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치체린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Чичери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36 ○ 자연사

혁명국가를 외교 언어로 번역한 첫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1872년 탐보프현 카라울 영지에서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1930년까지 13년간 소비에트 외교를 이끌었다. 1918년 3월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취임했으며,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뚫었다. 1923년부터 소련 외무인민위원, 1930년 병으로 물러나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귀족에서 인민위원으로 — 제정 외교관의 변신

게오르기 치체린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삼촌 보리스 치체린은 저명한 법철학자였고, 어머니 쪽으로는 발트 독일계 외교관 가문인 메이엔도르프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1897년 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문헌학부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제정 외무성에 들어가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며 부처 100년사 편찬에 참여했다. 명문가의 후계자에게 예정된 길이었다.

그러나 1904년 건강을 이유로 독일로 떠난 치체린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듬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해 멘셰비키 진영에 섰고, 자신의 토지를 포함한 모든 세습 재산을 포기했다. 베를린·파리·런던을 오가며 망명 사회주의자로 살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에서 반전 활동을 벌였다. 1917년 8월 영국 당국은 그를 공공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체포했다.

전환점은 10월혁명 이후 찾아왔다. 트로츠키가 영국 대사 조지 뷰캐넌에게 두 차례 항의 각서를 보낸 끝에, 1918년 1월 3일 치체린은 뷰캐넌과의 포로 교환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지 이틀 만인 1월 21일 트로츠키의 외무 담당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볼셰비키 당에 입당했다. 불과 두 달 뒤 트로츠키가 군사 문제로 자리를 옮기자 치체린은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인민위원으로 취임했다. 13년 전 제정 외무성의 기록보관소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 귀족 청년은 이제 혁명국가의 외교를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라팔로 조약 — 봉쇄를 뚫은 외교 전략

1922년 4월 16일, 제노바 회의의 막전막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은 라팔로 조약에 서명했다. 베르사유 체제에서 공동의 약자였던 두 나라는 상호 채권을 포기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치체린은 서방 열강이 소련을 고립시키려는 바로 그 장소에서 그 고리를 끊어냈다. 이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유럽 강대국과 최초로 대등한 외교적 정상화를 이뤘고, 고립을 돌파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치체린의 전략은 단순했다: 제국주의 열강 간의 균열을 포착하고, 그 틈에 혁명국가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 라팔로는 그 전략의 가장 성공적인 실행이었다.

마지막 투쟁, 1928~1936년: 병과 사직, 후임자에게 남긴 지침

1920년대 후반 치체린의 건강은 무너졌다. 1928년 8월에는 건강을 이유로 직무에서 면제해 달라는 신청서를 냈다. 그 해 여름 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크렘린 병원으로 옮긴 뒤 의료 심의회가 해외 치료를 요구했다고 적었다. 외화를 들여 자신을 치료하는 것은 개선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므로 무의미하다고 했고, 현 지도부 구성으로는 10년 만에 더는 일할 수 없으며 1927년 말 감축 이후의 과중한 부담은 나이와 지병을 고려할 때 견딜 수 없게 되었다고 썼다. 그리고 이렇게 맺었다. 「나는 소모된 자 중의 하나다.」 편지에는 동료들의 압박도 기록되어 있다. 보로실로프는 정치국 회의에서 그를 다른 정부들의 이익을 옹호한다고 비난하며 그의 출신을 문제 삼았고, 루드주타크는 그의 글에서 어리석은 냄새가 난다고 썼으며, 톰스키는 거의 모든 정치국 회의에서 그가 그 직무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칼리닌은 소련 이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다는 말을 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며, 부하린은 그를 적대자라고 불렀다.

정치국은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2주간 치료를 받은 뒤 3개월간 해외에서 치료하도록 하고, 그동안 인민위원 직무는 리트비노프에게 맡기기로 했다. 치체린은 베를린으로 떠났고 네 달이 지나도, 반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929년 3월 독일 주재 소비에트 대표 크레스틴스키는 카라한에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치료 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가 일을 그만두고 모스크바를 지치게 만들기로 작정한 듯하다고 썼다. 치체린은 외교 문제의 오류를 지적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거듭 보냈고, 스탈린은 사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며 인민위원이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부드럽지만 집요하게 물었다.

왜 이렇게 다루었는가. 1929년 4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야권이 패배한 뒤 총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고위 관료들의 대량 미귀환이 시작되었고, 현직 인민위원이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당과 그 총서기의 위신에 심각한 타격이 될 터였다. 10월 3일 파리 대사관의 참사관 그리고리 베세도프스키가 망명하자 크렘린의 불안은 더 커졌다. 11월 14일 정치국은 주치의 레프 레빈이 11월 말까지 소련 도착이 바람직하다는 편지를 쓰게 하고 레빈을 수행원으로 보내며 카라한을 즉시 베를린에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12월 3일에는 그의 도착을 앞당기라고 다시 명령했다. 그리하여 그는 1930년 1월 6일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돌아온 치체린은 1년 반의 부재 동안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들이 거의 모두 해임되고 자신이 세운 업무 체계가 파괴된 것을 발견했다. 사임까지 그의 주된 일은 후임 인민위원을 위한 지침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넘기지 못했다. 1930년 7월 리트비노프가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지침은 소비에트 외교의 '내부 적'들을 지목했다. 첫째는 코민테른이었다. 1929년까지는 끝없는 골칫거리였어도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1929년부터는 완전히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교의 죽음이다.」 지도 간부들의 코민테른 연설과 기구와 외국 공산당 사이의 접촉이 드러나는 일은 특히 해롭고 위험했다. 둘째는 국가정치보위국, 즉 게페우였다. 외무인민위원부와 합의하지 않은 외국인 체포는 수백만 건의 국제적 사건을 낳았고, 어떤 외국인이 재판 없이 불법적으로 총살되었다는 사실이 몇 년 뒤에야 드러나기도 했으며, 그런데도 인민위원부에는 아무것도 통보되지 않았다. 게페우는 인민위원부를 계급 적으로 대우했다. 지침에는 기구의 파괴도 기록되었다. 그가 1930년에 쓴 대로 감축과 숙청은 좋은 일꾼을 없애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대체했으며, 그는 스탈린에게 자기 무덤에 「여기 감축과 숙청의 희생자 치체린이 잠들다」라고 써 달라고 했다. 20퍼센트 감축은 자신을 파멸시킬 것이고 자신의 말은 언제나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경고도 남겼다. 그는 또한 인민위원으로서 자신은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고 정치국이 수석 외교관의 말을 들을 수도, 듣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적었는데, 그러한 조건에서 외무부가 사실상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점만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해는 계속된 불치병이 짓눌렀다. 병은 그를 친구들의 곁과 활동 무대에서 밀어냈고 이른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는 1936년 7월 7일 사망하여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소련 훈장은 없었고 몽골인민공화국 적기훈장을 받았다. 사망 이후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그는 소비에트 문헌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1950년판 소비에트 외교사전이 그에게 할애한 분량은 52쪽으로, 리트비노프의 92쪽, 몰로토프의 292쪽에 견주어 적었다. 모스크바의 그가 일하던 건물 벽에는 기념패가 붙었고, 모스크바·오렌부르크·페테르고프를 비롯한 여러 러시아 도시에 그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생겼다.

한 가지 구분해 둘 것이 있다. 몰로토프가 스탈린을 설득해 치체린을 해임하게 했고 그 뒤 치체린이 클랴지마의 다차에서 홀로 피아노를 치며 '우울과 무위' 속에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는 러시아 자료에서 스탈린의 통역관 V. M. 베레즈코프가 전하는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회고로 귀속된다. 이는 해임이나 사망의 문서화된 원인이 아니라 귀속된 회고이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