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르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

Лазарь Моисеевич Каганович
소련 러시아 1893–1991 ↓ 실각 1957

스탈린의 조직부 사람

1934년 17차 당대회 개표위원장.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단 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 스탈린의 한마디 — '중요한 건 누가 투표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개표하느냐다.'

가난한 유대계 제화공 출신으로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스탈린의 가장 오랜 측근으로 30년간 권력 핵심에 머물렀다. 조직부·서기국에서 임명과 배치를 관리하며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당 기구 곳곳에 심었고, 1930년대 초에는 사실상 2인자로 모스크바 재건과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집단화, 대숙청, 우크라이나 당 통제까지 스탈린 체제의 강경 집행자로 모든 핵심 사업에 참여했으며,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한 뒤 1991년 97세로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의 처음과 끝을 목격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우크라이나와 강제 집산화

카가노비치의 정치적 중요성은 스탈린의 인사 담당자였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일하며, 당의 중앙집권과 농업 생산의 강제적 재편을 현장에서 밀어붙인 지도자였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어 사용과 현지 인재 등용을 장려하는 우크라이나화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카가노비치는 이를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싸우는 노선보다 우선하지 않았다. 그는 당 기구의 통제를 강화하고 알렉산드르 슘스키 같은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했으며, 민족적 자율성의 요구를 중앙의 정치적 통일에 종속시켰다. 이 긴장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정책이 문화적 양보와 정치적 통제를 동시에 포함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1932년 곡물 조달 위기 때 카가노비치는 북캅카스 특별위원회를 이끌었고, 곡물 계획을 달성하지 못한 마을을 ‘블랙보드’에 올려 물자 공급과 거래를 차단하는 조치를 추진했다. 체포와 강제 이주가 뒤따랐으며, 이러한 정책은 농촌의 저항을 행정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 사보타주로 규정해 폭력을 확대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파견된 몰로토프 위원회의 활동에도 관여해, 농민의 생존 위기를 완화하기보다 국가 조달 목표와 당의 권위를 우선했다.

따라서 카가노비치는 기근을 혼자 결정한 인물로 환원할 수 없지만, 1932~1933년의 재난을 낳은 국가 정책을 집행하고 정당화한 핵심 정치가였다. 그의 경력은 산업화와 국가 건설의 성과가 농민에 대한 강압, 민족적 의심, 당내 숙청과 분리될 수 없었던 스탈린 시대의 모순을 압축한다.

모스크바 지하철 — 국가가 만든 지하 궁전

라자리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의 '철도 인민위원'이자 가장 잔혹한 집단화 집행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눈에 보이는 유산은 모스크바 지하철이다.

1931년, 카가노비치는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로서 지하철 건설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스탈린은 지하철이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기념비가 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카가노비치는 그 지시를 문자 그대로 실행했다.

1935년 5월 첫 노선 개통. 대리석 기둥, 청동 샹들리에,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 지하철역들은 궁전이나 대성당처럼 지어졌다. 카가노비치는 공사 현장을 매일 방문했고, 자신의 이름을 역명으로 붙이기까지 했다(1957년 실각 후 '오호트니 랴드'로 변경).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학살에 가담한 수백만의 영혼은 잊혔지만, 지하철은 지금도 매일 수백만 모스크바 시민을 실어 나른다. 사회주의 체제가 남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모순적인 유산 중 하나다.

처형 리스트 — 죽음에 서명한 자

대숙청(1937~1938년)에서 카가노비치는 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와 함께 이른바 '스탈린 처형 리스트'에 서명한 핵심 인물이었다. 이 리스트 체계는 NKVD가 작성한 이름 목록을 정치국원들이 차례로 검토·서명하면, 그 서명 자체가 곧 사형 판결이 되는 방식이었다.

러시아 국립사회정치사 기록보관소(RGASPI)에 보존된 11권의 리스트 중, 카가노비치의 서명은 189개 리스트에 등장한다. 그의 서명으로 19,000명 이상이 사형에 처해졌다.

1937년 2~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선동했다: "우리는 끝까지 파헤치지 못했다, 일본-독일-트로츠키주의-파괴공작 간첩단의 머리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그 자신이 이끄는 철도 인민위원부에서도 "미친 스파이-간첩 집단"을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가노비치는 NKVD의 '제1범주'(즉결 사형) 추가 할당에도 서명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8년 4월 26일 이르쿠츠크: 지역 당·NKVD 간부들이 '1범주 4,000명 추가'를 요청하자, 스탈린과 함께 '찬성'으로 결재했다.

말년에 회고를 남기며 카가노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소금을 너무 많이 쳤다 — 적이 실제보다 더 많다고 생각했다." 사과도, 책임 인정도 아니었다. 수만 명의 죽음을 조미료 실수에 비유한, 관료적 폭력의 축소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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