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전선을 함께 세우고 제 손으로 청산한 급진당의 「보클뤼즈의 황소」
「저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 인용 여부와 장소·상대를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빵집 아들 출신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6일 폭동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부터 국방을 맡아 인민전선을 지탱했으나 1938년 4월 총리로 복귀한 뒤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폐기하고 총파업을 꺾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로 실각해 리옴 재판에 섰고 1943년부터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5월 5일 풀려났다.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 드골의 전권에 반대했고 197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884–1914카르팡트라 빵집 아들, 역사 교사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사병에서 중위까지
- 1919–1933급진당 하원의원, 당의 지도자로 부상
- 1934.01–02총리, 2월 6일 폭동 이튿날 사임
- 1936–1940국방장관, 1938년부터는 총리 겸임
- 1938.04–09총리 복귀, 뮌헨 협정 서명
- 1938.11법령으로 40시간제 해체,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 청산
- 1939.09대독 선전포고,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 불법화
- 1940.03핀란드 지원 실기의 책임으로 실각
- 1940–1945리옴 재판 피고,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
- 1946–1958하원 복귀, 급진당 원로
- 1970.10파리에서 사망
관련 역사 사건
- 1914–19181차 세계대전프랑스군으로 참전한 장교1914년부터 1918년까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병에서 중위까지 올랐다.
- 1934.01–07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2월 6일의 총리동맹들에 맞서겠다며 경찰청장 시아프를 경질했고, 폭동 이튿날 의회 다수를 쥐고도 사임해 제3공화국에서 거리에 밀려 물러난 첫 총리가 되었다.
- 1934–1938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급진당 지도자, 블룸 내각의 국방장관2월 폭동으로 물러난 총리이자 인민전선 연합의 우측 기둥. 1938년 총리로 돌아와 11월 법령과 총파업 진압으로 인민전선을 제 손으로 끝냈다.
- 1939.11–1940.03겨울전쟁핀란드 지원을 추진하다 실각한 프랑스 총리영불 원정군 파견을 추진했으나 때를 놓쳤고, 1940년 3월 핀란드 강화 직후 그 책임론으로 물러났다.
- 1940–1944프랑스 침공과 비시 정부각료회의 의장1938년부터 1940년 3월까지 정부를 이끌며 재무장, 뮌헨 이후의 외교, 폴란드 보장과 1939년 총동원을 결정했다.
- 1940–1944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전쟁 전 총리1938년부터 1940년 3월까지 총리로 재임하며 재무장과 대독전쟁을 이끌었고,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인민전선에서 뮌헨까지
달라디에의 정치적 궤적은 프랑스 급진당이 좌파 연합과 공화국의 국방 사이에서 겪은 긴장을 압축한다. 그는 1935년 레옹 블룸의 사회당 및 공산당과 급진당을 인민전선으로 묶는 데 참여했고, 1936년 블룸 내각에서 국방을 맡아 연합의 제도적 기반을 지켰다. 그러나 1938년 총리로 복귀한 뒤 재정과 통화의 안정을 내세워 인민전선의 사회적 성과를 후퇴시켰다. 40시간 노동제를 되돌린 11월 법령과 그에 맞선 총파업의 진압은 노동운동과 급진당 정부의 결별을 분명히 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한 선택도 전쟁을 피하려는 계산과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양보라는 결과를 함께 남겼다. 1939년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독소 불가침조약 뒤 프랑스 공산당을 해산하고 언론을 금지했다. 따라서 달라디에는 단순한 유화정책의 상징이라기보다, 반파시즘 연합을 구축한 세력이 국가 방위와 반공 질서의 이름으로 그 연합을 해체한 정치가로 평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