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2016

비소련 혁명가 250명

러시아 혁명과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소련 국가기구에는 속하지 않았던, 세계 각지의 혁명가와 사상가들.

펑더화이

彭德怀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898–1974 ○ 옥사, 1978년 복권

대약진을 비판했다가 숙청된 중국 인민해방군 원수이자 한국전쟁 지휘관

'나는 하이루이(海瑞)가 되겠다!' — 1962년 마오쩌둥에게 제출한 8만 자 상소문에서, 황제에게 직언한 명나라 청렴 관리를 자처하며

중국 인민해방군 10대 원수 중 한 명으로, 한국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지휘했고 국방부장으로서 소련식 군대 개혁을 추진한 군사 지도자였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의 실패와 기근을 마오쩌둥에게 서한으로 비판한 일로 '반당 집단' 수장으로 숙청되었고, 문화대혁명 시기 투옥·고문 끝에 1974년 옥사했으며 197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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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국민당 군대에서 봉기, 홍5군 창설 후 징강산에서 마오·주더와 합류
  • 1930–1934홍3군단 사령관, 장시 소비에트 방어전 지휘
  • 1934–1935대장정 참가,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 지지
  • 1937–1940팔로군 부총사령관, 백단대전 총지휘
  • 1947–1949서북야전군 사령관, 옌안 방어 및 서북 5개 성 해방
  • 1950–1953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한국전쟁 지휘
  • 1954–1959국방부장, 중앙군사위 부주석; 소련식 군 현대화 추진
  • 1959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비판 서한으로 숙청, 전직 박탈

저우언라이

周恩来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898–1976 ○ 자연사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자 외교의 설계자

1972년 닉슨 방중을 성사시킨 외교는 냉전의 삼각구도를 바꾸었다.

중국 공산혁명의 초기부터 마오쩌둥과 함께한 지도자다. 1949년부터 사망 때까지 국무원 총리로서 국가 건설과 외교를 맡았고, 문화대혁명기의 권력 균형에도 깊이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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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76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1954–1958외교부장 겸임
  • 1972미중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연 외교

폴 리로이 로브슨

Paul Leroy Robeson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98–1976 ○ 자연사

'올 맨 리버'를 투쟁의 찬가로 바꾼 예술가

1937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올 맨 리버〉의 체념적 가사를 바꿔 불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웃는다 / 우는 대신에 / 나는 계속 싸워야 한다 / 죽는 그날까지." 웨일스에서 "예술가는 편을 들어야 한다. 나는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베이스-바리톤 가수이자 배우, 전미 풋볼 올아메리칸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 할렘 르네상스의 스타로 《쇼 보트》와 《오셀로》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1934년 소련 방문 후 평생 사회주의와 반식민주의를 지지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후원하고 아프리카문제위원회를 이끌었다. 매카시 시대 여권이 박탈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나 소련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고, 1958년 대법원 판결로 여권을 되찾았다. 그의 예술과 정치적 헌신은 흑인 해방운동과 국제 반제국주의 투쟁을 잇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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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러트거스대학, 미식축구 올아메리칸 2회, 졸업생 대표
  • 1919–1923컬럼비아 로스쿨, NFL 선수 활동
  • 1924–1928《황제 존스》 등 주연, 할렘 르네상스 스타로 부상
  • 1928–1939런던 《쇼 보트》로 세계적 명성, 《오셀로》(1930)로 영국 첫 흑인 오셀로
  • 1934첫 소련 방문 — "처음으로 흑인이 아니라 한 인간이다"
  • 1937–1939스페인 공화파 지지, 국제여단 방문, 아프리카문제위원회 활동
  • 1943–1945브로드웨이 《오셀로》 — 백인 출연진과 첫 흑인 오셀로, 296회 공연
  • 1949파리 평화대회 연설 후 피크스킬 폭동, 블랙리스트 시작
  • 1950–1958여권 박탈, HUAC 조사, 《프리덤》 창간, 스탈린 평화상(1952)
  • 1958대법원 판결로 여권 회복, 《Here I Stand》 출간
  • 1958–1960유럽·소련·호주·뉴질랜드 순회공연, 《오셀로》 출연
  • 1961–1963건강 악화, 동베를린 부흐 클리닉에서 회복
  • 1963–1976은둔 생활, 필라델피아에서 뇌졸중 합병증으로 사망
이론가 미국 독일 1898–1979 ○ 뇌졸중으로 사망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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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에르뇌 게뢰

Gerő Ernő
사회주의권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898–1980 ○ 출당 · 자연사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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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해리 헤이우드

Harry Haywood
비소련 혁명가 미국 미국 1898–1985 ○ 자연사

코민테른 '흑인 벨트' 테제의 설계자: 남부 흑인은 자결권을 가진 억압된 네이션이다

“흑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억압된 네이션의 문제이며 완전한 자결권을 가진다.” — 『흑인 해방』(1948)

전 노예의 아들로 급진화된 미국 공산주의자. 코민테른에서 남부 흑인 자결권 테제를 수립했고, CPUSA 정치국원과 스페인 내전 정치위원을 지냈다. 탈스탈린화 반대로 제명된 후 마오주의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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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제1차 세계대전 — 미 육군 제8연대(흑인연대) 복무, 프랑스 전선 참전
  • 1922–1925아프리카 혈맹단 → 청년공산주의동맹 → 미국공산당 입당
  • 1926–1930모스크바 유학 —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국제레닌학교, 코민테른 흑인문제 결의 초안
  • 1931–1938CPUSA 정치국원 겸 흑인부장 — 스코츠보로 구명운동, 남부 소작인조합 조직
  • 1937스페인 내전 —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연대 정치위원, 브루네테 전투
  • 1943–1945제2차 세계대전 — 미국 상선대 복무
  • 1948『흑인 해방』 출간 — 남부 흑인 해방을 미완의 민주혁명 과제로 이론화
  • 1959반수정주의와 흑인 자결권 고수로 CPUSA에서 제명
  • 1964–1978신공산주의 운동 — 10월동맹/CPML 중앙위원, 『블랙 볼셰비키』 출간
비소련 혁명가 브라질 브라질 1898–1990 ○ 자연사

희망의 기사: 2만 5천 km를 행군한 브라질 혁명가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대개 나이가 들면 제정신을 찾는다. 젊을 때는 혁명가였다가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정착하지. 그러나 나는 이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 제정신이 들지 않았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브라질 혁명가·정치인. 1925~1927년 '프레스테스 종대'를 이끌고 내륙 2만 5천 km를 행군해 '희망의 기사'라 불렸다. 1935년 코민테른 집행위원, ANL 봉기 지도 후 9년간 수감. 1943년부터 37년간 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노동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지휘했고 쿠데타 후 망명 중에도 당을 이끌었다. 유럽공산주의 전환을 거부해 축출됐으나 끝까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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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프레스테스 종대 참모장 — 14개 주 25,000km 행군
  • 1931–1934소련 망명,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 연구
  • 1934브라질 공산당 입당
  • 1935ANL 명예의장 · 코민테른 집행위원 · 무장봉기 지도
  • 1936–1945수감; 1943년 PCB 사무총장으로 선출
  • 1945–1948연방 상원의원; 1947년 당 불법화 후 지하활동
  • 1943–1980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 (37년간)
  • 1971–1979군사독재 아래 소련 망명; 1979년 사면으로 귀국

취추바이

瞿秋白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99–1935 ✕ 국민당에 처형

중국어로 《인터내셔널》을 처음 울린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이자 1927년 당의 지도자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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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2《천바오》 모스크바 특파원
  • 1922모스크바에서 중국 공산당 입당
  • 1923CCP 중앙위원, 선전·기관지 편집 책임
  • 1927–1928CCP 임시 정치국 수장 (사실상 당 지도자)
  • 1928–1930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 CCP 대표단 단장
  • 1930–1931CCP 중앙위원, 좌경폭동주의 비판 후 해임
  • 1931–1934상하이 좌익작가연맹 지도, 루쉰과 공동 활동, 번역·문예비평
  • 1934–1935중화소비에트공화국 교육인민위원, 《붉은 중국》 편집

장 피에르 물랭

Jean Moulin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인 1899–1943 ✕ 고문 뒤 사망

분열된 레지스탕스를 묶은 공화주의자

그는 독일군의 허위 서명 강요에 맞서 명예를 훼손하느니 자결을 택하려 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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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사부아 현 지사 비서실장
  • 1925–1930알베르빌 군 부지사
  • 1936인민전선 항공부 장관 비서실장
  • 1937–1939아베롱 현 지사
  • 1939–1940외르에루아르 현 지사
  • 1941–1943드골의 국내 레지스탕스 대표
  • 1943국가레지스탕스평의회 초대 의장

안드리야 헤브랑

Andrija Hebrang
비소련 혁명가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비아인 1899–1949 ✕ 감옥에서 실종 후 사망 처리

혁명적 민족정치와 당 중앙집권 사이에 선 지도자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랑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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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5–1928자그레브 지방 당 조직 활동
  • 1941–1944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서기
  • 1943–1944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원
  • 1944–1946국가반파시스트평의회와 산업·무역 행정 담당
  • 1946–1948경제위원회 의장, 계획위원회 의장
  • 1948당에서 축출, 가택연금과 체포
  • 1949베오그라드 감옥에서 실종, 사망 처리

미하우 칼레츠키

Michał Kalecki
비소련 혁명가 폴란드 폴란드 1899–1970 ○ 자연사

케인스보다 먼저 유효수요 원리를 정식화한 마르크스주의 거시경제학자

칼레츠키는 1943년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공장 내 '규율'과 '정치적 안정'은 기업 지도자들이 이윤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가치다. 그들의 계급적 본능은 지속적인 완전고용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건전하지 않다고 말해준다."

케인스보다 앞서 유효수요 원리를 정식화한 폴란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윤·투자·소득분배를 계급 분석으로 설명하는 독자적 거시경제학을 구축했고, 사회주의 폴란드에서 계획경제 성장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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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6바르샤바 경기순환·물가연구소 연구원
  • 1933「경기순환 이론 시론」 발표 — 유효수요 원리를 케인스보다 먼저 정식화
  • 1936–1945영국 이주; LSE,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통계연구소에서 연구
  • 1943「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 발표 —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저항을 예측
  • 1946–1954유엔 사무국 경제개발부 차장 (뉴욕); 매카시즘 압력으로 사임
  • 1955–1968폴란드 각료회의 경제고문,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바르샤바 대학 교수
  • 1957폴란드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968반유대주의 숙청에 항의하여 공직 사임

스레텐 주요비치

Сретен Жујовић
비소련 혁명가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인 1899–1976 ○ 자연사 · 당내 영향력 상실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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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박헌영

박헌영
비소련 혁명가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0–1955 ✕ 처형

조선공산당 재건의 주역, 남조선로동당 당수

1927년 신의주 법정에서 광인을 가장해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극단적 연기로 병보석을 얻어내고, 곧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까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으나, 월북 후 김일성에게 밀려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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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입당, 상하이에서 활동
  • 1922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원동인민대표대회 참석
  • 1925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8–1930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40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활동; 상하이·국내 지하운동 지도
  • 1945조선공산당 재건, 당수 겸 서기장 취임
  • 1946–1949남조선로동당 창당, 부위원장(사실상 당수)
  • 1948–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초대 외무상

모리스 토레즈

Maurice Thorez
비소련 혁명가 프랑스 프랑스 1900–1964 ○ 병사

광부의 아들에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인민전선의 설계자

「프랑스 국민은 결코 소련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 NATO 가입을 앞둔 1949년 2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뉴욕 타임스』 1949년 2월 23일 보도)

탄광 소년 노동자 출신으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정치인(1930–1964). 1936년 인민전선을 설계했고 전후 '프랑스식 사회주의로의 길'로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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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2세에 탄광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
  • 1919–1920사회당(SFIO) 입당 → 투르 대회에서 공산당 창립 참여
  • 1930–1964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 34년간 당을 이끎
  • 1936인민전선 결성 주도, 블룸 정부의 사회개혁 뒷받침
  • 1939–1944프랑스군 탈영 후 소련 망명, PCF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드골 정부 국무장관 → 부총리(1946–1947)
  • 1950–1953뇌졸중으로 소련에서 치료, 자크 뒤클로가 당 대행
  • 1964서기장 사임 후 명예 의장, 흑해 유람선에서 사망

최용건

최용건
사회주의권 지도자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0–1976 ○ 병사, 국장

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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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루이지 론고

Luigi Longo
비소련 혁명가 이탈리아 이탈리아 1900–1980 ○ 자연사

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갈로', 코민포름의 자아비판을 겪고 톨리아티의 뒤를 이은 PCI 사무총장

1964년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PCI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론고는 '나는 두목이 아니라 서기다'라고 선언했다.

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리발디 여단을 지휘하며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전후 PCI 부서기로 톨리아티를 보좌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슈클라르스카 포렝바)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PCI 대표로 참석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격렬한 자아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PCI의 노선을 강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964년 톨리아티 사후 사무총장이 되어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노선과 모스크바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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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리보르노 대회에서 PCI 창당 참여
  • 1936–1939국제여단 총감독 (스페인 내전), 별명 '갈로'
  • 1943–1945가리발디 여단 총사령관, CVL 부사령관
  • 1945–1964PCI 부서기
  • 1947.09코민포름 창립 회의 PCI 대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 1964–1972PCI 사무총장
  • 1972–1980PCI 명예 의장

오자키 호즈미

尾崎秀実
비소련 혁명가 일본 일본 1901–1944 ✕ 교수형 (국가반역)

고노에 총리의 브레인이자 모스크바를 구한 일본인 간첩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훌륭하게 죽고 싶다.

호즈미 오자키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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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7아사히 신문 기자
  • 1928–1932아사히 신문 상하이 특파원
  • 1930상하이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와 접촉
  • 1934–1941조르게 도쿄 첩보망의 핵심 정보원
  • 1937–1941쇼와연구회 연구원, 고노에 내각 자문
  • 1938–1941고노에 총리 '조찬회' 멤버
  • 1941.10조르게 사건으로 체포
  • 1944.11.7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

루돌프 슬란스키

Rudolf Slánský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 체코 1901–1952 ✕ 처형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1948년 2월 쿠데타를 조직하고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실무 책임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회의에서 슬란스키는 모스크바의 권력 장악 지령을 받고 프라하로 돌아왔다. '국제 무대에서처럼 국내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했다' — 1948년 2월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1929년 KSČ 중앙위원·정치국원이 된 후 고트발트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을 이끌고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에 참가했다. 1945~1951년 서기장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해 1948년 2월 쿠데타의 실무를 지휘,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반국가 음모·트로츠키주의·티토주의·시오니즘 혐의로 사형당했으며, 이 재판은 동구권 숙청 중 가장 뚜렷한 반유대주의 성격을 띠었다. 1963년 사법 복권, 196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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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입당
  • 1924KSČ 기관지 《루데 프라보》 편집자
  • 1927–1928KSČ 오스트라바 지역당 서기
  • 1928–1929KSČ 클라드노 지역당 서기
  • 1929KSČ 중앙위원·정치국원 선출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원
  • 1939–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방송 주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45–1951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인민민병대 사령관 겸직, 2월 쿠데타 실무 지휘
  • 1951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Gheorghe Gheorghiu-Dej
사회주의권 지도자 루마니아 루마니아 1901–1965 ○ 폐암 사망

소련의 위성에서 반자율적 공산주의 국가로 루마니아를 전환시킨 초대 공산당 지도자

1947년 12월 30일 아침, 게오르기우데지와 페트루 그로자가 군대에 포위된 왕궁으로 찾아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할 경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고 미하이 국왕은 망명 후 증언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1933년 그리비차 철도 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당내 '감옥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저항하며 1958년 소련군 철수를 관철시켰고, 중공업화와 서방과의 무역 확대를 통해 바르샤바 조약 내에서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했다. 그의 독자노선은 후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으나, 집권 기간 내내 세쿠리타테를 통한 국내 탄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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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 1933그리비차 철도 파업 주도, 체포·투옥
  • 1936당 중앙위원회 위원, 감옥파 수장
  • 1944탈옥, 루마니아 공산당 총서기
  • 1947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인민공화국 선포
  • 1952–1955루마니아 총리
  • 1955–1965루마니아 노동자당 제1서기
  • 1961–1965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비소련 혁명가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1901–1989 ○ 자연사

아이티 혁명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으로 되살린 트리니다드 출신 트로츠키주의자이자 범아프리카주의 지식인

“크리켓만 아는 자들이 크리켓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 『비욘드 어 바운더리』 서문, 키플링을 뒤집으며

트리니다드 출신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블랙 자코뱅』으로 아이티 혁명을 해방사로 재구성했으며, 트로츠키와 흑인 자기결정권을 논쟁했다.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발전시키고 크리켓으로 제국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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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트리니다드 터너푸나에서 교사 로버트 알렉산더 제임스와 이다 엘리자베스의 장남으로 출생
  • 1910–1918퀸스 로열 칼리지(QRC) 장학생으로 입학, 졸업 후 동교에서 영문학과 역사 교사로 근무 (에릭 윌리엄스 제자)
  • 1932영국 랭커셔로 이주, 『맨체스터 가디언』 크리켓 기자로 활동하며 반식민 저술 시작
  • 1934–1936ILP 가입 및 트로츠키주의 그룹 활동, 희곡 『투생 루베르튀르』 상연, 첫 소설 『민티 앨리』 출간
  • 1937–1938『세계혁명』(코민테른사) 및 『블랙 자코뱅』 출간 — 트로츠키·오웰·E.H. 카의 찬사
  • 1938–1939SWP 초청으로 미국 순회 강연,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트로츠키와 '흑인 문제' 논쟁
  • 1941–1951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정립, 『변증법 노트』 집필
  • 1953미국에서 추방, 엘리스섬 구금 중 멜빌 연구서 『선원들, 배신자들, 난파자들』 집필
  • 1957–1960가나 독립 축하 방문, 은크루마 혁명 연구 집필; 트리니다드에서 PNM 기관지 『더 네이션』 편집장
  • 1963『비욘드 어 바운더리』 출간 — 크리켓을 통해 식민지 사회와 계급·인종을 분석한 자전적 명저
  • 1970–1980워싱턴 D.C. 연방시립대학 강사, 앨리슨 & 버즈비에서 저작 선집 4권 출간
  • 1989런던 브릭스턴에서 흉부 감염으로 88세로 사망, 트리니다드 터너푸나 묘지에 안장

나즘 히크메트

Nâzım Hikmet
비소련 혁명가 튀르키예 튀르키예 1902–1963 ○ 망명 중 자연사

28년형을 시로 살아낸 터키 혁명시인, 모더니즘과 공산주의를 결합한 20세기 문학의 거인

“내 나라의 푸른 하늘 아래 평범한 마을 공동묘지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묻어다오” — 모스크바 유언, 1963년

오스만 살로니카 출신의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소련에서 마야콥스키레닌을 만나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터키로 돌아와 자유시를 도입하며 문학 혁신을 일으켰다. 《835행》에서 16,000행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과 독립전쟁을 노래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군사법정의 28년형으로 12년간 수감되었고 피카소·사르트르·로브슨의 국제 석방운동을 촉발했다. 1951년 소련 탈출 후 13년간 세계평화운동과 반식민주의에 헌신했으며, 시는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네스코는 2002년을 '나즘 히크메트의 해'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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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첫 시 〈조국의 비명(Feryad-ı Vatan)〉 발표
  • 1918이스탄불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복무
  • 1921터키 독립전쟁 참가 위해 아나톨리아로 이동, 무스타파 케말과 만남
  • 1922–192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볼셰비키당 입당
  • 1924–1925터키 귀환, 잡지 《아이든르크(Aydınlık)》 편집 — 불법 터키공산당 기관지
  • 1929첫 자유시집 《835행》 출간 — 터키 시의 혁명
  • 1933–1935《밤에 온 전보》로 첫 투옥, 부르사 교도소에서 《셰이흐 베드레딘 서사시》 집필
  • 1938–1950군사반란 선동 혐의로 28년형 선고, 4개 도시 교도소에서 12년 복역
  • 1939–1960옥중에서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 16,000행 집필
  • 1950국제 석방운동과 단식투쟁 끝에 사면 — 국제평화상 수상
  • 1951–1963소련 망명 — 세계평화평의회 상임위원, 반식민주의·반전 활동
  • 1963.6.3모스크바 페레델키노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펑전

彭真
사회주의권 지도자 중국 중국 1902–1997 ○ 혈액암으로 사망

문화대혁명의 첫 희생양이 된 베이징 시장이자 마오 사후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정치인

"마오 주석도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오 주석의 위신이 에베레스트만큼 높지 않더라도 타이산만큼은 높습니다. 흙 몇 톤을 퍼내도 여전히 그만큼 높습니다" ― 1962년 7천인대회에서 마오를 공개 비판하며

1923년 산시성에서 창립 당원으로 입당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5년 정치국원에 올랐다. 1951년부터 15년간 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로 수도 전역을 당의 충실한 거점으로 만들었다. 1966년 2월 5인 소조의 「2월 강요」로 문화대혁명의 학술적 봉쇄를 시도했으나, 마오쩌둥에 의해 무효화되고 '반혁명 수정주의자'로 몰려 53차례 대중투쟁을 당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개막이었다. 1979년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어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로 7개 기본 법률을 3개월 만에 통과시켰고,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으로서 개혁기 중국 법치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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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타이위안에서 중국공산당 입당, 산시성 창립 당원
  • 1929–1935베이징·톈진에서 투옥, 옥중에서도 지하활동 지속
  • 1937–1941화북국 조직부장 겸 산시-차하얼-허베이 변경구 서기
  • 1941–1944중앙당교 부교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당교 숙청 주도
  • 1945정치국원 선출; 동북국 서기 파견 — 1946년 군사적 패배로 해임
  • 1951–1966베이징 시장 겸 시당위 제1서기
  • 19665인 소조 조장, 「2월 강요」 기초; 5월 회의에서 숙청, 문화대혁명 개막
  • 1979–1988전인대 법제위 주임, 중앙정법위 서기; 제6기 전인대 상무위원장(1983–1988)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

Julio Antonio Mella
비소련 혁명가 쿠바 쿠바 1903–1929 ✕ 암살

25세에 암살된 쿠바 공산당의 학생 창립자, 반제국주의 순교자

1928년 12월, 멕시코시티의 격렬한 당 회의에서 비탈리가 메야에게 소리쳤다 — "잊지 마라: 인터내셔널에서 나가는 길은 둘뿐이다, 제명되거나 죽거나!" 한 달 후 메야는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쿠바 공산당을 공동 창립한 학생운동 지도자로, 아바나 대학에서 반제국주의 학생투쟁을 조직하고 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1925년 쿠바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을 세웠다. 마차도 독재에 쫓겨 멕시코로 망명한 후에도 혁명운동을 이어가다 1929년 25세의 나이로 암살당했으며, 쿠바 혁명 좌파의 상징적 순교자로 카스트로 세대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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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아바나 대학 법학부 입학 — FEU 공동 창립, 서기 역임
  • 1923FEU 회장 취임 — 제1차 전국학생대회 주최, 호세 마르티 인민대학 설립
  • 1924아바나 공산주의 그룹 가입, 반제국주의 동맹 쿠바 지부 결성
  • 1925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쿠바 공산당 창당 — 중앙위원; 체포 후 18일 단식투쟁
  • 1926대학 제적, 당에서 2년간 제명 — 온두라스·과테말라 거쳐 멕시코시티로 망명
  • 1926–1927쿠바 혁명적 망명자 협회(ANERC) 창립 — 『쿠바 리브레』 등에 기고
  • 1927브뤼셀 식민지 억압 반대 세계대회 참석 — 모스크바에서 국제노조인터내셔널 4차 대회 참관
  • 19291월 10일 멕시코시티에서 귀가 중 총격 암살 — 향년 25세

조지 오웰

George Orwell
작가·예술가 영국 영국 1903–1950 ○ 결핵 · 런던

POUM 민병대에서 총상을 안고 돌아와 전체주의의 언어를 해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카탈루냐 찬가』,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인상: 「내가 노동계급이 안장에 올라앉은 도시에 있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 버마 제국경찰 5년과 파리·런던 밑바닥 생활의 르포로 작가가 되었고, 1936년 12월 스페인으로 건너가 영국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에 들어가 아라곤 전선에서 넉 달을 보내다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을 입었다. 요양 중 겪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뒤이은 POUM 불법화는 그를 소련식 공산주의와 완전히 갈라서게 했고, 그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로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 경험을 적은 『카탈루냐 찬가』는 출간 반년 동안 683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했으며, 『동물농장』과 『1984』는 혁명이 새로운 지배로 굳는 과정과 그것을 떠받치는 언어를 해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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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영국령 인도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아편국 관리의 아들 에릭 아서 블레어로 출생
  • 1917–1921이튼 칼리지 장학생
  • 1922–1927인도 제국경찰로 버마 근무, 제국 통치에 대한 환멸 끝에 사직
  • 1928–1932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접시닦이·교사·서점 점원
  • 193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출간,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 1936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대 취재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집필, 에일린 오쇼너시와 결혼
  • 1936.12바르셀로나 도착,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 입대
  • 1937.01–05아라곤 전선 알쿠비에레·우에스카 복무, 5월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
  • 1937.05휴가 중 바르셀로나 5월 사태를 겪으며 POUM 건물을 경비
  • 1937.06POUM 불법화 후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탈출
  • 1938『카탈루냐 찬가』 출간, 반년간 683부 판매
  • 1941–1943BBC 동방부에서 인도 대상 방송 제작
  • 1945『동물농장』 출간
  • 1949『1984』 출간
  • 1950.01.21런던의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