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 대기근을 수습하고 대숙청을 집행한 제1서기
1937년 10월 3일 『프라우다』의 질책을 “70퍼센트는 거짓말”이라 반박한 지 열하루 만에, 카자흐스탄의 ‘반소비에트 분자’ 3,500명에 대한 추가 총살 할당량을 청하는 전보에 서명했다.
슈샤군의 아르메니아인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들어갔다. 1926~192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를 지배하다 연고주의 비판 속에 물러났고, 1933년 골로쇼킨의 뒤를 이어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가 되었다. 연방 원조를 끌어와 기근을 수습했지만 피난민에게 가혹한 처벌과 블랙리스트를 썼고, 1937년에는 추가 총살 할당량을 요청하며 대숙청을 집행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총살되었고 1958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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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38
정치·당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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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38
소련 국가기관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대표
정치·당 지도
경력 연표
- 1917RSDRP(볼셰비키) 입당
- 1920아제르바이잔 노동조합 평의회 의장
- 1926.01.21–1929.08.05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
- 1929–1933페름 관구위원회 서기, 우랄 주위원회 제2서기
- 1933.01.21–1938.05.16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 1938.05.23–1939.02.26체포, 군사참의회 판결로 총살
바쿠의 지배자, 아제르바이잔 제1서기
미르조얀은 1897년 11월 14일 옐리자베트폴현 슈샤군 아샨 마을의 아르메니아인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7년 RSDRP(볼셰비키)에 들어갔고, 1919년부터 당 사업을 했으며,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노동조합 평의회 의장과 아제르바이잔 노농감독부 참사회 위원을 지냈다. 바쿠 위원회 서기 시절에는 세르게이 키로프와 함께 상부의 승인 없이 무하람월 아슈라 날 시아파 신도들의 자기 채찍질 행렬을 힘으로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1925년 1월 아제르바이잔 당 기관지 『코무니스트』가 바쿠에서 튀르크인(아제르바이잔인)이 언어 차별을 받는다고 고발하며, 러시아인 참석자의 발언을 튀르크어로 통역하는 데 반대한 비나가디 마을 콤소몰 세포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바쿠 위원회 서기 미르조얀은 라자르 카가노비치에게 직접 조사 결과를 보고하면서 신문의 비판은 지어낸 것이라고 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그는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였다.
당시 바쿠의 노동자, 대부분 아제르바이잔인은 굶주리고 옷과 의료품도 모자랐다. 바쿠 경제의 기둥인 ‘아즈네프트’는 중앙에 직속되어 석유 노동자를 희생시켜 세계 시장에 석유를 덤핑으로 내다 팔면서 세금도 내지 않았고, 지방 당 조직은 그 운영에 손댈 권한이 없었다. 미르조얀은 아즈네프트 수익의 일부를 지방 예산에 넣어 달라고 거듭 중앙위원회에 요구했다. 1927년 튀르크인 노동자와 그들보다 열 배나 많은 급여를 받던 러시아인·아르메니아인 기술자 사이에 갈등이 일자 그는 숙련 일자리를 튀르크인이 우선 차지할 권리, 곧 토착화를 지지했다. 그러나 모든 요직을 튀르크인이 맡아야 한다는 급진적 토착화에는 반대했고, 러시아인·아르메니아인 기술자에게 튀르크어로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보았다. 1927년 3월 그는 중앙위원들에게 “러시아에서도 외국인 기술자에게 러시아어로 말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아제르바이잔 지도층에서는 유력 가문이 친척을 국가기관에 앉히는 연고주의가 흔했다. 역사가 외르크 바베로프스키는 미르조얀도 친척들을 지방 행정기관의 수입 좋은 자리에 앉혔지만, 공산당원들이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면 다른 길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1929년 7월 1일 정치국은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지도부를 바꾸기로 했다. 스탈린과 측근들은 당 조직은 ‘건강’하나 정치 지도가 ‘불만족스럽다’고 보았고, 그 책임을 바쿠 위원회를 통해 공화국의 다민족 중심지를 사실상 지배하던 미르조얀에게 가장 먼저 물었다. 미르조얀은 카라예프·카시모프 등과 함께 물러났고, 1929~1933년 페름 관구위원회 서기와 우랄 주위원회 제2서기로 옮겼다.
카자흐스탄 제1서기, 기근의 수습과 처벌
1933년 1월 21일 미르조얀은 필리프 골로쇼킨의 뒤를 이어 카자흐 지역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31~1933년 카자흐스탄에서는 100만 명(로버트 콘퀘스트 추정)에서 200만 명(아빌호진·카진바예프·타티모프 추정, 1989)이 굶어 죽었고, 토착 주민의 48퍼센트가 죽거나 공화국을 떠났다. 그는 카가노비치에게 이렇게 썼다. “모스크바를 떠날 때 카자흐스탄의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알았지만, 여기서 본 것은 내 모든 예상을 넘어섰다.” 그는 길에서는 물론 도시에서도 민경이 거의 날마다 굶어 죽은 이들의 시신을 거둔다고 보고했다.
1933년 그가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올린 보고서는 연방 당국이 카자흐 자치공화국을 돕기 시작하는 사실상의 출발점이 되었고, 중국에서 가축을 사들이기도 했다. 1933년에는 수확이 괜찮았고 가축의 대량 도살이 멈추었으며, 미르조얀의 지시로 3년 동안 콜호스원에게 가축 111만 7천 마리가 분배되었다. 한편 역사가 세라 캐머런은 그가 부임 직후 도망치거나 곡물을 훔치는 자를 소비에트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엄중한 조치’를 예고했다고 지적한다. 이 정의는 굶주린 피난민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었고, 그는 총살 같은 가혹한 처벌을 밀어붙였다. 더 많은 식량을 청하는 ‘눈물 어린 전보’를 보낸 간부들을 해임하고 그 지역에 원조를 끊었으며, 우크라이나에서 쓰던 수법을 본떠 몇몇 지역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굶주린 카자흐인들을 먹을 것이 없는 땅에 가두었다. 캐머런은 기근이 끝난 것도 1934년의 좋은 날씨와 큰 수확 덕이 컸다고 본다.
그의 재임 중에는 울바 수력발전소 건설이 시작되었고, 리데르 콤비나트와 침켄트 납 공장 건설, 카라간다 탄전 개발이 이어졌으며, 1935년 말 길이 약 800킬로미터의 구리예프–오르스크 송유관이 완공되었다. 1930년대 중반 공업 부문에서 토착 주민의 비중은 46.5퍼센트였다. 카자흐스탄 작가 대회가 처음 열렸고, 카자흐 음악극장과 국립 필하모니, 과학 아카데미 카자흐스탄 지부가 세워졌으며, 시인 아바이가 ‘복권’되었다. 1936년 카자흐 자치공화국은 연방 구성 공화국이 되었고, 1937년 그의 지도로 만든 카자흐스탄 헌법이 채택되었다. 그는 1935년 12월 20일 레닌 훈장을 받았고, 1927~1934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1934~1938년 중앙위원이었다. 아내 율리야 테보샨은 이반 테보샨의 누이로, 카자흐스탄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대숙청의 집행자에서 희생자로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스탈린과 말렌코프는 몇몇 지방 지도자와 함께 미르조얀을 지방의 ‘개인숭배’를 부풀리고 연고주의에 빠졌다며 비판했다. 그의 발의로 공화국 최고봉 한텡그리는 ‘미르조얀봉’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36~1938년 타라즈시는 ‘미르조얀’이라 불렸다. 체카 출신 미하일 시레이데르는 카자흐스탄의 국경일 건물에 스탈린의 공식 초상보다 몇 배나 큰 미르조얀의 초상이 걸렸다고 회고했다. 바베로프스키는 이 비판을, 미르조얀이 자기 권력을 중앙에 바치지 않고 넓혀 가던 데 대한 경고로 읽는다.
그는 대숙청을 앞장서 집행하기도 했다. 1937년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차 대회 보고에서 그는 “우리의 모든 당 선전 사업은 테러범·파괴분자·간첩으로 이루어진 파시스트 도당으로 변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우파 반레닌 집단과의 투쟁으로 가득 찼다”고 말했다. 1937년 7월 27일에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카자흐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우자크바이 쿨룸베토프를 음모의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체포 허가를 구했으며, 스탈린은 “이의 없음”이라고 적었다. 쿨룸베토프는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9월 22일 『프라우다』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끌려다니며」라는 기사에서 카자흐스탄 지도부가 공화국의 유명 인사들을 체포하지 않는다고 질책하자, 그는 기사가 “70퍼센트는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10월 3일에는 ‘반소비에트 분자’ 3,500명에 대한 추가 총살 할당량을 요청하는 암호 전보에 서명했고, 11월 19일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의 ‘반소비에트 분자에 관한’ 결정에, 12월 1일 1,600명의 탄압 한도를 늘려 달라는 전보에 잇달아 서명했다.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명령 제00447호로 만든 특별 3인위원회의 일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중앙의 행동을 바꿀 수 없음을 알면서도 몇몇 지방 지도자에 대한 근거 없는 고발에는 맞서려 했고, 간부를 없애기보다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리 포메란츠에 따르면 그는 1937년 자신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비판하던 수렌 아가미로프와 올가 샤투놉스카야에게 체포가 임박했음을 귀띔했고, 카자흐 언론인 비겔디 가브둘린은 그가 작가 무흐타르 아우에조프에게도 체포를 경고하며 카자흐스탄을 떠나라고 했다고 전한다. 1938년 겨울에는 남부에 정착한 강제 이주 조선인들을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북부로 옮기라는 지시에 반대하는 전보를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보냈고, 내무인민위원부의 작업 방식에도 의문을 표했다.
1938년 5월 15일 그는 모스크바로 오라는 스탈린의 전보를 받았고, 이튿날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5월 23일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체포되어 레포르토보 감옥에 갇혔고, 1939년 2월 26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참의회의 판결로 총살되었다. 유해는 모스크바 돈스코이 묘지의 ‘인수자 없는 유골 무덤’에 묻혔다. 1958년 복권되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1997년 악토베에서는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인 공동체의 발의로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거리 하나에 그의 이름을 붙이고 기념비를 세웠다. 2001년 카자흐스탄 대통령 기록관이 펴낸 자료집의 엮은이들은 그가 농업의 위기 탈출과 공업·문화 발전, 민족 간부 양성을 도왔고 처음에는 탄압의 규모를 억누르려 했으나, 자신도 희생될 수 있음을 깨달은 뒤 적극 가담했다고 평했다.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기록관의 문서가 공개된 뒤 2014년 6월 26일 카자흐스탄 공화국 지명위원회는 아스타나의 미르조얀 거리를 카니시 사트파예프 거리로 바꾸면서 “역사가들은 미르조얀이 카자흐 지식인의 절멸에 기여했음을 증명했다”고 적었다. 이어 타라즈(2015)·알마티(2016)·악토베(2018)·코크셰타우(2018)·우랄스크(2022)의 미르조얀 거리도 이름이 바뀌었고, 악토베의 기념비는 2018년 철거되었다. 아르메니아 대사는 이를 민족적 출신 때문에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일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