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영국 · 사건 18

1918–1922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8.11–1920.10

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1918년 11월 독일이 무너진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신생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군, 독일 자유군단이라는 세 세력 사이에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함대의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에스토니아는 1919년 초 붉은 군대를 밀어냈고, 자국 땅에서 출발한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에서 무너지자 이를 무장해제한 뒤 1920년 2월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독립 승인 조약을 맺었다. 라트비아는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 베르몬트-아발로프의 리가 공격을 차례로 이겨 냈고, 리투아니아는 리트벨을 물리쳤지만 폴란드에 빌뉴스를 잃었다. 1920년 한 해에 맺어진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핀란드)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북서 국경을 그렸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남았다.

1940–1944

프랑스 침공과 비시 정부

이 사건은 1940년 5월 10일부터 1944년 해방까지 독일의 프랑스 정복과 제3공화국의 붕괴, 비시의 통치를 가리킨다. 프랑스군은 마지노선 방어와 벨기에 진입을 결합했지만, 독일군은 아르덴을 뚫어 뫼즈강을 건넌 뒤 해협으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6월 14일 파리를 점령했고, 됭케르크 철수에도 프랑스의 조직적 저항은 무너졌다. 필리프 페탱은 6월 17일 휴전을 요청했고 6월 22일 협정으로 북부와 대서양 연안은 독일 점령지, 남부는 비시의 통치 아래 놓였다. 7월 10일 국민의회가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했고, 비시는 독일과 협력하며 반유대 법령, 경찰 검거, 경제 수탈과 노동 동원을 시행했다. 1942년 11월 남부까지 점령된 뒤 1944년 해방으로 체제는 붕괴했다.

1940.07–1941.05

영국 본토 항공전

영국 본토 항공전은 1940년 7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독일 공군과 영국 공군이 영국 해협과 영국 본토의 제공권을 두고 벌인 항공전이다.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의 패배 뒤 독일은 영국을 협상으로 굴복시키거나 침공하려 했고, 이를 위해 영국 전투기지휘부를 무너뜨리고 해협의 제해권을 뒷받침할 제공권을 얻으려 했다. 7월에는 해협 선박과 항구를 공격했고, 8월에는 비행장과 레이더망을 겨냥했으며, 9월 7일부터 런던과 도시들에 대한 대규모 폭격으로 전환했다. 영국은 레이더, 관측대, 지휘통제망,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결합해 독일의 주간 공습을 막았고, 독일은 1940년 9월 침공을 무기한 미루었다. 야간 폭격은 1941년 5월까지 이어졌지만 영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키지는 못했다.

1941–1945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미국과 영국 세력권을 공격하면서 본격화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으로, 1937년부터 이어진 중일전쟁과 일본의 자원 및 제국 확장 정책이 배경이었다. 미국의 대일 석유·자재 제재와 중국에서의 충돌 속에서 일본 지도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와 동남아 자원을 점령하고 미국의 협상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은 1942년 초 필리핀,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으로 빠르게 팽창했으나 산호해와 미드웨이에서 공세의 한계가 드러났다. 1942년 과달카날부터 연합국은 남서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도약식 공세를 진행했고, 1944년 필리핀 탈환과 마리아나 제도 점령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할 거점을 확보했다. 1945년 봉쇄, 폭격,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겹치면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공표했고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1941–1944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제기된 서유럽 재개전 요구가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오버로드 작전으로 실현된 과정이다. 이 요구는 동부전선의 압력을 덜어 달라는 소련의 군사적 필요와, 충분한 병력·상륙정·공중우세 없이는 실패할 수 있다는 영미 지휘부의 판단이 충돌하면서 지연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먼저 공격했고, 1943년 회담에서 해협 횡단 상륙을 확정한 뒤 영국 남부에 병력과 물자를 모았다. 1944년 6월 6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지휘한 연합군은 공수부대와 해군 포격에 이어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다섯 해변에 상륙했다. 기만작전은 독일군이 주공을 파드칼레로 오인하게 만들었지만 해안의 요새와 전투는 큰 희생을 요구했다. 연합군은 6월 말까지 교두보를 보급 가능한 전선으로 바꾸고, 8월 파리 해방과 독일 국경을 향한 서진의 기반을 마련했다.

1943–1945

이탈리아 전선과 무솔리니의 몰락

이탈리아 전선은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으로 시작되어 1945년 5월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으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의 지중해 전역이다. 북아프리카 패배와 본토 폭격 뒤 파시스트 체제 내부와 국왕은 전쟁 지속이 정권과 국가를 파괴한다고 판단했지만, 연합군은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떼어내고 독일군을 남쪽에 묶어 두려 했다. 시칠리아 점령 뒤 대파시스트 평의회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했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부는 9월 3일 카시빌레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9월 8일 공개되자 독일군은 중북부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를 구출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다. 연합군은 살레르노와 타란토에 상륙했지만 아펜니노산맥과 구스타프선, 안치오, 몬테카시노에서 막혔고, 1944년 6월 로마를 점령한 뒤에도 고딕선에서 소모전을 치렀다. 1945년 4월 최종 공세와 파르티잔 총봉기가 북부를 무너뜨렸고,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독일군 집단군 C는 5월 2일 항복했다.

1940–1944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은 1940년 독일의 프랑스 패배와 비시 정부 수립에서 시작되어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프로방스 상륙과 프랑스 영토의 해방으로 이어진 저항과 국가 재건의 과정이다. 독일 점령, 비시 당국의 협력과 탄압, 강제노동, 반유대주의 정책이 저항의 조건을 만들었고,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와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특히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가톨릭 세력이 서로 다른 목표를 지닌 채 지하 언론, 정보 수집, 탈출 지원, 파업, 사보타주와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장 물랭은 1943년 국민저항위원회(CNR)를 조직해 주요 운동을 조정했으며, 1944년 레지스탕스는 프랑스 내무군(FFI)으로 통합되어 연합군의 진격을 지원하고 파리 봉기에 참여했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 뒤 드골의 임시정부가 공화국의 연속성을 선언하면서 비시 체제의 국가적 정당성은 부정되었다.

1941–1945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은 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분할한 뒤 1945년까지 벌어진 공산당 주도 무장투쟁이다.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점령군과 협력 정권에 맞선 전국 봉기를 조직했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왕당파 체트니크와 경쟁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추축국의 대공세, 특히 네레트바와 수테스카에서 살아남은 파르티잔은 1943년 연합국의 지원과 승인을 얻었고, 1944년 소련군과 함께 베오그라드를 해방했다. 1945년 3월 군대는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편되었고, 파르티잔의 승리는 왕정을 대신하는 사회주의 연방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1941–1945

그리스 저항과 12월 사건

그리스 저항과 12월 사건은 1941년 추축국 점령에서 시작되어 1945년 바르키자 협정으로 이어진 저항과 권력투쟁이다. 독일·이탈리아·불가리아의 점령, 기근과 협력정권에 맞서 공산당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선(EAM)과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이 농촌과 도시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1944년 10월 독일군이 철수할 때 EAM은 전국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영국은 왕정과 비EAM 정부를 지키려 했고 소련도 그리스의 영국 영향권을 사실상 인정했다. 12월 1일 로널드 스코비가 저항군 무장해제를 명령하자 EAM 장관들이 사임했고, 12월 3일 아테네 시위에서 경찰이 발포하면서 영국군과 정부군, ELAS 사이의 37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증원과 화력 앞에 EAM은 후퇴했고, 1945년 2월 12일 바르키자 협정에서 ELAS 해산과 무장해제를 받아들였다.

1945.02–08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스탈린·루스벨트·처칠이, 7월과 8월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스탈린·트루먼·애틀리가 마주 앉아 전후 세계의 틀을 짰다. 얄타에서는 독일의 분할 점령과 배상, 폴란드의 국경과 정부 구성,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 안보리 거부권을 포함한 유엔 창설 방안이 합의되었고, 소련은 남사할린·쿠릴의 확보를 조건으로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포츠담에서는 독일의 비무장화·탈나치화 원칙과 폴란드의 서부 국경 실무가 다루어졌다. 회담장 밖에서는 이미 다른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트루먼이 「신형 무기」를 넌지시 알렸을 때 스탈린은 무표정했다. 정보망을 통해 원폭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4–1949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1944년 여름부터 붉은군대가 진주한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 소련 점령지구 독일, 그리고 자력으로 해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각국은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를 거쳤고, 1945~46년의 선거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결과가 갈린 곳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처럼 공식 집계와 후대에 공개된 기록이 어긋나는 곳도 있었다. 1947년에 연립의 다른 정당들이 해체·분열·재판을 거쳐 밀려났고, 1946~48년에 각국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통합되었다. 같은 시기 「인민민주주의」는 소비에트와 다른 「새로운 길」로 설명되다가 1948년 12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재정의되었다. 1949년까지 각국은 헌법과 단일 명부 선거로 새 체제를 확정했고, 당 안에서는 재판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47–1948

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

1947년 미국이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내놓자, 소련은 그것을 미국 자본에 유럽을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규정했다. 몰로토프는 파리 회담에서 협상을 결렬시켰고,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이 원조를 받는 것을 막았다. 즈다노프의 「두 진영」 선언과 코민포름 창설로 세계는 냉전의 두 블록으로 굳어졌다.

1948–1949

베를린 봉쇄와 공수

베를린 봉쇄(1948년 6월 24일–1949년 5월 12일)는 소련이 서방 연합국이 장악한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철도·도로·수로를 차단한 냉전 최초의 대규모 대치였다. 직접적 발단은 1948년 6월 서방이 독일 서부 점령지구에 도이치마르크를 도입하면서 소련 점령지구와의 경제적 분리가 확정된 데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베를린을 봉쇄하면 서방이 통화 개혁을 철회하거나 서베를린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계산했으나, 해리 S. 트루먼 행정부는 철수하지 않고 베를린 공수 작전으로 맞섰다. 미군과 영국 공군은 15개월 동안 27만 8,000회 이상의 비행으로 233만 톤의 식량·석탄·연료를 서베를린에 수송했고, 절정기에는 30초마다 한 대의 수송기가 베를린에 착륙했다. 동시에 서방의 대응봉쇄로 동독 지역은 석탄과 강재 부족에 시달렸다.

1950–1953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진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멎은 전쟁이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여러 차례 무력 통일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계산 위에서 1950년 봄 이를 승인하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배제했다. 미국이 유엔군을 조직해 개입하고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중국이 인민지원군을 보냈고, 전선은 1951년 여름부터 38도선 부근에서 굳었다. 소련의 참여는 무기·고문단과, 만주 기지에서 미그-15로 싸운 조종사들에 한정됐으며 이들의 존재는 양측 모두 오래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1961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며 쌓은 156km의 경계 요새 시설이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의 동독 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베를린의 개방된 구역 경계를 통해 빠져나갔다.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의 대규모 유출로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지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하여 경계 봉쇄를 승인받았다. 1961년 8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회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고,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철조망으로 차단했다. 서방 3국은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 지위를 직접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적 대응을 피했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장벽은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콘크리트 장벽은 이후 28년간 냉전의 상징이 되었고, 최소 140명이 장벽을 넘다 사망했다.

1975

헬싱키 협정

헬싱키 협정(1975년 8월 1일)은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명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최종의정서'이다. 소련은 1954년부터 유럽 전후 국경의 공식 승인을 목표로 유럽안보회의를 추진해 왔고,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서방이 마침내 응했다. 1972년 사전 협의, 1973~1975년 제네바 실무 협상을 거쳐 35개국 정상이 헬싱키에 모였다. 최종의정서는 정치·군사(제1바스켓), 경제·과학(제2바스켓), 인권·인도적 협력(제3바스켓) 등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국경 불가침 원칙을 관철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제3바스켓의 인권 조항은 소련과 동구권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정부가 스스로 서명한 약속을 근거로 활동할 발판을 제공했다.

1983

1983년의 위기

1983년의 위기는 1981년 소련이 미국의 핵 선제공격 탐지를 위해 개시한 사상 최대 평시 정보작전 RYaN에서 시작되어, 1983년 11월 NATO의 핵전쟁 지휘통제 훈련 Able Archer 83에서 정점에 달한 냉전 최고의 긴장 국면이다. 페르싱 II 미사일의 서유럽 배치, KAL 007기 격추, 페트로프 중령의 조기경보 오경보 대처, 레이건 행정부의 심리전과 함대 훈련이 겹치며 소련 지도부는 NATO 훈련이 실제 선제공격을 위장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련은 동독과 폴란드에서 항공기에 핵탄두를 탑재하고 전투태세를 상향했으며, 1990년 미 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는 '소련군 일부가 Able Archer를 엄호로 한 NATO 공격을 선제하거나 역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