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그로미코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Громыко
소련 벨라루스 1909–1989 ○ 자연사

「미스터 니예트」, 마지막 수로 개혁가를 추천하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침묵 끝에 75세의 그로미코가 가장 먼저 일어나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불렀다. "미소는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 28년간 '미스터 니에트'로 불리던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을 직접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28년간 외무장관: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미스터 니예트'는 안보리 20여 차례 거부권에서 비롯된 별명이었고, 그의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브레즈네프 시대 군축을 주도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1968)와 아프가니스탄(1979)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985년 3월, 최고참 보수파로서 고르바초프를 추천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을 열었다: '이 사람은 미소가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입니다.' 자신이 만든 개혁가가 여는 시대를 지켜보다 죽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벨라루스의 농민 아들, 서른네 살의 주미 대사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1909년 벨라루스의 스타리예 그로미키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학을 공부해 연구원의 길을 걷던 그의 운명은 대숙청이 바꿔 놓았다. 1930년대 말 외무인민위원부의 간부진이 숙청으로 쓸려 나가자, 노동자·농민 출신의 젊은 당원들이 빈자리에 대거 발탁되었고 그로미코도 그중 하나였다. 1939년 외교에 입문한 그는 4년 만인 1943년 서른네 살의 나이로 주미 대사가 되었다.

그는 테헤란·얄타·포츠담의 실무 준비에 참여했고, 덤바턴오크스 회의와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유엔 창설 문서에 서명했다. 20세기 후반의 국제 질서를 설계한 회의들에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있었다. 이후 유엔 안보리 초대 소련 대표, 주영 대사, 외무차관을 거쳐 1957년 외무장관에 올랐고, 그 자리를 28년간 지켰다.

스탈린에서 고르바초프까지 아홉 명의 지도자를 섬긴 이 경력은 소련 외교의 연속성 그 자체였다. 그가 어느 회담에서 협상 상대에게 남긴 말은 유명하다. 「당신들 뒤에는 몇 년의 정권이 있지만, 내 뒤에는 수십 년의 국가가 있다.」

유엔의 건축가 — 덤바턴오크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안드레이 그로미코의 외교관 경력은 국제연합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1944년 8월, 만 35세의 소련 대사였던 그는 워싱턴의 덤바턴오크스 저택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 회의는 유엔 헌장의 기초를 마련한 자리였고, 30대의 그로미코는 미국·영국의 원로 외교관들과 대등하게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이어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가 관여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구조가 확정되었고, 같은 해 4월~6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그는 소련을 대표해 유엔 헌장에 서명했다. 1946년 그로미코는 초대 소련 유엔 상임대표로 임명되어 1948년까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소련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거부권을 20회 이상 행사했고, 이 완강한 협상 스타일은 훗날 '미스터 니에트'라는 별명의 실질적 기원이 되었다. 한 외교사 연구자는 이렇게 평했다: '그로미코는 유엔의 설계자이자, 동시에 유엔을 소련 외교의 최전방 무대로 바꾼 인물이었다.'

미스터 니에트 — 냉전 외교의 28년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1957년부터 1985년까지 28년간 소련 외무장관을 지내며 냉전기 소련 외교의 얼굴이자 목소리였다. 서방 외교관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물러서지 않는 그의 완강함에 '미스터 니에트(No의 인격화)'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의 경력은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전 과정을 관통한다: 유엔 창설(1945), 쿠바 미사일 위기(1962)에서의 비밀 협상 채널, 데탕트 시대 핵군축 조약들(SALT I·II, ABM 조약), 그리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외교적 정당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마지막 정치적 행위는 1985년 3월, 최고참 보수파 원로로서 고르바초프를 총서기로 추천한 연설이었다: '이 사람은 미소가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입니다.'

1985년 3월의 킹메이커, 「강철 이빨」의 마지막 선택

1985년 3월 11일 정치국이 체르넨코의 후임을 정하던 날, 회의의 향방을 정한 것은 최고참 그로미코였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고르바초프를 추천하는 연설을 했고, 원로의 지지 앞에서 다른 후보군은 입을 다물었다. 고르바초프를 두고 그가 남겼다는 「미소는 상냥하지만 이빨은 강철」이라는 평은 이 승계극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되었다. 훗날 회고들은 이 지지가 사전에 조율된 거래였음을 보여 준다. 아들 아나톨리를 매개로 한 교섭에서 그로미코에게는 명예로운 퇴로가 약속되어 있었다.

약속대로 그해 7월 그는 외무장관직을 셰바르드나제에게 넘기고 의전상 국가원수인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신사고 외교가 자신이 평생 쌓은 노선을 해체하는 것을 그는 침묵 속에 지켜보았다. 1988년 가을 고르바초프가 그 자리마저 직접 맡기로 하자 그는 은퇴했고, 이듬해 7월 죽었다.

그의 이력을 두고 평가는 갈린다. 핵 시대의 위기들을 협상으로 관리한 냉전의 프로라는 평가와, 정체기의 경직된 외교를 상징하는 이름이라는 평가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마지막 정치 행위가 소련을 바꾸게 될, 그리고 끝내 해체하게 될 인물의 등극을 보증한 일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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