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강경 집행자 '아이언 라자르'
1934년 17차 당대회에서 개표위원장을 맡아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조작은 여러 문헌이 전하는 주장이며 확정된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유대계 제화공 가정에서 태어나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2년 당 조직부를 맡아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1925~192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로 중앙집권과 농업 재편을 밀어붙였고, 1930년 정치국 정회원이 되어 당 서기국과 모스크바 재건,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1932년 북캅카스 곡물 조달 위원회를 이끌며 마을을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대숙청기에는 처형 리스트에 서명하고 공화국들을 돌며 숙청을 독려했다.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하고 1961년 제명되었으며, 1991년 97세로 죽어 마지막 생존 옛 볼셰비키가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8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22–24조직지도부, 임명과 배치 실무
- 1928–39중앙위 서기, 스탈린의 당 기구 장악 지원
- 1957반당 그룹으로 실각
- 1925–28우크라이나 공산당 총서기
- 1935–42, 1943–44철도 인민위원
- 194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61당 제명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26.07–1930.07
- 정위원 1930.07–1957.06
1957.06 해임 · 「반당 그룹」 사건
관련 역사 사건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선전부 정치위원1918년 니제고로드에서 당 조직을 이끌고 1919년 보로네시에서 데니킨군에 맞선 방어를 조직했으며 1920년 투르케스탄에서 일했다.
- 1922.12소련의 결성우크라이나 당 서기, 우크라이나화의 모스크바 집행자1925-2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서 러시아어를 쓰면서도 우크라이나화를 강제해 당내 저항을 꺾었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조달 전권위원1932년 북캅카스 등지에 파견된 전권위원회를 이끌며 곡물 조달을 강제하고 저항하는 마을에 제재를 가했다.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스탈린의 공출 특사, 우크라이나에서 '곡물 전쟁' 지휘1932년 7월과 10~12월 우크라이나에 특사로 파견되어 공출 할당량 축소 요구를 '반당적'이라고 규탄했다. 1932년 11월 북캅카스에서 쿠반 마을 전체의 시베리아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 1937–1938대숙청정치국 집행자정치국 지도부의 일원으로 숙청 정책의 집행과 승인에 관여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철도인민위원전시 철도를 운영해 공업 소개와 전선 보급의 수송을 떠받쳤다.
- 1953베리야의 몰락간부단 일원간부단의 반베리야 결의에 가담했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격하에 반대연설에 반대한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이듬해 반당 그룹과 함께 밀려났다.
- 1957반당 그룹 사건반당 그룹스탈린의 오랜 조직가로 패배 뒤 당에서 밀려났다.
우크라이나와 강제 집산화
카가노비치의 정치적 중요성은 스탈린의 인사 담당자였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일하며, 당의 중앙집권과 농업 생산의 강제적 재편을 현장에서 밀어붙인 지도자였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어 사용과 현지 인재 등용을 장려하는 우크라이나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카가노비치는 이를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싸우는 노선보다 우선하지 않았다. 그는 당 기구의 통제를 강화하고 알렉산드르 슘스키 같은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했으며, 민족적 자율성의 요구를 중앙의 정치적 통일에 종속시켰다. 이 긴장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정책이 문화적 양보와 정치적 통제를 동시에 포함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32년 곡물 조달 위기 때 카가노비치는 북캅카스 특별위원회를 이끌었고, 곡물 계획을 달성하지 못한 마을을 ‘블랙보드’에 올려 물자 공급과 거래를 차단하는 조치를 추진했다. 체포와 강제 이주가 뒤따랐으며, 이러한 정책은 농촌의 저항을 행정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 사보타주로 규정해 폭력을 확대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파견된 몰로토프 위원회의 활동에도 관여해, 농민의 생존 위기를 완화하기보다 국가 조달 목표와 당의 권위를 우선했다.
따라서 카가노비치는 기근을 혼자 결정한 인물로 환원할 수 없지만, 1932~1933년의 재난을 낳은 국가 정책을 집행하고 정당화한 핵심 정치가였다. 그의 경력은 산업화와 국가 건설의 성과가 농민에 대한 강압, 민족적 의심, 당내 숙청과 분리될 수 없었던 스탈린 시대의 모순을 압축한다.
모스크바 지하철 — 국가가 만든 지하 궁전
라자리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의 '철도 인민위원'이자 가장 잔혹한 집단화 집행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눈에 보이는 유산은 모스크바 지하철이다.
1931년, 카가노비치는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로서 지하철 건설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스탈린은 지하철이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카가노비치는 그 지시를 문자 그대로 실행했다.
1935년 5월 첫 노선 개통. 대리석 기둥, 청동 샹들리에,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 지하철역들은 궁전이나 대성당처럼 지어졌다. 카가노비치는 공사 현장을 매일 방문했고, 자신의 이름을 역명으로 붙이기까지 했다(1957년 실각 후 '오호트니 랴드'로 변경).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학살에 가담한 수백만의 영혼은 잊혔지만, 지하철은 지금도 매일 수백만 모스크바 시민을 실어 나른다. 사회주의 체제가 남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모순적인 유산 중 하나다.
처형 리스트 — 죽음에 서명한 자
대숙청(1937~1938년)에서 카가노비치는 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와 함께 이른바 '스탈린 처형 리스트'에 서명한 핵심 인물이었다. 이 리스트 체계는 NKVD가 작성한 이름 목록을 정치국원들이 차례로 검토·서명하면, 그 서명 자체가 곧 사형 판결이 되는 방식이었다.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 기록보관소(RGASPI)에 보존된 11권의 리스트 중, 카가노비치의 서명은 189개 리스트에 등장한다. 그의 서명으로 19,000명 이상이 사형에 처해졌다.
1937년 2~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선동했다: "우리는 끝까지 파헤치지 못했다, 일본-독일-트로츠키주의-파괴공작 간첩단의 머리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 자신이 이끄는 철도 인민위원부에서도 "미친 스파이-간첩 집단"을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가노비치는 NKVD의 '제1범주'(즉결 사형) 추가 할당에도 서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8년 4월 26일 이르쿠츠크: 지역 당·NKVD 간부들이 '1범주 4,000명 추가'를 요청하자, 스탈린과 함께 '찬성'으로 결재했다.
말년에 회고를 남기며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소금을 너무 많이 쳤다 — 적이 실제보다 더 많다고 생각했다." 사과도, 책임 인정도 아니었다. 수만 명의 죽음을 조미료 실수에 비유한, 관료적 폭력의 축소판이었다.
전시·전후 행정, 1941~1957
대독일전쟁은 카가노비치가 철도 인민위원으로 있던 때 시작되었다. 1941년 10월 15일 그는 모스크바 지하철을 폐쇄하고 전략적 중요 시설로서 파괴할 방안을 세 시간 안에 마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지하철은 역사상 유일하게 문을 열지 않았지만, 저녁 무렵 파괴 명령은 취소되었다.
전시 수송에서 그의 역할은 양면적이다. 국가방위위원회는 1942년 3월 25일 ‘NKPS에 관하여’ 결의를 채택하여 그가 ‘전시 조건에서 업무를 감당하지 못했다’고 규정하고 인민위원직에서 해임했다. 그러나 한두 해의 짧은 공백을 빼면 그는 실질적으로 1944년까지 철도 인민위원부를 이끌었고, 공적으로 인정된 공적은 철도 수송을 중단 없이 유지하며 산업 기업과 인구를 동부 지역으로 피난시킨 일이었다. 이 무렵 그는 국가방위위원회에 처음부터 참여하지 못하고 1942년 2월에야 보임되었고, 1946년 서열은 공식적으로 아홉 번째였다는 기록도 함께 전한다.
1942년 카가노비치는 북캅카스 전선과 자캅카스 전선의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있었고 대본부 지시에 따라 캅카스 방어 조직에 참여했다. 1942년 10월 4일 투압세 인근 흑해 집단군 지휘소가 폭격을 받아 여러 장군이 현장에서 죽고 그는 파편에 팔을 다쳤다. 1942~1945년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이었고 1944년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다.
전후 그는 경제 행정으로 돌아갔다. 1947년 흐루쇼프를 대신해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제1서기로 갔으나 그해 12월 소환되어 흐루쇼프가 복귀했고, 1948~1952년에는 기업에 생산수단을 배정하는 국가물자기술공급위원회(고스나브)를 이끌었다. 스탈린 사망 후 그는 잠시 영향력을 회복하여 1953년 3월 각료회의 제1부의장 중 한 명이자 간부회 정회원이 되었고, 1955년 5월 24일 노동·임금 문제 국가위원회(고스콤트루드) 초대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56년 6월 6일 그 직에서 해임된 뒤 1956~1957년에는 건축자재산업부 장관이었다. 전후 행정 유산으로는 인구의 모든 부문에 연금을 확대한 새 연금법 작업이 있다. 1955년 11월 25일 간부회는 ‘동지 카가노비치의 제안에 따라’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그의 이름을 빼고 레닌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하면서, 같은 결정에서 그의 공적을 적고 오호트니 랴드 역을 그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195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자신이 이끈 국가위원회들의 운영에서 ‘무활동과 혁명적 합법성의 조야한 위반’을 지적당했고, 공식적으로 반당 그룹이라 불리게 된 무리와 함께 간부회에서 제거되었다. 그는 체포와 처형을 두려워하여 흐루쇼프에게 전화해 관용을 간청했다고 전해지며, 우랄 지역의 작은 칼륨 공장장 자리를 받았다. 1961년 당에서 제명되고 모스크바에서 연금 생활자로 지내다가 1991년 97세로 죽어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1984년 정치국은 몰로토프와 함께 그의 당 복권을 검토했다. 말년에 그는 스탈린에 대한 소비에트 언론의 공격을 비판했고, 숙청에 대해서는 스탈린 개인이 아니라 스탈린 지도부 전체의 잘못이었다고 말하며 당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명명 유산은 문서로 남아 있다. 1935년부터 1955년까지 모스크바 지하철 자체가 그의 이름을 달았고, 오호트니 랴드 역은 1955~1957년에만 그의 이름을 썼다. 최초의 소비에트 트롤리버스는 그의 이니셜을 딴 ‘LK’라는 상표를 달았고, 1937년 크라토보에 문을 연 어린이 철도는 그의 구상이었다. 모스크바주의 카가노비치 시(1935~1957), 타지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카가노비치아바드(1957년 콜코자바드로 개칭)처럼 도시들도 그의 이름을 썼으며, 1957년에 그를 기린 거의 모든 대상에서 이름이 제거되었다. 다만 벨고로드주의 로고바토예 마을 안의 정착지 등 일부 지명은 여전히 그의 이름을 쓰고, 크림의 라자레프카 마을도 그렇다는 설이 있다.
전후 반유대주의 문제는 사료들 사이에 엇갈린다. 한 러시아어 서술은 그가 유대인 박해에 격렬히 항의하고 ‘의사 음모’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스탈린에게 제출했다는 설을 아브두라흐만 아프토르하노프의 저서 등에 실린 주장으로 소개하며, 그가 스탈린 사후 재심 조치와 반유대주의 운동 종식을 적극 지지했다고 덧붙인다. 반대로 브리태니커는 그를 전후 유대인 박해에서 눈에 띄게 비껴간 인물로 보고, 영어 위키백과는 그를 ‘두려움 속에서 몸을 낮추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 지도부 내 가장 저명한 유대인으로 서술한다. 이 상이한 서술들은 각각 귀속시켜야 한다.
1991년 스튜어트 카한의 『크렘린의 늑대』는 그가 저자와 인터뷰하고 스탈린의 죽음에 부분적 책임을 인정했다고 주장했으나, 남아 있던 가족들은 카한의 모든 주장에 반박 성명을 냈다. 스탈린이 카가노비치의 누이와 결혼했다는 이른바 ‘로자 카가노비치’ 설은 기록보관소에 기초한 연구에서 신화로 취급되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도 이를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