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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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부에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시절 파벨 미프의 후원을 받아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를 지냈다. 스탈린 노선에 충실한 교조주의자로서 마오쩌둥의 주요 정치적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왕밍의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제시했으나,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표적으로 숙청된 후 1956년 소련으로 망명하여 모스크바에서 여생을 보냈다.
“나는 죽어서도 조선의 독립과 내가 평생 믿어온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소.” — 옌안에서 님 웨일즈에게 남긴 말
평북 용천 출신. 1919년 3·1운동 참가 후 일본·중국으로 건너가 192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서 수학하고 1927년 광저우 봉기에 홍군 측으로 참전했으며,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했다. 1937년 옌안에서 미국 언론인 님 웨일즈와 22차례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아리랑》(1941)은 조선 독립운동사의 생생한 증언으로 남았다. 1938년 캉성의 보안기관에 의해 '트로츠키스트·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고, 1983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다.
본명 아타나시오스 클라라스인 아리스 벨루히오티스는 그리스 공산당 활동가로서 점령기 그리스의 민족해방전선 EAM과 그 군사조직 ELAS를 연결한 핵심 조직가였다. 그는 1942년 루멜리 산악지대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꾸려 ELAS의 초기 기반을 세웠고, 규율과 대중정치를 결합해 저항을 전국적 힘으로 키웠다. 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 같은 연합작전은 점령에 맞선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EAM-ELAS의 우세는 다른 저항세력 및 영국과의 충돌도 심화시켰다. 바르키자 협정 뒤 무장해제를 거부한 그는 당 지도부와 결별하고 1945년 고립된 채 죽었으며, 이후 그리스 공산주의 운동에서 복권되었다.
'이 훈장은 후방의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합니다': 1953년 7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훈장을 받으며 펑더화이가 한 말
산시성 유격 근거지에서 출발해 만주(둥베이)의 당·정·군을 총괄한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로, 1949년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 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둥베이 군구 사령원으로서 중국인민지원군의 후방 기지와 보급망 전반을 책임졌으며, 펑더화이조차 '이 훈장은 곰보딱지 가오강에게 가야 한다'고 인정했을 정도로 참전의 물질적 토대를 조직했다. 1952년 국가계획위원회 주석으로 발탁되었으나, 류샤오치를 대체하려 한 권력 투쟁이 '가오-라오 반당 연맹'으로 규정되며 실각, 1954년 가택연금 중 수면제로 자살했다.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새장은 계획이고, 그 안에서 새[경제]는 마음껏 날 수 있다.' — 1982년, 시장과 계획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핵심 구상을 정식화하며
중국 공산당 제1·2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 상무인서관 식자공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대장정과 옌안 정풍운동을 거치며 당 조직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1949년 이후 중앙재경위원회 주임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물가 안정과 통일 재정을 확립했으며, 대약진 붕괴 이후 저우언라이·덩샤오핑과 함께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는 '새장 경제' 개념(시장은 계획이라는 새장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야 한다)을 정식화하며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제2의 실력자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는 보수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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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상하이 상무인서관 노동쟁의 지도, 5·30운동 참여 후 중국 공산당 입당
1931–1934중앙위원·정치국원, 대장정 참가 — 쭌이 회의 참석
1937–1944중앙조직부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핵심 역할
1949–1954중앙재경위원회 주임 겸 정무원 부총리, 제1차 5개년 계획 입안
1956–1962중공 중앙위원회 부주석; 대약진 이후 경제 재건 주도
1978–1987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 개혁개방 초기 설계와 보수적 견제
민병대 지휘관들을 평가한 한 보고서는 '도면 하나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자는 모데스토뿐'이라고 적었다.
후안 모데스토는 스페인 공산당의 군사 조직가에서 출발해 공화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제5연대와 제5군단을 이끌며 민병대를 정규 군대로 통합하는 전쟁의 변화를 구현했다. 1938년 에브로군 사령관으로서 공화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지휘했지만, 장기 소모전은 병력과 물자의 열세를 뒤집지 못했다. 패전 뒤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기록했다.
1970년대 말 팜반동은 한 방문객에게 말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1926년 광저우에서 호치민의 혁명 훈련 과정을 수료한 후, 팜반동은 베트남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평생을 보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말기 제네바 회담(1954) 북베트남 대표단장으로서 협정에 서명했고, 베트남 전쟁 기간 내내 북베트남의 대외적 얼굴로서 외교와 언론 대응을 주도했다. 1955년부터 1987년까지 32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전쟁 수행, 통일, 전후 사회주의 건설을 진두지휘했으나, 전시 동원형 경제 체제를 평화기에도 고수하여 경제난을 심화시켰다. 호치민이 '또 하나의 나'라고 부를 만큼 신임한 혁명가로, 보응우옌잡·레주언과 함께 베트남 현대사의 전 과정을 형성한 핵심 지도자였다.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 1965년 버클리 반전 티치인에서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냉전과 베트남전을 고발하며
폴란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하시드 경전의 신동이었다가 10대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1927년 폴란드 공산당 입당, '사회파시즘' 노선에 맞서 최초의 반스탈린 그룹을 조직해 1932년 제명되었다. 1939년 런던 망명 후 『스탈린: 정치적 전기』(1949)로 세계적 권위를 얻었고, 하버드대 트로츠키 아카이브로 3부작 『무장한 예언자』·『비무장한 예언자』·『추방된 예언자』를 완성해 정치 전기의 걸작을 남겼다. 1960년대 신좌파의 지적 스승이 되었고 1967년 로마에서 급서했다.
대중이 자신을 '마오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여긴다는 말에 린뱌오는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아무 재능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마오 주석에게서 배운 것이다.'
린뱌오는 중국 공산당의 가장 뛰어난 군사지휘관 중 한 명으로, 만주에서 랴오선·핑진 전역을 지휘해 국민당 주력을 섬멸하고 인민해방군을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1955년 10대 원수 중 3위로 서열되었으며,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주도하고 문화대혁명을 적극 추진했다. 1966년 당의 유일한 부주석으로 마오의 공식 후계자로 지정되어 최고 권력에 근접했으나, 1970년대 초 마오와의 갈등 속에 실각했다. 1971년 9월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했다.
“우리 당은 혁명의 첫날부터 베트남 인민의 전체 투쟁을 조직하고 통제한 유일한 지도자다.” — 1976년 통일 승리 연설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이론가.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프랑스 식민 감옥을 두 번 거친 후 호치민의 신임을 얻어 남부 조직을 책임졌다. 1956년 〈남으로 가는 길〉을 집필하여 남베트남 무장해방노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으며,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제1서기에 선출되어 호치민 사후(1969)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75년 베트남 통일을 완수하고 1978년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켰으며, 친소 노선 아래 중월전쟁(1979)을 겪으면서도 1986년 사망할 때까지 권좌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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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930혁명청년동맹 가입,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
1931–1945두 차례 투옥 — 8월 혁명으로 석방, 호치민의 신임 획득
1951–1954남부 중앙사무국장 — 항불전쟁 남부 전선 지휘
1956〈남으로 가는 길〉 집필 — 남부 무장투쟁의 이론적 토대 마련
1960–1969베트남노동당 제1서기 — 대미 전쟁의 실질적 최고지휘관
1969–1986당 최고지도자 — 통일(1975), 캄보디아 침공(1978), 중월전쟁(1979)
그의 혁명 가명 '쯔엉찐'은 '장정(長征)'을 뜻하며,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바치는 의도적 경의였다 — 이 이름 하나로 그가 당의 친중 이론가임이 처음부터 분명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수석 이론가. 1928년 혁명청년동맹에 가입한 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40년 서기장에 선출되어 8월 혁명과 항불전쟁 시기 당을 이끌었다. 1953–1956년 토지개혁을 주도하여 대규모 과잉 숙청을 초래했고 그 책임으로 서기장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국회 상임위원장(1960–1981)과 국가주석(1981–1987)을 지내며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1986년 레주언 사후 다시 서기장에 올라 도이머이 개혁 노선의 전환을 주도한 것은 그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결정적인 유산이다.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허가이는 돌연 연단에 올라 이미 사과한 간부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고 질타했고, 이 발언은 당내 규율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비에트 고려인 혁명가로,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파견을 받아 평양에 도착한 후 조선로동당 창립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했다.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으로서 소련식 간부당 노선을 추진했으며, 한국전쟁 중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검증·제명하는 대대적 당 정비를 주도했다. 대중당을 구상한 김일성과 당 조직 노선을 둘러싸고 충돌해 1951년 실각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소련파'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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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1937–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