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외교 노선의 계보

「선언 몇 장 발표하고 가게를 닫겠다」던 1917년의 세계혁명 외교에서 1989년의 시나트라 독트린까지, 소련 외교가 걸어온 한 세기의 계보. 외교 수장의 계보, 공식 노선과 교리의 변천, 혁명과 진영의 정치, 그리고 조약과 위기의 전환점을 네 줄로 나란히 놓았다. 노드를 누르면 해당 인물·용어·사건·문헌으로 이동한다.

1920 1930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외교 수장 노선과 교리 혁명과 진영 전환점 「인민들에게 혁명적 선언 몇 장을 발표하고 가게를 닫겠다」. 세계혁명이 임박했다면 외교는 임시 업무일 뿐이었다트로츠키, 외교의종말을 선언한외교인민위원1917–1918 비밀조약 폐기와 공개, 무배상·무병합 강화 호소. 국가 간 외교가 아니라 인민을 향한 호소가 본령이었다세계혁명의 외교1917–1921 혁명 국가가 생존을 위해 맺은 첫 강화. 세계혁명 대기론에 대한 현실의 첫 수정이었다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1918.03 귀족 출신의 박식가. 혁명 국가를 국제 체계 안에 되돌려 놓는 실무 외교의 기초를 놓았다치체린, 라팔로의설계자1918–1930 외교인민위원부가 국가와 교섭하는 동안 코민테른은 그 국가의 전복을 지원했다. 소련 외교의 이중 구조가 여기서 시작된다코민테른 창설: 두개의 외교1919 혁명이 늦어지자 통상조약과 이권 양여로 자본주의 세계와의 공존이 실무가 되었다. 훗날 평화공존론의 전거가 되는 국면공존의 맹아: 「숨돌릴 틈」의 외교1921– 베르사유 질서에서 배제된 두 나라,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의 수교. 고립 탈출의 첫 돌파구였다라팔로 조약:왕따들의 악수1922.04 혁명의 확산보다 소비에트 국가의 보전이 우선이 되면서, 외교는 혁명의 보조 수단에서 국가 정책의 중심으로 이동했다일국사회주의와 국가이익의 외교1924– 「평화는 불가분하다」. 국제연맹 가입(1934)과 반파시즘 연대 외교를 이끌었고, 서방에서 가장 신뢰받는 소련인이었다리트비노프,집단안보의 얼굴1930–1939 나치 독일의 위협 앞에서 서방 민주국가들과의 동맹으로 침략을 봉쇄한다는 노선. 뮌헨 협정이 그 신뢰를 무너뜨렸다집단안보 노선1933–1939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이라 부르던 노선을 버리고 반파시즘 연합으로 선회. 진영 정치가 국가 외교에 종속되는 신호였다코민테른 제7차대회: 인민전선 전술1935 리트비노프 해임과 함께 등장해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전시와 냉전 초의 소련 외교를 대표하는 이름몰로토프, 강철의「니에트」1939–1949 · 1953–1956 집단안보의 파산 위에서 맺어진 거래. 동유럽 세력권을 가른 비밀의정서는 반세기 뒤 발트 독립운동의 법적 근거가 된다독소불가침조약과비밀의정서1939.08 연합국과의 동맹을 위해 세계혁명의 사령부를 스스로 닫았다. 국가 외교의 완전한 우위를 보여 준 장면코민테른 해산1943 전승국 소련은 유럽의 절반에 대한 영향권과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었다. 이후 반세기 소련 외교의 자산이자 부담얄타와 포츠담:초강대국의 탄생1945 세계는 제국주의 진영과 반제국주의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는 냉전 초기의 공식 세계상두 진영론(즈다노프)1947–1953 마셜 플랜에 맞선 진영 결속 기구. 첫 공식 행동의 하나가 티토 파문이었다코민포름: 진영의결속1947–1956 사회주의 국가가 모스크바의 지도를 거부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음을 처음 보여 주었다티토-스탈린 결별:진영의 첫 균열1948 대숙청 재판의 검사가 유엔 연단의 냉전 수사학을 맡았다. 외교가 법정 논고를 닮아 간 시기비신스키, 검사출신의 외무장관1949–1953 서독의 나토 가입에 맞선 군사동맹. 진영의 결속 기구이자,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진영 단속의 도구가 되었다바르샤바조약기구1955 제20차 당대회가 전쟁 불가피론을 공식 폐기했다. 다만 공존은 「계급투쟁의 한 형태」라는 단서를 계속 달고 있었다평화공존론: 전쟁은숙명이 아니다1956–1985 위기 관리와 군비통제 교섭의 프로. 그의 재임 자체가 소련 외교의 연속성이었다그로미코, 미스터니에트의 28년1957–1985 평화공존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탄한 중국과의 결별로,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단일 중심이 사라졌다중소분열: 진영이둘로 갈라지다1956–1969 핵전쟁의 문턱을 밟은 13일. 이후 핫라인과 군비통제 교섭, 데탕트로 가는 길이 열렸다쿠바 미사일 위기1962.10 프라하의 봄 진압을 정당화한 공식 논리.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이 개별국의 주권에 우선한다는 교리였다브레즈네프 독트린:제한주권론1968–1989 전후 국경의 인정을 얻는 대가로 인권 조항을 받아들였다. 그 「제3바구니」가 동유럽 반체제 운동의 지렛대가 된다헬싱키 최종의정서:데탕트의 정점1975.08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진영 밖 적용이 부른 10년의 소모전. 「제2의 냉전」과 국제적 고립이 뒤따랐다아프가니스탄 침공:데탕트의 파산1979.12 외교 경험이 전무한 그루지야 당 지도자의 발탁 자체가 노선 전환의 선언이었다셰바르드나제, 후퇴를관리한 외무장관1985–1990 핵시대에는 인류의 생존이 어떤 계급의 이익보다 앞선다는 선언. 평화공존에 붙어 있던 계급투쟁의 단서를 지웠다신사고: 계급투쟁에서전인류적 가치로1985–1991 선택의 자유를 「예외 없는 보편 원칙」으로 선언한 신사고의 집대성. 전문 번역으로 읽을 수 있다유엔 연설: 일방감군 50만1988.12 사상 첫 핵무기 감축, 아프가니스탄 철군, 그리고 몰타에서의 냉전 종식 확인INF에서 몰타까지:냉전의 종식1987–1989 외무부 대변인 게라시모프의 농담에서 나온 이름. 동유럽 각국이 「마이 웨이」를 가게 두겠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공식 폐기 선언이었다시나트라 독트린:각자의 길1989 소련군은 병영에 머물렀고, 진영은 몇 달 만에 사라졌다. 바르샤바조약기구는 1991년 공식 해산된다동유럽 혁명: 진영의소멸1989
계승 · 분화 · 합류 영향 대립 소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