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니예트」, 마지막 수로 개혁가를 추천하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체르넨코가 죽은 이튿날, 그로미코는 고르바초프가 회의를 열자 곧바로 일어나 그를 총서기로 추천했다. 그에게 돌려진 '미소는 상냥하지만 이빨은 강철'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해졌지만, 공개된 회의 기록에는 없다.
28년간 외무장관을 지내며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외교에 입문한 1939년 이후 대숙청으로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며 올라 1943~1946년 주미 대사, 유엔 초대 상임대표를 지냈다. 1940년대 말부터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20여 차례 행사해 '미스터 니예트'로 불렸고,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1973년부터 정치국 정회원이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의 정치적 책임을 함께 졌다. 1985년 3월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를 총서기로 추천했고, 1988년 건강을 이유로 은퇴한 뒤 198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3 외교·국제활동 · 소련 · 외교
경력 연표
- 1943–4630대의 워싱턴 주재 대사
- 1944–45덤바턴오크스·얄타·샌프란시스코: 유엔 창설 실무
- 1957–85외무장관 28년
- 1962쿠바 위기의 협상 창구
- 1970s데탕트 조약들의 서명자
- 1985–88고르바초프 추천, 명목상 국가원수로 이동, 1988년 사임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73.04–1988.09
1988.09 퇴임
관련 역사 사건
- 1941–1945대조국전쟁주미 대사로 전시 동맹외교·유엔 창설 참여
- 1945.02–08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주미 대사로 얄타에 배석했고 유엔 창설 실무를 맡았다.
- 1950–1953한국전쟁안보리 복귀 건의결의안 84호 통과 직전 스탈린에게 안보리 복귀를 건의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부하고 결석을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 1962쿠바 미사일 위기외교외무장관으로 케네디를 만나 미사일 배치를 부인하며 위기의 외교전에 나섰다.
- 1968프라하의 봄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입 지지자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다.
- 1969–1979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소련 외무장관, 블라디보스토크 회담의 소련 측 협상자포드와의 워싱턴 예비회담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정상회담에서 중(重)ICBM 양보 문제를 놓고 브레즈네프 곁에서 미국 측 요구를 물리쳤다.
- 1975헬싱키 협정소련 측 실무 수석제네바에서 국경 불가침 원칙을 밀어붙이는 한편, 제3바스켓 인권 조항을 '휴지조각'이라 일축하며 국내법 일치 조항을 고수했다.
- 1979–1989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외교외무장관으로 개입 결정에 함께했다.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외무장관, 고르바초프 지지
- 1985–1989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외무장관에서 물러나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 옮기며 한 시대를 닫았다.
벨라루스의 농민 아들, 서른네 살의 주미 대사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1909년 벨라루스의 스타리예 그로미키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학을 공부해 연구원의 길을 걷던 그의 운명은 대숙청이 바꿔 놓았다. 1930년대 말 외무인민위원부의 간부진이 숙청으로 쓸려 나가자, 노동자·농민 출신의 젊은 당원들이 빈자리에 대거 발탁되었고 그로미코도 그중 하나였다. 1939년 외교에 입문한 그는 4년 만인 1943년 서른네 살의 나이로 주미 대사가 되었다.
그는 테헤란·얄타·포츠담의 실무 준비에 참여했고, 덤바턴오크스 회의와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유엔 창설 문서에 서명했다. 20세기 후반의 국제 질서를 설계한 회의들에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있었다. 이후 유엔 안보리 초대 소련 대표, 주영 대사, 외무차관을 거쳐 1957년 외무장관에 올랐고, 그 자리를 28년간 지켰다.
스탈린에서 고르바초프까지 아홉 명의 지도자를 섬긴 이 경력은 소련 외교의 연속성 그 자체였다. 그가 어느 회담에서 협상 상대에게 남긴 말은 유명하다. 「당신들 뒤에는 몇 년의 정권이 있지만, 내 뒤에는 수십 년의 국가가 있다.」
유엔의 건축가 — 덤바턴오크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안드레이 그로미코의 외교관 경력은 국제연합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 1944년 8월, 만 35세의 소련 대사였던 그는 워싱턴의 덤바턴오크스 저택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 회의는 유엔 헌장의 기초를 마련한 자리였고, 30대의 그로미코는 미국·영국의 원로 외교관들과 대등하게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이어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가 관여한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구조가 확정되었고, 같은 해 4월~6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그는 소련을 대표해 유엔 헌장에 서명했다. 1946년 그로미코는 초대 소련 유엔 상임대표로 임명되어 1948년까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소련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거부권을 20회 이상 행사했고, 이 완강한 협상 스타일은 훗날 '미스터 니에트'라는 별명의 실질적 기원이 되었다. 한 외교사 연구자는 이렇게 평했다: '그로미코는 유엔의 설계자이자, 동시에 유엔을 소련 외교의 최전방 무대로 바꾼 인물이었다.'
미스터 니에트 — 냉전 외교의 28년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1957년부터 1985년까지 28년간 소련 외무장관을 지내며 냉전기 소련 외교의 얼굴이자 목소리였다. 서방 외교관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물러서지 않는 그의 완강함에 '미스터 니에트(No의 인격화)'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의 경력은 소련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전 과정을 관통한다: 유엔 창설(1945), 쿠바 미사일 위기(1962)에서의 비밀 협상 채널, 데탕트 시대 핵군축 조약들(SALT I·II, ABM 조약), 그리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외교적 정당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마지막 정치적 행위는 1985년 3월, 최고참 보수파 원로로서 고르바초프를 총서기로 추천한 연설이었다: '이 사람은 미소가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입니다.'
협상의 실체: 쿠바 위기, 그리고 조약들의 서명자
1962년 10월 18일, 케네디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그로미코와 주미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을 만났을 때, 핵탄두를 포함한 소련의 R-12(SS-4) 미사일 42기와 4만 명 규모의 소련 여단은 이미 쿠바에 들어와 있었고 발사대 조립이 진행 중이었다. 미국은 대규모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로미코는 훗날 회고에서 이 협상을 자신의 외교 경력에서 가장 힘든 협상이었다고 적었다. 모스크바는 케네디가 미사일을 직접 묻는다면 내놓을 답변을 흐루쇼프와 미리 문구까지 맞춰 두었지만, 케네디는 '미사일'이라는 말을 끝내 쓰지 않았고 책상 서랍 속 사진도 꺼내지 않았다. 그로미코는 이 점이 자기 처지를 덜어 주었다고 보았다. 그는 앞서 이 배치를 탐탁지 않게 받아들였고 미국에서 정치적 폭발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로미코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를 둘러싼 기록은 서로 어긋난다. 러스크 미 국무장관의 서술에서 케네디는 그로미코에게 '자백할 기회'를 주었고 그로미코는 '들어 본 적 없는 뻔뻔한 거짓말'로 응답했다. 펠릭스 펠릭소프의 증언은 외무부와 그로미코가 작전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었기에 그가 케네디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고 하고, 도브리닌의 증언은 그로미코가 배치를 알고 있었으나 대사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공식 자료는 그가 위기의 '해결에 기여했다'고만 밝힌다. 결정적 국면은 공식 외교 경로 밖에서 케네디와 스칼리, 펠릭소프와 사하로프스키가 잇는 KGB '스칼리-포민' 비밀 창구로 진행되었고, 그로미코의 지시로 도브리닌은 터키 내 미군 기지의 비공개 철수도 추가로 요구했다. 1962년 10월 28일까지 흐루쇼프와 케네디가 승인한 합의에 따라 미사일은 곧바로 철수했고 터키 기지들은 1963년 초 조용히 폐쇄되었다.
같은 협상의 건설적 측면은 별개로 기록된다. 그는 1963년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 1972년 ABM 조약과 SALT I, 1973년 핵전쟁 방지 협정, SALT II(1979), 1975년 헬싱키 최종의정서를 직접 이끌고 서명했다. 1946년부터 일반 군축과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 금지를 제안해 온 그는 정부를 대신해 백 건이 넘는 군축 제안을 냈다. 1960년대 말 존슨 대통령, 러스크와의 뉴욕·워싱턴 회담에서 시작된 NPT 협상에서는 핵무기나 그 통제권을 '누구에게도' 이전하지 못하게 하는 조항이 러스크와 그로미코 사이에 직접 합의되었고, 그는 이 문서의 서명을 유엔 헌장에 이은 두 번째로 중요한 서명으로 여겼다. 1970년 모스크바 조약에서는 '불가침'(러시아어 '네루시모스티' 대 독일어 '운페를레츠바르카이트') 문구를 두고 조문을 하나씩 짚어 확정했고, 에곤 바르가 이 조약이 평화조약도 독일 통일의 길을 닫은 것도 아니라는 단서를 붙이려 한 시도를 막았다. 조약은 1970년 8월 12일 코시긴과 그로미코, 브란트와 셸의 서명으로 크렘린에서 조인되었다. 그는 1966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를 중재해 타슈켄트 협정을 이끌었고, 1965년부터 바오로 6세와 만난 첫 소련 고위 인사였으며, 1973~74년 제네바 중동 회의의 발기인 중 하나였다.
평가는 균형 있게 남겨 둔다. 러시아어 자료는 쿠바 위기에서의 그의 역할이 '학술적·역사적 논쟁의 대상'이라고 밝히고, 그가 미국 및 NATO 국가들과의 평화적 관계의 지지자였다고 적는다. 동시에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출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의 정치적 책임을 함께 진 기록도 남는다. 일부 평자는 뛰어난 기억력과 자신감이 그를 융통성 없고 상상력이 부족하며 '장기적 비전이 결여된' 인물로 만들었다고 보았고, 다른 이들은 그의 기억력과 지성, 지구력을 높이 평가했다.
1985년 3월의 킹메이커, 「강철 이빨」의 마지막 선택
1985년 3월 11일 정치국이 체르넨코의 후임을 정하던 날, 회의의 향방을 정한 것은 최고참 그로미코였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고르바초프를 추천하는 연설을 했고, 원로의 지지 앞에서 다른 후보군은 입을 다물었다. 고르바초프를 두고 그가 남겼다는 「미소는 상냥하지만 이빨은 강철」이라는 평은 이 승계극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되었다. 훗날 회고들은 이 지지가 사전에 조율된 거래였음을 보여 준다. 아들 아나톨리를 매개로 한 교섭에서 그로미코에게는 명예로운 퇴로가 약속되어 있었다.
약속대로 그해 7월 그는 외무장관직을 셰바르드나제에게 넘기고 의전상 국가원수인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신사고 외교가 자신이 평생 쌓은 노선을 해체하는 것을 그는 침묵 속에 지켜보았다. 1988년 가을 고르바초프가 그 자리마저 직접 맡기로 하자 그는 은퇴했고, 이듬해 7월 죽었다.
그의 이력을 두고 평가는 갈린다. 핵 시대의 위기들을 협상으로 관리한 냉전의 프로라는 평가와, 정체기의 경직된 외교를 상징하는 이름이라는 평가다. 분명한 것은 그의 마지막 정치 행위가 소련을 바꾸게 될, 그리고 끝내 해체하게 될 인물의 등극을 보증한 일이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