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누군가 내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지도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은하계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으로, 1980년 파업을 이끌어 독립 자주 노조 '연대'를 결성하고 공산 정부와의 그단스크 협정을 이끌어냈다. 계엄령 아래 투옥되었고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원탁회의의 비공식 야권 대표로서 폴란드의 평화적 체제 전환을 협상했다. 1990년 폴란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소련군 철수를 주도했으나, 1995년 재선에 실패하며 정치에서 물러났다. 한 노동운동가의 성공은 소비에트 블록 전체에 균열을 낸 신호였다.
레닌 조선소에서, 레닌의 이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어 버렸다.
1980년 8월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의 실질적 설계자로,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21개 요구를 분류·우선순위화했으며 공장간파업위원회(MKS)를 공동 창립한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역사가이다. 1981년 12월 계엄 선포 후 4년 넘게 지하에 숨어 불법화된 연대노조의 지하 조직망을 재건했고, 여성으로 변장해 딸의 세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히 은신했다. 1986년 체포되었다가 사면으로 풀려났고, 공산정권 붕괴 후 국회의원·상원의장·내무차관을 거쳐 2010년에는 몇 시간 동안 폴란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낙원이 아니라 헌법을 위한 혁명. 반(反)유토피아적 혁명. 유토피아는 단두대와 굴라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1968년 위기로 투옥되며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노동자방어위원회(KOR)와 연대노조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1989년 원탁회의에 참여했으며,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으로서 '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을 제안해 평화적 권력 이양을 설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남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
『기나긴 작별』 첫머리에서 "이 전쟁의 진정한 국제적 역사는… 지금으로서는 아주 먼 곳에 있다"며 스스로 한계를 밝혔다.
소련·러시아 외교정책과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역사가. 2011년 『기나긴 작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출간하여, 소련의 철수 결정이 전장보다 국내 정치에 의해 형성된 '기나긴 작별'이었음을 기록 자료와 구술로 입증했다. 조지워싱턴대에서 학사,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를 받은 뒤 암스테르담대에서 10년간 강의했고, 현재 템플대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발전의 실험실』(2018)로 데이비스상과 휴잇상을 수상했다.
「나는 이제 이 법정 앞에서, 이 나라 국민 앞에서, 캘리포니아 주가 나에 대해 제기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 1971년 1월 5일 법정 진술
미국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감옥 폐지 운동의 핵심 이론가. 1968년 CPUSA 입당, 1980·1984년 부통령 후보 출마. 1970년 체포·16개월 수감 후 무죄 평결로 국제 연대 운동 촉발. 『여성, 인종, 계급』(1981)으로 인종-성별-계급 교차 분석을 정초했고 감옥-산업복합체 개념을 발전시켰다. 1997년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을 공동창립해 폐지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으며, UC 샌타크루즈 석좌교수로 퇴임했다. 반세기 넘게 급진 사상과 실천의 교차점에 서 있는 살아있는 혁명가.
상세 이력 보기
1944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출생 — '다이너마이트 힐' 흑인 중산층 이웃에서 성장
1965브랜다이스대학 우등 졸업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
1968CPUSA 입당, 블랙팬서당 LA 지부에서 정치교육 담당
1969UCLA 철학과 조교수 임용 — 공산당원 자격으로 즉시 해고, 법원 판결로 복직
1970–1972마린 카운티 법정 무장 사건 연루로 체포, FBI 10대 지명수배 — 16개월 수감 후 전면 무죄 평결
1979소련 레닌 평화상 수상
1980, 1984CPUSA 부통령 후보 — 거스 홀의 러닝메이트
1981『여성, 인종, 계급』 출간 — 교차성 분석의 고전
1991CPUSA 탈당,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통신위원회(CCDS) 공동창립
1991–2008UC 샌타크루즈 역사의식·페미니스트 연구 교수 — 2008년 석좌교수 퇴임
1997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 공동창립 —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의 제도적 기반
얀 룰레프스키는 폴란드의 노동조합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가로, 비드고시치 지역 자유노조를 이끌었다. 그는 1981년 농민들의 독자적 노동조합 등록 요구를 연대의 의제로 받아들였고, 3월 19일 지방 국민평의회 회의장에서 민병대에게 폭행당했다. 이 사건은 자유노조가 전국 경고파업을 조직하고 계엄 선포 전의 긴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계엄기에 internment를 겪었으며, 민주화 뒤에는 국회의원과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규정 초안을 낭독한 뒤 "자, 이걸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게"라며 샤보프스키에게 쪽지를 건넸고, 몇 시간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로, 1989년 10월 호네커 축출 후 SED 총서기가 되었다. 취임 3주 만에 여행 규정 초안을 승인하고 11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낭독한 뒤 이를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개혁을 약속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12월 초 전권을 내놓았다. 통일 후 국경 사망 사건에 대한 형사책임으로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80년 8월 15일, 그녀가 발티츠카 오페라 인근에서 전차를 세우자 그단스크 대중교통 파업이 시작됐다.
헨리카 크지보노스는 그단스크의 전차 운전사이자 노동조합 활동가로, 조선소 안팎의 노동자 행동을 연결한 인물이다. 1980년 8월 15일 전차를 세워 대중교통 파업을 촉발했고, 그 소식은 다른 사업장으로 퍼져 도시 전체의 연대 행동을 넓혔다. 그녀는 사업장 간 파업위원회에서 대중교통 노동자를 대표하고 8월 협정에 서명했으며, 이후 계엄 아래에서는 수감자 지원과 지하 출판물 배포에 참여했다. 훗날 가정위탁시설을 운영하고 국회의원이 된 경력은 거리의 노동자 행동과 돌봄·제도 정치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