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0월 21일 켐니츠 회의에서 브란들러는 좌파 사민당원들의 이탈을 목격하고 계획된 봉기를 전격 취소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취소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고립된 채 봉기했고, 24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독일공산당(KPD) 의장으로 1921년 3월 행동과 1923년 '독일 10월' 봉기를 이끌었으나, 혁명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봉기를 취소하고 그 책임으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당 지도부에 맞서다 1929년 KPD에서 제명된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여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프랑스·쿠바 망명을 거쳐 1949년 서독으로 귀환, 생애 끝까지 독립적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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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1건설 노조 활동 시작, 사회민주당(SPD) 입당
1914–1916반전 활동,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멤버; 체포·추방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중앙위원 선출
1921–1924KPD 의장; 3월 행동·1923년 '독일 10월' 봉기 주도, 실패 후 모스크바 소환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골로스 트루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합법화하면… 국가와 인민의 삶을 위에서부터 운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반대를 철권으로 분쇄할 권위주의적 정치·국가 기구를 발전시킬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이자 마흐놉시치나의 지도적 이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골로스 트루다』를 편집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했으며,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아나키스트 통합 이론을 발전시켜 공산주의·개인주의·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들의 협력을 주창했다.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1917–1921년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결정판인 『미지의 혁명』을 저술했으며, 동지 마흐노가 추진한 플랫폼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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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 중퇴, 사회혁명당 입당, 노동자 학습 모임 조직
1905피의 일요일 행진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참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07오흐라나에 체포, 시베리아 유배; 탈출하여 프랑스 망명
1911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 전향, 파리에서 '자유 공산주의자 형제단' 가입
1915–1916반전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추적 피해 미국 도피; 뉴욕에서 『골로스 트루다』 편집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골로스 트루다』를 주요 아나코생디칼리즘 기관지로 재창간
1918–1920우크라이나 나바트 연합 공동 창설;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체카에 두 차례 체포
「볼셰비키는 공산주의를 저버리기 시작했다」 — 1922년 레닌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그녀는 이렇게 경고했다. 『워커스 드레드노트』를 당에 넘기기를 거부하고 CPGB에서 축출된 그녀는, 당 규율보다 자유로운 논쟁을 선택했다.
영국 참정권 운동가이자 좌익 공산주의자, 반식민 운동가. 어머니 에멀린의 WSPU와 결별하고 이스트엔드에서 노동계급 여성 조직화에 나섰다. 노동자사회주의연맹(WSF)을 창설하고,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레닌과 논쟁했으며, 이후 볼셰비키 노선을 비판하는 평의회 공산주의자로 전환했다. 생애 마지막 25년을 에티오피아 반파시스트 연대에 바쳤고, 『뉴 타임스 앤드 에티오피아 뉴스』를 통해 범아프리카주의와 라스타파리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성 삼위일체 대성당 애국자 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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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맨체스터에서 에멀린·리처드 팽크허스트의 딸로 출생
1903–1914WSPU 전임 활동가 — 로고·현수막 디자인, '블랙 프라이데이'(1910) 목격, 여성참정권 운동 전국 조직
1914–1918이스트엔드참정권연맹(ELFS) 설립, 『우먼스 드레드노트』 창간 — 전쟁 반대·징병 거부, 임대료 파업·공동급식 조직
1918–1920노동자사회주의연맹(WSF) 창설, 『워커스 드레드노트』 발행 —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참석, 레닌과 직접 논쟁
1921–1924CPGB에서 축출, 「레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발표 — 평의회 공산주의로 전환, 공산노동자당(CWP) 결성
1935–1956『뉴 타임스 앤드 에티오피아 뉴스』 창간·편집 — 이탈리아 파시스트 침공 반대, 범아프리카·반식민지 여론 형성
1956–1960에티오피아로 이주 —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고문, 최초의 교육병원 기금 모금, 『에티오피아: 문화사』 저술
1960아디스아바바에서 78세로 사망 — 에티오피아 국장, 성 삼위일체 대성당 애국자 묘역 안장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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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1937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KPO 대원 6명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자, 탈하이머와 브란들러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체포된 동지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개인적 보증을 떠맡는다. 그들은 반파시스트이며 혁명가로서, 스페인 혁명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독일공산당(KPD) 창립 멤버이자 1920년대 초반 당의 주요 이론가. 1923년 '독일 10월' 봉기 계획 당시 하인리히 브란들러와 함께 당을 이끌었으나 실패 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강의했으며, 부하린과 함께 코민테른 강령 초안 작업에 참여했다. 1929년 KPD에서 축출된 후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고, 보나파르트주의에 기초한 독자적 파시즘 이론을 발전시켰다. 1933년 이후 프랑스·쿠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반파시스트 저술을 이어갔다.
미국인 KMT 지지자들이 쑨원에게 '보로딘이 가명이며 본명은 그루젠베르크라는 걸 아십니까' 하고 경고하자, 쑨원은 이렇게 답했다. '압니다. 라파예트요.'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분트에,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1905년 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망명 러시아인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멕시코 초대 소비에트 영사로 멕시코공산당 창립을 도왔고, 1923년부터 광저우에서 국민당을 레닌주의 전위정당으로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성사시킨 국공합작은 중국공산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으나, 1927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와해되었다.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3·1운동을 변론한 민족인권변호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된 진보적 민족주의자
3·1운동 재판에서 '공소불수리론'을 제출하자 일제 검사들이 법정에서 반발했고, 그 광경은 전국 신문에 보도되어 허헌을 항일변호사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1907)로, 3·1운동 민족대표 47인을 변론하며 김병로·이인과 함께 '3대 민족인권변호사'로 불렸다. 1927년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에 피선되어 항일민족전선을 이끌었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선인민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냈다. 1946년 남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 최고인민회의 초대 의장과 김일성대학 초대 총장에 취임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민족운동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한 조선 근대사의 가교였다.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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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1920s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 공화국 붕괴 직전 마지막 연설, 1919년 8월 1일
옛 트란실바니아 출신 유대계 언론인에서 혁명가로 전향한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실질적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다. 유럽사상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133일간 이끌며 산업 국유화를 추진했으나, 토지 분배 대신 국영농장을 택해 농민의 지지를 잃고 협상국 개입 속에 붕괴했다. 망명 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선전선동부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했고, '제3시기' 좌경노선을 지지하다 1935년 인민전선 전환을 놓고 디미트로프와 대립했다.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이듬해 총살, 1955년 복권되었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수차례 테러를 겪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결성,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총독부로부터 평화적 치안권 이양을 받아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47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통일정부를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백의사에 암살당했다. 남북 모두가 공식 추모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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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 당수 취임
19192·8독립선언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1920–1922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입당;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레닌·트로츠키 면담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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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독일 철학자
“이런 교수들이 몇 명만 더 나와 이론을 뽑아내면 우리는 끝장이다.” —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코르슈와 루카치를 겨냥해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와 철학』(1923)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유물사관을 적용해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회복을 주장했고, 이는 코민테른의 맹렬한 비판을 불렀다. 1923년 튀링겐 노동자 정부의 법무장관, KPD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좌파 반대파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학자로 활동하며 브레히트·벤야민·프랑크푸르트학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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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0뮌헨·제네바·베를린에서 법학·철학 수학, 예나 대학 법학 박사
1912–1914런던에서 법률 연구, 페이비언협회 가입
1914–1918독일군 복무 — 무기 소지 거부, 두 차례 철십자 훈장 수여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입당, 군인평의회 대표
1920USPD 좌파와 함께 KPD 합류, 예나 대학 강사
1923.3『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출간 — 코민테른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됨
1923.10–11튀링겐 노동자 정부 법무장관 — 제국군의 진압으로 27일 만에 붕괴
1924–1928KPD 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제5차 대회 참석
1926.4KPD에서 축출 — 당내 좌파 반대파 '결연한 좌파(Entschiedene Linke)' 결성
1933제국의회 방화 사건 당일 독일 탈출 — 덴마크·영국 경유
1936–1961미국 망명 — 툴레인 대학,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 브레히트에 마르크스주의 강의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