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1991

마지막 세대 226명

소련을 개혁하려 한 사람들과 그 종말을 앞당긴 사람들, 마지막 소비에트 세대.

블라들렌 미하일로비치 미하일로프

Владлен Михайлович Михайл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25–2004 ○ 자연사

소련 말기 GRU를 이끈 마지막 군사첩보 수장

1990년 가을, 동유럽 주둔 정보망이 하나둘 접히던 때 한 장교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미하일로프가 답했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냥 무너지고 있을 뿐이다.'

전쟁 말기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교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해, 프룬제 사관학교와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거쳐 사단장·군단 참모장·참모총장 보좌관을 두루 역임한 정통 군인이다. 1979년부터 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고, 귀국 후 총참모부 주작전총국장으로서 소련군의 작전기획을 총괄했다. 1987년 7월 GRU 국장에 임명되어 아프가니스탄 철군,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소련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 군사첩보를 지휘했으며, 1990년 대장으로 진급했다. 소련 GRU의 마지막 정규 국장으로서 1991년 10월까지 재임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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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49입대 → 블라디보스토크 보병학교 → 소대장 → 중대장
  • 1951–54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 발트 군관구 소총대대장
  • 1958–66연대 참모장 → 차량화소총연대장, 발트 군관구
  • 1966–68총참모부 사관학교 졸업
  • 1969–79제21차량화소총사단장(GSVG) → 제15군 참모장 → 투르키스탄 군관구 참모장
  • 1979–80베트남 인민군 총참모부 선임 군사고문
  • 1980–83총참모부 제7국장 → 주작전총국장
  • 1983–87극동군 총사령부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87.2–7GRU 제1부국장
  • 1987.7–1991.10GRU 국장 겸 총참모부 차장
  • 1992건강상 이유로 퇴역

유리 필리포비치 솔로비요프

Юрий Филиппович Соловьё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5–2011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리가초프 측근

1989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솔로비요프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했다고 보고하며,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기술 관료로 성장한 후 당 기구로 옮겨갔다. 198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소련 제2도시를 책임졌다. 1989년 3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유권자 60%가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으며,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한 이 사건은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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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73렌메트로스트로이 근무, 수석기술자 거쳐 국장
  • 1973–1974레닌그라드 시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4–197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75–1978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78–1984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84–1985소련 산업건설부 장관
  • 1985–1989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1986년부터 정치국 후보위원 겸임)

구리 이바노비치 마르추크

Гурий Иванович Марчук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 러시아 러시아 1925–2013 ○ 자연사

소련 과학아카데미 마지막 총재이자 시베리아 계산수학의 개척자

“과학은 단일한 살아 있는 유기체이지, 자율적 메커니즘들의 덩어리가 아니다. 불행히도 정치인도 과학계도 국내 과학을 구할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 소련 해체 직후, 1991년 12월 17일

시베리아에 계산수학의 중심지를 세우고 소련 과학행정의 정점에 오른 응용수학자다. 핵반응로 계산, 대기·해양 수치모델링, 면역반응의 수리모델을 개척했으며 분할법과 수반방정식 이론으로 계산수학의 기초를 다졌다. 1964년 노보시비르스크에 소련 최초의 대규모 수치모델링 센터인 계산센터를 설립했고, 198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을 주도했다. 소련 해체와 함께 마지막 총재가 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산수학 연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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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2피직스에너지연구소 수학부장 (오브닌스크)
  • 1964–1980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계산센터 소장
  • 1975–1980시베리아 지부 의장 ·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80–1986GKNT 의장 ·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
  • 1991–2013RAS 상임간부회 명예위원 · 계산수학연구소 소장/명예소장

블라디슬라프 그리고리예비치 콜레스니코프

Владислав Григорьевич Колесник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25–2015 ○ 자연사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를 페레스트로이카 말기까지 이끈 마지막 전자공업 장관

그의 지휘 아래 보로네시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가 탄생했고, 로켓·우주·전략핵전력 통제체계에 들어갈 전자장비들이 잇따라 개발되었다.

소련 전자공업의 핵심 인물로, 1960년대 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에서 소련 최초의 집적회로를 개발·양산했으며, 1971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제1차관으로서 군수·우주·전략핵무기 체계에 필요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반을 확충했다.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장관으로 승진하여 몰락 직전까지 소련의 컴퓨터·반도체 산업을 총괄했으나, 서방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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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툴라 무기공장 · 카스토르나야 기관차 차량기지 정비공
  • 1948–1952보로네시 무선부품공장 기술자 → 연구소장 → 부수석설계자
  • 1952–1954주동독 소련 통상대표부 근무
  • 1958–1969보로네시 반도체소자 공장 수석기술자 → 공장장
  • 1969–1971보로네시 '엘렉트로니카' 생산조합 총책임자
  • 1971–1985소련 전자공업부 제1차관
  • 1985–1991소련 전자공업부 장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쿠르노소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рносов
연구자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6–1998 ○ 자연사

체르노빌 4호기를 봉인한 '대피호'의 저자이자 기술 책임자

그는 파괴된 원자로를 조사하기 위해 기중기 갈고리에 매달린 '바티스카프'에 직접 올라탔다.

탐보프 출신의 소련 원자력 건설 기술자로, 1953년 레닌그라드 공학건설연구소를 졸업한 뒤 ВНИПИЭТ에 입사해 평생 한 연구소에서 일했다. 1957년 키시팀 사고 수습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1986년 체르노빌에서는 불과 206일 만에 4호기를 봉인하는 '대피호'(석관) 프로젝트의 저자 겸 기술 책임자로서, 방사능 현장을 직접 '바티스카프'에 매달려 조사하며 세계 유례없는 공학적 해법을 설계했다. 훗날 ВНИПИЭТ의 총책임자(1989~1998)로 재직하며 아르자마스 사고와 키로바칸 지진 복구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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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ВНИПИЭТ 입사, 엔지니어로 시작
  • 1957키시팀 사고(첼랴빈스크-65) 수습 프로젝트 책임자
  • 1985–1989ВНИПИЭТ 주임기사
  • 1986체르노빌 4호기 '대피호'(석관) 프로젝트 저자 겸 기술 책임자
  • 1989–1998ВНИПИЭТ 총책임자(원장)
  • 1996러시아 연방 공훈건설자 칭호 수여

비탈리 이바노비치 보로트니코프

Виталий Иванович Воротник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926–2012 ○ 자연사

러시아를 떼어내지 않으려 했던 RSFSR의 마지막 수반

1989년 10월 당 중앙위원회 RSFSR 정치체제 회의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따로 만드는 것은 소련을 분할하는 길이다." 고르바초프의 구상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항공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쿠이비셰프·보로네시 지역 당 제1서기를 거친 소비에트 제도인. 브레즈네프 말기 쿠바 대사로 좌천되었다가, 안드로포프가 부패 척결을 위해 크라스노다르 지역에 투입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1983년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라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5년간 이끌었고, 체르노빌 사고 직후에는 정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현장 수습에 참여했다. 1988년 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국가원수)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분리 공산당 창설을 밀어붙이자 이에 공개 반대하며 소련이라는 틀 안에서의 RSFSR을 끝까지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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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60쿠이비셰프 항공공장 기술자 → 당위원회 서기
  • 1961–67쿠이비셰프 주 당 서기 → 제2서기 → 주 집행위 의장
  • 1971–75보로네시 주 당 제1서기
  • 1975–79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9–82주쿠바 소련 대사
  • 1982–83크라스노다르 변경주 당 제1서기: 부패 척결
  • 1983–88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정위원
  • 1988–90RSFSR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브세볼로드 세라피모비치 무라홉스키

Всеволод Серафимович Мураховский
농업 소련 러시아 1926–2017 ↓ 퇴임 1989

고스아그로프롬의 초대 의장

1985년 10월 고르바초프는 6개 농업 부처를 하나로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를 구상하며 "몇 년 동안 이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밝혔다. 한 달 뒤 무라홉스키가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반년 만에 스스로 개편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15세에 붉은 군대에 합류해 노보로시스크 방어전과 만주 작전에서 싸운 전쟁 참전자였다. 스타브로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후임 변경주당 제1서기(1978~1985)로 지역 농업과 산업 발전을 이끌며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오른 직후 소련 부총리 겸 국가농공위원회 초대 의장으로 발탁되어 6개 농업 관련 부처를 하나로 통합하는 대대적 행정 개편을 단행했으나, 거대 관료 기구의 비효율이 드러나 1989년 기구 폐지와 함께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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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1989국가농공위원회 의장

발렌틴 미하일로비치 팔린

Вале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Фалин
외교 소련 러시아 1926–2018 ○ 자연사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양보에 맞섰던 소련 최고의 독일 전문가

“1980년대 초 서독은 소련군 철수와 동독의 바르샤바조약 탈퇴만으로 1000억 마르크의 무상 차관을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아르히즈에서 140억 마르크를 받아들였다.” — 독일 통일 협상의 대가에 대해

소련 최고의 독일 문제 전문가로, 흐루쇼프와 그로미코의 연설문 작성자로 외교 경력을 시작해 1971–1978년 서독 대사를 지냈다. 1988–1991년 CPSU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으로서 외무부와 나란히 작동하는 평행 외교 기구를 이끌었고, 1990–1991년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독일 통일 협상에서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양보에 가장 강력히 반대한 인물로, 1989년 율리 크비친스키와 함께 쇠퇴하는 소련의 군사적 영향력을 에너지 의존으로 대체하려는 팔린-크비친스키 독트린을 정식화했다. 고르바초프가 통일 독일의 NATO 가입을 사실상 무상으로 허용했다고 비판하며, 모스크바가 최대 1000억 마르크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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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2독일 내 소련통제위원회 근무
  • 1952–1958소련 외무부 정보위원회
  • 1959–1971외무부 제3유럽(독일)부장, 그로미코 보좌관, 흐루쇼프 연설문 작성
  • 1971–1978주서독 소련 대사
  • 1978–1982CPSU 중앙위 국제정보부 제1부부장
  • 1983–1986『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실각기)
  • 1986–1988노보스티 통신사(APN) 이사회 의장
  • 1988–1991CPSU 중앙위 국제부장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1992–2000함부르크대학 평화연구·안보정책연구소 교수
  • 2000–2018모스크바 거주,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MGIMO) 강의

예프렘 예브세예비치 소콜로프

Яфрэм Евсеевич Сакалоў
당 최고 지도자 소련 벨로루시아인 1926–2022 ○ 자연사

농업 개발과 말기 개혁을 조율한 벨로루시아 당 지도자

그는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혁신을 위한 혁신에는 제동을 걸었다.

농업 전문가 출신인 예프렘 소콜로프는 벨로루시아의 지역 행정과 당 조직을 거쳐 공화국의 당 지도자가 된 실무형 정치인이었다. 그는 대규모 축산 단지와 도로 건설을 추진해 브레스트 지역의 생산 기반을 확장했으며, 1986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공화국의 소유권과 경제 권한을 더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고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 지도의 공개를 지시했지만, 스스로를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며 급진적 혁신에는 신중했다. 1990년 벨로루시아 당 제1서기에서 물러났고 그해 잠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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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50붉은군대 제5독립예비공병연대 복무
  • 1956–1958브레스트주 농업 전문가와 농업감사관
  • 1958–1961이바노보 지구당 제2서기
  • 1961–1965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를류튜프 지구당 제1서기 등
  • 1969–1977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 부부장·부장
  • 1977–1987브레스트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90벨로루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라피크 니쇼노비치 니쇼노프

Rafiq Nishonovich Nishonov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우즈베키스탄 1926–2023 ↓ 퇴임 1991

소련 말기의 마지막 민족소비에트 의장

그의 이름 '라피크'는 아랍어로 '동지'를 뜻한다. 고르바초프가 그를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발탁하자, 우크라이나 콤소몰 서기 발레리 치부흐는 '고르바초프의 개인 라피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우즈베크 농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타슈켄트 시당과 공화국 외무장관을 거쳐 1988년 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라시도프 목화 스캔들 이후 공화국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듬해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에 발탁되었다. 연방 해체라는 격변 속에서도 다민족 국가의 마지막 의회를 이끈 우즈베크 출신의 최고위 연방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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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s–1970s우즈베크 공화국 외교·당 행정에서 성장
  • 1986–1988우즈베크 공산당 제1서기, 라시도프 이후 공화국 정리 국면 담당
  • 1989–1991민족소비에트 의장, 연방 해체기의 마지막 대표 라인
  • 19918월 쿠데타와 연방 붕괴 속에서 직위가 소멸
  • 1991 이후러시아에서 생활하며 소련 말기 공화국 엘리트로 남음

겐나디 바실리예비치 콜빈

Геннадий Васильевич Колбин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27–1998 ○ 심장마비

낯선 러시아인 당간부로 임명되어 젤톡산 봉기를 촉발한 인물

1986년 12월 16일, 알마아타에서 열린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5차 총회는 단 18분 만에 끝났다. 모스크바에서 급파된 라주몹스키쿠나예프의 해임과 콜빈의 임명을 통보하자,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겐나디 콜빈은 소련의 당 기구에서 평생을 보낸 전형적인 브레즈네프식 간부였으나,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면서 예기치 않게 역사의 분수령에 서게 되었다. 니즈니타길 출신의 러시아인으로 카자흐스탄과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그의 임명은 알마아타에서 수천 명의 카자흐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는 젤톡산(12월) 봉기를 촉발했고, 이는 소련 민족문제의 폭발을 예고한 최초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이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내다 1990년 은퇴했고, 1998년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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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2니즈니타길 레닌구 당위원회 제2서기·제1서기
  • 1962–1970니즈니타길 시당위원회 제2서기·제1서기
  • 1970–1975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서기·제2서기
  • 1975–198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83–1986울리야놉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89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코나레프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Конар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7–2007 ○ 자연사

소련 철도의 마지막 대장

1991년 2월, 고르바초프에게 사임서를 제출하며: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여러 측면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을 졸업하고 유즈나야(남부) 철도에서 기술자로 시작해 1972년 철도국장까지 오른, 순수 철도인 출신 장관이었다. 1982년 안드로포프가 철도 부문의 위기를 비판한 직후 기존 장관이 경질되자 후임으로 발탁되어 1991년까지 소련 철도를 이끌었다. 재임 중 화물 적재량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1988년에는 연간 41억 톤이라는 소련 철도 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으며, 이는 당시 미국 철도보다 2배 많은 수치였다.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이유로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으며, 이후 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를 설립해 생애 마지막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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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하리코프 철도기술자대학 졸업, 유즈나야 철도 오스노바 역에서 기술자로 시작
  • 1953–1960유즈나야 철도에서 부역장·운수과장·운행부장 등 역임
  • 1962유즈나야 철도 제1부국장
  • 1972–1976유즈나야 철도 국장
  • 1976–1977소련 교통부 차관
  • 1977–1982소련 교통부 제1차관 겸 열차운행총국장
  • 1982–1991소련 교통부 장관, 1988년 사상 최대 화물 적재량 달성
  • 1991–2007민간 운송기업 인터트란스 회장, 50편 이상의 과학 논문 발표

콘스탄틴 표도로비치 카투셰프

Константин Фёдорович Катуш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7–2010 ○ 자연사

대외경제관계를 맡은 말기 경제 관료

치에르나 회담에서 카투셰프가 소련 입장을 변호하는 모습을 지켜본 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장 요세프 스므르콥스키는 그를 두고 "몰로토프 두 명을 합친 듯한 강경함"이라고 평했다.

고리키 자동차공장 엔지니어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후원 아래 급성장하여, 1968년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의 협상에서 소련 측 실무를 맡았고, 이후 사회주의권 관계를 총괄했다. 1977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전보되는 좌천을 겪었고, 이후 쿠바 대사를 거쳐 페레스트로이카기 대외경제관계 장관으로 개방 정책의 실무를 맡았다. 소련 붕괴 후에는 상업은행 경영진으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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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고리키 지역과 당 경제관리 라인에서 성장
  • 1968–1977중앙위 서기, 산업·경제 조정 업무 담당
  • 1977–1982각료회의 부의장, 경제 행정 실무에 관여
  • 1982–1985코메콘 관련 대외경제 협력 업무 수행
  • 1988–1991대외경제관계 장관, 페레스트로이카기 무역·합작 개방 관리

미하일 이바노비치 샤도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Щад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27–2011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석탄공업장관, 노천 채탄과 체르노빌 터널의 광부

1986년 체르노빌에서 샤도프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뚫을 광부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너희 중 누구라도 가지 않겠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가야 한다."

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체렘호보 탄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와 톰스크 공대를 거쳐 광산기사로 성장했고, 보스티부골(Vostsibugol) 생산합체의 총책임자를 거쳐 1985년 12월 소련 석탄공업장관에 임명되었다. 재임 중 네륜그리·베료좁스코예 등 신규 탄광 개발과 노천 채탄 기술의 대규모 도입을 주도했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후에는 원자로 아래 터널을 굴착하는 광부들을 직접 지휘했다. 1989년 쿠즈바스와 도네츠크를 휩쓴 대규모 광부 파업에 직면했고, 1991년 8월 쿠데타 지지로 해임되면서 소련 석탄공업장관직은 그와 함께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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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이르쿠츠크주 카멘카 마을 '안가르스트로이' 콜호스에서 농업 노동
  • 1944–1948체렘호보 광산기술학교 전기기계과 수학, 졸업
  • 1948–1950체렘호보우골 트러스트 5-비스 탄광에서 구역 정비사, 구역장, 수석정비사 보좌
  • 1950–1953톰스크 공과대학 부설 고등기술자 과정 수료, 광산기사 자격
  • 1953–1960사할린 및 체렘호보 탄광들에서 수석기사, 탄광장 역임
  • 1960–1963맘슬류다(Mamslyuda) 트러스트 관리자, 이르쿠츠크주 마마
  • 1965–1966이르쿠츠크주당위원회 지도원
  • 1966–1974보스티부골 콤비나트 부소장, 소장
  • 1974–1977보스티부골 생산합체 총책임자
  • 1977–1981소련 석탄공업 차관
  • 1981–1985소련 석탄공업 제1차관
  • 1985–1991소련 석탄공업장관
  • 1992모스크바 신용은행 이사회 의장

유리 페트로비치 바탈린

Юрий Петрович Батал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27–2013 ○ 자연사

서시베리아 석유단지와 체르노빌 석관을 건설한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건설 총책

1986년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좌천되어 온 자리는 바탈린 휘하의 국가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이었다.

우랄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바시키르 탄광과 유전 건설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튜멘에서 소련 최대의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복합단지 건설을 주도하며 1980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5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을 총괄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석관 공사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지휘했다. 1989년 퇴임 후 러시아 공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석유가스건설자연합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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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5바시키르 석탄·석유 건설 트러스트에서 작업반장에서 트러스트 관리자로 승진
  • 1965–1970튜멘석유가스건설총국 주임기사 겸 제1부국장
  • 1970–1983석유·가스산업건설 차관, 후에 제1차관
  • 1983–1985소련 국가노동·사회문제위원회 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겸임)

타티야나 이바노브나 자슬랍스카야

Татьяна Ивановна Заславская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27–2013 ○ 자연사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뇌관

「소비에트 경제학자로서 국가로부터 높은 봉급을 받는 11명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경제와 사회의 상태에 대해 인민 앞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다」 — 1983년

물리학도에서 경제학으로 전향한 키이우 출신 학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농촌사회를 연구하며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을 개척했고, 1983년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다. KGB가 압수했으나 서방으로 유출되어 『노보시비르스크 선언』으로 불리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토양이 되었다. 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VTsIOM 초대 소장, 인민대의원으로 사하로프·옐친과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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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50모스크바대 물리학과 3년 수료 후 경제학부 우등 졸업
  • 1950–63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농업 부문 연구, 1956년 кандидат 학위
  • 1963–87노보시비르스크 IEiOPP, 1967년 사회문제 부서장, 경제사회학 학파 창립
  • 1968 / 1981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당시 여성 학자 5명 중 한 명)
  • 1983「노보시비르스크 선언」: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사회적 경직을 진단
  • 1986–91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 1988–92VTsIOM(전연방 여론연구센터) 창립 소장
  • 1989–91인민대의원, 사하로프·옐친과 지역간 대의원 그룹에서 활동

보리스 이바노비치 고스테프

Борис Иванович Гостев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927–2015 ○ 자연사

시장개혁을 거부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의 마지막 정통파 재무장관

협동조합원이 월 천 루블을 버는 현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나는 사회에 부자 계층이 생기면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모스크바 경공업기술대학을 졸업한 기술자 출신 경제 관료로, 신발 공장 기사에서 출발해 국가계획위원회와 당 중앙위원회 경제부서를 거쳐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신임으로 1985년 12월 소련 재무장관에 취임했다. 재임 4년간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재정 악화, 급증하는 예산 적자, 협동조합 운동의 확산에 직면했으며, 시장개혁에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협동조합원의 고소득에 누진과세를 부과하며 '노동자가 거리로 나서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한 인물로, 사회주의적 평등을 훼손하는 부의 축적을 용납하지 않았다. 재임 중 오늘날의 예산·재무 아카데미인 재정실무자 연수원을 설립했고, 1989년 해임 후에는 그곳에서 교수로 13년간 후진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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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59신발 공장 기사, 경공업부, 칼리닌 소브나르호스 노동임금 부장
  • 1959–1966국가계획위원회, 국가과학경제위원회 부문 부장
  • 1966–1975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 제1부장
  • 1975–1982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기관부장
  • 1982–1985당 중앙위원회 경제부 제1부장 → 경제부장
  • 1985.12–1989.6소련 재무장관
  • 1989–2002재정실무자 연수원 교수

올레크 티모페예비치 보골몰로프

Олег Тимофеевич Богомолов
연구자 소련 러시아계 1927–2015 ○ 자연사

사회주의권 경제 통합과 개혁을 연구한 경제학자

그는 소련 경제의 정체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첫 자극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올레크 보골몰로프는 사회주의권의 국제경제 관계를 연구한 소련 경제학자이자 학술기관 운영자였다. 그는 동유럽의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개혁 경험을 비교 연구하며 계획경제의 경직성과 시장 메커니즘의 가능성을 함께 검토했다. 안드로포프가 경제 개혁 준비를 추진한 1983년에는 관련 위원회에 참여해 개혁 논의에 전문 지식을 제공했다. 이후에도 시장과 사회적 보호를 결합하는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경제적 선택지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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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대외무역부 고등무역학교 졸업
  • 1954국제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 1962–196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대외무역 관련 기관에서 근무
  • 1967–197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해외 사회주의 국가 경제지리학 강좌장
  • 1969–1991사회주의체제세계경제연구소 소장
  • 198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3안드로포프 경제 개혁 준비 위원회 참여
  • 1989–1991소련 인민대회 대의원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27–2016 ○ 자연사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오른 유일한 리투아니아인, 1월 사태로 수감된 마지막 모스크바파 서기장

2000년 아담쿠스 대통령이 사면을 제안하자 그는 거절했다: 「나는 조국 앞에 아무 죄도 없다.」

리투아니아 알리투스 출신으로 1942년부터 노동자로 일하며 공산당 기구에서 성장했고, 1989년 리투아니아공산당 분열 이후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에 맞서 연방 유지를 주장했으며, 1991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군대 투입을 요청하고 「국가구원위원회」를 이끌어 소련군의 빌뉴스 텔레비전 탑 진압 작전에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작전에서 민간인 14명이 사망했고, 1994년 민스크에서 체포되어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살인 방조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담쿠스 대통령의 사면 제안을 거부하며 '조국 앞에 죄가 없다'고 답했고, 2006년 1월 13일 만기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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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1944우드무르티야에서 목수·선반공
  • 1944–1955콤소몰·공산당 기구 활동, 빌뉴스 사범대학 졸업
  • 1963–1976당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빌뉴스 공과대학 교수
  • 1976–1990빌뉴스 사범대학 과학공산주의 교수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1991–1994벨라루스로 도피
  • 1994–2006체포 후 12년형, 2006년 1월 만기 출소

니콜라이 예피모비치 크루치나

Николай Ефимович Кручин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8–1991 ✕ 추락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금고를 지킨 마지막 재무관

1990년 7월 9일 제28차 당대회 연단에서 크루치나는 당 중앙위가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처음 공개했다. 소련 공산당 역사상 당 재정의 실체가 대의원들 앞에 드러난 유일한 순간이었다.

알타이 농촌 출신의 농학도로 콤소몰과 당 농업 부문에서 경력을 쌓아, 1965년부터 13년간 첼리노그라드 주당 제1서기로 카자흐 초원의 처녀지 개간을 지휘하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이 되었다. 1983년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당 중앙위 업무관리국장에 올라 당의 방대한 재산과 해외 원조 자금, 이른바 '당의 금'을 총괄했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당 예산을 공개해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밝혔으나, 쿠데타 실패 며칠 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의 죽음과 전임자 파블로프·국제부 간부 리소볼리크의 연이은 추락사는 당 자금의 행방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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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콤소몰 노보체르카스크·카멘스크·스몰렌스크 시·주 위원회 제1서기
  • 1959–1962콤소몰 중앙위 농촌청년부장
  • 1962–1963중앙위 농업부 지도원
  • 1963–1965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니 크라이 위원회 서기
  • 1965–1978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노그라드 주 위원회 제1서기
  • 1978–1983중앙위 농업부 제1부장
  • 1983–1991중앙위 업무관리국장 (당 재무·재산 총괄)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볼코고노프

Дмитрий Антонович Волкогонов
군사 · 국방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28–1995 ○ 위암으로 사망

군 선전 장성에서 소련 기록을 파헤친 역사가로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레닌이 1918년 펜자에 보낸 '쿨라크 100명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교수형에 처하라'는 전문을 발견했을 때, 볼코고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내 마음속에서 무너진 마지막 성채였다."

소련군 심리전 총국장과 군사정치총본부 부본부장을 지낸 상장군으로, 브레즈네프 시기 당 중앙위원회 비밀 기록보관소에서 연구하며 스탈린 평전 《승리와 비극》을 1978년부터 집필했다. 1983년 완성된 원고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아래 1989년 공개되어 소련 역사학에 충격을 주었다. 군사사연구소 소장으로서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적 전기를 출간했고, 《지도자들》 3부작으로 러시아 연방 국가상을 사후 수상했다. 만년에는 옐친의 국방 고문과 국가두마 의원으로 공산당·KGB 문서의 대대적 비밀해제를 주도했으며, 평생의 볼셰비키 신앙을 '유토피아적 포로 상태'라고 술회하고 정교회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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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 1963–1971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교수 · 학과 부책임자
  • 1971소련 육해군 총정치본부(GlavPU) 근무
  • 1979–1984GlavPU 특수선전(심리전) 총국장
  • 1984–1988GlavPU 부본부장 (상장군 진급, 1986)
  • 1988–1991소련 국방부 군사사연구소 소장
  • 1991–1995러시아 대통령 국방·안보 고문, 국가두마 의원, 문서비밀해제위원회 의장

빅토르 파블로비치 카르포프

Виктор Павлович Карпов
외교 소련 러시아 1928–1997 ○ 자연사

SALT·INF·START를 관통한 소련 군축외교의 얼굴

'어느 일방의 우월을 배제하는 평등과 동등한 안보의 원칙 위에서' — 1985년 제네바 군축협상 개시 성명

소련 외무부의 대표적 군축 전문 외교관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SALT-I·SALT-II·INF·START-I에 이르기까지 소련-미국 간 전략무기 협상의 결정적 국면에서 소련 측 실무를 이끌었다. MGIMO 졸업 후 워싱턴 대사관 참사관과 외무부 외교정책기획국 고문을 거쳐, 1985년 군축·군비제한문제국장으로서 제네바 협상에서 소련 대표단 단장을 맡았다. INF 전면폐기 조약(1987)과 START-I(1991)의 타결을 실무적으로 관철시켰고, 1990년 외무차관에 올라 소련 붕괴 직전까지 대미 전략무기 관계를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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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8–1962소련 외무부 대외정책정보국 제1서기
  • 1962–1966주미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66–1980소련 외무부 외교정책기획국 고문
  • 1980–1985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
  • 1985–1990소련 외무부 군비제한·군축문제국장, 콜레기야 위원
  • 1990–1991소련 외무차관
  • 1991–1997러시아 외무부 군축문제국 수석고문

이고리 세르게예비치 벨로우소프

Игорь Сергеевич Белоус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928–2005 ○ 자연사

소련 해군 전략균형을 건조한 조선장관

1974년 12월 4일, '비공개' 최고회의 간부회의 칙령으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국가 최고 훈장조차 기밀로 처리될 만큼, 그가 지휘한 전략원잠 계획은 소련의 가장 은폐된 사업이었다.

이고리 벨로우소프는 발트 조선소의 현장 기술자에서 소련 조선공업 장관까지 오른 선박 엔지니어이자 국가 지도자다. 1970년대 소련 해군 전략미사일 잠수함 전력의 핵심을 설계·건조한 책임자로서, 프로젝트 667B/BD/BDR 계열 잠수함과 미국 트라이던트에 대응하는 타이푼급 전략원잠 체계를 기술적으로 총괄하며 미소 간 해양 전략균형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88년부터는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군수복합체 전체를 조정했고, 이후 전환기 방산 컨설팅과 수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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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63발트 조선소에서 현장 기술자·콤소몰 서기·조립용접공장장·생산부장 역임
  • 1963–1967발트 조선소 수석엔지니어
  • 1967–1969아드미랄테이스키 조선소 수석엔지니어
  • 1969–1976소련 조선공업 차관
  • 1976–1984소련 조선공업 제1차관
  • 1984–1988소련 조선공업 장관
  • 1988–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군사산업위원회(VPK) 의장
  • 2000–2005로소보론엑스포르트 수석고문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 리지체프

Алексей Дмитриевич Лизич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28–2006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도 군 정치기관을 수호하려 했던 마지막 총정치국장

그는 말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 — 군 정치기관 해체를 거부하며 사임을 택하면서.

소련군 정치기관에서 평생을 복무한 정치장교로,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알렉세이 예피셰프의 후임 총정치국장으로 발탁되어 군대 내 페레스트로이카를 주도했다. 초기에는 정치기관 쇄신을 추진했으나, 개혁이 반군 선전과 정치장교 제도 자체의 해체로 치닫자 이에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 원칙은 지폐처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치기관의 무덤파는 자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임을 선택한 그는, 소련 붕괴 직전까지 군 내 당 통제라는 제도의 정당성을 끝까지 수호하려 한 마지막 총정치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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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체레포베츠 보병학교 졸업, 콤소몰 정치업무 시작
  • 1957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졸업 (통신)
  • 1960–1965총정치국장 보좌관 (콤소몰 담당, 대령)
  • 1965–1971제13근위군단 정치부장 → 모스크바 군관구 정치국 제1부국장 (소장)
  • 1971–1980주독소련군 정치국 제1부국장 → 자바이칼 군관구 정치국장 (중장)
  • 1980–1985총정치국 부국장 (상장) → 주독소련군 정치국장
  • 1985–1990소련군·해군 총정치국장 (대장, 1986)
  • 1990–1992국방성 총감찰단, 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