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1970

코시긴 개혁

계획경제에 이윤을 심으려던 시도는 왜 멈췄는가?

1965년 총리 코시긴은 기업의 자율성과 이윤·수익성 지표를 확대하는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경제학자 리베르만의 제안에서 출발한 이 개혁은 계획경제의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이 개혁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브레즈네프와 보수파가 제동을 걸면서 개혁은 흐지부지됐다.

둔화하는 성장과 비대해진 계획: 1962년의 소련 경제

1962년 9월 9일, 프라우다 지면에 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의 옙세이 리베르만 교수가 쓴 「계획, 이윤, 상여금」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이 3년 뒤 코시긴 개혁으로 이어질 거대한 논쟁을 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 글이 왜 바로 그 시점에, 프라우다 1면이 아니라 경제면도 아닌 '토론' 란에 실렸는지를 이해하려면 1962년 소련 경제가 서 있던 자리를 들여다봐야 한다.

1950년대 소련 경제는 연평균 10%를 웃도는 산업성장률로 서방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1959년 11.4%를 정점으로 성장률은 해마다 내리막을 걸었다. 1960년 9.5%, 1961년 9.1%, 1962년 9.7%로 잠시 반등했으나 1963년 8.5%, 1964년에는 7.1%까지 떨어졌다. 농업은 더 심각했다. 1963년 농업 총생산은 전년 대비 7.5% 감소했고, 소련은 사상 처음으로 해외에서 1,200만 톤 이상의 밀을 사들여야 했다. 1953년부터 1965년 사이 정부는 식량 수입을 위해 3천 톤이 넘는 금을 매각했다.

위기의 뿌리에는 계획 체계 자체의 구조적 피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1957년 흐루쇼프가 도입한 소브나르호스(지역경제평의회) 체제는 중앙 부처의 칸막이를 없애고 지역 단위의 종합적 발전을 꾀했지만, 정작 만들어낸 것은 '지역 이기주의'였다. 각 지역이 자체적으로 모든 산업을 두려 하면서 중복 투자가 만연했고, 통일된 기술정책은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흐루쇼프는 10년 사이에 무려 여섯 차례나 경제관리 조직을 개편했고, 1962년 11월에는 당 기관마저 산업과 농업으로 분리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기업 차원에서는 '총생산량'(발로바야 프로둑치야)이라는 단일 지표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톤수, 개수, 루블 총액으로 계획을 채우기만 하면 원가가 얼마나 들든, 제품이 실제로 팔리든 말든 문제되지 않았다. 관리자들은 의도적으로 낮은 계획 목표를 협상한 뒤 이를 '초과 달성'해 상여금을 받았고, 그 결과 기업은 더 무겁고 더 비싼 제품을 생산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이른바 '달성기준'(от достигнутого) 계획은 잘한 기업일수록 다음 해 계획이 가중되고 못한 기업은 쉬운 목표를 받는 역설을 낳았다. 1964년 초 기준으로 판매되지 못한 채 재고로 쌓인 섬유·의류·신발의 가치는 20억 루블을 넘어섰고, 미완성 투자에 묶인 자금은 270억 루블, 연간 투자 총액의 75%에 달했다.

소비자도 더는 침묵하지 않았다. 1962년 6월 1일, 정부가 고기와 버터의 소매가를 25~30% 인상하자 노보체르카스크 전기기관차 공장 노동자 1만 3천 명이 파업에 돌입했고, 군대의 발포로 24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경제적 실패가 정치적 폭발로 이어질 수 있음을 모스크바에 각인시켰다.

바로 이 무렵, 또 하나의 조용한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바실리 넴치노프, 레오니트 칸토로비치, 빅토르 노보질로프 같은 수리경제학자들이 선형계획법과 최적화 이론을 계획에 접목하려는 작업을 진척시키고 있었다. 이들의 접근은 노동가치론만으로 가격을 설명하던 정통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충돌했지만, 1965년 세 사람이 레닌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최적 계획' 진영은 제도적 승인을 얻었다. 리베르만의 논문은 바로 이 두 갈래의 압력, 즉 아래로부터의 경제적 파탄과 위로부터의 학문적 재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터져 나온 신호탄이었다.

「계획, 이윤, 프리미엄」: 프라우다가 던진 불씨

1962년 9월 9일, 프라우다는 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의 별로 알려지지 않은 교수 옙세이 리베르만의 글 「계획, 이윤, 프리미엄」을 실었다. 이 글이 나오기까지는 우연이 아니라 후원이 있었다. 당시 『프라우다』 편집위원이었던 경제학자 알렉세이 루먄체프가 흐루쇼프에게 리베르만을 소개했고, 흐루쇼프가 게재를 승인했다. 루먄체프는 이미 1956년 자신이 주필로 있던 『꼬뮤니스트』에 리베르만의 글을 실은 적이 있었다. 흐루쇼프로서는 1957년 소브나르호스 개편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경제의 구조적 비효율을 건드릴 '시험 풍선'이 필요했다.

리베르만의 진단은 날카로웠다. 소련 기업들은 수십 개의 지표로 옥죄여져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진짜 잠재력을 드러낼 유인이 전혀 없었다. 계획은 '기록 기준', 즉 전년도 실적을 바탕으로 짜였기 때문에 금년에 잘하면 내년 계획이 가중됐다. 그래서 기업들은 실력을 숨기고, 낮은 계획을 받아낸 뒤 안전하게 초과달성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상여금은 총생산량에 연동돼 있었기 때문에 원가가 얼마든, 제품이 팔리든 말든 '더 많이' 만들기만 하면 됐다. 리베르만은 이렇게 썼다: "열심히 일한 대가로 스스로를 어려운 처지에 빠뜨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어야 한다."

그의 처방은 단순하면서도 급진적이었다. 중앙이 기업에 내려주는 의무 지표를 생산량·품목·납기 일정으로 대폭 축소하고, 나머지는 기업이 스스로 계획을 짜게 하라. 대신 장기 고정된 업종별 수익성(자본 대비 이윤) 기준을 마련하고, 이 기준을 충족한 기업의 이윤에서 일정 비율을 단일 상여 재원으로 삼게 하라. 그러면 기업은 계획을 낮추려 애쓰는 대신 자발적으로 잠재력을 드러낼 것이라는 논리였다. 가격·재정·대규모 투자 같은 '기본 지렛대'는 중앙이 계속 쥐고 있으니 계획경제의 골격은 그대로였다.

출판 직후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프라우다는 9월 한 달 동안 10편 이상의 반응 기사를 실었다. 항공기 설계자 안토노프는 「모두를 위해, 자신을 위해」에서 기업 책임자에게 더 많은 권한을 달라고 호소했다. 반대도 거셌다. 전 재무장관 아르세니 즈베레프는 기존의 '기업장 펀드'로 충분하며, 기업 평가는 복수의 생산 지표로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국가계획위원회와 재무부 출신 관료들은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중앙만이 정할 수 있다고 맞섰다. 1962년 9월 25~26일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의 확대 회의는 리베르만의 구상을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리베르만은 자신이 몸담은 하리코프 연구소 안에서도 공격을 받았고, 결국 하리코프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논쟁은 멈추지 않았다. 수리경제학파의 거두 바실리 넴치노프는 같은 해 9월 21일 프라우다에 기고하여 「계획 과제와 물질적 자극」이라는 제목으로 리베르만을 옹호했다. 넴치노프는 더 나아가 '생산 기금에 대한 지불' 개념, 즉 기업이 보유한 자본에 대해 국가에 이용료를 내는 제도를 제안했다. "기금을 많이 받은 자에게는 계획 수익성을 책정할 때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논리였다. 이 아이디어는 훗날 개혁의 핵심 요소가 된다. 1962년 11월 『경제의 문제들』은 17명의 학자·행정가가 참여한 대규모 토론회를 지면에 실었고, 논쟁은 1964년까지 이어졌다. 1964년 8월에는 자동화 전문가 V. 트라페즈니코프가 프라우다에 "지령적 규범에 기초한 낡은 경제관리 형태를 버려야 할 시기가 왔다"고 썼고, 이번에는 비판이 잦아들었다. 논쟁의 장이 실험의 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같은 지붕, 두 방향: 1965년 9월 전원회의의 결단

흐루쇼프가 물러난 지 11개월 만에 열린 1965년 9월 27일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총리 코시긴은 「공업 관리의 개선, 계획의 완성, 공업 생산의 경제적 자극 강화에 관하여」라는 무미건조한 제목의 보고를 올렸다. 보고문에서 '개혁'이라는 단어는 네 번 등장했지만, 전원회의가 채택한 공식 결의문에서는 그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이날 결정된 조치들은 1930년대 스탈린식 계획 체제가 정착된 이래 소련 경제 관리 방식에 가해진 가장 큰 폭의 수정이었다.

개혁안은 진공에서 나오지 않았다. 1964년 12월 말, 코시긴은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아나톨리 코로보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작업반을 구성해 개혁 초안을 준비시켰다. 그러나 첫 번째 장애물은 경제 관료가 아니라 정치 지도부 내부에서 나왔다. 1965년 4월, 코시긴은 소브나르호스(지역국민경제회의)를 전면 폐지하고 10개의 연방-공화국 산업부처를 신설하며, 고스플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안을 제시했다. 브레즈네프가 반대했다. 지역 당 기구들이 관리하던 산업 통제권을 각료회의 산하 중앙 부처로 넘기면 소비에트 경제의 3분의 2가 코시긴의 손에 들어간다는 이유였다. 8월 말에야 타협안이 나왔다: 소브나르호스를 폐지하고 부처 체제를 부활시키되, 기업 자체는 연방공화국의 관할로 남기는 절충이었다. 이로써 관리 체계는 형식적으로 중앙집권화되었지만, 부처들은 개별 기업에 대해 신속하고 강제력 있는 결정을 내릴 권한을 사실상 갖지 못하게 되었다.

9월 전원회의와 그 직후인 10월 4일의 중앙위원회·각료회의 합동 결의, 그리고 같은 날 승인된 「사회주의 국영 생산 기업 규정」은 이렇게 탄생한 개혁의 골격을 법제화했다. 핵심은 두 방향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중앙집권적 복원이었다: 1957년 흐루쇼프가 창설한 47개 소브나르호스를 해체하고, 9개의 전연방 산업부처(경공업부, 화학공업부, 라디오공업부 등)와 11개의 연방-공화국 부처를 신설했다. 다른 하나는 분권화였다: 기업에 내려보내는 의무 계획 지표가 30여 개에서 9개로 줄었다. 핵심 지표는 총생산량 대신 '실현된 제품 판매량'(레알리자치야)과 '수익성'(렌타벨노스티), 즉 이윤의 고정자산 대비 비율이었다.

기업은 이윤의 일부로 세 가지 자극 기금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물질적 장려 기금(노동자 상여), 사회문화·주택 기금(복지·주택 건설), 생산발전 기금(설비 투자)이 그것이다. 종래의 상여금이 임금 기금에서 나와 사실상 고정급의 일부였던 것과 달리, 이제 상여금은 기업이 실제로 벌어들인 이윤에 연동되었다. 또한 기업은 고정자산과 운전자본에 대해 일종의 사용료(플라타)를 국가에 납부하게 되어, 유휴 설비를 쌓아두는 것이 재정적으로 불리해졌다. 기업들은 세부 품목과 구색을 스스로 결정하고, 공급자·소비자와 직접 장기 계약을 체결하며, 인원수를 자체적으로 정할 권한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 이중 설계에는 처음부터 균열이 새겨져 있었다. 가격은 여전히 중앙이 고정했고, '수익성'을 결정하는 투입 비용은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였다. 가장 근본적인 모순은 이 개혁이 기업에 시장적 유인을 주면서도 그 기업들이 활동할 시장, 즉 생산 수단의 도매 시장, 자유로운 가격 체계, 파산 제도를 하나도 창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소비에트 경제사가 그리고리 하닌의 냉정한 평가대로, 이 결정들은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약했다. 그러나 1965년 가을, 그 누구도 이 결의안들이 향후 5년간 소비에트 경제에 기록적인 성장 수치를 안기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1968년의 역류: 프라하가 모스크바의 개혁을 멈추다

1968년 1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에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선출되고, 4월 「행동강령」이 발표되면서 소련 보수파의 불안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두브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검열 폐지, 여행 자유, 기업 자율성 확대를 약속했고, 그 경제적 설계를 맡은 이가 바로 오타 시크였다. 시크는 1964년 이미 체코슬로바키아 경제개혁의 초안을 작성한 인물로, 그의 구상은 코시긴 개혁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생산수단의 도매시장, 경쟁적 가격체계, 노동자 자주관리, 대외무역의 분권화까지 포함된 이 청사진은 '계획 아래 시장'이라는 코시긴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보수파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는 하나의 증명이었다. 시크를 비롯한 경제개혁론자들이 정치적 자유화의 선봉이 되었다는 사실은 '경제적 분권화 → 정치적 해빙 → 체제 위기'라는 인과의 사슬을 실물로 보여준 셈이었다. 미하일 수슬로프는 이 논리를 정치국에서 반복했고,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는 공개적으로 개혁의 정치적 위험성을 거론했다. 코시긴이 1968년 5월 경제협의회에서 "개혁은 스스로를 정당화했으며 더욱 심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로 그 달, 소련 지도부는 이미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8월 21일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주는 국내 개혁의 운명도 함께 결정했다. 침공 이후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개혁이 제공한 '자율성'이 이념적 이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 급속히 힘을 얻었다. 이미 개혁의 내재적 모순, 즉 기업이 가격을 올려 손쉽게 이윤을 늘리는 관행, 임금 상승이 생산성 향상을 앞지르는 현상, 투자재원의 만성적 부족이 드러나던 터에, 정치적 논리가 개혁의 기술적 결함을 덮어버렸다. 1969년부터 부처별로 책정되던 경제적 기준치는 사실상 이전의 행정적 지령으로 환원되었고, 기업의 자율적 투자 결정권은 축소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이 국면에서 결정적 이득을 보았다. 1964~1968년에는 경제·외교에서 코시긴에게 주도권을 내주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는 당 중앙위 서기국, 곧 브레즈네프 자신의 관할이었다. 프라하의 봄 진압을 주도하며 그는 당 기구의 실권자로 부상했고, 코시긴의 개혁은 '정치적 신뢰를 상실한 실험'으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코시긴이 1971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류보미르 시트로우갈 총리에게 "모든 것이 무너졌다. 개혁은 그것을 원치 않는 자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토로한 데는, 경제논리가 지정학적 공포 앞에 굴복한 1968년의 전말이 응축되어 있었다. 개혁은 공식적으로 폐기된 적 없이 서서히 질식했다. 남은 것은 호지라숏이라는 이름뿐인, 본래의 취지를 상실한 절차였다.

개혁이 남긴 것, 남기지 못한 것: 평가의 갈림길

코시긴 개혁이 멈춘 시점은 단번에 특정하기 어렵다. 1968년이 보통 분기점으로 지목되지만, 실제 폐기는 점진적인 후퇴의 연속이었다. 1969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브레즈네프는 "이윤은 값을 부당하게 올리는 방식으로도 늘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71년 노동생산성 지표가 의무 과제로 복원됐고, 1972년부터 물질장려기금에 상한선이 설정됐으며, 1973년 기업 자체 자금 건설이 28% 삭감되면서 개혁은 사실상 종료됐다.

8차 5개년 계획(1966~1970)의 성과를 놓고는 해석이 엇갈린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연평균 7.8% 성장했고, 공업생산은 50% 증가했으며, 1,900여 개 대기업이 준공됐다. 개혁 지지파는 이윤 유인 도입의 성과로 읽는다. 반대파는 일회성 효과로 본다. 기업들이 숨겨두었던 예비를 드러내고 '졸업' 관행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기르시 하닌의 표현대로 "선반 위의 자원이 바닥으로 흘러내린" 결과에 불과했으며 시스템 효율 자체는 높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가들의 견해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 "놓친 기회" 학파다. 개혁은 올바른 방향으로 출발했으나 프라하의 봄이라는 외생적 충격과 보수 관료의 저항 때문에 좌초되었다는 입장이다. 바이바코프는 회고록에서 "기업 기금에서 예산 적자를 메우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고 술회했는데, 이는 퇴조가 필연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였음을 시사한다. 8차 5개년 계획의 높은 성장률은 이 시각의 결정적 근거다. 이윤 유인만으로도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났다면, 개혁을 완주했다면 얼마나 더 큰 성과를 냈겠느냐는 것이다.

둘째, "구조적 불가능" 학파다. 행정 가격 체제에서 이윤 지표를 도입하는 것은 처음부터 모순이었다는 입장이다. 실제 기업들은 효율 향상 대신 '신제품'을 가장해 가격을 올리고, 이윤 높은 품목으로만 생산을 쏠리게 했으며, 부처와 행정적 흥정을 벌였다. 1966년 상반기 화폐 발행량은 전년 동기의 1.5배로 뛰었고, 1969년 1월 인구 화폐 잔고가 소매·도매 재고를 26.7% 초과했다. 다론 아제몰루와 제임스 로빈슨(『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2012)은 계획 가격이 실제 가치와 유리되어 있어 혁신을 측정할 수 없었고, 장려금 산정이 총임금기금에 연동되어 인원 감축 유인이 사라졌다는 점을 근본 원인으로 꼽는다. 이 입장에서는 1968년도, 관료 저항도 부차적이다.

셋째, "'개혁'이 아니었다" 학파다. 하닌은 "1965년 9월 결정을 주의 깊게 읽으면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과장"이라고 썼다. 지표는 30개에서 9개로 줄었지만, 그 9개 안에는 총생산량·주요 품목·임금총액·예산 납부액·중앙투자액·신기술 도입·원자재 공급량 등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윤'이 등장했지만, 이윤이 시장 경쟁이 아니라 행정 명령의 결과인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이 관점에서 8차 5개년 계획의 높은 성장률은 흐루쇼프 시기 말 혼란에서 정상 상태로 회귀한 반등이었다.

이 세 입장은 상호배타적이기보다 강조점의 차이다. 개혁의 내재적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외생적 충격을 부정할 수 없고,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1966~1970년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코시긴 개혁의 잔해 위에서 소련 경제는 1970년대 내내 총요소생산성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이 '정체'의 체험 없이는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점이다.

평가의 전장: 왜 멈췄는가를 둘러싼 다섯 갈래의 해석

코시긴 개혁이 왜 멈췄는가에 관해서는 지금도 역사가들 사이에 합의가 없다. 크게 다섯 가지 해석이 경쟁한다.

첫째는 「정치적 봉쇄」 해석이다. 프라하의 봄(1968년)이 브레즈네프와 정치국 보수파에게 경제개혁은 곧 정치적 해빙이라는 공식을 확신시켰고, 그 결과 개혁은 정치적으로 질식당했다는 것이다. 코시긴 자신이 1971년 체코슬로바키아 총리 시트로우갈에게 한 말, "개혁은 그걸 전혀 원치 않는 자들의 손에 넘어갔다"가 이 해석의 상징적 증거로 쓰인다.

둘째는 「두 조종간」 해석이다. 올세비치와 그레고리는 개혁의 핵심 모순이 하나의 기업에 지령계획과 유사시장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 조종간을 동시에 단 데 있다고 보았다. 두 조종간은 서로 충돌했고, 이 충돌은 점점 심화되어 결국 개혁을 거꾸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69년까지 상품 적자는 절대적으로 변했고, 기업의 이윤은 예산 수입을 잠식했으며, 투자는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다.

셋째는 「애초에 개혁이 아니었다」는 해석이다. 경제사가 하닌은 1965년 9월 결정을 '개혁'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과장이며, 지표를 몇 개 줄이고 이윤이라는 단어를 추가했을 뿐 실질적인 제도 변화는 없었다고 평가한다. 하닌의 관점에서는 8차 5개년계획(1966~1970년)의 높은 성장률도 개혁 덕분이 아니라 석유 개발, 일회성 유휴 설비 가동, 그리고 흐루쇼프기 투자의 결실이 늦게 나타난 결과였다. 야신도 이 시기 성장이 개혁보다는 회복 효과와 원자재 호황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넷째는 「구조적 불가능성」 해석이다. 202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제모을루와 로빈슨은 계획경제에서 가격은 실물 가치와 단절되어 있으므로 혁신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고, 상여금이 총임금기금에 연동된 설계는 기계화·자동화의 유인을 원천 봉쇄했다고 지적한다. 이 관점에서는 개혁의 실패가 정치적 좌절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체제가 시장을 허용할 수 없는 한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구조의 문제였다.

다섯째는 「개혁이 남긴 유산」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개혁이 공식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기업과 노동자 집단에 '우리'라는 이해관계를 처음으로 각인시켰고, 올세비치·그레고리의 표현을 빌면 "중앙집권적 지령계획의 무덤 파는 군대가 이때 이미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이 훗날 페레스트로이카의 심리적·제도적 토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다섯 해석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정치, 제도, 구조, 유산을 배합해 설명하지만,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코시긴 개혁은 '마지막 기회'가 되기도 하고 '어차피 불가능했던 실험'이 되기도 한다.

놓친 기회인가, 애초에 불가능했던 일인가: 끝나지 않은 논쟁

코시긴 개혁이 멈춘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합의는 없다. 루스템 누레예프가 2017년에 엮은 논문집의 제목, 『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안전밸브인가』가 이 논쟁의 두 극점을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개혁이 소련 체제를 붕괴 없이 현대화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실질적 기회였다고 본다. 다른 쪽에서는 애초에 작동할 수 없는 모순 덩어리였고, 부분적으로라도 실행되면서 오히려 계획경제의 훼손을 앞당겼다고 본다.

이 틀을 연 것은 유리 골란드와 알렉산드르 네키펠로프의 2010년 논문이다. 그들은 묻는다: 코시긴 개혁은 '놓친 기회'였는가, 아니면 '신기루'였는가? 이 질문은 이후 러시아 경제사학계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신기루론의 핵심 논거는 가격 체계다. 개혁은 기업에 이윤 동기를 부여했지만, 가격은 여전히 행정적으로 결정됐다. 예브게니 야신은 8차 5개년 계획(1966~1970) 시기의 높은 성장률이 개혁 덕분이 아니라 흐루쇼프 혼란 이후의 안정화 효과, 유리한 대외 조건,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고갈되지 않은 사마틀로르 유전 같은 외연적 성장 자원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개혁이 '진짜 기회'였다고 보는 측은 이렇게 반문한다: 개혁이 실패한 것은 설계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환경 때문이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없었다면, 브레즈네프가 아닌 코시긴이 우위를 점했다면, 가격 개혁은 1970년대에라도 이어질 수 있었다.

또 하나의 깊은 균열은 개혁이 소련 체제의 수명을 늘렸느냐 줄였느냐다. 율리 오를세비치와 폴 그레고리는 코시긴 개혁이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로부터 분리된 집단적 경제 이익'을 가진 기업이라는 실체를 만들어냈고, 이것이 장기적으로 계획 체제의 무덤을 팠다고 분석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개혁의 중단이 체제를 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쪽짜리 개혁의 유산(기업의 이기적 행동, 부처 간의 이익 경합, 중앙 통제의 약화)이 체제를 서서히 잠식했다. 이에 맞서 다론 아제모을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2012년 저서에서 개혁이 정치 체제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고, 따라서 '놓친 기회'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독점적 일당 체제 아래에서는 기업의 자율성을 진정으로 보장할 수 없고, 창의적 파괴를 가능하게 할 제도적 조건도 갖춰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관계 차원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8차 5개년 계획의 성과 평가다. 공식 통계는 국민소득 연평균 7.8% 성장을 기록했지만, 기르시 하닌의 대체 추계는 이보다 훨씬 낮다. 하닌은 공식 수치가 개혁을 좋게 보이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부풀려졌다고 본다. 이 주장이 맞다면, 개혁이 단기적으로도 실패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공식 통계를 신뢰하는 연구자들은 최소한 8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은 개혁이 효과를 냈다고 반박한다.

개혁과 페레스트로이카의 관계도 해석이 갈린다. 고르바초프의 경제 참모들, 특히 1987년 「국영기업법」의 설계자들은 코시긴 개혁의 설계도를 의식적으로 참조했다. 이 점에서 개혁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 속에 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는 이 연속성을 부정적으로 읽는다: 코시긴 개혁의 실패가 1980년대 후반에 '계획을 손보는' 방식으로는 체제를 살릴 수 없다는 결론을 이미 증명했는데도 고르바초프 팀이 똑같은 길을 다시 걸었다는 것이다.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제모을루와 로빈슨의 분석이 추가되면서 논쟁은 한 층 더 넓어졌다. 이들은 코시긴 개혁의 실패를 단일 국가의 정책 실패가 아니라, 포용적 제도 없이는 지속적 경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일반 명제의 사례로 읽는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러시아 경제사학계 일각에서는 '제도 결정론'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반론이 나온다. 1965년 시점에서 중국식의 점진적 시장화 경로가 불가능했다고 단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코시긴 개혁을 둘러싼 논쟁은 세 개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첫째, 개혁은 제대로 설계되었는가? 그렇다면 무엇이 그것을 죽였는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 설계되었는가? 둘째, 8차 5개년 계획의 성장은 개혁 덕분인가, 아니면 개혁과 무관한 요인들 덕분인가? 셋째, 개혁의 중단은 체제를 구했는가, 아니면 체제의 종말을 앞당겼는가? 반세기가 지나도록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 개혁이 단순한 경제정책의 일화가 아니라, 계획과 시장, 정치와 경제, 개혁과 체제 수호 사이의 길항이 집약된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체기로 가는 길: 개혁 이후 개혁

코시긴 개혁은 공식적으로 폐지된 적이 없다. 1965년 9월 전원회의 결정을 번복하는 문서는 단 한 건도 채택되지 않았다. 개혁은 뒤집히지 않고 서서히 비워졌다. 1972년 물질적 인센티브 기금에 루블 단위 상한선이 설정되고, 1973년 기업 자체 자금 건설 규모가 28% 삭감되면서 개혁의 심장부였던 기업 자율성은 형해화됐다. 한때 30개에서 9개로 줄었던 지령 지표는 하나둘 복원되었고, 1979년 7월 중앙위 결정은 '순수(규범)생산'이라는 새 지표를 도입하며 사실상 개혁 이전 체제로의 복귀를 완성했다. 1980년대 초 기업은 이윤의 42%를 보유했으나 실제 처분권은 8~9%에 불과했다.

그러나 개혁이 남긴 흔적은 깊었다. 가장 분명한 유산은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의 실적이다. 국민소득은 연평균 7.8% 성장해 브레즈네프 시대 전체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 '황금의 5개년'이 개혁 덕분인지, 흐루쇼프 시대에 착수된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의 결실인지, 아니면 석유·가스 수출 호황과 같은 외생적 요인 때문인지는 오늘날까지 경제사학자들 사이에서 합의되지 않은 질문이다. 기르시 하닌은 이 시기 성장의 상당 부분이 '일회성 예비의 동원'(재고 정리, 설비 가동률 상승, 지불 체계 정상화)에서 비롯되었으며, 개혁의 구조적 효과는 미미했다고 보았다.

또 하나 개혁이 확실히 남긴 것은 거시경제적 불균형이다. 소련 국가은행과 재무부의 비밀 문서는 개혁이 초래한 모순을 냉정하게 기록했다. 기업의 임금 지급 능력이 커지면서 1966년 상반기 화폐 발행량은 전년 동기의 1.8배로 뛰었고, 1969년 1월에는 인민의 손에 쥔 현금 잔고가 소매·도매 재고를 26.7%나 초과했다. 개혁 3년 만에 소비재 부족은 상대적 현상에서 절대적 현상으로 전환됐다. 동시에 기업 이윤이 중앙 예산 대신 기업 유보로 흘러가면서 국가 재정은 적자에 빠졌고, 고스플란 의장 니콜라이 바이바코프는 '일시적 차입'으로 시작해 멈출 수 없게 된 기업 기금 유용을 훗날 인정했다. 개혁은 명령경제의 배관을 뜯어냈지만 그 자리에 기능하는 시장을 놓지 못했고, 그 틈으로 돈이 샜다.

코시긴 개혁의 가장 오래 지속된 유산은 아마도 '다음 개혁'에 미친 영향일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경제학자들은 이 실험을 반면교사로 읽었다. 예고르 가이다르는 이 개혁을 '소련 경제 관리 체제를 바꾸기 위한 마지막 진지한 시도'라고 불렀고, 그 실패로부터 가격 자유화 없는 부분 개혁의 무의미함이라는 교훈을 도출했다. 1965년 개혁은 시장 가격도, 사적 소유도, 경쟁도 없는 상태에서 기업에 이윤 동기만 이식하려 했고, 그 결과는 '명령경제의 최악과 시장경제의 최악을 결합한'(하닌) 혼종이었다. 이 교훈은 1980년대 후반 소련 지도부가 부분 개혁에서 전면적 체제 전환으로 밀려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동시에 개혁은 역설적인 질문을 남겼다. 중국과 베트남은 비슷한 시기에 기업 자율성 확대로 출발해 점진적으로 시장을 확대하며 계획경제를 탈출했는데, 왜 소련은 그러지 못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어떤 연구자는 소련의 계획 체계가 너무 완벽하게 제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또 다른 연구자는 중국과 달리 소련에는 개혁을 밀어붙일 거대한 농촌 잉여 노동력이 없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수 하나가 더해진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다. 정치적 자유화가 경제 개혁의 불가피한 귀결이라는 공포를 소련 지도부의 뇌리에 새긴 이 사건은, 개혁의 경제 논리보다 정치 논리가 언제나 앞선다는 시스템의 철칙을 확인시켰다.

오늘날의 합의는 대략 이렇다. 코시긴 개혁은 진지했지만 불완전했고,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켰으며, 궁극적으로는 개혁의 불가능성을 입증함으로써 훗날 더 급진적인 변화의 당위를 예비했다. 그것이 기회의 창이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열릴 수 없는 문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사라진 뒤에도, 러시아와 서구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계속되고 있다.

정리된 것, 남은 것: 60년 논쟁이 놓인 자리

코시긴 개혁을 둘러싼 60년의 논쟁은 적어도 세 가지를 정리했다. 첫째, 1965년 9월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개혁안은 리베르만·넴치노프가 그렸던 그림과 다른 것이었다. 애초의 구상은 장기적·안정적인 규범 아래 기업이 스스로 이윤을 추구하게 하자는 것이었으나, 실제 실행된 것은 매년 재조정되는 부처별 규범, 임금총액에 묶인 유인기금, 그리고 가격개혁 없는 이윤지표였다. 둘째, 개혁의 초기 성과와 후기 역류 사이에 프라하의 봄이 있었지만, 1968년은 원인이라기보다 방아쇠였다. 개혁은 이미 1967년부터 예산 적자, 임금 폭증, 소비재 부족, 건설 중단 증가라는 내부 모순을 노출하고 있었다. 셋째, 개혁의 후퇴는 단순한 정치적 보복이 아니었다. 브레즈네프의 1969년 12월 전원회의 발언, "이윤은 가격 인상과 불필요한 제품 생산 중단으로도 올릴 수 있었다"는 체제가 감당할 수 없었던 상품-화폐 불균형을 직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 질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하나는 인과의 방향이다. 프라하의 봄이 없었더라면 개혁은 살아남았을까? 보수파가 개혁을 위험시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체코슬로바키아였지만, 개혁 자체가 이미 초래하고 있던 거시경제적 불균형, 즉 1969년 초 인민의 현금잔고보다 26.7%나 적은 소비재 재고는 독자적인 위기 요인이었다. 이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

둘째는 개혁의 성격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이견이다. 하닌의 평결, "명령경제와 시장경제의 모든 최악의 측면을 결합했다"는 기획 자체의 모순을 지적한다. 반면 사프로노프의 분석은 반대 방향에서 "반쪽짜리여서가 아니라, 반쪽짜리인 채로 가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고 본다. 후자는 개혁이 성공하려면 가격을 놓아주어야 했고, 가격을 놓아주는 것은 노보체르카스크의 기억이 증명하듯 정치적 자살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두 입장은 같은 실패에 대한 정반대의 해석이며, 오늘날까지 어느 쪽도 상대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지 못했다.

셋째,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질문: 놓친 기회인가, 애초에 불가능했던 길인가. 이 물음은 더 이상 코시긴 개혁만의 것이 아니다. 1965년의 실험은 계획과 시장의 접합이 기술적 설계의 문제인지 정치적 조건의 문제인지를 묻는 더 큰 논쟁의 시금석이 되었다. 개혁이 남긴 가장 분명한 유산은 이 질문 자체다.

결과

개혁은 부분적 성과에 그친 뒤 사실상 폐기됐고, 소련 경제는 「정체기」로 접어들었다. 계획 안에서 시장 원리를 도입하려던 이 실험은 훗날 페레스트로이카 논쟁의 전사(前史)가 됐다.

연표

  1. 1962
    리베르만 논쟁

    프라우다에 실린 리베르만의 글이 이윤 지표 도입 논쟁을 열었다.

  2. 1965.09
    개혁의 개시

    코시긴이 기업 자율성과 수익성 지표를 확대하는 개혁을 발표했다.

  3. 1968
    제동

    프라하의 봄 뒤 개혁이 위축되고 보수파가 우위를 점했다.

관련 인물 44명

참여29

이론적 촉매옙세이 리베르만1897–1981

이윤 지표 도입을 제안해 개혁의 이론적 촉매가 됐다.

수리경제 최적화레오니트 칸토로비치1912–1986

계획을 수학으로 최적화하려 한 노벨상 경제학자였다.

사이버네틱 계획빅토르 글루시코프1923–1982

전국 네트워크(OGAS)로 계획경제를 관리하려 한 사이버네틱스 학자였다.

수리경제학바실리 넴치노프1894–1964

계획의 과학화를 꿈꾼 수리경제학의 조직자였다.

최적계획 이론의 수학적 토대 제공빅토르 노보질로프1892–1970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함께 1965년 레닌상을 공동 수상한 최적계획 이론가로서, 자신의 '차등적 비용' 개념을 통해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기반이 된 수리경제학파의 핵심 축을 이루었다.

개혁 지지·즈베노 실험겐나디 보로노프1910–1994

RSFSR 수상으로서 코시긴 개혁을 지지하고 농업에서 소규모 자율 작업조(즈베노) 제도를 실험했으나, 브레즈네프의 반대로 좌절되고 결국 정치국에서 퇴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계획경제 개혁을 집행니콜라이 바이바코프1911–2008

재무장관으로 예산과 인센티브 균형을 관리바실리 가르부조프1911–1985

국가은행 총재로 금융 측면에서 개혁의 한계를 유지블라디미르 알히모프1919–1993

리베르만 논문 게재로 개혁 논의 촉발알렉세이 루먄체프1905–1993

1962년 흐루쇼프의 후원 아래 리베르만의 「계획·이윤·프리미엄」을 『프라우다』에 게재해 전연방 경제개혁 논쟁을 촉발했다. 이 논쟁은 코시긴 개혁의 직접적 기원이 되었다.

물자공급 체계 개편베니아민 딤시츠1910–1993

1965년 10월 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프) 초대 의장으로 임명되어 코시긴 개혁의 물자공급 측면을 집행했다. 부총리로서 개혁기 내내 중앙 물자 배분 체계를 관장했다.

GKNT 의장으로 과학기술 측면 집행블라디미르 키릴린1913–1999

1965년 10월 코시긴에 의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초대 의장으로 임명되어, 개혁 패키지의 일환으로 민간 R&D 조정·기획을 총괄했다. GKNT는 코시긴 개혁과 함께 창설된 핵심 기관이었다.

화학공업 부문 개혁 집행레오니트 코스탄도프1915–1984

1965년 10월 소련 화학공업부 장관에 임명되어, 코시긴 개혁으로 복원된 중앙 부처 체제 아래 화학공업 부문의 현대화와 화학화 계획을 주도했다. 15년간 장관으로서 개혁기 화학 산업의 확장을 진두지휘한 핵심 집행자였다.

석유공업 부문에서 부처 체제 복원을 집행발렌틴 샤신1916–1977

1965년 10월 2일, 코시긴 개혁으로 소브나르호스가 폐지되고 중앙 부처 체제가 복원되면서 초대 석유채굴공업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977년까지 12년간 장관으로서 소련 석유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끌어올렸다.

국방공업 부문에서 부처 체제 복원을 집행세르게이 즈베레프1912–1978

1965년 3월 소련 국방공업장관에 임명되어, 코시긴 개혁으로 소브나르호스가 폐지되고 중앙 부처 체제가 복원된 이후 1978년까지 13년간 재래식 무기 생산 전체를 총괄했다. 렌탈 개혁의 군수산업 측면을 책임진 핵심 집행자였다.

농업 개혁 집행표도르 쿨라코프1918–1978

1964년 중앙위 농업부장, 1965년 농업 담당 서기로 임명되어 코시긴 개혁기 농업 부문의 정책을 집행했다. 1965년 3월 농업 전원회의는 개혁 패키지의 핵심 구성 요소였다.

철강부문에서 부처 체제 복원을 집행이반 카자네츠1918–2013

1965년 10월, 코시긴 개혁으로 소브나르호스가 폐지되고 중앙 부처 체제가 복원되면서 초대 소련 철강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985년까지 20년간 장관으로 재임하며 소련을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으로 끌어올렸다.

GKNT 부의장으로 과학기술 측면 집행제르멘 그비시아니1928–2003

1965년 코시긴 개혁과 함께 창설된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의 부의장으로 임명되어 키릴린 의장 아래에서 민간 R&D 조정·기획을 보좌했다. 코시긴의 사위로서 개혁 진영 내부에 깊이 편입된 인물이었다.

화학공업 부문 당 라인 감독빅토르 부슈예프1919–1996

1965년 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에 임명되어, 같은 해 9월 전원회의로 출범한 코시긴 개혁의 화학공업 부문(합성고무·플라스틱·광물비료·석유화학의 대규모 확장)을 당 기구에서 감독했다. 1976년까지 11년간 개혁기 화학 산업 현대화를 당 라인에서 주관했다.

수리경제 계획 방법론의 제도화니콜라이 페도렌코1917–2006

CEMI 초대 소장(1963–1985)으로서 칸토로비치의 선형계획법을 전국 계획 체계로 확장한 SOFE의 이론적 토대를 수립했고, 고스플란의 자동화된 계획계산체계(ASPR)의 과학적 지도를 맡아 코시긴 개혁의 수리경제 측면을 제도화했다.

벨라루스 공화국 차원의 개혁 집행티혼 키셀료프1917–1983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1959–1978)으로서 코시긴 개혁 전 기간을 관통하며 공화국 차원의 산업 개혁을 집행했다. 즐로빈 제철소 현대화와 민스크 메트로 건설 로비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대외경제·코메콘 측면 집행미하일 레세치코1909–1984

1962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상주대표로서, 코시긴 개혁 전 기간을 관통하며 소련 블록 대외경제 통합을 주도했다. 개혁 이전인 1958–1962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 겸 대외경제위원장으로서 개혁의 대외경제 토대를 마련했고, 1971년 코메콘 '사회주의 경제통합 종합강령' 채택을 이끌었다.

공작기계·공구공업 부문에서 부처 체제 복원을 집행아나톨리 코스토우소프1906–1985

1965년 10월, 코시긴 개혁으로 소브나르호스가 폐지되고 중앙 부처 체제가 복원되면서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에 재임명되었다. 이후 1980년까지 15년간 장관으로서 소련을 세계 최대 공작기계 생산국으로 유지했다.

전자공업 부문에서 부처 체제 복원을 집행알렉산드르 쇼킨1909–1988

1965년 10월, 코시긴 개혁으로 소브나르호스가 폐지되면서 전자기술 국가위원회 의장에서 초대 전자공업부 장관이 되었다. 이후 20년간 장관으로 재임했다.

고스플란 부의장으로 개혁안 형성에 참여알렉산드르 코로보프1907–1967

1963~1965년 고스플란 부의장으로 1965년 개혁안 형성에 참여했다. 시장 지향 변화에 반대한 '지령경제의 베테랑'으로 평가된다(이스트마트).

공화국 차원 개혁 집행비탈리스 루벤스1914–1994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1962~1970)으로서 코시긴 개혁 전 기간을 관통하며 공화국 차원의 산업 개혁을 집행했다.

산업 담당 서기알렉산드르 루다코프1910–1966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로서 1965년 9월 전원회의에서 코시긴의 경제개혁을 심의·채택하는 데 참여했다.

개혁의 거울오타 시크1919–2004

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겸 경제개혁 책임자. 그의 시장 지향 개혁안이 소련 보수파에게 '경제개혁은 곧 정치적 해빙'이라는 공식을 확신시켰다.

개혁을 옹호한 자동화 전문가바딤 트라페즈니코프1905–1994

1964년 8월 프라우다에 지시 규범에 기초한 낡은 경제 관리 방식을 버릴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목격 · 증언10

프라하의 봄의 상징알렉산드르 두브체크1921–1992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로서 추진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소련 보수파에게 경제개혁의 정치적 위험성을 각인시켰다.

개혁을 비판한 경제사학자기르시 하닌1937–

1965년 개혁을 '진정한 개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심했다'고 평가했으며, 이 개혁이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최악의 특징을 결합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규제자 비양립성을 분석한 경제학자율리 오를세비치1929–2016

2000년 폴 그레고리와 함께 쓴 회고 분석에서, 단일 기업 안에서 지령 계획과 유사 시장이라는 두 규제자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 개혁의 핵심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코시긴 개혁 논쟁의 프레임을 만든 공저자유리 골란드1943–

알렉산드르 네키펠로프와 함께 2010년에 발표한 기념비적 논문에서 코시긴 개혁이 '놓친 기회인가 신기루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으며, 이 프레임은 소련 이후 역사학 논쟁의 구조를 형성했다.

부분 개혁 실패를 주장한 경제사학자블라디미르 콘토로비치1950–

중앙 부처와 국가계획위원회의 저항이, 부분 개혁이 계획 체계를 파괴할 것이라는 합리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개혁의 구조적 실패를 제도로 설명한 분석가다론 아제모을루1967–

제임스 로빈슨과 함께 계획경제에서는 가격이 혁신을 평가할 수 없고 임금 기금 총액에 연동된 보너스가 자동화 유인을 제거했기 때문에 코시긴 개혁이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50년 논쟁을 한 권의 표제로 수렴한 편집자루스템 누레예프1950–2023

2017년 공동 연구서 《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밸브인가: 1965년 코시긴 개혁 50주년에 부쳐》를 편집했으며, 이 표제 자체가 역사학 논쟁의 두 축을 결정화한 것으로 인용된다.

개혁의 제도적 한계를 추적한 역사가니키타 피보바로프현재

2025년 논문에서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의 갈등, 개혁이 처음부터 반쪽이었음을 밝혔다.

개혁을 분석한 경제사가폴 R. 그레고리1941–

올세비치와 공동 저술로 개혁 실패 원인을 분석했고, 소련 기획자 인터뷰를 남겼다.

개혁을 분석한 역사가알렉세이 사프로노프현재

그는 전산화와 경제적 유인책이 경쟁이 아닌 보완 관계라고 주장했다.

관련 용어

출처: Alec Nove, An Economic History of the USSREncyclopaedia Britannica: Alexei Kosy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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