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국가를 외교 언어로 번역한 첫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귀족 가문 출신의 망명 사회주의자로, 1918년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이 되었다. 에스토니아·튀르키예·이란·아프가니스탄과 연이은 조약으로 혁명 러시아의 외교적 고립을 벗겨냈고,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독일과 손을 잡으며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돌파했다. 13년간 소비에트 외교의 제도적 토대를 세운 뒤 병과 과로 속에서 1930년 막심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경력 연표
- 1923–1930외무인민위원
관련 역사 사건
귀족에서 인민위원으로 — 제정 외교관의 변신
게오르기 치체린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귀족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삼촌 보리스 치체린은 저명한 법철학자였고, 어머니 쪽으로는 발트 독일계 외교관 가문인 메이엔도르프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1897년 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문헌학부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제정 외무성에 들어가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며 부처 100년사 편찬에 참여했다. 명문가의 후계자에게 예정된 길이었다.
그러나 1904년 건강을 이유로 독일로 떠난 치체린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듬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해 멘셰비키 진영에 섰고, 자신의 토지를 포함한 모든 세습 재산을 포기했다. 베를린·파리·런던을 오가며 망명 사회주의자로 살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에서 반전 활동을 벌였다. 1917년 8월 영국 당국은 그를 공공 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체포했다.
전환점은 10월혁명 이후 찾아왔다. 트로츠키가 영국 대사 조지 뷰캐넌에게 두 차례 항의 각서를 보낸 끝에, 1918년 1월 3일 치체린은 뷰캐넌과의 포로 교환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지 이틀 만인 1월 21일 트로츠키의 외무 담당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볼셰비키 당에 입당했다. 불과 두 달 뒤 트로츠키가 군사 문제로 자리를 옮기자 치체린은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인민위원으로 취임했다. 13년 전 제정 외무성의 기록보관소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 귀족 청년은 이제 혁명국가의 외교를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라팔로 조약 — 봉쇄를 뚫은 외교 전략
1922년 4월 16일, 제노바 회의의 막전막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은 라팔로 조약에 서명했다. 베르사유 체제에서 공동의 약자였던 두 나라는 상호 채권을 포기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치체린은 서방 열강이 소련을 고립시키려는 바로 그 장소에서 그 고리를 끊어냈다. 이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유럽 강대국과 최초로 대등한 외교적 정상화를 이뤘고, 고립을 돌파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치체린의 전략은 단순했다: 제국주의 열강 간의 균열을 포착하고, 그 틈에 혁명국가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 라팔로는 그 전략의 가장 성공적인 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