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2016

비소련 혁명가 250명

러시아 혁명과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소련 국가기구에는 속하지 않았던, 세계 각지의 혁명가와 사상가들.

팔미로 톨리아티

Palmiro Togliatti
비소련 혁명가 이탈리아 이탈리아 1893–1964 ○ 자연사

「일 미리오레(Il Migliore)」: 40년간 서유럽 최대 공산당을 이끈 전략가

죽음을 앞두고 쓴 '얄타 각서'로 모스크바로부터의 자율, 다중심주의를 제창하다 (1964)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자·서기장. 코민테른 인민전선을 주도했고 1944년 살레르노 전환으로 반파시스트 연정 참여를 이끌었다. 임종 직전 얄타 각서로 다중심주의를 제창,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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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이탈리아공산당(PCd'I) 창립 참여
  • 1927–1964당 서기 — PCI를 서유럽 최대 공산당으로
  • 1935–1939코민테른 집행부,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지도
  • 1944살레르노 전환 — 반파시스트 연립정부 참여
  • 1946–1948제헌의회 '헌법의 아버지', 1948년 암살 미수 생존
  • 1964얄타에서 사망 — '얄타 각서'로 다중심주의 제창

세히스문도 카사도

Segismundo Casado
비소련 혁명가 스페인 스페인 1893–1968 ○ 자연사

네그린을 무너뜨리고 프랑코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낸 공화국 장군

1939년 3월 5일 밤, 라디오 마이크 앞에 선 카사도는 네그린 정부가 공산당 독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국방평의회의 수립을 선포했고, 마드리드에서는 곧바로 시가전이 시작됐다.

스페인 공화국군의 기병 장교로, 내전 발발 후 공화국 진영에 남아 인민군의 작전·훈련을 맡으며 중부군 사령관까지 올랐다. 전쟁이 이미 졌다고 확신한 그는 1939년 3월 5일 마드리드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네그린 정부를 전복하고 미아하 장군을 내세운 국방평의회를 세웠으며, 공산당의 정권 장악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프랑코와의 평화 협상을 시도했다.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카사도는 영국 군함으로 탈출해 영국과 베네수엘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96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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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세고비아주 나바데라아순시온에서 출생
  • 1907–1911바야돌리드 기병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20–1935기병대 장교로 근무, 참모교육 이수, 모로코 참전, 대통령 경호대장 역임
  • 1936–1937인민군 작전과장·참모학교장·혼성여단 편성 담당, 기병 감찰관
  • 1938.05중부군 사령관 취임, 대령 진급
  • 1939.03.05–12네그린 정부에 대한 쿠데타 주도, 국방평의회에서 국방 담당
  • 1939–1961영국과 베네수엘라에서 망명 생활, BBC 해설자, 네슬레 직원으로 근무
  • 1961–1968스페인 귀국,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1968년 마드리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발터 울브리히트

Walter Ulbricht
사회주의권 지도자 동독 독일 1893–1973 ○ 자연사

동독을 건설하고 베를린 장벽을 세운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라이프치히 가구공 출신으로, 1912년 사민당에서 시작해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활동했고, 1945년 소련과 함께 귀국해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 창당을 주도했다. 1950년부터 당 제1서기로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결단했고, 1963년 신경제체계로 동구권 최고 생활수준을 실현했다. 1971년 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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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8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 1923–1933KPD 중앙위원, 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3–1945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KPD 대표
  • 1943자유 독일 국가위원회(NKFD) 결성 참여
  • 1950–1971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 제1서기
  • 1960–197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71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당직 사임

마오쩌둥

毛泽东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893–1976 ○ 자연사

농민의 나라에 맞게 혁명의 문법을 다시 쓴 중국 혁명의 지도자

“작은 불씨 하나가 온 들판을 태울 수 있다(星星之火,可以燎原).” — 당내 서신(1930)

중국 공산혁명을 이끌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혁명가이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는 인민전쟁 전략을 창안했으며, 제3세계 해방운동과 서구 신좌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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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중국공산당 창립 참여
  • 1927후난 농민운동 시찰 보고 — 농민 혁명론
  • 1934–1935대장정 — 쭌이 회의에서 실권 장악
  • 1937철학논문 《실천론》·《모순론》 발표
  • 1940《신민주주의론》 발표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 1958–1961대약진 운동 — 파국적 기근
  • 1966–1976문화대혁명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José Carlos Mariátegui
비소련 혁명가 페루 페루 1894–1930 ○ 병사

안데스의 현실로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쓴 독학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는 모사도 복제도 아닌 영웅적 창조여야 한다.” — 『아마우타』(1928)

페루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이탈리아에서 그람시 사상을 접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안데스 현실에 맞게 재창조했다. 『7개 에세이』에서 원주민 문제를 토지 문제로 분석, 페루사회당을 창립했다. 35세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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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이탈리아 체류 — 공장평의회 운동과 그람시 서클 접촉
  • 1926『아마우타』 창간
  • 1928『7개 에세이』 — 토지·원주민 문제의 마르크스주의 분석
  • 1928–1929페루사회당과 노동총연맹(CGTP) 창립
  • 193035세로 사망

도쿠다 규이치

徳田球一
비소련 혁명가 일본 일본 (오키나와) 1894–1953 ○ 망명 중 사망

18년 감옥에서 버틴 일본공산당 초대 서기장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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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일본공산당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8–1945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18년 복역 (아바시리·지바·도요타마·후추 형무소)
  • 1945일본공산당 서기장 (초대)
  • 1946–1950중의원 의원 (3선, 도쿄 3구)
  • 1950–1953중국 망명, 베이징기관 조직 및 무장투쟁 지휘

비센테 로호

Vicente Rojo Lluch
비소련 혁명가 스페인 스페인인 1894–1966 ○ 망명 후 귀국, 자연사

공화국을 지킨 가톨릭 장군

1939년 1월, 로호는 네그린에게 전선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비센테 로호는 스페인 공화국에 충성한 직업군인으로, 군사 전문성과 가톨릭 신앙을 공화국의 방어에 결합한 인물이다. 그는 마드리드 방어를 조직하고 자라마, 과달라하라, 브루네테, 에브로 전투의 작전을 계획하며 인민군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1939년 프랑스에서 후퇴한 뒤 네그린의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난민 병사들을 돌보는 길을 택했으며, 이후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957년 귀국했을 때 프랑코 정권은 그를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했지만 형을 집행하지 않고 곧 사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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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톨레도 보병학교 졸업, 소위
  • 1922–1932톨레도 보병학교 교관 및 교육 행정 담당
  • 1936공화국군 참모부 근무, 중령 진급
  • 1936–1937마드리드 방위군 참모장
  • 1937–1939공화국군 중앙참모장, 인민군 확대와 주요 작전 지휘
  • 1939프랑스 망명, 중장 진급, 귀환 명령 거부
  • 1943–1956볼리비아 군사학교 교수
  • 1957스페인 귀국,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 후 사면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

Augusto César Sandino
비소련 혁명가 니카라과 니카라과 1895–1934 ✕ 암살

미 제국주의에 맞서 니카라과 게릴라전을 이끈 범라틴 반제 영웅

“조국의 배신자가 침략자들의 손에 내 유해를 넘기지 않게 하라.” — 산디노 선언(1927)

니카라과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 1927년부터 1933년까지 미군 점령에 맞서 '국가주권 수호군(EDSN)'을 이끌며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반제국주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1934년 소모사가 이끄는 국가경비대에 암살되었고, 그의 유산은 1961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으로 이어져 1979년 소모사 독재를 전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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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미군 개입과 셀레돈 장군 전사 목격 — 반제의식 형성
  • 1921–1926멕시코 망명 — 스탠더드오일 정유공장 노동, 멕시코 혁명 사상 접촉
  • 1926–1927니카라과 귀국 — 금광 노동자 중심 의용군 조직, 입헌전쟁 참전
  • 1927.7에스피노네그로 협정 거부 — 산 알비노 선언으로 대미 게릴라전 개시
  • 1927–1933국가주권 수호군(EDSN) 총사령관 — 미 해병대 상대 6년 게릴라전 지휘
  • 1929–1930멕시코 망명 — EMECU 정신주의 공동체 참여, 범중미 반제연대 모색
  • 1933미군 철수 후 사카사 정부와 평화협정 — 무장 해제 합의
  • 1934.2.21대통령궁 회담 후 국가경비대에 체포·처형 — 시신 행방불명

호세 디아스

José Díaz
비소련 혁명가 스페인 스페인 1895–1942 ✕ 병사로 인한 자살

빵집 노동자에서 공산당 서기장으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이끈 스페인 혁명의 지도자

“우리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 깊은 사회적 내용을 지닌 민주적 의회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 — PCE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보고, 발렌시아, 1937년 3월 5일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으로서 인민전선 전략을 주도하며 당을 소수 분파에서 공화국 진영의 핵심 대중정당으로 키웠다. 세비야의 빵집 노동자 출신으로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에서 활동하다 1927년 PCE에 입당, 1932년 서기장에 올랐다. 1935년 제7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을 관철했으며, 내전 중에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국”을 내걸고 군사적 승리에 당의 전 역량을 집중했다. 말기 위암으로 소련에서 투병하다 1942년 트빌리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이후 수십 년간 스페인 공산주의 전통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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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세비야 제빵노동조합 '라 아우로라' 가입
  • 1917세비야 제빵노동자 파업 지도
  • 1920CNT 총파업 참여
  • 1925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시기 마드리드에서 체포, 투옥
  • 1927스페인공산당(PCE) 입당, 안달루시아 조직 지도
  • 1932.3제4차 PCE 대회 —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 1932.9PCE 정치국 진입, 곧 서기장 임명
  • 1935제7차 코민테른 대회 참석 — 디미트로프의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노선 지지
  • 1936.2마드리드 선거구 코르테스 의원 당선
  • 1936–1939내전 기간 PCE 지휘 — 군사적 승리와 공화국 진영 단결에 주력
  • 1938.12위암 치료 위해 소련으로 이송, 레닌그라드에서 수술
  • 1939–1942코민테른 사무국 간부 — 스페인·남미·영국령 인도 담당

마르소 피베르

Marceau Pivert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95–1958 ○ 병사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쓴 사회당 좌파, 인민전선의 왼쪽 경계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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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14센에마른의 교사 집안,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가 됨
  • 1914–19181차 대전 참전, 전쟁이 그를 반군국주의자로 만듦
  • 1924–1935SFIO 파리 연맹과 교원노조 운동
  • 1935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 결성
  • 1936.05「모든 것이 가능하다」 기고
  • 1936–1937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 책임
  • 1938제명 뒤 노동자농민사회당(PSOP) 창당
  • 1940–1946멕시코 망명
  • 1946–1958SFIO 복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서 활동
  • 1958.06파리에서 사망

루트 피셔

Ruth Fischer
비소련 혁명가 독일 오스트리아 1895–1961 ○ 자연사

유럽 대중공산당의 첫 여성 지도자, 그리고 가장 날카로운 반스탈린주의 전향자

“우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레닌그라드에는 테러가 지배하고 있다.” — 마슬로프에게 보낸 편지가 소련 검열에 적발되며 공개 낭독되었고, 이것이 스탈린과의 결정적 단절이 되었다 (1926년 2월, 코민테른 특별회의).

독일공산당(KPD) 공동의장(1924–1925)으로 유럽 주요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빈 철학 교수의 딸로 태어나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을 공동 창립했고, 베를린에서 마슬로프와 함께 KPD 극좌파를 이끌며 1923년 봉기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공개 비난할 만큼 치열한 파벌 투사였으나, 1926년 스탈린에게 복종을 거부하며 축출된 뒤 평생 반스탈린주의 좌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망명지 미국에서 정보기관 협력자로 전락했다가 말년에 다시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극적인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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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오스트리아 공산당(KPÖ) 공동 창립 — 당원 번호 1번
  • 1919–1921베를린으로 이주, KPD 입당
  • 1921–1923베를린 지역당 지도자 — 마슬로프와 함께 KPD 좌파의 '공세 이론' 주창
  • 1924–1925KPD 공동의장 — 제국의회·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 후보
  • 1924코민테른 제5차 대회 독일 대표단장 — 트로츠키 공개 비난
  • 1925–1926모스크바에 강제 체류 — 스탈린의 당 노선 복종 요구 거부
  • 1926KPD 제명 — 통합야당 지지
  • 1928레닌분트 참여 후 곧 탈퇴
  • 1933–1941파리 망명 — 트로츠키와 협력, 국제그룹 결성
  • 1941–1955미국 망명 — 《스탈린과 독일 공산주의》(1948) 출간
  • 1947하원 반미활동위원회(HUAC)에서 형제 게르하르트·한스 아이슬러에게 불리한 증언
  • 1955–1961파리 귀환 — 《레닌에서 마오까지》(1956) 출간, 반공주의 철회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러시아 1895–1984 ○ 자연사 · 파리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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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 192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 1920.12투르 대회: 수바린 결의안 채택으로 프랑스 공산당(SFIC) 창당 — 명예의장 추대
  • 1921–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상임위원회·서기국 위원 — 3대 기구 모두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 1924볼셰비키 13차 대회에서 트로츠키 옹호 — 코민테른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전격 제명
  • 1926크루프스카야→라코프스키 경로로 입수한 레닌의 유언장을 프랑스에서 최초 출판
  • 1927–1935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하며 트로츠키와 결별 — 민주공산주의서클(CCD) 조직
  • 1935《Staline, aperçu historique du bolchévisme》 출간 — 최초의 비판적 스탈린 평전
  • 1935사회사연구소(Institut d'Histoire Sociale) 설립 — 암스테르담 IISH의 프랑스 지부
  • 1939.5《피가로》 지면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100일 앞서 예측
  • 1940–1947비시 정권에 체포, 석방 후 미국 망명 — 1947년 귀환
  • 1947–1976《Est & Ouest》 및 《Le Contrat Social》 발행 — 냉전기 반스탈린 좌파 소비에트학 주도

돌로레스 이바루리

Dolores Ibárruri
비소련 혁명가 스페인 스페인 1895–1989 ○ 자연사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을 저지한 반파시즘의 목소리

“침략의 파시즘이 스페인에서 저지르는 범죄를 계속 방치한다면, 파시즘은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밀어닥칠 것입니다. 스페인 인민은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기를 택합니다.” — 파리 지지집회 연설, 1936년 9월 3일

스페인공산당(PCE)의 상징적 지도자로, 내전 중 "¡No pasarán!"을 외쳐 반파시즘 투쟁의 얼굴이 되었다. 망명 중 프랑코 독재에 저항했으며,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공개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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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입당
  • 1918『엘 미네로 비스카이노』에 첫 기사 게재, 필명 '파시오나리아' 사용 시작
  • 1922통일 스페인공산당(PCE) 창립 참여
  • 1930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 1933반파시스트 여성연합 창설 의장
  • 1935코민테른 제7차 대회 —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출
  • 1936.2아스투리아스 지역구 코르테스 의원 당선
  • 1936.7라디오 연설 “¡No pasarán!” —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 저지 호소
  • 1937코르테스 부의장 선출
  • 1939–1942소련 망명 — 코민테른 활동 지속
  • 1941–1963단파방송 '독립 스페인 라디오'(라디오 피레나이카) 지휘
  • 1942–1960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
  • 1945국제민주여성연맹(WIDF) 공동 창립, 부의장
  • 1960–1989PCE 의장
  • 1968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입 공개 반대
  • 1977프랑코 사후 귀국 — 41년 만에 다시 코르테스 의원 당선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Buenaventura Durruti
비소련 혁명가 스페인 스페인 1896–1936 ✕ 전사 · 마드리드 전선

바르셀로나에서 반란군을 꺾고 자기 이름의 종대를 이끈 아나키스트 금속노동자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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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 1936.11.22바르셀로나 장례, 수십만 명이 운구를 따름

클레멘트 고트발트

Klement Gottwald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 체코 1896–1953 ○ 자연사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공산당 지도자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모스크바다. 우리는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무엇을 배우는지 아는가?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어떻게 비트는지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자 중 한 사람으로, 1929년부터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로서 인민전선 노선에 참여했으며, 전후 총리(1946–1948)와 대통령(1948–1953)을 지내며 국가 주도 산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다. 1948년 2월 위기에서 비공산당 각료들의 사퇴를 이용해 헌법적 절차 안에서 공산당 주도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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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참여
  • 1929–1945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38–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저항 지도
  • 1945–1946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 1946–1948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48–1953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비소련 혁명가 스페인 스페인계 1896–1973 ○ 자연사

분열을 넘어 노동자 통합을 추구한 혁명가

1936년 체포된 뒤 마우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고, POUM은 그의 부재 속에서 안드레우 닌의 지도 아래 놓였다.

호아킨 마우린은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카탈루냐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블록을 이끌며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노선과 결별했고, 1935년 안드레우 닌과 함께 POUM을 창설해 초대 총서기가 되었다. 1936년 군사봉기 때 국민파 지역에 갇혀 체포된 뒤 내전 전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의 부재 속에서 닌이 당을 이끌었다. 석방과 망명 뒤에는 뉴욕에서 문필과 통신 사업으로 활동하며 스페인 혁명의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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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20레리다에서 교사로 일하며 CNT에 가입
  • 1920–1922레리다 CNT 서기, 《루차 소시알》 편집자
  • 1921–1922CNT 전국 서기국 임시 서기
  • 1924–1930카탈루냐발레아르 공산주의연맹 조직자
  • 1931–1935노동자농민블록 서기장
  • 1935–1936POUM 공동 창립자, 초대 총서기
  • 1936인민전선 후보로 바르셀로나 하원의원
  • 1949–1973뉴욕 아메리칸 리터러리 에이전시 설립자·작가

라자니 팔메 더트

Rajani Palme Dutt
비소련 혁명가 영국 인도 1896–1974 ○ 자연사

CPGB 창립 당원이자 반세기 수석 이론가,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의 개척자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후 더트는 말했다. '스탈린이라는 태양에도 당연히 약간의 흑점은 있다.' 소련 체제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영국 공산당 창립 당원으로 반세기 동안 수석 이론가를 지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1934년 《파시즘과 사회혁명》에서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 위기의 극단적 형태로 분석했고, 1940년 《인도 투데이》로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을 개척했으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반전 노선을 둘러싸고 해리 폴릿을 대신해 총서기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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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CPGB 창립 당원
  • 1921–1974《Labour Monthly》 창간 · 53년간 편집장
  • 1923–1965CPGB 집행위원회 위원
  • 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부위원
  • 1925–1935코민테른 대표(벨기에·스웨덴) · 인도 공산당 지도
  • 1936–1938《Daily Worker》 편집장
  • 1939–1941CPGB 총서기
  • 1943–1965CPGB 집행위원회 부의장 · 부총재

자크 뒤클로

Jacques Duclos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896–1975 ○ 폐울혈로 사망

37년간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 의회와 지하를 오간 스탈린주의자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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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1차 대전 참전, 베르됭에서 부상 후 포로
  • 1920–1926PCF 창립 당원 → 중앙위원회, 국회의원 당선
  • 1928–1936레옹 블룸을 꺾고 재선, 정치국 입성, 국회 부의장
  • 1940–1944지하 PCF 책임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제헌의회·국민의회 의원 및 부의장, 3당 연정 참여
  • 1947–1953코민포름에서 자기비판 → 마셜 플랜 반대 투쟁, 토레즈 병중 당 대행
  • 1959–1975상원 의원 및 공산당 원내대표, 1969년 대선 21.3% 득표
  • 1975몽트뢰유에서 사망, 페르 라셰즈에 안장

탄 말라카

Tan Malaka
비소련 혁명가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1897–1949 ✕ 처형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아버지,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을 접목한 혁명 이론가

“모스크바에 앉아 인도네시아 혁명을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식민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 1926년 봉기 승인을 구하러 마닐라로 온 알리민에게

인도네시아 공산당 초기 의장이자 『공화국을 향하여』의 저자.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의 연대를 주장해 코민테른과 결별했고, 해방 후 완전 독립 노선으로 신생 공화국의 방향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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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포트 더 콕 사범학교 졸업, 다툭(datuk) 족장 칭호 수여
  • 1913–1919네덜란드 유학, 러시아혁명에 감화되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19–1920델리 차 농장 노동자 자녀 교사 — 『가난한 자들의 땅』 집필
  • 1921.6사레카트 이슬람 학교(세콜라 탄 말라카) 설립, 세마랑과 반둥으로 확산
  • 1921.12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의장 취임 — 세마운 후임
  • 1922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되어 네덜란드로 추방 — CPN 하원 후보 출마
  • 1922–1923코민테른 제4차 대회 참석 — 범이슬람주의와 공산주의 연대 주장
  • 1923–1925코민테른 동방부 대리인 — 광저우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향하여』 집필
  • 1925–1927마닐라 체류, 1926년 PKI 봉기를 반대했으나 저지 실패
  • 1927방콕에서 인도네시아 공화당(PARI) 결성 — 코민테른과 결별
  • 1927–1942중국·싱가포르·필리핀 등지에서 가명으로 지하활동 — 『마딜록』 집필
  • 1945–1946인도네시아 귀환, 투쟁연맹 결성 — 스자르르 내각 퇴진 견인
  • 1946–1948체포·구금 — 수감 중 자서전 『감옥에서 감옥으로』 집필
  • 1949.2.21동자바 블림빙에서 공화국군에 체포되어 총살

시프리아노 메라

Cipriano Mera Sanz
비소련 혁명가 스페인 스페인 1897–1975 ○ 사형 감형 · 망명 중 사망

카사도의 마드리드 쿠데타를 공산군의 반격에서 구한 아나키스트 제4군단장

「군복을 입는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 행동이 내 성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벽돌공으로 CNT 건설노조를 이끌다 내전 직전 투옥되었고, 반란 발발과 함께 풀려나 과달라하라·쿠엥카에서 봉기를 진압하는 종대를 조직했다. 제14사단을 거쳐 제4군단장이 된 그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격퇴하며 공화국 진영에서 손꼽힌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되었다. 1939년 3월 네그린 정부의 공산당 의존에 반발해 카사도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공산군이 마드리드를 장악해 가던 순간 메라의 제4군단 예비대가 시내로 진입해 3일 만에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전쟁의 종결 경로를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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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CNT 마드리드 건설노조 서기
  • 1936.07민병 종대 조직, 과달라하라·쿠엥카 탈환
  • 1936.11–1937제14사단장
  • 1937–1939제4군단장
  • 1939.03카사도 쿠데타 지지, 마드리드에서 공산군 저항 분쇄
  • 1939–1942오랑·카사블랑카 망명 후 비시정권에 의해 스페인 송환
  • 1946–1975출소 후 프랑스 재망명, 파리에서 벽돌공으로 일함

샤를 티용

Charles Tillon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계 1897–1993 ○ 자연사 · 1970년 제명

노동운동에서 무장 레지스탕스로 나아간 공산주의자

“수와 단결이 우리 힘이 될 것이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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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프랑스 해군 기관병, 1919년 군함 게생의 반란 주도, 군사형무소 수감
  • 1921–1931프랑스 공산당 가입, CGTU 일드빌렌 지역·낭트 노동조합 지도자
  • 1931–1936CGTU 전국 지도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국 후보위원
  • 1936–1940하원의원, 스페인 공화파 피난 지원 활동
  • 1940–1944공산당 비밀 지도부, 국민군사위원회와 FTP 창설·최고사령관
  • 1944–1947공군·군수·재건부 장관, 오베르빌리에 시장 및 의원
  • 1952–1970공산당 지도부에서 축출, 1957년 복권, 1970년 제명
비소련 혁명가 독일 독일 1898–1956 ○ 심장마비로 사망

서사극과 '낯설게 하기'로 연극을 계급투쟁의 무기로 만든 마르크스주의 극작가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희곡들을 이해했다 — 마르크스야말로 내 희곡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의 창시자였다. 192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후, 감정적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낯설게 하기'와 변증법적 연극론을 정립했으며, 《서푼짜리 오페라》·《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사천의 선인》 같은 작품들로 자본주의와 전쟁을 무대 위에서 해부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47년 HUAC 조사 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 동베를린에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해 전후 세계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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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 상 수상
  • 1924베를린으로 이주, 도이체스 극장 연극부 조수
  • 1928『서푼짜리 오페라』 초연, 1920년대 베를린 최대 흥행작
  • 1933나치 독일을 떠나 15년간의 망명 시작
  • 1947할리우드에서 HUAC에 증언, 다음날 미국을 떠남
  • 1949헬레네 바이겔과 동베를린에 베를리너 앙상블 창립
  • 1954스탈린 평화상 수상

김원봉

김원봉
비소련 혁명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족 1898–1958 ↓ 숙청, 사망

의열단 창설자로서 조선의용대·광복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른 무장투쟁가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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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의열단 창설, 단장(의백) 취임
  • 1926황푸군관학교 제4기 입학
  • 1935조선민족혁명당 창당
  • 1938조선의용대 편성, 대장 취임
  • 1944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 194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 1952내각 노동상
  • 1957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류사오치

刘少奇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98–1969 ○ 구금 중 병사

중국공산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마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문화대혁명에 휩쓸린 국가주석

"다행히도 역사는 인민이 쓰는 법이다" — 숙청되어 카이펑으로 압송되던 1969년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

중국공산당 노동운동의 초기 조직자로서 안위안 탄광 파업을 지도하고 상하이·우한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39년 「공산당원의 수양」을 집필해 마르크스주의 당 건설 이론에 독창적으로 기여했으며, 1945년 당 규약에 마오쩌둥 사상을 명문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취임해 대약진 실패 후 경제 조정을 주도하며 '삼자일포' 등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였으나, 이는 마오와의 치명적 분열로 이어졌다. 문화대혁명 발발 후 '자본주의 노선의 사령관'으로 몰려 1968년 모든 직위에서 해임·제명되었고 1969년 구금 중 사망했으나, 1980년 덩샤오핑에 의해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전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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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5안위안 탄광 노동자클럽 전권대표,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
  • 1936중국공산당 북방국 서기 (화북 항일 저항 지도)
  • 1941–1943신사군 정치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겸 중앙군사위 부주석
  •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에 관하여」 보고, 마오쩌둥 사상 당규약 명문화
  • 1949중앙인민정부 부주석
  • 1954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 1959중화인민공화국 주석 (국가원수)
  • 1968모든 당내외 직위 박탈 및 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