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의회는 마살리예프 대신 아스카르 아카예프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압사마트 마살리예프는 광산 기술자에서 출발해 키르기지야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된 키르기스 소비에트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말기의 민족 갈등과 정치적 개방 속에서도 공화국의 당·국가기구를 이끌며 기존 사회주의 질서를 지키려 했다.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스카르 아카예프에게 자리를 내준 뒤에도 공산주의 정치와 의회 활동을 이어 갔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 당선 후 모스크바 아파트를 거절하고 고향 팔라나로 돌아갔다. '내 모든 책은 나에게 고해성사다'라고 그는 말했다.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로, 필명 코얀토(Коянто, '순록의 사람')로 널리 알려진 코랴크 문학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레닌그라드 게르첸 사범대학 북방학부와 고리키 문학대학 고등문학과정을 졸업하고, 1969년 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를 시작으로 코랴크인과 북방 원주민의 삶, 신화, 정체성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1976)는 소련 관료들의 북방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9년 코랴크 자치구에서 소련 인민대표로 선출되어 북방 원주민의 권익을 대변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과 주지사 고문을 지내며 고향을 위해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몹시샨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농업·당 관료로 성장한 정치가였다. 1990년 공산당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자 정치국을 떠났다. 소련 해체 뒤에도 난민 행정과 국방, 농업 정책에 관여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의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레너드 H. 퍼루츠는 미국 공군 장성이자 군사정보 전문가로, 냉전 말기의 핵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으로서 소련군의 비정상적 핵 readiness를 관찰했지만 나토의 경보 수준을 올리지 말도록 권고해 긴장을 더 키우지 않았다. 이후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며 정보 판단과 군사 의사결정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말년에는 애이블 아처 83의 위험을 되돌아보는 보고서를 남겼다.
1991년 쿠데타 패배 뒤 그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결성을 “당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다.
아나톨리 말로페예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당 조직을 거쳐 벨로루시아의 공화국 지도부에 오른 소비에트·벨로루시아 정치가였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지역 행정 경험과 연방 중심의 당 노선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이끌었고,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지지했다. 쿠데타 패배 뒤에도 당 조직의 재건을 모색했으며, 이후 독립 벨로루시아의 의회 정치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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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고멜 출생
1949–1952고멜·민스크 차량수리공장에서 기계공
1952–1956소비에트 해군 복무
1962–1975고멜·모지리 당 조직에서 근무, 모지리 시당 제1서기와 고멜주 당위원회 서기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1989년 5월 27일, 제1차 인민대표회의 연단에서 보수파 의원들을 향해: "여기 계신 분들은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최고회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1989년 제1차 소련 인민대표회의에서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한 역사가. 프랑스 아날학파 연구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학장(1986-1991)을 거치며 소련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했고,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에는 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을 설립해 당 고등학교 건물에 독립적 인문학 공간을 열었고, 이후 옐친과 푸틴의 권위주의를 공개 비판하며 마지막까지 체제와 거리를 두었다.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국제사회 반응은 생각했나?' 나는 답했다. '옐친이 지금 부시와 통화 중입니다. 부시는 찬성하는 눈치입니다!'
민스크에서 태어난 핵물리학자로, 벨라루스 국립대학 교수이자 라디오전자공학 전문가였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조사위원회에서 소련 당국의 은폐에 맞서 진실 공개를 요구하다 해임되었고, 이 경험이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1991년 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비스쿨리 사냥 별장에서 옐친·크랍추크와 회동을 주최했으며, 원래 석유·가스 공급 논의로 시작된 자리에서 소련 해체 선언문에 처음으로 서명 의사를 밝혔고,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이 끝났음을 통보했다. 독립 벨라루스의 첫 국가원수였으나 1994년 루카셴코의 부패 의혹 공세로 실각했고, 말년에는 망명하지 않고 민스크에서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원로로 남았다.
1989년 6월, 소련 최고회의는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제출한 각료 명단을 심사하며 자하로프의 문화장관 재임명을 거부했다. 수십 년간 거수기였던 의회가 현직 장관을 자격 미달이라며 퇴장시킨 첫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의 선전·선동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으로 진출했고,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문화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금지 도서의 출판, 영화 검열 완화, 예술 창작의 자율성 확대 등 소련 문화정책의 결정적 전환을 주도했으며, 모스크바 예술극장 분할 같은 첨예한 갈등을 직접 중재했다. 1989년 새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그의 재임명을 거부하면서 소련 의회가 각료 인준을 실질적으로 심사하는 첫 사례의 주인공이 되었다. 퇴임 후 러시아 공화국 부총리를 지냈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 시대를 '놓쳐버린 기회들의 통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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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1973레닌그라드 대학 졸업 후 톰스크·레닌그라드에서 정치경제학 강의, 1973년 경제학 박사
예브게니 야신은 소련 말기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려는 개혁 구상을 발전시킨 경제학자였다. 그는 샤탈린 그룹의 500일 프로그램 공동 작성자로 참여해 급진적 시장 전환의 청사진을 제시했으며, 소련의 해체 뒤에는 러시아의 개혁 국가기구에서 일했다. 옐친 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서 시장개혁을 추진했지만, 전환의 사회적 비용과 국가 역량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자유주의 노선을 대표했다. 이후 고등경제대학과 자유주의 사상 재단을 이끌며 러시아의 경제정책과 공론장에 영향을 미쳤다.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발전소 마당에 나가보니 발밑에 흑연 조각들이 널려 있었지만, 그래도 원자로가 파괴됐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타슈켄트에서 러시아 노동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에너지 공학을 전공하고 화력발전소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 체르노빌 원전의 건설 책임자 겸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16년간 발전소를 이끌었고, 공사 지연과 결함 자재로 사표를 냈으나 당 상급자가 찢어버렸다. 1986년 사고 직후 해임되고 1988년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소 후에도 체르노빌 사고 수습 업무에 종사하다 2021년 키이우에서 사망했다.
그리고레 예레메이는 소련 말기 몰다비아의 당·국가 관료로, 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당 내부에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연방 해체와 공화국 독립이 겹친 1991년의 전환을 통과했다. 당 해산 뒤에는 몰도바의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소비에트 정치 경력과 독립국가의 제도 정치 사이를 잇는 행보를 보였다.
체르노빌 피폭을 감수한 지 한 달도 안 돼, 벨리호프는 과학아카데미에서 핵실험 검증 국제회의를 주재하며 참사를 군축의 계기로 바꾸려 했다.
핵융합 플라스마 물리학과 MHD 발전을 개척한 소련의 물리학자이자 과학행정가. 1959년 자기회전불안정성을 발견해 현대 천체물리학의 기초를 닦았고, 1962년 전열불안정성도 규명했다. 쿠르차토프 연구소에서 경력을 시작해 1973년부터 소련 제어핵융합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1978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에 올라 연구소와 아카데미를 잇는 핵심 고리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에서 고르바초프의 과학보좌역으로 방사능 차단 작업에 참여했고, 냉전 말기 핵군축 과학외교를 주도했다. 소련 해체 후 쿠르차토프 연구소를 존속시키고 ITER 국제핵융합실험로 창립의장으로서 미·소·유럽·일본 공동 핵융합 연구의 틀을 만들었다.
체르노빌 현장에서 60일을 보내고, 은폐된 진실을 테이프에 녹음한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과학자
“나는 빈에서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소련의 무기화학자 발레리 레가소프는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으로서 1986년 4월 26일 저녁 체르노빌 참사 현장에 처음 도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정부위원회에서 과학적 수습을 이끌며 붕소·모래 투하를 제안했고, 빈 IAEA 회의에서 5시간에 걸친 보고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으나 원자로 설계 결함의 전모를 밝히지 못했다. 사고 2주기 다음날인 1988년 4월 27일 자택에서 목을 매 숨졌으며, 유서처럼 남긴 오디오 테이프에는 소련 원자력 체계의 은폐와 부실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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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1964엔지니어 → 교대조장, 시베리아 화학콤비나트 (톰스크-7)
1964–1972연구원, 쿠르차토프 연구소; 1967년 화학 후보박사, 1972년 화학 박사
1972–1983과학 담당 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198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3–1988제1부소장, 쿠르차토프 연구소; 방사화학·화학기술 학과장, 모스크바 국립대
1982년 7월 16일, 크비친스키는 제네바 외곽 숲에서 미국 협상가 폴 니츠와 단둘이 거닐며 중거리핵 감축 타협안을 모색했다. 양국 정부가 거부했지만, 이 대화는 리 블레싱의 브로드웨이 연극 『숲속 산책』으로 되살아났다.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키운 소련의 독일 전문 외교관으로, 30년 넘게 대서방 외교 최전선에서 활동했다. 1981년 제네바 중거리핵전력(INF) 협상 소련 수석대표로서, 1982년 7월 미국 측 폴 니츠와의 비공식 '숲속 산책' 회담은 냉전 군축사의 상징이자 후일 브로드웨이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1986~1990년 주서독 대사로 독일 통일 '2+4 조약' 준비에 참여했고, 1991년 소련 외무부 제1차관으로 유럽 안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 1997년 주노르웨이 대사로 복귀, 2003년부터 사망 시까지 공산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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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1965주동독 소련대사관 통역·무관·3등서기관·2등서기관
1965–1978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 2등서기관·1등서기관·전문고문·부국장
1978–1981주서독 소련대사관 공사참사관
1981–1986소련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제네바 핵군축 협상 소련 대표단 단장
1986–1990주서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CPSU 중앙위원회 위원후보(1986~89)·위원(1989~90)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 선출된 직후 중앙위원회에서 한 연설: "우리는 당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크라이나를 정치적 실험의 장으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계공학자 출신으로 도네츠크 기계제작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공장장까지 오른 테크노크라트였다. 1976년 당 관료로 전환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 도네츠크 주당 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쳤으며,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해 수습에 참여했다. 1990년 6월 고르바초프의 신임 속에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이듬해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당 활동이 금지되면서 사임했다. 소련 해체 후에도 우크라이나 의회 의원과 경제정책위원장을 지내며 구 공산당 계열 정치세력의 재편을 주도했다.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기구 관료로,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당 총무부장과 소련 대통령장을 지내며 개혁기 제도 운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오데사와 키예프에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4년 모스크바로 발탁되었고, 1985년 총무부장이 되어 중앙위 문서 흐름과 서기장실을 총괄하는 최측근 참모가 되었다. 1990년 대통령제 출범 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과 대통령장을 역임하며 소련 말기 행정권의 제도적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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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단 한 명의 시위자도 삽날에 죽지 않았습니다. 소브차크 씨가 그루지야 파시스트들과 함께 지어낸 것입니다」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독립 요구 집회를 해산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려 21명의 민간인 사망을 초래했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로디오노프를 지목했으나, 명령 계통의 위쪽은 야조프 국방장관과 공화국 당 지도부로 이어져 있었고 그는 그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공개 책임을 진 인물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제40군 사령관을 거쳐 1996년 러시아 국방장관에 임명됐으나 예산과 군 개혁 방향을 놓고 옐친 진영과 충돌해 10개월 만에 해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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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70오룔 기갑학교 졸업, 주독 소련군 복무, 말리놉스키 기갑아카데미 금메달 졸업
1970–1980제24 '철의' 차량화소총사단 연대장·부사단장·사단장 역임. 참모아카데미 우등 졸업
1980–1986제28군단장(체코슬로바키아), 제5군 사령관(극동),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
1986–1989모스크바군관구 제1부사령관, 이후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집회 해산 지휘
1989–1997참모아카데미 원장(1989~96). 러시아 국방장관(1996~97), 군 예산을 정부 개혁안에 종속시키길 거부해 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