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3월 5일 밤, 라디오 마이크 앞에 선 카사도는 네그린 정부가 공산당 독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방평의회의 수립을 선포했고, 마드리드에서는 곧바로 시가전이 시작됐다.
스페인 공화국군의 기병 장교로, 내전 발발 후 공화국 진영에 남아 인민군의 작전·훈련을 맡으며 중부군 사령관까지 올랐다. 전쟁이 이미 졌다고 확신한 그는 1939년 3월 5일 마드리드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네그린 정부를 전복하고 미아하 장군을 내세운 국방평의회를 세웠으며, 공산당의 정권 장악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프랑코와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카사도는 영국 군함으로 탈출해 영국과 베네수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6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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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세고비아주 나바데라아순시온에서 출생
1907–1911바야돌리드 기병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1920–1935기병대 장교로 근무, 참모교육 이수, 모로코 참전, 대통령 경호대장 역임
1936–1937인민군 작전과장·참모학교장·혼성여단 편성 담당, 기병 감찰관
1938.05중부군 사령관 취임, 대령 진급
1939.03.05–12네그린 정부에 대한 쿠데타 주도, 국방평의회에서 국방 담당
1939–1961영국과 베네수엘라에서 망명 생활, BBC 해설자, 네슬레 직원으로 근무
1961–1968스페인 귀국,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1968년 마드리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라이프치히 가구공 출신으로, 1912년 사민당에서 시작해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활동했고, 1945년 소련과 함께 귀국해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 창당을 주도했다. 1950년부터 당 제1서기로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결단했고, 1963년 신경제체계로 동구권 최고 생활수준을 실현했다. 1971년 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실각했다.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비센테 로호는 스페인 공화국에 충성한 직업군인으로, 군사 전문성과 가톨릭 신앙을 공화국의 방어에 결합한 인물이다. 그는 마드리드 방어를 조직하고 자라마, 과달라하라, 브루네테, 에브로 전투의 작전을 계획하며 인민군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1939년 프랑스에서 후퇴한 뒤 네그린의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난민 병사들을 돌보는 길을 택했으며, 이후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57년 귀국했을 때 프랑코 정권은 그를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했지만 형을 집행하지 않고 곧 사면했다.
“조국의 배신자가 침략자들의 손에 내 유해를 넘기지 않게 하라.” — 산디노 선언(1927)
니카라과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 1927년부터 1933년까지 미군 점령에 맞서 '국가주권 수호군(EDSN)'을 이끌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반제국주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1934년 소모사가 이끄는 국가경비대에 암살되었고, 그의 유산은 1961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으로 이어져 1979년 소모사 독재를 전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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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미군 개입과 셀레돈 장군 전사 목격 — 반제의식 형성
1921–1926멕시코 망명 — 스탠더드오일 정유공장 노동, 멕시코 혁명 사상 접촉
1926–1927니카라과 귀국 — 금광 노동자 중심 의용군 조직, 입헌전쟁 참전
1927.7에스피노네그로 협정 거부 — 산 알비노 선언으로 대미 게릴라전 개시
1927–1933국가주권 수호군(EDSN) 총사령관 — 미 해병대 상대 6년 게릴라전 지휘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 깊은 사회적 내용을 지닌 민주적 의회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 PCE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보고, 발렌시아, 1937년 3월 5일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으로서 인민전선 전략을 주도하며 당을 소수 분파에서 공화국 진영의 핵심 대중정당으로 키웠다. 세비야의 빵집 노동자 출신으로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에서 활동하다 1927년 PCE에 입당, 1932년 서기장에 올랐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을 관철했으며, 내전 중에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을 내걸고 군사적 승리에 당의 전 역량을 집중했다. 말기 위암으로 소련에서 투병하다 1942년 트빌리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 공산주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는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 마슬로프에게 보낸 편지가 소련 검열에 적발되며 공개 낭독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의 결정적 단절이 되었다 (1926년 2월, 코민테른 특별회의).
독일공산당(KPD) 공동의장(1924–1925)으로 유럽 주요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빈 철학 교수의 딸로 태어나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고, 베를린에서 마슬로프와 함께 KPD 극좌파를 이끌며 1923년 봉기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공개 비난할 만큼 치열한 파벌 투사였으나, 1926년 스탈린에게 복종을 거부하며 축출된 뒤 평생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정보기관 협력자로 전락했다가 말년에 다시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극적인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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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오스트리아 공산당(KPÖ) 공동 창립 — 당원 번호 1번
1919–1921베를린으로 이주, KPD 입당
1921–1923베를린 지역당 지도자 — 마슬로프와 함께 KPD 좌파의 '공세 이론' 주창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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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192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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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모스크바다. 우리는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무엇을 배우는지 아는가?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어떻게 비트는지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1929년부터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로서 인민전선 노선에 참여했으며, 전후 총리(1946–1948)와 대통령(1948–1953)을 지내며 국가 주도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다. 1948년 2월 위기에서 비공산당 각료들의 사퇴를 이용해 헌법적 절차 안에서 공산당 주도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36년 체포된 뒤 마우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고, POUM은 그의 부재 속에서 안드레우 닌의 지도 아래 놓였다.
호아킨 마우린은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카탈루냐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블록을 이끌며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노선과 결별했고, 1935년 안드레우 닌과 함께 POUM을 창설해 초대 총서기가 되었다. 1936년 군사봉기 때 국민파 지역에 갇혀 체포된 뒤 내전 전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의 부재 속에서 닌이 당을 이끌었다. 석방과 망명 뒤에는 뉴욕에서 문필과 통신 사업으로 활동하며 스페인 혁명의 경험을 기록했다.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후 더트는 말했다. '스탈린이라는 태양에도 당연히 약간의 흑점은 있다.' 소련 체제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영국 공산당 창립 당원으로 반세기 동안 수석 이론가를 지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1934년 《파시즘과 사회혁명》에서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 위기의 극단적 형태로 분석했고, 1940년 《인도 투데이》로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을 개척했으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반전 노선을 둘러싸고 해리 폴릿을 대신해 총서기를 역임했다.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군복을 입는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 행동이 내 성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벽돌공으로 CNT 건설노조를 이끌다 내전 직전 투옥되었고, 반란 발발과 함께 풀려나 과달라하라·쿠엥카에서 봉기를 진압하는 종대를 조직했다. 제14사단을 거쳐 제4군단장이 된 그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격퇴하며 공화국 진영에서 손꼽힌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되었다. 1939년 3월 네그린 정부의 공산당 의존에 반발해 카사도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공산군이 마드리드를 장악해 가던 순간 메라의 제4군단 예비대가 시내로 진입해 3일 만에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전쟁의 종결 경로를 결정지었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희곡들을 이해했다 — 마르크스야말로 내 희곡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의 창시자였다. 192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후, 감정적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낯설게 하기'와 변증법적 연극론을 정립했으며, 《서푼짜리 오페라》·《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사천의 선인》 같은 작품들로 자본주의와 전쟁을 무대 위에서 해부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47년 HUAC 조사 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 동베를린에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해 전후 세계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