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01–07

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

파리의 하룻밤 폭동이 어떻게 코민테른의 노선을 뒤집었는가?

1934년 2월 6일 저녁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극우 동맹들이 하원 의사당을 향해 밀어붙이다 경찰 발포로 15명이 죽었다. 스타비스키 금융 사기 사건으로 의회 부패에 대한 분노가 쌓인 끝이었고, 극우 언론은 스타비스키가 유대인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점을 앞세워 그 분노를 반유대 선동으로 옮겨 놓았다. 이튿날 의회 다수를 쥐고 있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사임하면서, 제3공화국에서 처음으로 거리가 정부를 무너뜨렸다. 사흘 뒤 공산당 시위에서 다시 9명이 죽었고, 2월 12일 총파업에서는 따로 행진하던 사회당과 공산당의 대열이 나시옹 광장에서 만나 「단결!」을 외쳤다. 오늘날 연구는 그날 밤을 조직된 쿠데타로 보지 않지만, 히틀러 집권 1년째였던 당시 좌파에게 그것은 프랑스판 파시즘의 총연습이었다. 이 공포가 사회파시즘 노선을 무너뜨리고 7월 통일행동협정과 이듬해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인민전선 보고로 이어졌다.

스타비스키의 시신과 의회의 불신

프랑스에 대공황은 늦게 왔다. 1931년부터 수출이 무너지고 실업이 늘었지만 정부는 금본위와 균형재정을 지키느라 손발이 묶여 있었다. 1932년 총선에서 좌파가 이겼는데도 급진당은 사회당과 함께 정부를 꾸리지 못했고, 두 해 사이에 내각이 다섯 번 바뀌었다. 의회는 위기 앞에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기구로 보이기 시작했다.

1933년 12월, 여기에 추문 하나가 얹혔다. 사업가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가 바욘 시립 전당포를 통해 담보가 부실한 채권을 발행해 수억 프랑을 끌어모은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여러 차례 기소되고도 재판이 열아홉 번 연기되는 동안 자유롭게 지냈고, 그 뒤에는 급진당 정치인들과 사법부의 인맥이 있었다. 사건을 쥐고 있던 파리 검사장은 쇼탕 총리의 처남이었다. 1934년 1월 8일 샤모니의 산장에서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고 경찰은 자살로 발표했다. 「경찰이 아주 가까이서 쏘았다」는 조롱이 우파 신문의 표제가 되었다. 왕당파 악시옹 프랑세즈, 피에르 테탱제가 세운 청년애국단, 향수 재벌 프랑수아 코티가 만들어 자금을 댄 연대 프랑스, 그리고 참전군인 조직에서 자라난 불의 십자단은 이 사건을 「부패한 공화국」의 증거로 삼아 거의 매일 밤 거리로 나섰다.

「유대인 사기꾼」: 추문이 인종 선동으로 번역되다

스타비스키는 러시아 제국의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 가정에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프랑스에 왔고 뒤에 귀화한 사람이었다. 극우 언론에게 이 사실은 사건의 부수적인 세부가 아니라 사건의 의미 그 자체였다. 악시옹 프랑세즈는 제호 옆에 「프랑스는 프랑스인에게」를 달고 있었고, 샤를 모라스레옹 도데는 이 추문을 외국인과 유대인이 프랑스의 제도를 안에서부터 좀먹는다는 오래된 이야기의 최신 증거로 삼았다. 《그랭구아르》와 《주 쉬 파르투》가 같은 곡조를 반복했으며, 「유대-프리메이슨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몇 주 사이에 우파 지면의 상투구가 되었다.

부패에 대한 분노 자체에는 근거가 있었다. 담보가 부실한 채권이 시립 기관의 이름으로 발행되었고, 열아홉 번 연기된 재판 뒤에는 정치인과 사법부의 인맥이 있었다. 극우가 한 일은 그 분노를 제도의 문제에서 혈통의 문제로 옮긴 것이었다. 문제는 부패한 의원이 아니라 「이 나라 사람이 아닌 자들」이 되었고, 해법은 감사와 재판이 아니라 의회 자체의 청산이 되었다. 2월 6일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상당수가 이 이야기를 안고 왔으며, 「도둑들을 몰아내라」는 구호와 반유대 구호는 그날 같은 입에서 나왔다.

이 선동은 그 밤으로 끝나지 않았다. 1936년 2월 왕당파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레옹 블룸을 차에서 끌어내 거의 죽도록 때렸고, 그해 6월 그가 총리로 의사당에 서자 우파 의원 그자비에 발라는 이 오래된 갈로로마의 나라가 처음으로 유대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발라는 1941년 비시 정권의 유대인문제총국장이 되어 유대인 등록과 재산 박탈을 집행한다. 1934년 겨울의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어디로 갔는지는 그 인사 하나로 드러난다.

콩코르드의 밤

1월 27일 카미유 쇼탕 내각이 무너지고 30일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정부를 세웠다. 그는 동맹들에게 관대하다는 평을 듣던 파리 경찰청장 장 시아프를 2월 3일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모로코 총감 자리를 제안했으나 시아프는 거부했고, 우파는 이것을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2월 6일 저녁, 달라디에가 하원에서 신임을 묻는 동안 여러 동맹과 90만 회원을 둔 참전군인 조직 전국연합(UNC)이 각기 다른 길로 콩코르드 광장에 모였다. 광장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하원 의사당이었다. 군중은 버스를 불태우고 철책을 뜯어 던졌으며, 다리를 막아선 경찰은 여러 차례 발포했다. 밤이 끝났을 때 열다섯 명이 죽었다. 부상 뒤에 숨진 사람까지 세는 집계는 열일곱 명으로 적는다. 부상자는 1,500명이 넘었고 대부분이 시위대였으며 경찰 쪽에서도 수백 명이 다쳤다.

달라디에는 의회에서 신임을 얻었다. 그런데도 이튿날 사임했다. 군대를 부르면 더 큰 유혈이 온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제3공화국에서 의회 다수를 쥔 정부가 거리에 밀려 물러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후임은 정계에서 은퇴해 있던 전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였고, 그가 꾸린 거국내각에는 필리프 페탱 원수가 국방장관으로 들어갔다. 좌파가 보기에 이것은 거리의 폭력이 내각의 구성을 바꾼 사건이었다.

폭동인가 쿠데타인가

이 밤은 이름부터 갈렸다. 좌파는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이라 불렀고 우파는 애국자들의 날이라 불렀다. 이 항목이 앞의 이름을 쓰는 것은 그 밤이 어떻게 읽혔고 무엇을 낳았는지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오늘날 연구는 2월 6일을 조직된 쿠데타로 보지 않는다. 세르주 베르스탱을 비롯한 연구자들이 정리했듯이 동맹들에게는 공동 지휘부도, 의사당을 점거한 뒤의 계획도 없었다. 불의 십자단을 이끌던 프랑수아 드 라 로크 대령은 자기 대열을 의사당 반대편에 세워 두었다가 해산시켰고, 이 신중함 때문에 뒷날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목적도 하나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연금이 깎인 참전군인과 세금에 항의하는 상인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정치를 움직인 것은 사건의 실제 성격이 아니라 그것을 읽은 방식이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지 1년,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서로를 주적으로 부르다 함께 무너진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프랑스 좌파는 콩코르드의 밤을 프랑스판 파시즘의 총연습으로 읽었고, 그 독법 위에서 움직였다. 사실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위협에 대한 판단의 문제였다는 이 구분이 이후에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열쇠다.

2월 12일, 두 대열이 만나다

2월 9일 프랑스공산당이 부른 시위가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 일대에서 경찰과 충돌해 9명이 죽었다. 사흘 뒤인 2월 12일에는 노동총동맹(CGT)이 공화국 방어를 내걸고 24시간 총파업을 불렀고, 갈라져 나가 있던 통일노동총동맹(CGTU)과 공산당도 각자의 이름으로 참가했다. 전국에서 파업과 집회가 이어졌다. 파리에서는 사회당 대열과 공산당 대열이 서로 다른 길로 나시옹 광장을 향해 행진했다. 두 대열이 만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여섯 해 동안 서로를 「사회파시스트」와 「분열주의자」로 부르던 사이였다. 대열은 충돌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단결!」을 외치며 서로 껴안았다.

이날의 광경은 그 뒤 몇 달 동안 프랑스 좌파 정치의 근거가 되었다. 당의 결정이 기층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기층이 당의 손을 묶었다. 생드니 시장이자 공산당 지도부의 한 사람이던 자크 도리오는 2월부터 사회당과의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제명되었다. 뒷날 그가 파시스트 정당인 프랑스인민당을 세운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아이러니로 남는다. 같은 요구를 당의 이름으로 집행한 것은 그를 제명한 모리스 토레즈였다.

모스크바가 노선을 바꾸기까지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 이래의 공식 노선은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의 「온건한 날개」로 규정하는 사회파시즘론이었다. 독일에서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1933년에 이미 드러났지만, 코민테른은 히틀러의 집권을 자본주의 붕괴의 전조로 해석하며 노선을 유지했다.

전환의 인물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였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피고로 라이프치히 법정에 서서 괴링을 몰아붙이고 무죄를 받아 낸 그는, 콩코르드의 밤에서 3주 뒤인 1934년 2월 27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해 봄부터 그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를 주적으로 두는 노선이 옳은지 묻는 메모를 쓰기 시작했고,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이 그 물음의 구체적인 증거가 되었다. 결정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의 재가가 있고 나서야 노선이 움직였고, 그 재가에는 소련 외교의 필요가 얹혀 있었다. 독일의 위협 앞에서 소련은 프랑스와 손을 잡아야 했는데, 프랑스공산당이 프랑스 정부를 무너뜨리려 애쓰는 상태로는 그 동맹이 성립하지 않았다.

7월 27일 사회당과 공산당이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다. 10월 낭트에서 토레즈는 연합을 급진당까지 넓히자며 「노동과 자유와 평화의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처음 내놓았다. 1935년 5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이 서명되었고, 그해 7월 25일부터 8월 20일까지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디미트로프는 8월 2일의 보고로 이 전환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공식 노선으로 만들었다. 그 보고가 파시즘에 내린 정의는 이후 반세기 동안 공산주의 운동의 표준 정식이 된다. 「권력을 쥔 파시즘은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배외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자들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이다.」 파시즘을 자본주의 일반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지배계급 안 특정 분파의 지배로 규정한 이 정식은, 나머지 부르주아 세력과의 동맹을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회파시즘론이 닫아 두었던 문이 그 자리에서 열렸다.

두 개의 기억

프랑스에서 2월 6일은 두 갈래의 기억으로 남았다. 좌파에게 그것은 인민전선의 출발점이었다. 2월 12일의 합류에서 1935년 7월 14일 50만 명의 인민연합 선서로, 1936년 5월 총선 승리와 레옹 블룸 정부로 이어지는 선이 그어졌다.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가 그 선의 끝에 있었다.

우파에게 2월 6일은 순교의 날이었다. 죽은 열다섯 명은 「공화국이 쏘아 죽인 애국자」로 기려졌고 해마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추모가 열렸다. 1940년 패전 뒤 비시 정권의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밤을 자기 정치의 기원으로 말했다. 같은 사건이 한쪽에는 반파시즘 연합의 출발점이 되고 다른 쪽에는 의회 공화국을 끝장낼 명분이 되었다.

역사학의 논쟁은 인과의 방향에 관한 것이다. 노선 전환은 파리의 거리에서 올라간 것인가, 아니면 소련 외교의 필요에서 내려온 것인가. 코민테른 문서고가 열린 뒤의 연구는 대체로 두 힘이 만난 지점을 가리킨다. 프랑스 지부는 모스크바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기층의 압력으로 먼저 움직였고, 모스크바는 그 움직임을 뒤늦게 추인하면서 자기 외교의 필요에 맞게 다듬었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노선이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인민전선은 무엇을 약속했고, 무엇을 미뤘나

1935년 7월 25일부터 8월 20일까지 모스크바 노동조합회관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는 65개 가맹당과 19개 동조 정당을 대표한 513명의 대표가 모였다. 이 대회의 전환은 단순히 「사회파시즘」이라는 말을 「인민전선」으로 바꾼 일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나치가 노동조합과 공산당, 사회민주당을 차례로 분쇄한 뒤에는, 노동계급 내부의 순결한 주도권만 기다리는 전략이 파시즘의 실제 동원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프랑스의 1934년 2월 12일 공동행동과 오스트리아의 2월 무장투쟁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교훈을 주었다. 노동자 조직들은 경쟁을 계속하는 동안 패배했고, 함께 행동할 때에만 거리와 사업장을 지킬 수 있었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8월 2일 본보고서는 이 경험을 이론으로 묶었다. 그는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국수주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자들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라고 규정하면서도, 그것이 단순히 자본가들의 비밀 결의로 출범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파시즘은 위기에 몰린 소부르주아와 일부 노동자에게 반자본주의와 민족의 구원을 약속하며 대중 기반을 만든다. 따라서 대응도 공산당의 선언만으로 끝날 수 없었다. 디미트로프가 제시한 출발점은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의 노동계급 통일전선이었고, 그 위에 농민과 도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비공산주의 정당까지 묶는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이 연합을 혁명의 포기가 아니라 파시즘을 저지하고 대중 다수를 조직하는 구체적 투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 약속에는 비용과 긴장도 있었다. 코민테른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스트 독재의 차이를 실제 생존의 문제로 인정했지만, 인민전선에 참여한 공산당들은 당장의 방어를 위해 급진적 요구와 권력 문제를 뒤로 미루어야 했다. 1935년 5월 프랑스와 소련이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사실은 이 전환이 국제정세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막심 리트비노프집단안보 외교는 독일의 재무장을 막기 위해 프랑스 같은 자본주의 국가와도 협력해야 했고, 코민테른의 새 노선은 그 외교에 노동운동의 정치적 형태를 부여했다. 이 때문에 일부 혁명가들은 인민전선을 방어적 통일이 아니라 노동자 운동을 급진적 결산에서 묶어 두는 계급협조라고 비판했다. 그 비판은 훗날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가 노동자들의 공장점거와 개혁 요구를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되돌아왔다. 제7차 대회는 파시즘을 막을 넓은 연합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 연합이 승리한 뒤 사회를 어느 방향으로 바꿀지는 해결하지 않은 채 남겼다.

무너진 것은 정부였고, 남은 것은 공화국이었다

2월 6일이 확정한 것은 ‘파시스트 쿠데타’라는 단일한 사건의 성격이 아니라, 거리의 폭력이 의회 정부를 실제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하원 다수를 갖고 있었지만 2월 7일 사임했고, 그 자리를 가스통 두메르그의 거국내각이 차지했다. 따라서 위기는 헌정 질서를 즉시 폐지하지는 않았어도, 무장한 대중조직과 의회 우파가 결합할 때 정부의 권위가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냈다. 동시에 노동자운동은 2월 12일의 총파업과 공동행진으로 다른 결론을 만들어 냈다. 공화국 방어는 단순히 기존 의회를 신뢰한다는 뜻이 아니라, 파시스트 동맹이 노동조직을 분쇄하기 전에 서로 싸우던 노동자 정당과 노동총동맹이 행동의 공간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 사건이 정착시킨 것은 인민전선의 필연성이 아니라 통일행동의 필요였다. 1934년 7월 협정과 1935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보고는 이 필요를 코민테른의 국제 노선으로 일반화했지만, 그것이 사회당과 공산당 사이의 전략적 차이를 없애지는 않았다. 레프 트로츠키는 『프랑스는 어디로 가는가』에서 급진당과의 연합이 노동자를 부르주아 정치에 묶는다고 비판하며 노동자 민병과 독자적 권력기관을 주장했다. 반대로 디미트로프는 1935년 보고에서 광범한 연합 없이는 파시즘의 대중 기반을 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양쪽 모두 2월의 교훈을 말했지만, 하나는 혁명적 공세의 기회로, 다른 하나는 방어를 위한 계급동맹의 조건으로 읽었다.

역사학의 쟁점도 여기에 남아 있다. 조엘 콜턴이 정리한 현재의 합의는 여러 동맹 사이에 의사당을 장악하기 위한 통일된 계획이 없었고, 조직의 분열과 지도력 부족 때문에 쿠데타가 실행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이끄는 불의 십자단이 의사당 돌입 대신 해산한 사실은 이 판단의 핵심 근거다. 그러나 이 결론은 ‘위험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악시옹 프랑세즈와 청년애국단 일부는 공화국을 무너뜨리려 했고, 경찰 발포와 달라디에의 사임은 그들의 압력이 헌정 정치에 남긴 물질적 결과였다. 세르주 베르스타인은 이를 조직된 쿠데타라기보다 우파가 좌파 정부를 몰아내려 이용한 폭력적 정치위기로 보았고, 브라이언 젱킨스와 에릭 밀링턴은 위기 자체가 프랑스의 ‘파시즘 면역성’을 가정해 온 설명을 재검토하게 만든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2월 6일은 프랑스가 이미 파시스트 국가가 되었다는 증거도, 아무것도 아닌 소동도 아니다. 그것은 공화국의 생존이 제도 내부의 다수만으로 보장되지 않으며, 노동계급의 조직된 대응이 없으면 반동이 정부의 형태부터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준 경계선이었다. 무엇이 끝났는지는 분명했다. 사회파시즘 노선은 현실의 공동위기를 설명하지 못했다. 무엇이 해결되지 않았는지도 분명했다. 인민전선은 노동자 통일과 부르주아 공화국 방어를 결합하는 방법, 그리고 그 결합이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를 끝내 결정하지 못했다.

결과

2월의 위기는 프랑스 좌파의 재편을 강제했다. 1934년 7월 27일 사회당과 공산당의 통일행동협정, 1935년 7월 14일 50만 명의 인민연합 선서, 1936년 5월 총선 승리로 이어져 레옹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섰다. 코민테른에서는 1935년 제7차 대회에서 사회파시즘 노선이 폐기되고 인민전선이 공식 노선이 되었으며, 이 노선은 스페인과 칠레의 인민전선 정부로 이어졌다가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과 함께 갑작스럽게 접혔다. 프랑스 극우에게 2월 6일은 순교의 기억으로 남아, 1940년 비시 체제의 인사들이 자기 정치의 기원으로 되짚는 날이 되었다.

연표

  1. 1933.12
    스타비스키 사건이 터지다

    바욘 시립 전당포를 통한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의 채권 사기가 드러나고, 급진당 정치인들과의 인맥이 함께 알려졌다. 극우 언론은 그가 유대인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점을 앞세워 추문을 반유대 선동으로 옮겼다.

  2. 1934.01.08
    스타비스키의 죽음

    샤모니의 산장에서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발표했고 우파 신문은 입막음 살해라고 썼다.

  3. 1934.01.27
    쇼탕 내각 붕괴

    추문에 몰린 카미유 쇼탕이 사임했다. 두 해 사이 다섯 번째 내각 교체였다.

  4. 1934.01.30
    달라디에 내각 성립

    급진당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정부를 세우고 거리의 동맹들에 맞서겠다고 밝혔다.

  5. 1934.02.03
    경찰청장 시아프 경질

    동맹들에게 관대하다는 평을 듣던 파리 경찰청장 장 시아프가 물러났다. 우파는 이것을 도발로 받아들였다.

  6. 1934.02.06
    콩코르드 광장의 폭동

    극우 동맹들과 참전군인 단체가 하원 의사당을 향해 밀어붙이고, 다리를 막아선 경찰이 발포해 15명이 죽고 1,500명 넘게 다쳤다.

  7. 1934.02.07
    달라디에 사임

    의회 신임을 얻고도 사임했다. 제3공화국에서 다수를 쥔 정부가 거리에 밀려 물러난 첫 사례였다. 후임 두메르그 거국내각에는 페탱이 국방장관으로 들어갔다.

  8. 1934.02.09
    공산당 시위와 두 번째 유혈

    프랑스공산당이 부른 시위가 레퓌블리크 광장 일대에서 경찰과 충돌해 9명이 죽었다.

  9. 1934.02.12
    총파업과 나시옹 광장의 합류

    CGT의 24시간 총파업 날, 따로 행진하던 사회당과 공산당 대열이 나시옹 광장에서 만나 「단결!」을 외쳤다. 여섯 해의 적대가 기층에서 먼저 무너졌다.

  10. 1934.02.27
    디미트로프 모스크바 도착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무죄를 받아 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소련에 도착했다. 그해 봄부터 사회파시즘 노선을 문제 삼는 메모를 쓰기 시작한다.

  11. 1934.06.27
    도리오 제명

    사회당과의 공동행동을 가장 먼저 공개로 요구했던 자크 도리오가 모스크바 소환을 거부해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두 해 뒤 그는 파시스트 정당을 세운다.

  12. 1934.07.27
    사회당-공산당 통일행동협정

    두 당이 서로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파시즘에 함께 맞서기로 서명했다. 10월 낭트에서 토레즈가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을 내놓는다.

  13. 1935.08.02
    코민테른 제7차 대회, 디미트로프의 보고

    디미트로프가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분자들의 공공연한 테러 독재」로 정의하고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공식 노선으로 만들었다.

관련 인물 17명

지도부8

2월 6일의 총리에두아르 달라디에1884–1970

동맹들에 맞서겠다며 경찰청장 시아프를 경질했고, 폭동 이튿날 의회 다수를 쥐고도 사임해 제3공화국에서 거리에 밀려 물러난 첫 총리가 되었다.

PCF 서기장모리스 토레즈1900–1964

2월까지도 사회당과의 협력을 거부하던 노선에서 다섯 달 만에 통일행동협정으로 돌아섰고, 10월 낭트에서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처음 내놓았다.

코민테른 노선 전환의 인물게오르기 디미트로프1882–1949

폭동 3주 뒤 모스크바에 도착해 사회파시즘 노선의 재검토를 시작했고, 1935년 8월 제7차 대회 보고에서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분자들의 테러 독재로 정의하며 인민전선을 공식 노선으로 만들었다.

CGT 사무총장, 2월 12일 총파업 소집자레옹 주오1879–1954

정치 파업을 꺼려 온 CGT를 움직여 공화국 방어를 내걸고 24시간 총파업을 불렀고, 이 파업이 두 노동총동맹의 재통합으로 이어졌다.

불의 십자단 회장프랑수아 드 라 로크1885–1946

광장에 나온 가장 큰 조직을 이끌었으나 의사당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이 밤이 조직된 쿠데타가 아니었다는 오늘날의 판단은 그의 처신을 주요 근거로 삼는다.

악시옹 프랑세즈의 이론가샤를 모라스1868–1952

스타비스키 사건을 외국인과 유대인이 공화국을 좀먹었다는 이야기로 번역한 지면 공세의 중심이었고, 2월 6일 아침 그의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호소했다.

《악시옹 프랑세즈》 주필레옹 도데1867–1942

1월 내내 연루된 의원들의 이름을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다. 그날 밤 광장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청년애국단 창설자피에르 테탱제1887–1965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쥔 채 광장의 주력 대열 하나를 이끌었다.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참여8

노선 전환의 최종 결재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프랑스 지부가 먼저 움직인 뒤에야 노선 변경을 재가했다. 독일에 맞선 프랑스와의 동맹이라는 소련 외교의 필요가 그 재가에 얹혀 있었다.

코민테른 집행위 서기드미트리 마누일스키1883–1959

프랑스 지부의 통일행동 요구를 모스크바에서 다루며 노선 전환의 실무를 관리했다.

제7차 대회 전쟁 문제 보고자팔미로 톨리아티1893–1964

디미트로프의 보고와 짝을 이루는 제국주의 전쟁 준비에 관한 보고를 맡아 새 노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SFIO 지도자레옹 블룸1872–1950

2월 12일 총파업에 사회당을 이끌고 참여했다. 두 해 뒤 그 합류의 끝에서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가 된다.

집단안보 노선의 소련 외무인민위원막심 리트비노프1876–1951

프랑스와의 접근을 추진한 집단안보 외교가 인민전선 노선의 외교적 짝이었다. 1935년 5월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으로 이어졌다.

해임된 파리 경찰청장장 시아프1878–1940

동맹에 관대하다는 평 속에 2월 3일 물러났고, 우파는 이 해임을 도발로 받아들였다. 사흘 뒤 그가 지키던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통일행동을 가장 먼저 요구한 PCF 지도자자크 도리오1898–1945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하다 6월에 제명되었고, 한 달 뒤 당은 같은 협정에 서명했다. 두 해 뒤 그는 파시스트 정당을 세운다.

동맹들의 자금줄프랑수아 코티1874–1934

연대 프랑스를 만들어 자금을 댔고 초기 불의 십자단도 지원했으며,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로 그 언어를 백만 부 가까이 퍼뜨렸다.

관련 용어

출처: Serge Berstein, Le 6 février 1934 (Gallimard/Julliard, 1975)Julian Jackson, The Popular Front in France: Defending Democracy, 1934-3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Brian Jenkins (ed.), France in the Era of Fascism: Essays on the French Authoritarian Right (Berghahn Books, 2005)Kevin McDermott and Jeremy Agnew, The Comintern: A History of International Communism from Lenin to Stalin (Macmillan, 1996)Georgi Dimitrov, The Fascist Offensive and the Task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report to the Seventh World Congress, 2 August 1935)Georgi Dimitrov, Diary 1933-1949, ed. Ivo Banac (Yale University Press, 2003)Jessica Wardhaugh, In Pursuit of the People: Political Culture in France, 1934-39 (Palgrave Macmillan,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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