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볼셰비즘의 승리」에서: "세계 각지에서 볼셰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펄럭이고 승리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것을 보라. (…) 오늘 이후로 이곳은 더 이상 부르주아지의 세계도, 자본주의의 세계도, 제국주의의 세계도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의 세계, 볼셰비즘의 세계다!"
중국 마르크스주의 선구자이자 공산당 공동 창립자. 베이징대 도서관장으로 마오쩌둥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했고, 5·4운동을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다. 국공합작을 설계했고 1927년 장쭤린에 처형되었다.
담배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 조지 시안토스는 그리스 공산당(KKE)의 핵심 지도자로 성장했다. 독일 점령기에 니콜라오스 자하리아디스가 다하우로 이송되자 당의 직무대행 서기를 맡아 KKE와 민족해방전선(EAM),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4년 12월 무장충돌에서 EAM군을 지휘했고, 무장부대 해산에 반대하면서도 결국 협상 노선을 택했다. 1945년 바르키자 협정에서 EAM 대표단을 이끌고 서명했지만, 협정의 무장해제 조항은 뒤이은 백색 테러와 새로운 내전 국면 속에서 EAM의 정치적 패배로 남았다.
1920년 5월 10일, 런던 항구. 폴릿은 부두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던 무기 수송선 SS 졸리 조지호의 군수품 선적을 막아냈다. 배는 무기를 내린 채 출항했다.
영국 공산당(CPGB) 창립 당원이자 25년 넘게 총비서를 지낸 영국 공산주의의 중심 인물. 1920년 런던 항만 노동자들을 설득해 폴란드로 향하는 군수품 선적을 저지하며 'Hands Off Russia' 운동의 얼굴이 되었다. 스탈린의 개인적 승인으로 총비서에 올라 당의 '코드 홀더'로서 모스크바와 직접 비밀 무선 연락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을 지원했고, 전후 평화적 의회주의 노선을 담은 《영국의 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공동 집필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에도 거실의 스탈린 초상화를 끝내 떼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당의 심장을 추방한 셈이었다. 트로츠키가 진지한 젊은 활동가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 1937년 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축출한 뒤
캔자스 출신의 아일랜드계 노동운동가로, 1919년 미국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코민테른 상임간부회에 올랐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비판문을 접하고 좌익반대파로 전환,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미국 공산주의자동맹을 창립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지도했고, 1938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창당하여 초대 전국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스미스법에 따라 18개월간 수감되었으며,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지도자로서 국제 트로츠키즘 운동을 이끌었다.
“좌파 놀음을 하며 '중도파 사냥'에 열중하는 마슬로프 동지는 열정은 많으나 분별이 부족하다” — 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직접 이름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1921년 8월 14일).
우크라이나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기에 독일로 이주했다. 피아노를 포기하고 아인슈타인과 플랑크 아래서 자연과학을 공부했으나, 1차대전을 겪으며 정치에 뛰어들어 KPD 창립에 가담했다. 루트 피셔의 평생 동반자로서 1924년 당 의장에 올랐고, '볼셰비키화'를 밀어붙여 초좌익 전환을 이끌었으나 대량 이탈도 초래했다. 1926년 스탈린과 텔만에 의해 제명된 뒤, 레닌분트·트로츠키 협력·국제그룹을 오가며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독자적 길을 찾아 헤맸다. 1941년 아바나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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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KPD 창립 당원 —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러시아 전쟁 포로 대상 선전 활동
1920–1923KPD 중앙위원 — 피셔와 함께 베를린 좌파 지도, 《로테 파네》 외교편집장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카진 지역의 교사 출신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다.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수십 명의 유대인 피란민을 구했고, 1942년 아브노이 부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각료회의가 해임 철회를 의결했지만, 노세크는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 경찰 간부 8명을 공산당원으로 교체했다.
광부 출신으로 18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점령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45년 귀국 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경찰과 보안기구를 공산당 세력으로 재편했다. 1948년 2월 13일 비공산당 경찰 간부 8명을 해임함으로써 내각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과 고트발트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1944년 레바논 회의에서 그는 저항운동이 세운 해방 지역의 대표성을 전국 정부 구상에 반영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 스볼로스는 노동권과 민주적 헌정 질서를 연구한 그리스의 헌법학자이자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다. 추축국 점령기에 민족해방정치위원회 의장으로서 해방 지역의 행정과 민중 대표 제도 구상을 이끌었고, 레바논 회의에서 저항운동과 망명정부의 연합을 모색했다. 해방 뒤에는 국민통합정부의 재무장관으로 경제 재건을 추진했으나, 좌파 장관들과 함께 사임하며 저항군 해산에 반대했다. 그는 반공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독자적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고, 그 긴장은 전후 그리스 정치에서 그의 영향력과 고립을 함께 만들었다.
라이프치히에서 돌아온 생리학자,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보내고 끝까지 항전을 택한 마지막 총리
1938년 5월, 프랑코에게 내민 「13개 조항」. 스페인의 완전한 독립,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정부, 지역 자치, 양심의 자유, 토지개혁, 그리고 전쟁 행위에 대한 보복 금지. 프랑코의 답은 무조건 항복이었다.
생리학자 출신의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정치인.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가 되어 세베로 오초아를 길러낸 실험실을 세웠으며, 1929년 PSOE에 입당해 1931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1936년 9월 재무장관으로 입각해 국립은행의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옮기고 이를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했고, 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인 1937년 5월 총리에 올라 「저항이 곧 승리」를 내걸고 인민군의 중앙집권화를 밀어붙였다. 그가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에 의존한 것은 서방의 불개입 아래 무기를 살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었으나, 이 때문에 「모스크바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평생 받았다. 1938년 5월 「13개 조항」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고집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쿠데타로 그는 스페인을 떠났다. 1946년 PSOE에서 제명됐고, 2008년에야 당으로부터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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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카나리아 제도 라스팔마스의 부유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
1906–1915독일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생리학 수학, 1912년 의학박사
1922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 세베로 오초아를 배출한 실험실 창설
1929–1931PSOE 입당,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라스팔마스 선거구 하원의원 당선
1936.09라르고 카바예로 내각 재무장관 취임,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이송
1936.10금 준비 510톤을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 이른바 「모스크바의 금」
1937.05.17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 총리 취임: 「하나의 전쟁, 하나의 군대, 하나의 지휘」
1938.04–1939.03국방장관 겸임, 「저항이 곧 승리」 노선으로 에브로 공세 지휘
1938.05「13개 조항」 발표로 협상 시도, 프랑코가 거부
1938.09–10국제연맹에서 국제여단의 일방적 철수를 발표하고 바르셀로나 고별 행진 주관
1940년 11월 6일, 16년의 호르티 감옥 생활을 마치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바로 다음날 붉은광장 혁명기념일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의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과 노동자당 최고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과 함께 귀국해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1919년 쿤 벨러의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약한 후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고, 호르티 정권 아래 16년간 투옥되었다. 1945년 귀국 후 '살라미 전술'로 경쟁 세력을 단계적으로 제거하며 일당 지배를 완성했다. 1952년 총리를 겸해 중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으나,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압력으로 1956년 7월 해임되었고 혁명 후 소련에서 여생을 보냈다.
1946년 1월 도쿄 당사에 도착한 노사카를 맞으려 기모노와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마치 스타를 기다리는 팬처럼 모여들었다고 한 신문이 전했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에 참여하고 영국공산당 창립대회(1920년)에도 런던 대표로 출석한 국제 공산주의자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미국·중국에서 대일 첩보망을 운영했다. 1940~1945년 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을 이끌며 일본군 포로를 공산군 전향 병력으로 재편했고, 전후 일본공산당을 '사랑받는 당'으로 포장해 평화적 혁명 노선으로 35석의 의석을 얻어냈다. 1958년부터 24년간 당 의장을 지내며 안보투쟁과 중·소 분열 속 당의 독자 노선을 유지했으나, 1992년 스탈린 시대 동료 밀고 사실이 폭로되어 자신이 창립한 당에서 제명되었다.
미군기가 산디노 진영을 폭격하는 가운데, 마르티는 타자기를 밀치며 말했다. "역사가 펜으로 쓰이지 못할 때는 총으로 쓰여야 한다." 그리고 소총을 들고 미군기를 향해 사격했다.
엘살바도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중미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이다. 1930년 엘살바도르 공산당(PCS)을 공동 창건하고 1932년 대공황으로 몰락한 농민·원주민의 무장봉기를 이끌었으나 마르티네스 군부의 라 마탄사 학살로 진압·총살당했으며, 사후 그 이름은 FMLN에 계승되어 중미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삶은 값비싸지 않으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명예와 이상에 맞게 사는 것이다.”
베르티 알브레히트는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결합한 프랑스의 활동가로,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었다. 나치즘의 위험을 일찍 경고하고 독일인 망명자를 도운 일은 앙리 프르네와의 협력, 그리고 지하 저항운동 콩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Les Petites Ailes와 Vérités의 제작을 맡고 콩바의 사회사업을 조직하며 체포와 투옥, 탈출 뒤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받은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숨졌고, 사후 해방의 동료로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