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1991

마지막 세대 226명

소련을 개혁하려 한 사람들과 그 종말을 앞당긴 사람들, 마지막 소비에트 세대.

표도르 그리고리예비치 우글로프

Фёдор Григорьевич Угл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인 1904–2008 ○ 심장마비로 사망

반알코올 캠페인의 핵심 선전가였던 최고령 집도 외과의사

레닌그라드의 한 교수가 젊은 우글로프의 수술 보고를 듣고 '이건 뮌하우젠 남작의 허풍이다'라고 말했다가, 직접 수술을 검토한 뒤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시베리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사라토프 의대를 졸업하고, 겨울전쟁과 900일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외과의로 복무했다. 식도·종격동·폐·심장 수술을 개척했으며, 102세까지 수술실에 서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에서 '어떤 음주도 용납될 수 없으며 술 취함은 러시아 민족의 본성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전국에 유포한 핵심 선전가였고, 종신토록 금주 운동을 이끌었다.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의 배후로 유대인 음모론을 제기하고 록 음악을 마약으로 분류하는 등 러시아 민족주의 우파와 결합한 과격한 주장으로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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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사라토프 의대 졸업, 지역 의사
  • 1939–1945겨울전쟁과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외과의로 복무
  • 1950–1991제1레닌그라드 의대 병원외과 제2학과장
  • 1953–2006『베스트니크 히루르기』 편집장
  • 1967소련 의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5『환상의 포로』 출간, 반알코올 캠페인 핵심 선전가
  • 1988전인민 금주 투쟁 연합 의장
  • 1994기네스 세계기록: 최고령 집도 외과의

드미트리 세르게예비치 리하초프

Дмитрий Сергеевич Лихач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906–1999 ○ 자연사

솔로프키를 살아남은 고대루스 문학의 세계적 권위자, 후기 소련의 도덕적 양심

1929년 가을 솔로프키. 체포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장작더미 속에 숨어 밤새 총성을 들었다. 날이 밝자 깨달았다. "내 대신 죽은 이를 위해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문헌학자·문화사가. 1928년 반혁명 활동으로 솔로프키 수용소에서 4년간 복역했다. 석방 후 푸시킨관에서 고대루스 문학을 연구했으며, 『이고리 원정기』 연구와 『고대루스 문학 기념물』 총서 편찬을 주도했다. 1970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6년 소비에트 문화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평생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사하로프 제명에 반대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인민대표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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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2반혁명 활동 혐의 체포, 솔로프키 수용소 및 벨발트라그 복역
  • 1938소련 과학아카데미 러시아문학연구소(푸시킨관) 연구원
  • 1947문헌학 박사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6–1993소비에트(러시아) 문화재단 이사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아나톨리 나우모비치 리바코프

Анатолий Наумович Рыбак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11–1998 ○ 자연사

20년간 금서였다가 글라스노스트의 상징이 된 작가

『아르바트의 아이들』 속 스탈린은 말한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이 한 문장에 한 시대의 냉혹한 논리가 응축되어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자란 유대계 소비에트 작가. 1933년 NKVD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3년 유배, 전쟁 중에는 전차부대 지휘관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1960년대에 완성한 『아르바트의 아이들』은 20년 넘게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로 마침내 빛을 보아 스탈린주의 청산의 문학적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 가문의 나치 점령 하 투쟁을 그린 『무거운 모래』(1979)는 러시아어 최초의 홀로코스트 소설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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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6NKVD 체포, 시베리아 3년 유배
  • 1941–46전차부대 지휘관, 베를린까지 진격
  • 1948–56『코르티크』『청동새』로 아동문학 데뷔
  • 1950『운전사들』로 스탈린상 수상
  • 1960s–87『아르바트의 아이들』 집필, 사미즈다트, 출판 금지
  • 1979『무거운 모래』 — 최초의 러시아어 홀로코스트 소설
  • 1987글라스노스트로 『아르바트의 아이들』 출간, 세계적 센세이션
  • 1989–91소비에트 PEN 센터 회장

세르게이 레오니도비치 소콜로프

Сергей Леонидович Сокол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11–2012 ↓ 해임 1987

마티아스 루스트 사건으로 해임된 국방장관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 조종사 마티아스 루스트가 경비행기로 소련 방공망을 뚫고 붉은 광장에 착륙했다. 이틀 뒤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가 소콜로프의 해임을 제안하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55년 복무한 원수는 한 소년의 비행 한 방에 물러났다.

하산 호 전투와 독소전에서 기갑부대를 지휘하며 성장한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로, 1967년부터 17년간 국방부 제1차관으로 군부의 제도적 중추 역할을 했다. 1978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진급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작전조 책임자로서 소련군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1984년 국방장관에 올랐으나, 1987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붉은 광장 착륙 사건으로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101세까지 생존한 유일한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소련군의 전성기와 종말을 모두 목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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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 참전, 기갑·기계화 지휘 경험 축적
  • 1960s–1970s레닌그라드 군관구와 국방부 제1차관으로 승진
  • 1979–1980s아프가니스탄 전쟁 지휘·감독에 깊이 관여
  • 1984–1987국방장관, 고르바초프 초기 군부의 보수적 얼굴
  • 1987마티아스 루스트 모스크바 착륙 사건 뒤 해임

뱌체슬라프 이바노비치 코체마소프

Вячеслав Иванович Кочемасов
외교 소련 러시아인 1918–1998 ○ 자연사

동독 해체를 지켜본 마지막 소련 대사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코체마소프는 고르바초프셰바르드나제에게 전화 지시를 구했으나 둘 다 연결되지 않았다. 그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정치인·외교관으로, 1962년부터 21년간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내며 문화·사회 정책을 총괄했고, 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의장(1966~1983)으로서 문화유산 보존 운동을 이끌었다. 1983년 동독 주재 소련 대사로 임명되어 1990년까지 냉전 최전선인 동베를린에서 근무했으며,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을 지켰다. 1990년 4월 동독의 로타어 드 메지에르 총리에게 독일 통일에 관한 소련의 11개 조건을 담은 비공식 문건을 전달하며 통일 과정에서 소련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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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고리키 주 콤소몰 제1서기
  • 1949–1955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55–1960주동독 소련대사관 참사관·공사참사관
  • 1961–1962대외문화교류 국가위원회 부의장·제1부의장
  • 1962–1983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66–1983전러시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의장
  • 1966–1983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83–1990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3–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데멘체프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Деменце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계 1918–2010 ○ 자연사

국가재정의 경고자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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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9치타·캄차카 지역 회계·재정 담당
  • 1944–1947캄차카주 통제·감사기관 감사관
  • 1949–1962고르노알타이·야로슬라블주 재정 책임자, 집행위 부의장
  • 1962–1965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가수입관리국장·차관
  • 1965–1973소련 재무부 차관
  • 1973–1986소련 재무부 제1차관
  • 1986–1987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의장

예고르 쿠즈미치 리가초프

Егор Кузьмич Лигачё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0–2021 ↓ 실각 1990

페레스트로이카 안의 보수적 제2서기

1990년 2월 6일 중앙위 전원회의, 69세의 리가초프는 사퇴 압박 속에서도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구체적 사업에 착수하고 싶다!'고 외쳤다. 이 한마디는 곧 소련 전역의 유행어가 되었고, 며칠 후 그는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톰스크에서 18년간 주당 서기로 지역 산업화를 이끌었고, 안드로포프 말기에 중앙 조직당사업부장으로 발탁되어 고르바초프 체제의 제2서기가 되었다. 반알코올 캠페인의 주도자로 개혁 초기를 함께했으나, 곧 글라스노스트 전면화와 옐친의 급진 노선을 견제하는 당 보수파의 얼굴로 돌아섰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레닌주의자' 후보로 고르바초프에게 맞섰고, 공유재산이 인민을 결속시킨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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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85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85–90제2서기, 페레스트로이카 내부 보수파
  • 1990제28차 당대회에서 실각

아나톨리 세르게예비치 체르냐예프

Анатолий Сергеевич Черняев
외교 소련 러시아 1921–2017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펜이자 양심: 신사고 외교의 설계자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을 접하고 일기에 썼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회주의 체제 역사의 한 시대 전체가 끝났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해낸 일이다. 그는 역사의 속도를 감지했고, 역사가 자연스러운 물길을 찾도록 도왔다.」

고르바초프의 수석 외교정책 보좌관이자 연설문 작성자.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동유럽 불개입 등 신사고 외교의 실무를 설계했다. 1972년부터 1991년까지 매일 쓴 일기는 페레스트로이카 최고위층 의사결정을 기록한 가장 솔직한 1차 사료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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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붉은군대 복무: 북서전선, 발트 해방 작전 참전, 소대·중대 지휘
  • 1947–1950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 졸업, 영국 노동운동사로 박사학위
  • 1950–1958모스크바대학 근현대사 강의, 학과장 대리
  • 1958–1961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
  • 1961–1986중앙위 국제부: 차장보·고문·고문단장 거쳐 1970–1986년 부부장
  • 1986–1991고르바초프 외교정책 보좌관: 정상회담 실무, 연설문, 신사고 외교 설계
  • 1992–2010년대고르바초프 재단 연구원, 회고록·일기 출간 및 기록 공개 주도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아흐로메예프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Ахроме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23–1991 ✕ 자살

INF 조약을 협상한 소련군 원수, 제국의 종말을 견디지 못하다

INF 사찰 대상으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공장을 제안한 아흐로메예프에게 조지 슐츠가 '거긴 디즈니랜드입니다!'라고 외치자, 그는 미소도 잃지 않고 답했다. '그럼 사찰단이 디즈니랜드도 좀 구경하게 하시죠.'

독소전에 해군보병 장교로 참전해 레닌그라드에서 부상한 군인으로,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을 입안하고 소련군 참모총장(1984~88)으로서 고르바초프의 최고 군사고문을 맡아 INF 조약 등 냉전 종식 협상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군사개혁과 일방적 군축에 반발해 사임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내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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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해군특별학교 졸업, 해군보병 장교로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부상. 전쟁 말 SU-76 자주포대대 부지휘관
  • 1945–1967기갑부대 지휘관·참모. 스탈린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1952), 참모아카데미 졸업(1967), 전차사단장
  • 1967–1974제8전차군 참모장, 제7전차군 사령관, 극동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74–1979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참모차장. 아프가니스탄 침공 계획 입안
  • 1979–1984참모총장 제1차장. 소련원수 진급(1983). 아프가니스탄 작전 지휘
  • 1984–1988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INF 조약 등 군축 협상 주도. 고르바초프 군사개혁에 반발해 사임
  • 1988–1991대통령 군사고문. 1991년 8월 GKChP 가담, 쿠데타 실패 후 크렘린 집무실에서 자살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루셰프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уш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23–1997 ○ 자연사

바르샤바 조약군의 마지막 총사령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루셰프 육군대장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이 되었다" — 1955년 창설된 이 직책은 36년 만에 그와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

아르한겔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부터 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총소대장으로 참전, 시냐비노 공세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며 전투 경험을 쌓았다. 전후 기갑부대로 전환해 동독 주둔 소련군에서 핵심 경력을 쌓았고, 1985년 고르바초프 체제 아래 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86년 국방부 제1차관을 거쳐 1989년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91년 조약 해체와 함께 이 직책의 마지막 보유자가 되었다. 소련 영웅(1983)과 육군대장(1981) 칭호를 받았고, CPSU 중앙위원(1981–1990)과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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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볼호프·레닌그라드 전선에서 소대장·중대장으로 참전, 두 차례 부상
  • 1950s–1960s기갑부대 장교로 복무, 전차연대장과 전차사단장 역임
  • 1969–1975동독 주둔 제1근위전차군 제1부사령관, 이후 사령관으로 진급
  • 1975–1985볼가·중앙아시아·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차례로 역임
  • 1985–1986소련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
  • 1986–1989소련 국방부 제1차관
  • 1989–1991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 (최종)
  • 1991–1992국방부 감찰장군단 군사고문, 이후 퇴역

레프 니콜라예비치 자이코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Зайк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23–2002 ↓ 실각 1990 · 자연사

방산 공장 견습공에서 군산복합체 총괄 정치국원이 된 테크노크라트

위대한 조국전쟁 중 열두 시간 교대 근무를 서던 열여덟 살 자이코프는 세 차례 전선으로 도망쳤다. 매번 공장으로 돌려보내졌지만, 방산 노동자로서의 그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으로 출발해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5–1990)까지 오른 산업 관료 출신 당 지도자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로부터 방위산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핵·재래식 무기 감축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소련이 금지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알고 있던 극소수 고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87년 보리스 옐친 축출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를 겸임했고, 방산 전자기업 노바토르와 레니네츠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총책임자까지 오른 공장 경력으로 사회주의 노동 영웅(1971) 칭호를 받았다. 이념보다 실무를 중시한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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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5레닌그라드 방산 공장 견습공·자물쇠공, 3차례 전선 탈출 시도
  • 1961–71레닌그라드 국영 '노바토르' 공장장
  • 1974–76과학생산연합 '레니네츠' 총책임자
  • 1976–83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 1983–85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85–90중앙위 서기(군수공업·기계제조 담당), 정치국 위원(1986–90)
  • 1987–89모스크바 시 당 제1서기 (겸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Яковле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923–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 이념 담당이 이념을 해체하다

1983년 5월 19일, 온타리오 주 애머스트버그의 유진 웰런 농장. 옥수수와 콩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야코블레프는 캐나다 대사 10년차의 주의를 내던졌다. "어째서인지 나는 조심을 집어던지고 그에게 외교 문제의 어처구니없는 실책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산책이 끝날 무렵, 두 사람은 체제 개혁의 동지가 되어 있었다.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상이군인이자 당 선전부의 엘리트. 러시아 민족주의를 비판한 논문으로 캐나다 대사 10년의 「유배」를 살았고, 그곳에서 시찰 온 고르바초프를 만났다. 정치국의 이념 담당으로 글라스노스트와 역사 재심을 밀어붙였고, 말년에는 비밀 의정서와 숙청 문서의 공개·복권 작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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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43전선 복무 중 중상
  • 1953–72중앙위 선전부에서 성장
  • 1972–83반민족주의 논문 파문으로 캐나다 대사 10년
  • 1983–85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
  • 1985–90선전부장, 정치국원: 글라스노스트 설계
  • 1989–2000s비밀 의정서 조사위원장, 이후 복권위원회 위원장

이반 모이세예비치 트레티야크

Иван Моисеевич Третьяк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923–2007 ○ 자연사

KAL 007 격추 명령을 내린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 트레티야크는 참모본부로부터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부하 부대에 그대로 하달했다.

소련의 육군대장(1976)으로, 독소전쟁에서 21세에 연대장을 지내며 소련영웅 칭호를 받은 전쟁영웅이었다. 전후 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1967~1976)과 극동군관구 사령관(1976~1984)을 거쳐, 1986년 국방차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방공군 총사령관(1987~1991)으로서 소련 영공방어를 총괄했다. 1983년 9월 1일 극동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 007편 여객기를 격추하라는 본부 명령을 하달하여 269명의 민간인 사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82)에도 선정될 만큼 전후 소련 군사엘리트의 전형적 궤적을 밟았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해임되며 시대의 종언과 함께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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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독소전쟁 참전: 제29근위소총사단 소대장·중대장·대대장·제93근위소총연대장
  • 1956–1957제26근위소총사단장
  • 1960–1964주독소련군 제3연합군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64–1967자캅카스군관구 제4군 사령관
  • 1967–1976벨라루스군관구 사령관
  • 1976–1984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4–1986극동방면군 총사령관
  • 1986–1987국방차관 겸 국방부 감찰총국장
  • 1987–1991국방차관 겸 방공군 총사령관

발렌틴 이바노비치 바렌니코프

Валентин Иванович Варенников
군사 · 국방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23–2009 ○ 자연사

승전기를 받아든 장군, 쿠데타 법정에 홀로 선 장군

1945년 6월, 근위대장이었던 바렌니코프 대위는 모스크바 중앙비행장에 도착한 승전기를 직접 건네받았다. 몇 시간 뒤 그 깃발은 붉은광장에서 열린 승전 퍼레이드의 선두에 섰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싸운 소련 육군 원수급 장성.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사령관으로서 철군 협상을 진두지휘했고, 작전 마기스트랄의 성공적 지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에 올랐으나,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가담했다. 쿠데타 실패 후 기소된 공모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했으며, 1994년 대법원에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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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붉은 군대 징집, 체르카스크 보병학교 입교
  • 1942–1945스탈린그라드·드네프르·바그라티온·베를린 작전 참전, 3회 부상, 대위로 종전
  • 195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67참모본부 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 1969–1971주독 소련군 제3충격군 사령관
  • 1971–1973주독 소련군 제1부사령관
  • 1973–1979카르파티아 군관구 사령관
  • 1979–1984참모본부 작전총국장 겸 제1부참모총장
  • 1984–1989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사령관 (국방부 관리단장)
  • 1989–1991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
  • 1995–2003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KPRF, 이후 로디나)

레죄 니에르시

Nyers Rezső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23–2018 ○ 자연사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개혁을 밀어붙인 당 지도자

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니에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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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 1956식품산업부 장관
  • 1960–1962재무부 장관
  • 1968신경제메커니즘 개혁 설계
  • 1974–1981헝가리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고문
  • 1987–1988국회 개혁위원회 위원장, 국무상
  • 1989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 헝가리 사회당 초대 의장

마흐무트 아흐메토비치 가레예프

Махмут Ахметович Гаре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계 타타르인 1923–2019 ○ 자연사

전쟁 경험을 군사이론으로 조직한 참모장군

1989년 철수 뒤에도 그는 카불에 남아 나지불라 정부의 전쟁 수행을 자문했다.

마흐무트 가레예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참모 업무를 바탕으로 소련군의 작전·교육 체계를 다듬은 군사이론가이자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총참모부 과학·작전 부문에서 군사과학과 훈련을 담당하며 전쟁을 분석하는 실천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남아, 소련의 원조가 이어지는 동안 정부군 작전과 군사 자문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회고록과 연구서에서 그는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의 전쟁 경험을 군사적·정치적 교훈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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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대조국전쟁 참전, 대대·여단 참모 장교
  • 1947–195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65–1970제50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제28군 참모장
  • 1970–1971아랍공화국 군사고문단 참모장
  • 1974–1984총참모부 군사과학국장, 작전총국 부참모장
  • 1984–1989소련군 총참모부 부참모장, 과학·작전훈련 담당
  • 1989–1990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수석 군사고문
  • 1995–2019군사과학아카데미 초대 회장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수하레프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Сухаре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23–2021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의 마지막 개혁 검찰총장, 스탈린 탄압 피해자 재활을 감독한 법률가

1988년 검찰총장 취임 후 수하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는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가 지휘한 검찰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수십만 명의 정치적 탄압 피해자에 대한 재활 심사를 추진했다.

보로네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항공 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 18세에 전선으로 나갔다. 통신장교로 모스크바에서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며 4개의 전투 훈장을 받고, 1944년 폴란드 나레프 강 도하 작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전역 후 콤소몰과 당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사법·검찰 분야를 담당하며 법률가로 성장해, 1970년 재창설된 소련 법무부의 제1차관으로 발탁되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 탄압 피해자들의 대대적인 법적 재활을 추진했고, 1990년 퇴임 후에도 러시아 검찰 산하 연구소를 이끌며 법치 강화와 형사사법 개혁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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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제69소총병사단 통신소대장·중대장·연대통신주임, 대위
  • 1947–1950콤소몰 보로네시 철도지구위 서기, 보로네시 주위원회 부장
  • 1950–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부장·국제부장
  • 1959–1966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지도원·RSFSR 담당 부부장
  • 1966–1970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검찰·법원·사법 부문장
  • 1970–1984소련 법무부 제1차관
  • 1984–1988러시아 SFSR 법무장관
  • 1988.2–1988.5소련 검찰 제1부총장
  • 1988–1990소련 검찰총장
  • 1991–2006러시아 연방 검찰청 산하 합법성 및 법질서 강화 연구소 부소장·소장·주임연구원

칼 겐리호비치 바이노

Карл Генрихович Вайно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에스토니아 1923–2022 ○ 자연사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1978–1988), 페레스트로이카를 거부하며 러시아화를 밀어붙인 강경파

에스토니아어를 거의 하지 못하고 짙은 러시아어 억양으로 말해 '예스토니안'이라 불렸다.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에스토니아인 볼셰비키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어가 모어였고 에스토니아어는 짙은 억양으로만 구사했다. 1978년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요하네스 케빈의 후임으로 제1서기가 되어 극단적인 러시아화를 추진했고, 1979년에는 암살 미수 사건을 겪었다.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 후 당 기구를 총동원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으나, 이듬해 6월 모스크바에 의해 경질되어 바이노 밸랴스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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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톰스크(오늘날 옴스크) 교통대학 졸업, 전연방공산당 입당, 에스토니아 SSR 철도 기술자로 근무
  • 1948–1953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주위원회 서기
  • 1953–1957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서장
  • 1957통신고등당학교 졸업
  • 1957–1960에스토니아 SSR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1960–1978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8–1988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8–1990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당통제위원회 위원

텡기즈 예브게니예비치 아불라제

თენგიზ ევგენის ძე აბულაძე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그루지야 1924–1994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문화적 신호탄을 쏘아올린 그루지야의 영화감독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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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트빌리시 연극학교 입학, 1946년 졸업
  • 1953VGIK 졸업, 그루지야필름 입사
  • 1955「마그다나의 당나귀」 공동 연출, 칸영화제 단편상(1956)
  • 1967삼부작 첫 영화 「기도」 완성
  • 1976「소망의 나무」 완성, 트빌리시 연극학교 교수
  • 1984「참회」 완성, 2년간 상영 금지
  • 1986「참회」 공개, 글라스노스트의 상징이 되다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선출

게오르기 호스로예비치 샤흐나자로프

Георгий Хосроевич Шахназар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아르메니아 1924–2001 ○ 자연사

소련 정치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 정치개혁의 두뇌

고르바초프도, 나도, 우리 모두 이중사고자였다. 머릿속에서 진실과 선전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반체제냐 굴종이냐, 그게 선택지였다」

바쿠 출신 아르메니아계 정치학자·법학박사. 소련 정치학회를 창립해 17년간 이끌며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론을 개척했고, 소비에트 사회 내 이익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한 초기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고르바초프 보좌관으로서 당 독점 폐지·경선 도입·대통령제 전환의 헌법개혁을 설계했으며, 퇴임 후 회고록 『자유의 대가』를 집필하고 SF 작가 '게오르기 샤흐'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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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포병대 화기소대장·포대정찰반장, 쾨니히스베르크·세바스토폴·민스크 해방전 참전
  • 1949–1952아제르바이잔 국립대 법학부 졸업, 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대학원
  • 1952–1960정치출판사(Politizdat) 편집자
  • 1960–1964『정치자습』·『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근무
  • 1964–1988중앙위 사회주의국가부 자문관 → 부부장 → 제1부부장 (동독·폴란드·체코·쿠바 담당)
  • 1969법학박사: 논문 「사회주의 민주주의: 문제와 전망」
  • 1973–1990소련 정치학회 회장, 국제정치학회(IPSA) 부회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연방최고회의 대의원
  • 1988–1991고르바초프 보좌관 → 소련 대통령 고문: 정치개혁·헌법개정 설계
  • 1990–1991인민대의원, 최고회의 헌법입법소위원회 위원장
  • 1992–2001고르바초프 재단 글로벌문제센터 소장

바실리 알렉산드로비치 딘코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инк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비에트 연방 불가리아 1924–2001 ○ 자연사

소련을 세계 최대 가스 생산국으로 만든 가스·석유공업 장관

1985년 가스공업 장관에서 석유공업 장관으로 전보되자,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 영혼은 가스맨이야. 어쩔 수 없지."

불가리아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대조국전쟁 정찰병으로 참전, 전후 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을 지냈다.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후 크라스노다르 유전 기술자로 출발해 1981년 소련 가스공업 장관에 올랐다. 재임 중 가스 생산량을 세 배로 끌어올리고 우렌고이-포마리-우주고로드 횡단대륙 가스관(4,450km)을 완공해 서유럽까지 잇는 통합가스공급체계를 완성했다. 1985년 석유공업 장관으로 옮겨 1988년 소련 사상 최대 원유 생산량(연 6억 2,400만 톤)을 기록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단일 국가 최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퇴임 후 가스프롬 이사와 텐더위원장으로 시장경제 이행기의 러시아 가스 산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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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7소련군 정찰병, 대조국전쟁 참전
  • 1947–1954크라스노다르 콜호스 의장, 아제르바이잔 공업대학 졸업
  • 1954–1962크라스노다르네프티 · 아빈네프티 기술자
  • 1962–1965크라스노다르 가스관리국장 → 쿠반가스프롬 초대 사장
  • 1966–1970소련 가스공업부 가스채취총국(글라브가스도비차) 국장
  • 1970–1981소련 가스공업 차관 → 제1차관
  • 1981–1985소련 가스공업 장관
  • 1985–1989소련 석유공업 장관
  • 1979–1989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투르크멘 SSR)
  • 1986–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유리 파블로비치 막시모프

Юрий Павлович Максим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24–2002 ○ 자연사

아프간 전쟁과 소련 해체 속에서 전략로켓군을 지휘한 군대대장

1943년 7월 17일, 첫 전투에서 기관총 소대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백병전 끝에 고지를 탈취한 뒤 7차례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자 가족에게는 전사 통지서가 발송되었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기관총 중대를 지휘하며 세 차례 부상을 입고도 카르파티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종전을 함께한 보병 장교로, 전후 두 개의 참모 아카데미를 금메달로 졸업하고 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제40군의 작전을 관할했다.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재임하며 소련 핵전력 최전성기인 1,400기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체제를 지휘했고, 소련 붕괴 후에도 전략억지군 사령관으로서 CIS 통합 지휘 체계의 이행을 맡았다. 말년까지 한 번도 당과 군을 떠나지 않고 국가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핵무기에 대한 민간 통제라는 헌법적 원칙을 지킨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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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제1모스크바 기관총 사관학교 졸업, 남서전선 배치
  • 1943–1945제187·195근위소총연대 기관총 소대장·중대장, 2·3·4우크라이나전선
  • 1947–1950프룬제 군사아카데미
  • 1950–1953참모본부 작전총국 장교
  • 1957–1961주헝가리 남부군집단 차량화소총연대장
  • 1965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 1965–1968제77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아르한겔스크)
  • 1968–1969예멘 아랍 공화국 주재 최고군사고문
  • 1973–1976투르키스탄 군관구 제1부사령관
  • 1976–1978알제리 주재 소련 군사전문가단장
  • 1979–1984투르키스탄 군관구 사령관, 아프간 전쟁 관할
  • 1982소비에트연방영웅, 육군대장 진급
  • 1984–1985남부전략방향군 총사령관
  • 1985–1992전략로켓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CIS 전략억지군 사령관 이임
  • 1993퇴역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크류치코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рючк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924–2007 ↓ 체포 1991

8월 쿠데타를 설계한 KGB 의장

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내부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파블로프 총리의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고, KGB 의장은 모스크바 경찰학교 생도들에게 체포되었다.

1956년 부다페스트의 안드로포프 밑에서 경력을 시작해 KGB 의장까지 오른 심복.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조직해 고르바초프를 크림에 연금했으나, 군이 움직이지 않자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감옥에서 회고록을 썼고, 1994년 사면되어 조용히 죽었다. 그가 지키려던 나라보다 16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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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부다페스트 대사관 3등서기관(안드로포프 휘하)
  • 1967–74KGB 의장 비서실
  • 1974–88제1총국장: 해외정보 총괄
  • 1988–91KGB 의장
  • 1991.8국가비상사태위원회 주도
  • 1991–94수감, 사면

드미트리 티모페예비치 야조프

Дмитрий Тимофеевич Яз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24–2020 ↓ 체포 1991

8월 쿠데타의 국방장관

사면을 받아들인 이유를 묻자: "거부했더라면 모스크바 거리의 아스팔트를 탱크로 망가뜨린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테니까."

제2차 세계대전에 17세로 자원입대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쿠바 주둔 소련군을 지휘했다. 1987년 국방장관에 기용된 후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군축과 개혁에 저항하며 군부 불만의 상징이 되었고, 1990년 최후의 소비에트 연방원수로 진급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지휘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합류했으나 옐친의 백악관 진압을 거부해 쿠데타 실패를 결정지었다. 체포·수감 후 사면되었고, 리투아니아에서 1991년 1월 사건으로 궐석 유죄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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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어린 장교로 독소전에 참전
  • 1960s–1970s극동·중앙아시아 등 군관구 지휘를 거쳐 승진
  • 1987–1991국방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군의 불만을 대표
  • 1991.8국가비상사태위원회에 참여하나 군을 결정적으로 움직이지 못함
  • 1991–1994체포·수감 뒤 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