉴 판매가 1.5배로 뛰었다. 그 결과 1987년 한 해에만 4만 4천 건 이상의 알코올 대용품 중독 사고가 발생했고, 1만 1천 명이 사망했다.

재정 타격은 더욱 직접적이었다. 1985년 이전까지 주류 판매는 국가 예산 수입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핵심 재원이었다. 1984년 주류 판매 수입은 540억 루블이었고 1985년 600억 루블을 거둘 예정이었으나, 실제 수입은 460억 루블에 그쳤다. 1986년에는 380억 루블, 1987년에는 350억 루블로 더 떨어졌다. 국가예산은 1985년에만 140억 루블의 적자를 기록했고, 이 적자 구조는 소련 붕괴까지 지속되었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는 캠페인 초기부터 "설탕과 토마토 페이스트 같은 사모곤 대체 원료의 품귀와 예산 수입 감소"를 경고했으나, 리가초프와 솔로멘체프의 강경 노선에 밀렸다. 1987년 중반이 되자 비탈리 보로트니코프 러시아공화국 총리가 정치국에 캠페인 방식의 오류를 지적하는 서한을 제출했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 압박 속에 1988년 가을 캠페인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행정적 급진주의」라는 유죄 판결

1988년 가을, 반알코올 캠페인은 정치국 안팎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1988년 9월 초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정치국에 제출한 비망록은 캠페인 3년의 대차대조표를 냉정하게 적시했다. 주류 판매 급감으로 소비재 수요가 식료품·의류·신발로 몰리면서 상점 앞 대기열이 3년 전보다 절반 넘게 늘었고, 설탕 판매량은 1985년 785만 톤에서 1987년 928만 톤으로 치솟아 거의 전역에서 배급제로 돌아섰다. 국가통계위원회 추산으로 1987년 한 해에만 140만 톤의 설탕이 밀주용으로 소비되었으며, 이는 약 1억 4천만에서 1억 5천만 데칼리트르의 사모곤에 해당해 보드카 판매 감소분을 사실상 상쇄했다. 리시코프가 바로 그해 초 정치국에서 보고했듯, 1988년도 예산의 상품 적자 100억 루블 중 90억 루블이 보드카 판매 감소에서 비롯된 구멍이었다.

캠페인의 운명은 이미 1987년 말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1987년 7월, 최고회의는 판매 목적 없는 자가소비용 밀주 제조에 대한 형사처벌을 행정처분으로 낮추었다. 러시아공화국 총리 비탈리 보로트니코프는 캠페인 방법론의 오류를 지적하는 비망록을 정치국에 보냈고, 정치국은 문제를 각료회의로 넘겼다. 각료회의는 리시코프의 주도로 1988년 1월 1일부터 국영 주류 생산과 판매를 늘리기로 권고했다.

종지부는 1988년 10월 12일 당 중앙위원회 결정 「음주·알코올 중독 퇴치 강화에 관한 당 중앙위 결정의 이행 경과」였다. 이 문건은 캠페인을 명시적으로 폐기하지는 않았으나, 표현의 선택으로 사실상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금지적·명령적 수단", "극단과 조급함", "단기적이고 요란한 캠페인"에 대한 비판이 줄을 이었고 "현장의 과잉"을 단죄했다. 모스크바와 주요 도시에서는 이미 그해 여름부터 주류 판매점이 조용히 재개되고 판매 시간이 연장되었으며, 맥줏집과 와인 바가 제한적으로 문을 열었다. 중앙위 결정은 이러한 후퇴를 사후 승인하면서도 "음주 극복 노선에서의 일탈은 용납될 수 없다"는 모순된 단서를 달았다.

재정 손실 규모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고르바초프의 경제 고문 아벨 아간베갼은 3년간 570억 루블의 국고 손실을 추산했고, 재무장관 발렌틴 파블로프는 1989년 9월까지 누적 손실을 918억 루블로 집계했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훗날 『프라우다』에서 490억 루블을 인정했다. 캠페인을 가장 강경하게 밀었던 예고르 리가초프조차 1986년 가을 정치국에서 "예산이 주류 판매 감소로 약 120억 루블을 덜 거둬들였다"고 시인한 바 있다. 1984년 540억 루블이던 주류 판매 수입은 1986년 380억, 1987년 350억 루블로 추락했다.

그러나 진짜 대가는 숫자가 아니었다. 「미네랄 서기장」이라는 별명에 담긴 민심의 이반은 이후 페레스트로이카의 다른 개혁들이 맞닥뜨릴 저항을 예고했다. 캠페인은 1988년 10월에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무너진 국영 주류 생산 체계를 복구하는 데는 수년이 걸렸고 보드카 생산량은 1993년에야 1984년 수준을 회복했다. 주류 판매 시간을 오후 2시부터로 제한한 규정은 1990년 7월 24일 각료회의 결정 제724호까지 형식적으로 살아남았다. 캠페인은 단 한 번의 정치국 투표나 공개 사과 없이,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행정 문서 속으로 사라졌다.

무엇이 증명되고 무엇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38년이 지난 지금도 이 캠페인은 러시아 역사학과 역학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논쟁의 선명한 구분선을 처음 그은 것은 테레세 레이탄(Therese Reitan)의 2001년 논문 「수술은 실패했으나 환자는 살아남았다」였다. 레이탄은 의사·역학자들이 캠페인을 공중보건의 성공으로 평가한 반면, 정치학자들은 소련식 행정 캠페인의 마지막 실패로 간주했다고 지적했다.

확정된 사실부터 보자. 알코올 소비가 급감했고 사망률은 즉시 반응했다. 역학자 알렉산드르 넴초프(Александр Немцов)의 계산에 따르면, 1985~1992년 사이 예상 사망자 수 대비 약 138만 명이 덜 죽었다. 이 중 약 100만 명이 캠페인이 집중되었던 첫 3~4년 동안의 감소분이다. 인구학자 예브게니 안드레예프(Евгений Андреев)는 남성 기대수명이 1984년 61.7세에서 1987년 65.0세로 3.2년 상승했으며 이는 러시아 역사상 최고치였다고 밝혔다. 여기에 출생률 상승(연간 약 50만 명 증가), 범죄율 감소, 산업재해 감소가 더해진다. 술을 덜 마시면 덜 죽는다는, 역학적으로는 당연한 명제가 국가 규모의 자연실험을 통해 실증된 셈이다.

반대쪽 대차대조표도 확정적이다. 3년간 예산에서 사라진 주류 수입은 최소 490억 루블(고르바초프 본인이 1990년 『프라우다』에 기고한 수치)에 달했다. 사모곤이 공식 주류의 빈자리를 메우면서 설탕 소비가 연간 7,850만 톤(1985년)에서 9,280만 톤(1987년)으로 폭증했고, 독성 대용주로 인한 사망이 1987년 한 해만 1만 1천 건에 이르렀다. 포도 재배는 반세기 만에 회복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1994년,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은 캠페인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가장 첨예한 논쟁은 1990년대 초 러시아의 '사망률 위기'를 둘러싼 것이다. 자야 바타차리아(Jay Bhattacharya) 등은 2013년 『American Economic Journal: Applied Economics』에서 캠페인 기간 음주와 사망률이 크게 줄었던 지역일수록 캠페인 종료 후 사망률이 더 가파르게 반등했음을 보였다. 즉 1990~1994년 러시아 남성 사망률 40% 폭증의 상당 부분은 시장경제 이행 충격이 아니라, 국가가 더 이상 술을 통제하지 않게 된 데 따른 '반동'이라는 주장이다. 이 해석은 전통적인 전환기 스트레스 설명(경제 붕괴, 실업, 심리적 충격)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넴초프 자신은 『러시아 알코올의 현대사』(2011)에서 캠페인의 근본적 한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위로부터의 행정 명령으로는 음주 문화를 바꿀 수 없으며, 국민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한 금주 정책은 지속될 수 없다. 그 점에서는 소련의 마지막 캠페인도 1914년과 1972년의 전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기간 동안 이 캠페인이 실제로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이 모순이 바로 이 개혁에 대한 모든 평가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지 않는 이유다.

성공도 실패도 아닌, 평가 자체가 갈라진 유산

반알코올 캠페인을 하나의 판결문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그것을 정리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은 결론을 낳았다. 스웨덴 정치학자 대니얼 타르쉬스는 1993년 이렇게 제목을 붙였다: 「성공한 실패」(The Success of a Failure). 한 문장으로 캠페인의 역설 전체를 압축한 표현이었다. 행정적으로는 목표를 달성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재앙이었고, 공중보건의 관점에서는 승리였으나 재정의 관점에서는 참패였다. 그 후 30년 동안 학계의 논쟁은 이 역설의 양쪽 날개를 번갈아 더 무겁게 만드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사망자 수를 놓고 벌어졌다. 러시아 알코올 역학의 권위자 알렉산드르 넴초프는 1985~1987년 사이 캠페인이 러시아에서만 약 7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추계했고, 후속 연구에서 그 숫자를 약 100만 명까지 상향했다. 제이 바타차리아·크리스티나 가트만·그랜트 밀러(2013)는 주 단위 패널 데이터를 분석해 캠페인 기간 중 연간 약 40만 명의 추가 사망이 방지되었으며, 1985~1989년 누적으로 약 66만 5천 명이 덜 죽었다고 계산했다. 이 연구의 더 큰 주장은 그다음에 있었다: 1990~1994년 러시아의 40% 사망률 급증, 이른바 '체제전환 사망 위기'의 상당 부분이 민주화와 자본주의 도입이 아니라 반알코올 캠페인의 종료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보드카 소비가 캠페인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자, 가장 많이 마시던 계층인 노동 연령 남성의 사망률이 가장 먼저 가장 가파르게 치솟았다.

이 주장은 '체제전환 충격'을 러시아 사망 위기의 주범으로 보던 정치경제학계의 통념을 정면으로 겨누었기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니얼 트라이즈먼(2010)은 사망률 변동을 설명하는 핵심 변수로 주류 가격과 소비량을 꼽으면서도, 1990년대 초의 사망 급증을 단일 요인으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했다. 테레세 레이탄(2001)은 캠페인에 대한 평가가 연구자의 규범적 입장, 즉 공중보건 우선이냐 개인의 자유 우선이냐에 따라 판이하게 갈린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같은 수치를 놓고도 '국가가 시민의 생명을 구했다'와 '국가가 시민의 선택을 빼앗았다'라는 상반된 서사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캠페인 당사자들조차 끝까지 엇갈린 평가를 내놓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2005년 20주년 인터뷰에서 "실수 때문에 좋은 큰일이 끝내 불명예스럽게 끝났다"고 말했다. 예고르 리가초프는 2010년 인터뷰에서 캠페인이 "중상모략당했다"고 주장했고, 미하일 솔로멘체프는 포도밭 파괴가 과장되었다고 반박했다. 세 사람은 같은 정치국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남은 것은 서로 다른 기억이었다.

오늘날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이 캠페인은 현대사에서 국가 주도의 공중보건 개입이 단기간에 측정 가능한 규모로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보기 드문 사례였다. 동시에, 위로부터의 금주가 민주적 동의 없이 추진될 때 어떤 정치적·재정적·사회적 비용을 치르는지도 증명했다. 무엇이 더 무거운지는 증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이 끝내지 못한 논쟁

이 캠페인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1993년 스웨덴 정치학자 다니엘 타르쉬위스가 『Europe-Asia Studies』에 발표한 논문의 제목, 「실패의 성공」(The Success of a Failure)이라는 역설에 수렴되어 왔다. 공중보건의 목표를 기준으로 삼으면 성공이고, 재정·정치적 기준을 적용하면 실패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그 후 30년간 이 역설이 덮지 못한 두 가지 논쟁이 학계를 갈라왔다.

첫째는 생명을 구한 규모다. 알렉산드르 넴초프는 공식 사망 통계와 알코올 소비 추계를 조합해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러시아에서만 약 70만 명, 소련 전체로는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고 추산했다. 이후 추계를 확장해 1986년부터 1991년까지 122만 명이 추가로 생존했다는 수치를 제시했다. 미국 학술원은 1997년 보고서에서 넴초프의 방법론을 '지나치게 단순한 통계 조작'이라 비판했지만, 2013년 바타차리아·가트만·밀러가 주(州) 단위 패널 데이터로 검증한 결과 연간 약 40만 명의 사망 감소, 캠페인 전 조사망률 대비 24퍼센트 감소를 확인하면서 넴초프의 주장에 정밀성이 더해졌다.

둘째, 더 근본적인 논쟁은 1990년대 러시아의 사망률 급증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다. 1990년에서 1994년 사이 러시아 남성 기대수명은 6.6년 하락했다. 주류 해석은 시장 충격, 빈곤, 체제 전환의 혼란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바타차리아 등은 이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캠페인 이전 음주율이 높았던 지역일수록 1980년대 후반 사망률 감소 폭이 컸고, 동시에 1990년대 사망률 증가 폭도 컸다. 시차를 둔 '따라잡기 사망'(캠페인으로 연명했던 취약층이 캠페인 종료 후 사망)과 장기 추세로의 복귀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체코·헝가리·폴란드처럼 체제 전환을 겪었으나 캠페인을 거치지 않은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동일한 사망률 급증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비교 증거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 연구는 '체제 전환 자체가 살인적이었다'는 통념을 흔들었고, 러시아 인구위기의 원인을 1985년의 금주 정책이 아니라 1988년의 금주 포기에서 찾는 역전된 시각을 학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캠페인은 끝났지만, 그 유산을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 개의 확정과 하나의 균열

35년의 연구와 논쟁 끝에 세 가지는 더 이상 진지하게 다투는 학자가 거의 없다. 첫째, 캠페인이 공중보건에서 상당한 단기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르 넴초프의 추계에 따르면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약 138만 명이 캠페인 덕분에 추가로 생존했으며, 남성 기대수명은 1984년 61.7세에서 1987년 64.9세로, 3년 만에 3.2세가 늘었다. 바타차리아·가트만·밀러(2013)는 연간 약 40만 명의 사망 감소로 추산했고, 방법론은 다르지만 결론의 방향은 같다. 둘째, 캠페인이 소비에트 재정에 입힌 타격이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비용을 초래했다는 점이다. 1985년에서 1988년 사이 주류 판매 수입은 약 300억 루블 감소했고, 설탕 배급제와 밀주 단속은 정권의 일상적 권위를 침식했다. 셋째, 캠페인의 집행 방식이 관료제적 실적 경쟁으로 변질되어 농업과 포도주 산업에 복구 불가능한 손해를 입혔다는 점이다. 몰도바에서만 8만 헥타르의 포도밭이 사라졌고, 크림의 마산드라 와이너리는 리가초프의 현장 지시 한 방에 문 닫을 뻔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모두를 수용한 후에도 하나의 균열은 메워지지 않는다. 이 균열을 가장 정확히 진단한 것은 테레세 레이탄의 2001년 논문 「수술은 실패했지만 환자는 살아남았다」였다. 레이탄은 캠페인 평가가 역학적 관점과 사회학적·규범적 관점 사이에서 근본적으로 갈라져 있다고 지적했다. 역학자는 사망률·기대수명·질병 부담이라는 측정 가능한 지표로 캠페인을 평가하고, 그 결론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사회학자와 정치경제학자는 시민의 일상에 대한 국가 폭력, 재정 파탄, 주류 문화의 파괴, 그리고 무엇보다 정권이 국민을 성숙한 주체가 아니라 관리 대상으로 대했던 방식을 문제 삼는다.

이 균열은 2010년대에 더 깊어졌다. 바타차리아·가트만·밀러(2013)는 1990년대 초 러시아의 사망률 폭증, 즉 남성 기대수명이 1994년 57.6세까지 추락한 소위 「러시아 사망률 위기」의 주요 원인이 캠페인의 종료라고 주장했다. 캠페인 기간에 살아남았던 취약 계층이 보드카가 다시 풀리면서 지연 사망한 「반동 효과」이며, 체제 전환의 충격은 부차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자로바·셰이링·애쉬·킹(2021)은 극동 지역을 제외하면 반동 효과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유화의 속도와 범위가 사망률 변동을 더 잘 설명한다고 반박했다. 헝가리처럼 캠페인이 없었던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망률 급등이 관찰되었다는 사실은 반동 가설의 외적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반알코올 캠페인은 단일한 평가로 수렴되지 않는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 그것이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구한 생명들이 불과 몇 년 뒤 다른 방식으로 다시 사라졌을 가능성 사이에서, 연구자들은 여전히 같은 숫자를 보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읽고 있다.

결과

공식 주류 판매가 4분의 1 넘게 줄었고 남성 기대수명이 눈에 띄게 늘었으며 출생률도 올랐다. 그러나 밀주(사모곤)가 성행해 설탕이 품귀가 되었고, 3년 동안 재정은 수백억 루블의 주류 수입을 잃었다. 1988년 가을 캠페인은 사실상 폐기되었고, 고르바초프에게는 「미네랄 서기장」이라는 조롱이 남았다. 공중보건의 성과와 재정·민심의 대가가 극명하게 엇갈린 개혁이었다.

연표

  1. 1985.05
    캠페인 개시

    당 중앙위원회 결정과 정령으로 음주 퇴치 조치가 공포되었다.

  2. 1986
    감산의 확대

    주류 생산 감축이 계획을 앞질렀고 남부 공화국의 포도밭이 파괴되었다.

  3. 1987
    사모곤과 설탕 품귀

    밀주가 급증해 설탕이 배급제에 들어갔고 재정 손실이 뚜렷해졌다.

  4. 1988.10
    사실상의 종료

    정치국이 판매 제한을 완화하면서 캠페인이 조용히 끝났다.

관련 인물 14명

관련 용어

출처: Stephen White, Russia Goes Dry: Alcohol, State and Society (1996)William Taubman, Gorbachev: His Life and Times (2017)A. V. Nemtsov, A Contemporary History of Alcohol in Russia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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