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이윤을 심으려 한 총리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에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려 저우언라이와 약 3시간에서 3시간 반 동안 회담하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레닌그라드 봉쇄 시기 국가방위위원회 전권대표로 주민 소개와 라도가호 호저 송유관 부설을 맡아 「생명의 길」 보급선을 세운 기술관료 출신 정치가다. 1964년 10월 15일부터 1980년 10월 23일까지 16년간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 이 직위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고, 1965년 이윤과 판매를 기업 평가 지표로 삼는 경제개혁을 발의했다. 개혁이 시행된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은 소련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기로 꼽히지만, 개혁은 1968년 프라하 사태 이후 축소되었다. 1969년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와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했으며, 1980년 건강 악화로 본인 요청으로 물러난 뒤 그해 12월 18일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9–1980 경제·재정·계획 · 소련
경력 연표
- 1939–40섬유공업인민위원
- 1941–42레닌그라드 소개위원회: 「생명의 길」 보급선 운영
- 1943–46러시아공화국 총리
- 1949「레닌그라드 사건」 숙청에서 살아남다
- 1964–80각료회의 의장(총리)
- 1965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 발의
- 1966–70제8차 5개년 계획: 전후 최고 성장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46.03–1948.09
- 정위원 1948.09–1952.10
- 후보위원 1952.10–1953.03
- 후보위원 1957.06–1960.05
- 정위원 1960.05–1980.10
1980.10 퇴임
관련 역사 사건
1965년 코시긴 개혁 — 실행되지 않은 대안
1965년 9월, 알렉세이 코시긴은 소련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경제 개혁안을 중앙위원회에 제출했다. 기업에 이윤 지표를 도입하고, 생산량 대신 판매량을 평가 기준으로 삼고, 도매가격을 실제 수요에 맞추고, 기업 투자의 일부를 기업 자체 결정에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과 본질적으로 같은 방향이었다. 차이점은? 코시긴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 경제적 합리화만 추구한 '당 내부 개혁'이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의 '안정' 노선과 군산복합체의 반발, 그리고 결정적으로 1968년 체코 침공 이후 정치적 자유화 공포 속에서 개혁은 물을 탔다. 기업 자율권은 축소되었고, 1970년대 초까지 개혁은 사실상 폐기되었다.
코시긴은 1980년까지 총리직을 유지했지만, 그의 개혁은 실현되지 않았다. 소련 경제가 1970년대 이후 침체의 늪에 빠져든 것은, 바로 이 개혁이 좌초된 결과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966년 타슈켄트 선언 — 소련의 평화 중재
1965년 가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끝난 직후, 소련은 남아시아에서 자국의 외교적 입지를 구축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포착했다. 코시긴은 양국을 타슈켄트로 초청하여 1966년 1월 4일부터 10일까지 인도 총리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와 파키스탄 대통령 아유브 칸 사이를 직접 중재했다.
일주일간의 지난한 협상 끝에 1월 10일 타슈켄트 선언이 서명되었다. 양측은 전쟁 전 위치로 군대를 철수하고,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며, 포로를 교환하고, 경제·통상 관계를 복원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냉전 시기 소련이 비공산권 국가 간 분쟁에서 '선의의 중재자'로 나선 첫 대규모 성공 사례였다.
그러나 다음 날 샤스트리 총리가 타슈켄트에서 급서하면서 타슈켄트 선언은 비극의 그림자를 남겼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에서 이 합의는 각자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시긴의 중재는 소련 외교가 냉전의 양 진영을 넘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이는 그가 단지 경제 테크노크라트가 아니라 국제무대에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 정치가였음을 입증한다.
1970년대 코시긴의 후퇴와 논쟁적인 마지막
1970년대 초중반까지 브레즈네프는 사실상의 최고 지도자로 설 만큼 권력 기반을 굳혔고, 이 시기부터 코시긴의 위치는 조금씩 깎여 나갔다. 일리야 젬초프는 1971년 제24차 당대회에서 '브레즈네프가 이끄는 정치국'이라는 표현이 처음 공개된 것을 코시긴의 권력 상실 기점으로 본다. 브레즈네프는 당 기구의 정부 기구 장악을 강화해 총리의 발판을 좁혔다.
1977년 소련 헌법은 국가원수의 각료회의 통제를 강화해 각료회의를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에 예속시켰다. 같은 해 포드고르니를 대신해 브레즈네프가 국가원수가 되면서 코시긴의 일상적 정부 운영 역할은 크게 줄었다. 코시긴이 병가를 낸 사이 브레즈네프는 니콜라이 티호노프를 각료회의 제1부의장에 앉혔고, 보수적 성향의 티호노프는 이 자리를 이용해 코시긴을 대기 역할로 밀어냈다. 1980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는 경제발전계획을 코시긴이 아니라 티호노프가 보고했다. 코시긴은 1980년까지 총리직에 있었지만, 각료회의 결정을 브레즈네프와 사전에 조율해야 할 만큼 권한이 축소된 상태였다.
건강은 1970년대에 무너졌다. 잦은 입원으로 키릴 마주로프가 여러 차례 그를 대신했고, 1976년 첫 심장마비를 겪은 뒤 가까운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활기찬 인물에서 계속할 의욕을 잃은 지친 사람으로 바뀌었다. 러시아어 자료는 1976년 뇌졸중과 1979년 10월, 1980년 8월의 반복된 심근경색을 기록한다. 1976년 8월 1일에는 카약을 타다 의식을 잃고 거의 익사해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두 차례 사직서를 냈으나 모두 반려되었다.
재임 중에도 개혁 시도는 이어졌지만 정치적 후퇴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1973년 개혁은 중앙 부처의 권한을 줄이고 공화국과 지방 정부의 권한을 늘리려 했으나 목표를 채우지 못해 취소되었고, 다만 기업연합을 만드는 성과는 남겼다. 1979년 개혁은 1965년과 달리 부처를 강화해 중앙정부 개입을 늘리려 했으나, 1980년 그의 사임과 티호노프의 보수적 노선 때문에 거의 시행되지 못했다. 브레즈네프는 제10차 5개년 계획(1976-1981)에서 코시긴이 '질의 계획'이라 부르며 추진한 소비재 확대를 거부했고, 그 결과 소비재는 공업생산의 26퍼센트에 그쳤다. 코시긴의 사위에 따르면 그는 이 결정에 격분하며 국방비 증가가 소련의 '완전한 파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 문제에서 사료는 엇갈린다. 한쪽 기록은 코시긴이 모든 군사 개입에 강하게 반대했고 그가 빠진 비공개 회의에서 정치국이 만장일치로 개입을 지지했다고 전한다. 다른 쪽은 바렌니코프의 증언을 따라 1979년 코시긴이 소련군 파병을 지지하지 않은 유일한 정치국원이었고 그때부터 브레즈네프 주류와 완전히 갈라섰다고 한다. '유일한 반대자'라는 표현은 증언에 근거한 주장이므로 단정하지 않고 병기한다. 아프가니스탄 대표단 방문 당시 코시긴은 타라키와 아민이 반대자를 처형하는 것을 비판하고 경제·군사 원조 확대는 약속하면서도 소련의 개입은 거부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사료도 당시 코시긴과 그로미코 등 여러 지도자가 개입에 반대했다고 기록해, 그가 개입에 반대했다는 점은 문서로 확인되지만 유일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1980년 10월 입원 중이던 그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본인이 낸 신청에 따라 21일 정치국원직에서, 23일 각료회의 의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사흘 뒤 정부 차원의 경호와 통신, 편의 제공이 모두 끊겼다. 병원에 있던 그는 11차 5개년 계획(1981-1985)의 완전한 실패를 두려워하면서 정치국이 이 문제를 건설적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보았다고 그리신이 회고했다. 그는 12월 18일 모스크바에서 급성 심장정지로 사망했고, 소련 공식 언론은 사흘 뒤에야 이를 보도했다. 장례는 사흘이 미뤄졌는데, 그가 브레즈네프 생일(12월 19일) 전날이자 스탈린 생일(12월 18일) 당일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보로트니코프는 이틀 사흘 동안 나라가 코시긴의 죽음을 몰랐다고 회고했다. 국장과 화장 뒤 브레즈네프, 유리 안드로포프, 티호노프가 크렘린 벽 묘지에 유골함을 안치했다.
동료들은 그가 '묵묵히' 일했지만 '열의'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한 익명의 정보총국 관계자는 잘못을 알면서도 절제된 성격 탓에 신중함을 택한 '외롭고 다소 비극적인 인물'로 그를 평가했고, 피에르 트뤼도는 그를 '거친 모서리를 뺀 흐루쇼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키신저는 그가 거의 광적으로 일에 헌신했다고 보았고,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정치국에서 가장 총명하고 강인한 인물로 꼽았다. 러시아어 회고록에 따르면 흐루쇼프도 브레즈네프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둘 다 나라의 경제 관리자 자리에 계속 앉혀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