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

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소련 러시아 1883–1936 ✕ 처형

당의 공인된 신중파: 경고는 그보다 오래 살았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중앙위원회의 무장봉기 결정을 신문 《노바야 지즌》에 공개하며 "지금 봉기는 혁명에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레닌은 '파업파괴자'라며 제명을 요구했다. 열흘 뒤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았고, 카메네프는 초대 소비에트 국가원수가 되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으로 8년간 수도를 이끌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직접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트로이카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으며, 1936년 첫 모스크바 쇼재판에서 지노비예프와 나란히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24년, 레닌의 유언을 봉인한 결정

1924년 5월, 제13차 당대회를 앞두고 정치국은 한 가지 질문 앞에 섰다: 「대회에 보내는 편지」, 즉 레닌의 유언을 대의원들에게 공개할 것인가?

레닌의 미망인 크룹스카야가 봉인된 편지를 중앙위원회에 전달했다. 그 내용은 명백했다: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옮기라는 것. 정치국은 논쟁에 빠졌다. 지노비예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레닌의 우려는 과장이며 스탈린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카메네프는 이 입장에 가세했다.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던 카메네프는 유언을 당대회 전체가 아닌 대의원단 대표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읽어주고, 공개 토론은 생략하자고 결정했다.

카메네프의 계산은 단순했다. 그는 스탈린의 권력이 당분간 필요하다고 보았다. 트로츠키를 막으려면 스탈린이 필요했고, 트로츠키라는 더 큰 적 앞에서 레닌의 유언은 부차적 문제였다. 그 결정으로 스탈린은 자리를 지켰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카메네프 본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36년, 카메네프는 자신이 지켰던 스탈린의 총살 집행 명령서에 서명당했다.

1936년 8월, 첫 번째 모스크바 쇼재판

1936년 8월 19일부터 24일까지, 노동조합회관 10월홀에서 소련 최초의 대규모 쇼재판이 열렸다. 「트로츠키-지노비예프 테러리스트 센터」 사건. 피고인 16명 중 중심에는 그리고리 지노비예프레프 카메네프가 섰다.

재판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은 고문과 협박의 연속이었다. 여름 내내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독방에는 중앙난방이 틀어져 있었다. 천식이 있던 지노비예프에게는 특히 가혹했다. NKVD 수사관들은 카메네프에게 아들이 수사를 받고 있으며 처형될 수 있다는 증거를 들이밀었다. 마침내 스탈린은 정치국을 대표한다는 명목으로 직접 그들을 만나, 자백하면 목숨과 가족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사람은 굴복했다.

법정에서 검찰총장 안드레이 비신스키는 피고인들을 향해 「파시스트 부르주아 계급의 개들」, 「트로츠키즘의 미친 개들」, 「썩어 문드러진 인간들」이라 퍼부었다. 증거는 필요 없었다. 자백만으로 충분했다. 카메네프는 유죄를 인정했지만, 마지막까지도 어느 정도의 품위를 유지하려 애썼다. 8월 24일 전원 사형 선고. 다음 날 새벽, 루뱐카 지하에서 총살되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카메네프가 낙담한 지노비예프에게 건넸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다: 「그만두게, 그리고리, 품위 있게 죽세나.」 그 말이 실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53세의 노볼셰비키가 30년간 섬겼던 당의 지하실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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