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버논 켈로그는 곤충학자이자 과학 행정가로, 스탠퍼드에서 동물학과 곤충 분류를 연구하고 미국 과학 연구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허버트 후버의 벨기에 구호 활동을 도운 인연은 그를 전후 국제구호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1921년 볼가 유역을 직접 시찰한 그는 아동만이 아니라 부모와 성인도 구호해야 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고, 이는 미국구호행정의 사업 확대를 뒷받침했다. 그의 경력은 전문 과학자가 기근 앞에서 행정과 윤리적 판단의 주체가 된 사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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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1894캔자스에서 성장하고 캔자스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곤충학을 공부했다.
1894–1920스탠퍼드대학교 동물학 교수로 재직하며 동물학과를 세우고 곤충 분류와 진화를 연구했다.
1915–1916벨기에 미국구호위원회 책임자로 전쟁 난민과 민간인 구호를 조직했다.
1917–1920구호와 전쟁 경험을 저술하고 후버의 식량·국제구호 활동을 지원했다.
1921년 9월미국구호행정 특수 조사관으로 첫 구호 열차를 타고 볼가 유역을 조사했다.
1921년 말워싱턴에서 후버에게 성인까지 포함하는 구호 확대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1921–1933국가연구위원회 초대 상임 서기로 일하고 과학연구 제도와 대중 과학을 조직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 93세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아버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 —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역사가, 범아프리카주의자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이다. NAACP 공동 창립자로서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를 24년간 편집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이끌었고, 『흑인의 영혼』과 『미국의 흑인 재건』을 통해 미국 사회학과 역사학의 지형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를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콰메 은크루마의 초청으로 가나에 정착해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에 착수하던 중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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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윌버포스대·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필라델피아 니그로』(1899) 출간
1897–1910애틀랜타대 교수, 『흑인의 영혼』(1903) 출간, 나이아가라 운동 창립(1905)
1910–1934NAACP 공동 창립,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 편집장;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10월 혁명을 목도한 포트레소프는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의 살해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세운 체제를 한마디로 규정했다. "바보들의 사회주의."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창립 세대다. 1903년 당 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며 멘셰비키의 지도적 이론가가 되었고,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대중정당을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멘셰비키 방어파를 이끌었으며, 1917년 10월 혁명을 거부했다. 1919년 체카에 체포된 후 1925년 소련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에서 소비에트 체제 비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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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1896스트루베·마르토프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노동해방' 그룹과 접촉
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결성 참여
1897–1899체포되어 뱟카현으로 유형
1900–1903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 제2차 당대회 이후 멘셰비키 지도부
1905–1907귀국하여 멘셰비키 신문 『나찰로』『넵스키 골로스』 편집
1910–1914멘셰비키 청산파 기관지 『나샤 자랴』 편집, 4권짜리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운동』 공동 편찬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을 목격한 뒤 골드만은 이렇게 썼다. '크론시타트는 나를 볼셰비키에 묶어둔 마지막 실을 끊어놓았다' — 그녀는 1921년 12월 소비에트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 작가, 연설가.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정치에 눈떠 북미와 유럽에서 아나키즘 정치철학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피임·자유연애·반군국주의를 주제로 수천 명을 끌어모은 연설로 '붉은 에마'라 불렸으며,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이후 볼셰비키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전향적인 목소리를 냈고, 《러시아에서의 환멸》(1923)에 그 경험을 기록했다.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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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시카고 환송연에서 헨리 클레이 프릭의 사망 소식을 듣고 베르크만은 이렇게 말했다: '프릭은 신에 의해 추방되었다.'
러시아 제국 빌나에서 태어나 1888년 미국으로 이주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작가. 1892년 홈스테드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에 분노하여 제철소 사장 헨리 클레이 프릭을 암살하려다 실패, 14년간 복역했으며 그 경험을 《한 아나키스트의 옥중기》(1912)에 담았다. 출소 후 에마 골드만의 잡지 《마더 어스》 편집자로 활동하며 미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919년 반전 활동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 혁명에 열광했으나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을 목격하고 환멸을 느껴 《볼셰비키 신화》(1925)에서 초기 소비에트 국가의 권위주의를 기록했으며, 이후 프랑스 망명 중 아나코-코뮤니즘 입문서 《지금 그리고 이후에》(1929)를 저술했다.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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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1943년, 평생의 반볼셰비키 멘셰비키 지도자 단은 『볼셰비즘의 기원』에서 볼셰비즘이 '우리 시대의 핵심 사상인 사회주의의 담지자'로 역사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썼다.
표도르 단은 혁명가·의사이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 분파의 창립 지도자이며 핵심 이론가였다.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 레닌에 맞섰고, 1917년 2월 혁명 후 '혁명적 방어주의'의 주요 이데올로그로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22년 망명 후 1923년 마르토프 사망부터 1940년까지 멘셰비키 해외대표단을 이끌며 볼셰비키 권위주의와 서구 사민주의 타협에 맞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견지했다. 『볼셰비즘의 기원』(1943)에서는 볼셰비즘이 사회주의의 역사적 담지자임을 인정하면서도 소비에트 체제의 정치적 자유화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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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활동, 체포 후 뱟카로 유형
1901–1903베를린 망명, 이스크라 지원 그룹 참여; RSDLP 제2차 대회에서 마르토프 지지, 멘셰비키 공동 창립
1905–1912멘셰비키 주요 신문 『나찰로』 편집진, RSDLP 제4·5차 대회; 『사회민주주의자의 목소리』 공동 편집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혁명적 방어주의' 이데올로그
1919–1920제7·8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멘셰비키 대표로 연설; 적군 군의관 복무
1922–1923체포·투옥 후 해외 추방;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창립 참여, 소비에트 시민권 박탈
1923–1940멘셰비키 해외대표단 단장; 베를린·파리에서 망명 활동
1941–1947뉴욕 망명, 잡지 『노비 푸티』 발행; 『볼셰비즘의 기원』(1943) 집필
1918년, 마르토프는 스탈린이 1907년 당에서 제명된 전력이 있음을 폭로했다. 스탈린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혁명재판소는 마르토프에게 '공적 견책'을 선고했다.
이스크라를 레닌과 함께 만든 동지였으나, 1903년 당원 자격 조항 하나를 두고 갈라져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10월 이후에도 나라를 떠나지 않고 합법 야당의 자리를 지키려 애썼고, 1920년 출국을 「허락받아」 베를린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병상의 레닌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임종 직전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제국 장교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조선 민족해방운동에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접목시킨 공산주의 선구자.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무장독립노선을 추진했으며, 이승만과 결별 후 고려공산당(상하이파)을 이끌며 민족해방과 계급혁명의 결합을 추구했다.
“독서는 노동계급 해방의 가장 훌륭한 수단 중 하나다. 그러니 많이 읽기를 권한다.” — 레카바렌이 전국 노동자 모임에서 늘 되풀이한 말.
칠레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평생을 바친 조직가이자 이론가였다. 질산염 광산 노동자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민주당에 입당해 활동하다, 1912년 타협적 개량주의와 결별하고 칠레 사회주의노동자당(POS)을 창당했다. 수차례 투옥과 추방을 겪으면서도 노동자 신문을 창간·편집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계급의식을 고취했으며, 1922년 당을 코민테른에 가입시켜 칠레 공산당으로 전환시켰다. 1924년 당내 노선 갈등과 건강 악화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닦은 조직·교육·언론의 토대는 칠레와 라틴아메리카 혁명 전통의 초석이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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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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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