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사람을 뽑아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돌아섰다.
피터 프라이어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이자 기자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진실과 국제적 연대를 함께 추구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봉기를 취재했지만 Daily Worker에 보낸 기사는 검열되거나 묵살되었고, 그는 『헝가리의 비극』으로 공식 노선에 맞섰다. 이 충돌은 그의 공산당 제명과 영국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기여했으며, 이후 그는 흑인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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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청년공산주의자동맹 가입
1943–1947Yorkshire Post 기자
1945영국 공산당 입당
1948–1956Daily Worker 의회·외신 특파원
1956헝가리 혁명 취재, 『헝가리의 비극』 집필
1957–1959The Newsletter 편집자, Socialist Labour League 창립 참여
우리는 최근 과거의 역사를 굵은 선으로 가른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위기에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질 것이다.
가톨릭 평신도 지식인으로 1958년 독립 월간지 《비엥치》를 창간·주재하고,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즈나크' 가톨릭 의원단 소속으로 의회에서 양심적 반대를 실천한 폴란드의 정치인이다. 1980년 그단스크 파업에서 연대노조 고문단을 이끌고 《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을 맡았으며, 계엄령 아래 1년간 억류된 뒤 1989년 원탁회의 협상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1989년 8월 24일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당 총리로 취임해 발체로비치 계획을 통한 급진적 시장 개혁을 단행했고, '굵은 선'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1990년 대선에서 바웬사에 패배한 뒤 민주연합을 창당해 이끌었다.
그는 후일 회고했다: "나는 분노한 나머지 가구용 칼을 들고 스피커 기둥에 올라가 전선을 끊으려 했다."
스타니스와프 마티야는 포즈난 체겔스키(ZISPO) 공장의 목수로, 동료들의 신임을 얻어 노동자 권리 수호의 대변인이 된 인물이다. 1956년 6월 바르샤바 협상에 나선 27인 대표단의 수장으로서 임금 인상과 세금 환급 약속을 받아 냈으나, 정부가 이를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봉기의 비공식 지도자로 떠올랐다. 진압 후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겪고 공장에서 해고당했지만, 1980년 연대노조의 명예 회원이 되어 1981년 포즈난 십자가 추모비를 제막한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12월 22일 아침, 그는 절친한 군의관에게 부탁해 멀쩡한 왼쪽 다리에 깁스를 감고 혁명 진압에서 빠지려 했다.
루마니아 공산군 포병장교 출신으로 1986년 국방차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22일 차우셰스쿠로부터 국방장관에 임명된 직후 군에 병영 복귀 명령을 내려 혁명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고, 12월 25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조직·집행했다. 혁명 후 국방장관과 국가경제장관을 지냈으나, 티미쇼아라 유혈 진압 책임으로 2008년 살인죄가 확정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민이 부관에게 소련군에 경고하라 명하자 부관은 '쏘는 쪽이 소련군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민은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거짓말이다, 그럴 리 없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 칼크파의 실질적 2인자이자 1978년 4월 혁명의 군사적 설계자. 미국 유학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후 귀국하여 당내 군부 조직책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부수상·외무장관·국방장관을 거치며 타라키를 제치고 실권을 장악했다. 1979년 9월 타라키를 축출·처형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직에 올랐으나, 가혹한 숙청과 반란 확산 속에 소련은 그를 통제 불능으로 판단했다. 12월 27일 KGB 특수부대의 타지베크 궁전 습격으로 살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소련 동지들은 나를 한없이 사랑하며, 내 개인적 안전을 위해 내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 꼭두각시 대통령이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기 유폐의 실상.
바브라크 카르말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멤버이자 파르참(깃발) 분파의 지도자로, 1978년 4월 혁명 후 부수상이 되었으나 곧 칼크파의 숙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프라하에서 해임된 뒤 아프간 정권의 암살단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 비밀경찰의 보호 아래 숲속 오두막에서 은신했으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함께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집권 기간 중 사면령, 새 국기 채택, 기본원칙 헌법 제정 등으로 정권의 기반을 넓히려 했으나,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고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은 교착에 빠졌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된 뒤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종료를 선언하자, 그는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떠나던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크레인 기사로, 1980년 8월 해고가 연대(Solidarity) 탄생의 불씨가 된 폴란드 노동운동가이다. 16년간 용접공으로 일하며 작업량 기준의 270%를 채운 '노동 영웅'이었지만, 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하며 당국과 맞서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파업 3일째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하자 알리나 피엔코프스카와 함께 문을 막고 노동자들을 돌려세워 임금 투쟁을 연대 파업으로 바꾸었다. 이후 바웬사의 독주와 노조의 변질을 비판하며 거리를 두었고, 2010년 스몰렌스크 항공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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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입사, 용접공으로 16년 근무 후 크레인 기사로 전직
1968상사의 비자금 횡령을 고발, 해고 위기를 부서 노동자 전체의 지지로 막아냄
1978자유노조 해안지부(WZZ) 공동 창립, 지하 신문 『해안의 노동자』 편집
1980-08-07불법 노조 활동으로 해고, 정년 5개월을 앞둔 시점
1980-08-14해고가 그단스크 파업을 촉발, 공장간파업위원회(MKS) 간부회 일원으로 8월 협정 서명
동독의 대표적 선전 담당자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을 거쳐 SED 정치국 위원 겸 동베를린 제1서기에 올랐다.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변하여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했다. 훗날 자신의 실수가 체제의 '관 속의 마지막 못'이었다고 인정했고, 통일 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동독 체제에 대한 공개적 반성으로 감형됐다.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출신으로,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 민족구국전선(FSN)을 이끌며 차우셰스쿠 체제를 종식시켰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승인했으며, 1990년 85% 득표로 루마니아 최초의 자유선거 대통령이 되었다. 광부를 동원해 반대 시위를 진압한 미네리아드 사태로 평판에 금이 갔고, 훗날 혁명기 살상에 대한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NATO 가입과 EU 가입 협상을 완료했으나,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1980년 파업이 시작되자 그는 노동자 조직과 자유로운 정보의 족쇄가 마침내 끊겼다고 선언했다.
야체크 쿠론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당 관료제의 지배와 분리해 다시 사유한 역사가이자 조직가였다. 카롤 모드젤레프스키와 함께 쓴 「당에 보내는 공개서한」은 관료제가 노동계급을 지배한다고 비판하면서 노동자 평의회와 민주적 다원주의를 제안했다. 그는 1976년 노동자 방어위원회(KOR)를 공동 창립해 노동자와 지식인을 연결했고, 1980년에는 연대의 핵심 자문역으로 노동자 자주관리 노선을 밀었다. 1981년 12월 13일 계엄령 첫날 밤 구금된 뒤에도 지하 연대를 지지했으며, 1989년 이후에는 노동·사회정책 장관으로 전환기의 사회적 권리를 다뤘다.
마리안 유르치크는 슈체친 조선소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80년 파업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국가와 협상한 지도자였다. 그는 8월 30일 슈체친 협정에 서명했지만, 단결권 보장을 얻지 못한 채 경제적 양보를 받아들였고, 하루 뒤 그단스크에서 더 폭넓은 합의가 성립하면서 두 지역의 차이가 선명해졌다. 계엄 뒤에는 수감과 재판을 겪었으며, 훗날 레흐 바웬사 진영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 노동조합 노선을 이어 갔다.
"부자유하고 억압받는 자들 가운데 위대한 사람은 오직 억압자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자뿐이다" —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 (1972)
가이아나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24세에 런던대학 SOAS에서 아프리카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대학과 자메이카 서인도제도대학에서 강의하며 범아프리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한 독자적 분석을 구축했다. 1972년 출간된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저발전시켰는가』는 노예무역과 식민주의,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아프리카의 저발전을 구조적으로 생산했다고 논증하며 제3세계 역사학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1974년 귀국 후 노동인민동맹(WPA)에서 활동하며 다인종 노동계급 연대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를 전개했다.
“우리가 협상하는 이유는 사회주의를 위한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다. 나는 공산주의자다.” — 암살 직전 인터뷰, 1993년
남아공 공산당 사무총장이자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참모총장으로,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장투쟁에서 협상 전환까지 남아공 해방운동의 좌익을 이끈 혁명가. 1993년 극우 이민자에게 암살되면서 민주이행을 위기로 몰아넣었으나, 그의 죽음은 오히려 1994년 총선을 확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며, 결코 팔리지 않을 것이다.” — 헌터칼리지 연설, 뉴욕, 1983년 8월
그레나다의 혁명가이자 인민혁명정부 수상(1979–1983).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신JEWEL운동(NJM)을 이끌며 1979년 부패한 게일리 정권을 무너뜨렸다. 집권 후 문맹률을 35%에서 5%로, 실업률을 50%에서 14%로 낮추고 무상의료·여성평등임금·출산휴가를 도입했다. 쿠바와 협력해 국제공항을 건설했으며, '우리는 누구의 뒷마당도 아니다'라는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1983년 부수상 버나드 코드의 내부 쿠데타로 처형되었고, 이는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으로 이어졌다.
소련 철수 후에도 3년을 버텼으나 탈레반에 의해 잔혹히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소, 당신이 나를 설득해 밀어붙였고 지원을 약속했소. 이제 나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운명에 내던지는 것이오." 셰바르드나제에게, 1991년 가을
파슈툰 명문가 출신의 의사이자 PDPA 파르참파 활동가였던 나지불라는 1980년부터 5년간 비밀경찰 KHAD를 이끌며 잔혹한 탄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목을 받아 1986년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신해 PDPA 사무총장 겸 대통령에 올랐다. '민족화해' 정책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복원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했으나 내전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련군 철수를 막으려 애썼지만 1989년 2월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3년간 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군사·경제 지원이 끊기고 둠두스툼의 배신으로 정권이 붕괴하자 카불의 UN 건물로 피신했으며, 1996년 탈레반이 수도를 점령했을 때 끌려나와 고문 끝에 살해되어 시신이 전시되었다.
"당신은 그들을 배신했어요. 이제 당국이 우리를 빈대처럼 짓밟을 겁니다."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그에게 한 말.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간호사로 일하며 1978년 자유해안노조(WZZ) 창립에 참여하고 지하신문 『해안의 노동자』에 노동안전과 직업병에 관한 글을 기고한 폴란드의 반체제 노동운동가이다. 1980년 8월 16일, 경영진이 임금인상을 약속하자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했지만, 피엔코프스카는 안나 발렌티노비치와 함께 조선소 정문을 막아서서 동조 파업에 들어간 다른 공장 노동자들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며 파업을 연대로 전환시켰다. 이 개입으로 공장간파업위원회(MKS)가 결성되었고, 그녀는 21개 요구 중 의료개혁을 담은 16번 요구의 초안을 썼으며 8월 31일 그단스크 협정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클루지 출신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로, 차우셰스쿠 정권의 조직적 마을 파괴 계획(체계화)을 공개 비판하고 헝가리 TV와의 비밀 인터뷰에서 인권 유린을 고발하며 세큐리타테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 16일 티미쇼아라에서 당국의 강제 퇴거 집행을 막으려 모인 신도들의 저지로 시작된 시위는 곧 반체제 봉기로 확산되어 루마니아 혁명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혁명 후 오라데아의 개혁교회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 재건과 헝가리어 교육에 힘썼으며,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피델은 대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그를 대체하지 않는 한.” — 대학생 연설, 2006년
7·26 운동 창립 멤버로 몬카다 병영 습격(1953)과 그란마 상륙에 참가했으며,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오리엔테에 게릴라 해방구를 건설한 쿠바 혁명의 핵심 지휘관. 1959년부터 2008년까지 혁명무력부 장관을 지내며 현대 국가 사상 최장기 국방장관을 기록했고, 쿠바의 군사·보안 기구를 구축하고 공산당 제도화를 주도했다. 2008년 형 피델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과 2011년 당 제1서기에 취임, 신중한 시장 개혁을 추진하며 2018년과 2021년 차례로 퇴진하기까지 반세기 넘게 쿠바 혁명의 없어서는 안 될 2인자로 군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