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트 표도로비치 일리초프

Леонид Фёдорович Ильичёв
소련 러시아 1906–1990 ○ 자연사

흐루쇼프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를 모두 편집하고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한 철학자

1952년, 스탈린은 정치국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프라우다 편집장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 더 강한 사람을 임명하고, 이 사람은 좀 더 배우게 하라."

흐루쇼프 시대의 수석 이데올로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을 지내며 반종교 캠페인을 설계하고 라디오 마야크를 창설했다. 이후 24년간 외무차관으로 중국과의 국경협상을 이끌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노동자에서 프라우다 편집장까지: 스탈린 시대 저널리스트의 경로

일리초프의 초기 경력은 소비에트 체제가 생산한 전형적인 '당 저널리스트'의 궤적을 보여준다. 1906년 예카테리노다르(현 크라스노다르)에서 태어나 12세부터 노동자로 일했으며, 1924년 18세에 당에 입당했다. 1930년 북캅카스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1937년에는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를 마쳤다. 이는 당 엘리트 양성의 최정점 코스였다.

그의 언론 경력은 1938년 잡지 《볼셰비크》의 책임비서로 시작되어 약 20년간 중앙 언론에 몸담았다. 1944년부터 1948년까지는 소련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장을 맡아 대조국전쟁 말기와 전후 복구기를 다루었다. 이어 1951년 6월,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당 중앙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임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2년 말, 스탈린은 정치국 회의에서 "프라우다 편집장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고 평가절하하며 그를 경질했다. 드미트리 셰필로프가 후임이 되었다. 이 인용구는 일리초프의 정치적 명함에 평생 따라붙는 일화가 되었다. 당시 스탈린의 판단은 일리초프가 대숙청과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관료적 생존 능력에도 불구하고, 최고 지도자의 눈에는 중량감이 부족한 인물로 비쳤음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 좌절 이후 일리초프의 경력은 오히려 상승했다. 1953년 외무부 출판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58년에는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1961년에는 중앙위 서기 겸 이념위원회 의장으로 승진하여 흐루쇼프 시대 이념 전반을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다. 훗날 정치학자 겐나디 아신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아주 형편없었다"고 평했지만, 생존과 적응의 기술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 교육자: 고등당학교의 철학 강사 (1937–1953)

적색교수양성소를 졸업한 1937년부터 외무부로 옮긴 1953년까지, 일리초프의 주된 직업은 당 간부 교육이었다. 그는 볼셰비키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고등당학교(ВПШ)에서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저작을 강의하며 차세대 당 엘리트를 양성했다. 1940년 1월 강의 「엥겔스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 관하여」와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에 관하여」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당 교육의 표준 교재가 되었다. 1952년에는 『엥겔스의 『반뒤링론』에 관하여』를 출판했으며, 이 책은 스탈린 사후에도 재판되었다.

그의 강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사적 유물론을 당의 실천적 필요와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역사에서 인민 대중과 개인의 역할에 관하여」(1941)라는 강의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발전했고, 이후 흐루쇼프 시기 '개인숭배 비판'의 이론적 배경 중 하나로 원용되었다. 또한 1939년에는 『혁명적 과학의 거장들: 레닌과 스탈린』을 공저하여 당원 교양서로 널리 보급했다. 그의 고등당학교 강단 경험은 이후 프라우다 편집장과 이념서기로서 수천 명의 선전원을 지도하는 실무적 토대가 되었다.

스탈린 말기 선전 캠페인의 집행자: '뿌리 없는 세계주의자'와 '의사 살인자들'

일리초프의 이데올로그 경력에서 가장 어두운 장은 그가 스탈린 말기 두 개의 대규모 선전 캠페인을 집행한 역할이다. 1948~1949년 중앙위 선전선동부 차장을 거쳐 1949년 《프라우다》 제1부편집장이 된 그는, 1949년 1월 28일 자 《프라우다》 사설 「한 반애국적 연극비평가 집단에 대하여」로 정점을 찍은 '뿌리 없는 세계주의자' 척결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사설은 유대계 지식인들을 '인민에 대한 책임감을 상실한 자들', '소비에트 인간에게 깊이 혐오스러운 뿌리 없는 세계주의'의 대표자로 낙인찍었고, 이후 수개월간 연극·문학·과학·영화계 전반에 걸친 숙청으로 이어졌다.

그는 1951년 6월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승진하여 '의사 살인자들' 사건(의사들의 음모)의 선전 국면을 직접 관장했다. 체카 출신의 주요 의사들이 '시오니스트 음모'로 소련 지도자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조작된 혐의가 1953년 1월 13일 공식 발표되기까지, 일리초프가 이끄는 《프라우다》는 반猶 캠페인의 선봉에 서서 '의사-독살자'라는 표현을 일상화했다. 그는 1952년 11월 스탈린에 의해 경질되었지만, 퇴임 직전까지 캠페인의 기조를 설정하는 데 관여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4월 4일, 동일한 《프라우다》 지면에 '의사들의 음모'가 조작임을 인정하는 성명이 실렸을 때는 이미 일리초프가 물러난 뒤였다.

1956년 4월, 폴란드 유대인 신문 《폴크스슈티메》가 스탈린의 이디시 문화 탄압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자, 당시 외무부 출판국장이던 일리초프는 아무런 권한도 없이 이를 '반소비에트적 중상'이라고 비난했다. 피해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다른 민족에게도 동일했다는 논리였다. 신문이 공개 반박을 요구하자 그는 침묵했다. 이 일화는 한때 자신이 집행했던 캠페인의 성격에 대해 그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소비에트 역사학자들은 그를 두고 "의사 살해자들에 대한 박해의 조직자"(흐로노스)라고 평한다.

외무부 출판국장 시절: 스탈린의 그림자에서 흐루쇼프의 이데올로그로

1952년 말 스탈린이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며 프라우다 편집장에서 경질한 후, 일리초프의 경력은 잠시 표류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그는 소련 외무부 출판국장 겸 외무부 간부회의(collegium)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명백한 강등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새로운 권력 구도에서 생존을 모색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했다.

외무부 출판국장으로서 일리초프는 소련 외교의 대외 홍보 체계를 정비했다. 그는 이 직책과 동시에 소련의 대표적 외교 전문지 《메주두나로드나야 지즌》(국제생활)의 편집장을 겸임하며, 흐루쇼프 시대 평화공존 노선의 이론적 토대를 외교 엘리트와 해외 독자에게 전달하는 채널을 구축했다. 이 잡지는 냉전기 소련의 외교적 입장을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으로 발신하는 핵심 매체였다.

1956년에는 폴란드 유대인 신문 《폴크스슈티메》가 스탈린의 이디시 문화 탄압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자, 일리초프는 권한도 없이 이를 "반소비에트적 중상"이라고 비난했다. 피해가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신문이 공개 반박을 요구하자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사건은 그가 공식 직책을 넘어 이념 수호자로서 스스로를 위치 짓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년간의 외무부 생활은 일리초프에게 결정적 전환기가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외교 엘리트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국제문제에 대한 실무 감각을 익혔으며, 흐루쇼프의 신뢰를 얻었다. 1958년 흐루쇼프는 그를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으로 발탁했고, 이로부터 3년 후 그를 이념서기로 끌어올렸다. 한때 스탈린이 "너무 작다"고 폄하했던 인물은 이렇게 소련 이념 체계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4개 시대를 관통한 당 기관 궤적: 후보위원에서 중앙위원, 감사위원, 그리고 다시 후보위원으로

일리초프의 당내 제도적 경로는 소비에트 엘리트 정치의 생존 논리를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다. 1952년 제19차 당 대회에서 그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кандидат в члены ЦК)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말 스탈린이 그를 프라우다 편집장에서 경질하면서 그의 당내 위상은 흔들렸다. 그로부터 4년간, 스탈린 사망, 베리야 숙청, 흐루쇼프의 부상이 교차한 전환기, 그는 후보위원이라는 불안정한 지위에 머물렀다.

1956년 제20차 대회에서 일리초프는 중앙위원 후보직에서 밀려나 중앙감사위원회(Центральная ревизионная комиссия)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감사위원회는 당 재정 감사가 공식 임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주변부였다. 이는 스탈린의 '너무 작다'는 평가 이후 그가 당 엘리트의 바깥 원으로 밀려났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외무부 출판국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관료적 입지를 재건했고, 1958년 흐루쇼프에 의해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으로 발탁되었다.

1961년 제22차 대회는 그의 제도적 정점이었다. 정식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이내 중앙위 서기 겸 이념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어 당 이념 기구의 전권을 쥐었다. 그러나 1964년 흐루쇼프 실각과 함께 1965년 3월 서기직과 이념위원회 의장직을 상실했고, 1966년 제2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직도 잃었다.

그 후 10년간 당의 공식 권력 기관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외무차관으로만 활동했다. 그러다 1976년 제25차 대회에서 다시 중앙감사위원회 위원으로 복귀했고, 1981년 제26차 대회에서는 29년 만에 중앙위 후보위원으로 재진입했다. 이로써 그는 CPSU 중앙위원회(정식), 중앙감사위원회, 중앙위 후보위원이라는 세 가지 당 기관 지위를 모두 순환한 몇 안 되는 인물이 되었다. 1981년부터 1990년 사망까지 후보위원으로 남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4명의 서기장을 거쳤다. 이 반세기에 걸친 당 기관 궤적은 급격한 몰락을 겪으면서도 완전한 숙청은 피하고, 말년에 명예적 복권을 이루는 소비에트 관료적 생존의 전형을 보여준다.

해빙기 문화 이데올로그: 예술 검열과 당적 통제

일리초프가 중앙위 선전선동부장(1958~1961)과 이념서기(1961~1965)로 재임한 시기는 해빙기 문화적 자유화의 정점이자 당의 통제 강화가 충돌한 지점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호자로서 실험적 예술에 단호히 맞섰고, 예술가들은 당이 인민을 대표하므로 전적으로 당 노선에 부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3년 케네디 암살 직후, 이즈베스티야의 멜로르 스투루아가 대통령의 사진을 정치국원 전용 검은 테두리로 게재하자, 일리초프는 스투루아의 당 제명을 시도했다(실패). 빅토르 아스타피예프의 중편을 둘러싸고 잡지 《노비 미르》의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와 날선 공방을 벌였고, 세르게이 미카엘랸의 영화 《도전을 받아들인다》의 검열에 개입했으며 《뜨거운 7월》 제작 과정에도 자문했다. 그는 작가동맹·작곡가동맹·미술가동맹의 통합을 추진했는데, 이는 개혁파의 제도적 발판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한편 1956년 폴란드 유대인 신문 《폴크스슈티메》가 스탈린의 이디시 문화 탄압을 폭로하는 기사를 게재하자, 일리초프는 권한도 없이 이를 '반소비에트적 중상'이라고 규정했다. 피해가 유대인에게만 특정된 것이 아니며 다른 민족에게도 동일했다는 논리였다. 신문이 반박을 요구하자 그는 침묵했다. 그의 문화 정책은 흐루쇼프가 용인한 제한적 자유화의 경계선을 집행하는 역할이었고, 이는 해빙기 내내 계속된 이데올로그들과 창작 지식인 사이의 긴장을 상징한다.

레닌상 수상과 『미국과 정면으로』: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 기록

1960년 4월, 일리초프는 『미국과 정면으로 ― N.S. 흐루쇼프의 미국 여행 이야기』의 공동 저자로서 레닌상을 받았다. 이 책은 1959년 9월 15일부터 27일까지 이루어진 소련 지도자 최초의 미국 방문을 기록한 공식 출판물이었다. 공저자로는 흐루쇼프의 사위이자 《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알렉세이 아주베이, 작가 니콜라이 그리바초프, 그리고 《프라우다》의 유리 주코프가 참여했다. 일리초프는 당시 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장으로서 이 책의 출판을 관장했을 뿐 아니라 직접 집필에도 참여했다.

방문단에는 일리초프도 수행원으로 동행했으며, 그는 흐루쇼프가 할리우드 영화 세트장에서 즉석 연설을 하고, 로즈웰 가 픽포드 농장을 방문해 옥수수 품종을 논하며, 아이젠하워와 캠프 데이비드에서 마주 앉은 순간들을 목격했다. 이 방문은 냉전의 정점에서 양국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연 사건이었고, 책은 소련 독자들에게 미국 사회를 선별적으로 소개하는 선전적 기능과 함께 흐루쇼프 개인의 카리스마를 부각시키는 정치 문학이었다.

레닌상은 소련 최고의 문화·과학 영예였으며, 이 상은 일리초프의 경력에서 가장 공식적인 인정 중 하나였다. 1963년에는 보로프스키 상도 추가로 받으며 언론인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이 책은 1960년 외국어 출판사를 통해 영어로 번역 출간되어 전 세계에 배포되었고, 흐루쇼프 시대 소련의 대외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다.

중소 이념 논쟁의 소련 측 설계자 (1960–1964)

일리초프가 CPSU 중앙위 선전선동부장(1958~1961)과 이념서기·이념위원회 의장(1961~1965)으로 재임한 시기는 중소 이념 분쟁이 사상 최대의 공개적 대립으로 폭발한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1960년 4월, 중국 공산당은 「레닌주의 만세」를 발표해 흐루쇼프의 평화공존 노선을 '수정주의'로 공격했고,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 81개 당 회의에서도 양측은 첨예하게 충돌했다. 일리초프는 이 전쟁터 한복판에서 소련의 이론적 대응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1963년 6월 14일, 중국 공산당은 25개 항의 '제안서'를 소련에 전달했고, CPSU는 이에 맞서 7월 14일 역사적인 「CPSU 중앙위원회의 모든 당 조직, 모든 소련 공산주의자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문건은 중소 논쟁에서 소련 측의 입장을 종합한 기초 텍스트였으며, 일리초프가 이끄는 이념위원회가 그 초안 작성과 선전 캠페인을 주도했다. 같은 해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행한 일리초프의 보고 「당 이념 사업의 당면 과제」는 대중국 이념전의 전술적 청사진이었다.

1963년 11월 4일, 일리초프는 소련 과학원 상임위원회에서 행한 기조 강연에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계급들은 사회 발전의 객관적 법칙을 밝히는 데 관심이 없고 이를 은폐하려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중국의 교조주의를 겨냥한 이론적 일격이었다. 그는 소련 사회과학의 총공세를 조직해 1963~1964년에만 수백 종의 대중국 논쟁 문헌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아이러니는 1965년 그 자신이 실각한 후, 바로 그 중국과의 국경협상을 이끄는 외무차관으로 24년을 보냈다는 점이다. 그는 중소 분쟁의 이론가에서 협상가로, 불과 1년 사이에 역할을 완전히 뒤바꾼 유일한 소련 지도자였다.

전인민국가의 이론가: 흐루쇼프기 이념 혁신의 철학적 정당화

1961년 10월 제22차 대회에서 채택된 제3차 당 강령은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인민국가(общенародное государство)'로 재정의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론의 근본적 수정이었으며, 흐루쇼프 지도부는 이 개념을 통해 계급투쟁이 종식되고 소련 사회가 공산주의 건설 단계에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이념 담당 중앙위 서기이자 철학 박사였던 일리초프는 이 이론적 전환의 핵심 설계자였다.

그의 대표적 이론 작업은 1962년 10월 소련 과학원 총회에서 행한 기조 보고서 「사회 발전 지도의 과학적 기초」였다. 이 보고서에서 일리초프는 사회 발전이 자연사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며, 당의 역할은 이 객관적 법칙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여 '사회 과정의 의식적 지도'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퇴장하는 계급일수록 객관적 법칙을 은폐하려 한다'는 정식화로 계급투쟁 관점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언어를 제시했다. 같은 해 출간된 『정치 지식의 기초』(제4판, 편집장)와 1963년의 『사회과학과 공산주의』도 같은 문제의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이론적 작업은 중소 이념 논쟁의 직접적 표적이 되었다.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1963~1964년 '9개 논평'을 통해 '전인민국가'론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포기'이자 '수정주의'라고 맹비난했고, 일리초프는 이 공격에 대한 소련 측 반박의 주도적 논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전인민국가'는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과 함께 당의 공식 언어에서는 퇴색했으나, 1977년 브레즈네프 헌법에 그 흔적이 남았다. 과학원 산하 '사회주의 발전과 공산주의 이행의 합법칙성' 종합문제 학술위원회 의장으로서 그는 이후에도 이 연구 의제를 지속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과학원 학술원 회원

일리초프는 정치적 이데올로그일 뿐 아니라 소비에트 철학계에서 제도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학자였다. 1937년 적색교수양성소 철학과를 졸업한 후 평생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을 연구했으며, 1962년 6월 소련 과학원 경제·철학·법학부 정회원(아카데미크)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역사에서 인민 대중과 개인의 역할'을 주제로 했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는 『철학과 과학적 진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문제들』(1977), 『유물변증법의 문제들: 변증법의 세계관적·방법론적 기능』(1981), 『사적 유물론: 방법론의 문제들』(1983) 등이 있다. 특히 1983년에는 『철학 백과사전』의 주필을 맡아 소비에트 철학의 표준적 참고서를 편찬했다. 그는 과학원 산하 '사회주의 발전과 공산주의 이행의 합법칙성' 종합문제 학술위원회 의장도 역임했다. 엥겔스의 『반뒤링론』과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 대한 해설서로 철학 교양 교육에도 기여했으며, 1960년 흐루쇼프의 미국 방문기를 공동 집필한 『미국과 정면으로』로 레닌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작업은 당대에도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정치학자 겐나디 아신은 훗날 인터뷰에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아주 형편없었다"고 평했다. 그의 저술은 대체로 당 노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머물렀고 독자적인 이론적 기여는 제한적이었다는 평가가 학계에 남아 있다.

1962년 노보체르카스크 유혈 진압 참여

1962년 6월, 일리초프는 소비에트 역사상 가장 큰 전후 노동자 봉기 진압에 직접 참여했다. 5월 31일 발표된 육류 30%·버터 25% 가격 인상과 임금 삭감이 겹치자, 노보체르카스크 전기기관차 공장(NEVZ) 노동자 수천 명이 6월 1일 파업에 돌입했다. 다음 날, 5천~1만 2천 명의 시위대가 붉은 기와 레닌 초상화를 들고 시내 당 위원회 청사로 행진했다.

크렘린은 프롤 코즐로프, 아나스타스 미코얀, 안드레이 키릴렌코, 드미트리 폴랸스키 등 상임간부회 위원들과 중앙위 서기 알렉산드르 셸레핀, 그리고 레오니트 일리초프로 구성된 고위 대표단을 급파했다. 이들은 전차와 내무군이 에워싼 당 청사(고르콤)에 집결했으나, 시위대가 광장을 가득 메우자 뒷문으로 도주했다. 미코얀은 시위대와 직접 대화하기를 원했지만 보안상 이유로 무산되었다.

곧이어 군 지휘관 올레슈코 장군이 발코니에서 해산 명령을 내렸고, 군인들은 경고 사격 후 약 1~4분간 군중을 향해 실탄을 발사했다. 광장에서만 16명이 사망했고, 인근 경찰서 습격 과정에서도 5명이 추가로 숨졌다. 공식 집계로 23~24명 사망, 87명 중상. 희생자 시신은 야밤에 트럭으로 실려 나가 외딴 공동묘지에 무명으로 매장되었고, 광장은 소방차로 핏자국을 씻어낸 뒤 아스팔트로 덮었다.

이후 114명이 '대중 소요' 및 '도적 행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7명이 사형당했다. 일리초프는 이념 담당 서기로서 진압 작전에 참여했으며, 이 사건은 흐루쇼프 해빙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사건은 글라스노스트가 열린 1980년대 말까지 은폐되었다.

1962년 12월–1963년 3월: 마네주 전시 이후 창조적 지식인과의 대결

1962년 12월 1일, 흐루쇼프가 모스크바 마네주 전시장에서 아방가르드 미술을 보고 격노한 직후, 소비에트 문화계는 해빙기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 대결의 최전선에 선 당 대변인은 다름 아닌 이념 담당 서기 레오니트 일리초프였다.

12월 17일, 일리초프는 창조적 지식인 대표들과의 회의에서 장시간 연설을 했다. 그는 일부 작가·예술가들이 흐루쇼프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 낭독했는데, 그 편지에는 "다양한 예술적 경향의 공존 없이는 예술은 파멸한다"며 마네주 전시를 옹호하고 "스탈린 시대의 방식으로의 회귀"를 막아달라는 호소가 담겨 있었다. 일리초프는 여기에 강력히 반박했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평화공존이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답변이었다. 예술에서 '평화공존'을 요구한 또 다른 편지에 대해서는, 서명자들이 "숙고 끝에 철회했다"고 만족스럽게 전했다.

1963년 3월 7~8일, 크렘린에서 당과 지식인 사이의 결정적 대면이 열렸다. 7일에는 일리초프가 '준비운동' 연설로 포문을 열었고, 8일에는 흐루쇼프가 2시간 30분에 걸친 연설로 문화적 탈스탈린화의 한계를 선포했다. 한 전문가는 이 연설을 "1946년 즈다노프의 선언 이후 소비에트 지도자가 문학과 예술에 대해 행한 가장 광범위한 성명"이라고 평했다.

이 3개월간의 대결은 해빙기 문화 자유화의 종착점을 상징했다. 일리초프는 흐루쇼프가 즉흥적 분노를 쏟아낸 마네주 방문 이후, 그 분노를 체계적인 당 노선으로 번역하고 창조적 지식인 사회에 집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내건 '예술에서 당파성'의 기치는 해빙기 내내 계속된 긴장의 최종적 귀결이었으며, 이 노선은 1964년 10월 흐루쇼프의 실각 때까지 유효했다.

흐루쇼프의 반종교 캠페인 설계

일리초프가 이념위원회 의장으로서 설계한 1964년 반종교 캠페인은 소비에트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무신론 운동이었다. 1963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사상 계몽 사업의 부진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1964년 1월호 《꼼무니스트》에 「종교에 맞서는 공세적 투쟁」을 촉구하는 강령적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이념위원회가 기초한 「주민 무신론 교육 강화 방안」은 1964년 1월 2일 중앙위 결정으로 채택되어 과학적 무신론 연구소 설립, 대학 내 무신론 강좌 개설, 최우수 무신론 영화·연극·회화 경연대회, 청년 무신론자 클럽 조직, 임산부에게 세례와 할례의 신체적 위험을 경고하는 일대일 대화까지 망라했다. 일리초프는 무신론의 성공이 '진심에서 우러난 대화'와 '인내심 있는 설명'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해 8월, 일리초프는 수슬로프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보·음악 라디오 방송 《마야크》의 창설을 밀어붙였다. 서방의 러시아어 방송에 맞서 소련 청취자를 붙잡아 두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두 이니셔티브는 그해 10월 흐루쇼프의 실각과 함께 중단되었다. 이념위원회는 해체되고 일리초프는 외무차관으로 좌천되었으며, 무신론 캠페인도 브레즈네프 지도부 아래 사실상 축소되었다. 1962년 노보체르카스크 노동자 봉기 진압에도 이념 담당 서기로서 관여한 것으로 기록된다.

1963년 6월 전원회의: 이데올로그 권력의 정점

1963년 6월 18일, 일리초프는 CPSU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당 이념 사업의 당면 과제」를 주제로 기조 보고를 했다. 이 전원회의는 흐루쇼프 시대 이념 공세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일리초프는 사상 계몽 사업의 부진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인민 대중의 의식 속에서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장기적이고 복잡한 과정'이라고 규정했고, 종교·민족주의·서구 부르주아 사상의 세 가지 위험을 동시에 겨냥한 포괄적 이념 강화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그의 보고는 이후 80쪽 분량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전국 당 조직의 지침서가 되었다. 이 문서는 과학적 무신론 연구소 설립, 대학 내 무신론 필수 강좌, 예술 검열 강화라는 세 축을 하나의 통일된 교리로 묶었다. 1964년 1월 2일 중앙위 결정으로 채택된 「주민 무신론 교육 강화 방안」은 바로 이 6월 보고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흐루쇼프가 직접 참석한 이 전원회의는 일리초프가 소련의 전체 이념 장치를 단일한 공세 노선으로 통합한 순간으로, 그의 경력에서 가장 높은 제도적 권위를 상징한다. 불과 1년 4개월 후 이념위원회는 해체되고 일리초프는 외무차관으로 좌천되었지만, 1963년 6월 보고는 흐루쇼프 시대 이념 공세의 설계도로 기록에 남았다.

라디오 마야크 창설: 수슬로프를 꺾고 탄생한 소비에트의 소리

1964년 8월 1일 자정, 소련 전역의 라디오에서 「모스크바 교외의 저녁」(Подмосковные вечера) 선율이 새로운 방식으로 울려 퍼졌다. 이날부터 방송을 시작한 《마야크》('등대'라는 뜻으로, 소련 조종사들을 인도하는 무선 등대에서 이름을 땄다)는 소비에트 방송 역사상 최초의 24시간 정보·음악 라디오 방송이었다. 5분 뉴스에 25분 음악을 배치한 '5/25' 포맷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고, BBC·미국의 소리·도이체 벨레 등 서방의 러시아어 방송에 맞서 소련 청취자를 붙잡아 두려는 냉전적 목적을 세련된 청취 경험 속에 감췄다.

이 방송국을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이념위원회 의장 레오니트 일리초프였다. 당시 선전 문제를 총괄하던 미하일 수슬로프는 서방 방송에 맞서기 위해 대중음악을 틀어주는 발상 자체에 반대했다. 수슬로프에게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방어가 아니라 퇴각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리초프는 흐루쇼프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 반대를 돌파했고, 1964년 6월 중앙위 결정을 이끌어내 《마야크》를 탄생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야크》는 창설 불과 3개월 후 일리초프 자신이 흐루쇼프와 함께 실각한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를 거쳐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전국 FM 라디오 방송국 중 하나로 남았다. 24년간 이어진 외무차관직보다 더 오래 지속된 일리초프의 제도적 유산은, 그가 이룩한 그 어떤 이념 캠페인보다 오래 살아남은 이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흐루쇼프와 함께 추락하다: 1964년 10월 이후의 정치적 생존

일리초프의 경력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은 그가 설계한 두 이니셔티브가 막 현실화되던 1964년 가을에 찾아왔다. 8월 1일 라디오 마야크가 개국했고, 반종교 캠페인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14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흐루쇼프를 모든 직위에서 해임했다. 브레즈네프가 제1서기가 되고 코시긴이 수상으로 임명된 새로운 지도부는 흐루쇼프의 측근들을 신속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념위원회 의장이자 흐루쇼프의 수석 이데올로그였던 일리초프는 명백한 표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해임되지 않았다. 1965년 3월까지 약 5개월간 그는 유임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브레즈네프 진영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동안 과도기적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5년 3월 23일, 마침내 일리초프는 중앙위 서기직과 이념위원회 의장직에서 해임되고 소련 외무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흐루쇼프의 심복에 대한 명백한 강등"으로 보도했다. 이념위원회는 해체되었고, 그의 후임으로 표트르 데미체프가 임명되었으며, 반종교 캠페인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나 일리초프는 침묵 속에 사라진 많은 흐루쇼프 측근들과 달리 파멸적 숙청을 피했다. 대신 그는 외무차관이라는 기술관료적 직책을 수용하여 24년이라는 소련 외무성 최장수 차관 기록을 세웠다. 1965년의 강등은 그의 이념가 경력을 끝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장 오래 지속된 제도적 역할의 시작이었다. 그는 1989년 은퇴할 때까지 외무차관으로 남아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고르바초프 4명의 서기장 아래에서 근무했다.

흐루쇼프의 몰락과 함께 한때 전능했던 이 이데올로그가 기술관료로 조용히 전환한 과정은, 소비에트 엘리트 정치의 생존 논리를 보여준다. 공개적 저항도, 충성 맹세도 아닌, 조용한 수용과 전문적 유능함이 곧 정치적 장수였다.

외무차관 시절과 중소 국경협상

1965년 흐루쇼프 실각과 함께 이념서기에서 외무차관으로 좌천된 일리초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에서 24년이라는 소련 외무성 최장수 차관 기록을 세우며 자신의 가장 오래 지속된 정치적 역할을 완성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중소 국경 문제였다. 1969년 다만스키섬(전바오섬) 무력 충돌 이후 소련과 중국은 국경협상을 재개했고, 일리초프는 소련 측 수석대표로 베이징을 수차례 오가며 협상을 이끌었다.

1970년대 후반 협상이 교착되자 그는 1982년 브레즈네프의 지시로 다시 베이징으로 파견되어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과 정치적 사전협의를 시작했다. 첸치천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 협의가 "중소 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이었다고 평가했다. 일리초프는 1983년 우쉐첸, 1985년 첸치천과의 후속 회담을 이끌며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 지원, 몽골 내 소련군 주둔, 중소 국경 소련군 증강이라는 중국 측의 '3대 장애물'을 놓고 협상했다. 진전은 더뎠지만 그의 협상 테이블은 양국 지도부 사이 유일한 공식 대화 통로로 기능했다. 1989년 그가 퇴임한 해,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으로 중소 관계는 마침내 정상화되었다.

그는 또한 1982년 소련·쿠바·앙골라·SWAPO 간 남아프리카 전략을 논의한 첫 4자 회의를 주재하며 아프리카 외교에도 관여했다.

이데올로그의 개인 소장품: '그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본이다'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호자였고 사유 재산과 부르주아적 취향을 비판했던 일리초프는, 사적으로는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의 가장 열정적인 미술 수집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그림 수집을 시작한 것은 전쟁 말기, 다른 당 고위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혼란을 틈타 예술품을 확보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드미트리 셰필로프는 회고록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사튜코프, 크루시코프, 일리초프는 전쟁 중과 그 이후 그림과 귀중품 사재기에 몰두했다. 그들은 자기 아파트를 작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만들고 백만장자가 되었다." 나아가 소련 주중대사를 지낸 파벨 유딘 학술원 회원이 들려준 이야기를 전한다. 일리초프가 자신의 수집품을 보여주며 말했다는 것이다: "파벨 표도로비치, 명심하게. 그림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본이야. 돈은 가치가 떨어질 수 있고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 하지만 그림은 절대 가치가 떨어지지 않아."

셰필로프는 일리초프와 그 동료들이 그림에 진심으로 감동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재정적 계산 때문에 수집했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일리초프 컬렉션의 규모와 질은 단순한 투기 이상을 암시한다. 1985년 12월, 79세의 나이로 일리초프는 자신의 개인 컬렉션에서 아이바좁스키의 해양화 3점(「바다 위의 일몰」, 「안개 낀 아침」, 연필 드로잉 「바다. 범선」)을 포함한 러시아·소비에트 회화 85점을 고향 예카테리노다르(당시 크라스노다르)의 크라스노다르 지방 미술관에 기증했다. 아이바좁스키 외에도 시시킨, 폴레노프 등 19세기 러시아 거장들의 작품과 소비에트 시대 회화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기증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노동자 소년으로 떠난 고향 도시에 학술원 회원이자 전직 중앙위 서기가 베푼 귀환이었다. 또한 평생 당의 재산과 사적 자산, 공적인 금욕과 사적인 풍요를 오가며 살아온 사람의 삶에 마침표를 찍는 행위이기도 했다. 1990년 그가 사망한 후, 소련 외무부가 출판한 부고는 그의 '공산주의 건설에 대한 탁월한 공헌'을 기렸다. 하지만 그의 컬렉션에서 아이바좁스키의 「바다 위의 일몰」이 현재도 크라스노다르 미술관 상설 전시실에 걸려 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은 채였다.

국가 훈장과 마지막 영예: 스탈린이 '너무 작다'고 한 인물의 12개 훈장

일리초프의 생애를 관통하는 아이러니 중 하나는, 1952년 스탈린이 '프라우다 편집장 일리초프는 약하다. 그 일에는 너무 작다'고 평가절하했던 바로 그 인물이 이후 소비에트 최고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관료 중 한 명으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레닌 훈장 3회(1962, 1981, 1986), 10월혁명 훈장(1971), 1급 조국전쟁 훈장(1945), 노동적기훈장 5회(1945, 1949, 1961, 1966, 1976), 명예휘장(1956), 노동용맹 메달(1959) 등 총 12개의 주요 국가 훈장을 받았다. 여기에 레닌상(1960)과 보로프스키 언론인상(1963)이 더해진다.

이 훈장 목록은 그가 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4개 시대를 관통하며 체제의 핵심 기관들(이념, 외교, 언론)에서 꾸준히 중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레닌 훈장은 소련 최고 훈장으로서, 1962년에는 이념서기로서의 공로로, 1981년과 1986년에는 외무차관으로서의 장기 복무를 인정받아 수여되었다. 1945년 7월과 11월에 연속 수여된 두 개의 노동적기훈장은 전쟁기 언론 활동에 대한 포상이었다.

1985년 12월, 79세의 일리초프는 평생 수집한 회화 컬렉션을 고향 크라스노다르의 코발렌코 미술관에 기증했다. 1989년 외무차관에서 물러난 후에도 외무성 고문으로 남아 일했으며, 1990년 8월 18일 84세로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 쿤체보 묘지에 안장되었다. 스탈린에게 '너무 작다'는 판정을 받은 지 38년 만의 조용한 죽음이었지만, 그의 관복에는 소비에트 국가가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훈장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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