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1991

마지막 세대 226명

소련을 개혁하려 한 사람들과 그 종말을 앞당긴 사람들, 마지막 소비에트 세대.

로무알다스 오졸라스

Romualdas Ozolas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39–2015 ○ 암으로 사망

200만 서명으로 소련군 철수를 요구한 사유디스의 철학자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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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빌뉴스대학 철학 전공
  • 1965–1968『쿨투로스 바라이』 편집자
  • 1973–1989빌뉴스대학 철학 강사
  • 1988–1990사유디스 창립 멤버·평의회 의원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부총리
  • 1992–2000세이마스(의회) 의원
  • 1993–2000리투아니아 중도연합 당수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모이세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Моисе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39–2022 ○ 자연사

마지막 소련 총참모장, 8월 쿠데타로 몰락하다

1991년 8월 22일, GKChP 쿠데타가 무너지고 야조프가 체포되자 모이세예프는 단 하루 동안 소련 국방장관 대행을 맡았다. 이튿날 그 역시 해임되었다.

소련군의 마지막 총참모장(1988~1991). 드미트리 야조프의 측근으로 극동군관구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군 2인자 자리에 올랐으며, 아프가니스탄 철수 계획을 지휘하고 미소 군축 협상에도 참여했으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야조프를 지지했다가 실패 후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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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군 복무, 극동전차학교 졸업
  • 1962–1972전차소대장·중대장, 독일주둔 소련군 및 카르파티아 군관구
  • 1972–1980전차연대장, 제50·27근위차량화소총사단장
  • 1982–1985극동군관구 제15군 부사령관, 이후 사령관
  • 1985–1987극동군관구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87–1988극동군관구 사령관
  • 1988–1991소련군 총참모장·국방제1차관
  • 1991.8.22–23소련 국방장관 대행
  • 2011–2016국가두마 의원(통합 러시아)
이념 · 선전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40–2022 ○ 자연사

빌뉴스 1월 사태에서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한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 이념서기

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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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소련공산당 입당
  • 1970–1990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당역사연구소 연구원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이념부장
  • 1994–2002반국가 활동 혐의로 수감 (8년형)
  • 2002–2012러시아국립사회대학 교수, 공산당연합-CPSU 평의회 부의장

렘비트 아누스

Lembit Annus
사회주의권 지도자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인 1941–2018 ○ 자연사

소련 유지를 택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자

1991년, 그는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다가오던 때에도 소련 연방을 지지하는 정치국에 합류했다.

렘비트 아누스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모스크바계 지도자로, 민족 독립과 연방 유지를 둘러싼 분열의 한복판에 섰다. 그는 1990년 12월부터 1991년 8월 당이 금지될 때까지 КПСС 강령을 지지한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맡았고, 1991년에는 КПСС 정치국원이 되었다. 당의 해체 뒤에도 프라우다 특파원과 지방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공산주의 정치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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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코흐틀라얘르베에서 출생
  • 1963소련 공산당 입당
  • 1983–1989잡지 《에스티 코무니스트》 편집장
  • 1990에스토니아 공산당 칼리닌 지구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КПСС 강령계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91–1999《프라우다》 에스토니아 특파원, 탈린 시의회 의원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카잔니크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Казанник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19 ○ 지병으로 사망

옐친에게 의석을 양보한 날 선 양심의 법학자

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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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카자흐 SSR 테미르타우에서 목수로 노동
  • 1960–63소련군 공병대 복무
  • 1963–75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 졸업, 대학원, 조교, 전임강사
  • 1975–91옴스크대학 부교수(환경법·국가법)
  • 1989–91소련 인민대의원; 지역간대의원그룹 회원
  • 1993–94러시아 검찰총장
  • 1996–2003옴스크주 부지사
  • 2003–19옴스크대학 교수; 옴스크법학연구소 제1부소장(2003–07)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구벤코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убенко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20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문화장관

히틀러 역을 맡은 졸업 공연에서, 구벤코는 부모를 죽인 자를 향한 모든 증오를 배역에 쏟아부었다. 공연을 본 류비모프는 곧바로 그를 타간카 극장으로 영입했다.

전쟁 고아에서 인민예술가로 성장한 배우·영화감독. 루나차르스키 이래 처음으로 현역 예술인이 소련 문화장관(1989–1991)에 오른 인물이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좌파 정치인으로 전향하여 국가두마 문화위원장과 모스크바 시의회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문화유산 수호에 앞장섰다. 타간카 극장 분열 후에는 「타간카 배우 동지회」를 창설해 2020년까지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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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1문화장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샤포시니코프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42–2020 ○ 자연사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 마지막 항공원수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후 핵가방이 옐친에게 이양되던 날 샤포시니코프는 말했다: "핵버튼은 믿음직한 손에 있습니다."

소련 공군에서 30년 넘게 복무하며 전투기 조종사에서 공군 총사령관까지 오른 직업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야조프에게 모스크바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비상사태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제안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1년 8월 26일 항공원수 계급을 받아 소련 역사상 마지막으로 '원수' 칭호가 붙은 군인 계급을 수여받은 인물이 되었다. 소련 해체 후 CIS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 핵무기 통제권 이양을 감독했으며,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와 아에로플로트 사장을 거쳐 수호이에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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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하리코프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전투기 조종사로 임관
  • 1969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1987오데사 군관구 공군 사령관
  • 1987–1988소련군 주독 집단군 공군 사령관
  • 1990–1991소련 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
  • 1991.8–1992.2소련 국방장관 (최후)
  • 1992–1993CIS 연합군 총사령관
  • 1993.6–9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
  • 1995–1997아에로플로트 사장
  • 1997–2004러시아 대통령 보좌관 (항공·우주 담당)

니콜라이 티모페예비치 안토시킨

Николай Тимофеевич Антошкин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러시아 (모르드바계) 1942–2021 ○ 코로나19로 사망

체르노빌 원자로 상공에서 1,927회의 헬기 투하를 직접 지휘한 소련 공군 장군

원자로 안에서 수톤의 흑연이 타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헬기로 불구덩이를 끄기로 했다.

모르드바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오렌부르크 군사항공학교를 거친 정찰비행 장교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진압과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아프가니스탄 상공 정찰에 모두 참전했다. 1986년 4월 26일 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으로서 체르노빌 폭발 소식을 받고 즉시 현장으로 날아가, 10일간 헬기 조종사들을 이끌며 200m 상공에서 불타는 원자로에 4,925톤의 모래, 납, 붕소를 퍼부었다. 방사선에 노출된 몸으로도 퇴역하지 않고 1998년까지 복무한 뒤 통합 러시아당 소속 국가두마 의원으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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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0정찰비행 연대 조종사, 편대장
  • 1973–1979비행대대장, 정찰항공연대장 (오데사·투르키스탄 군관구)
  • 1980–1983제20근위군 항공사령관, 중부군집단 항공사령관
  • 1985–1988키예프 군관구 공군 참모장, 체르노빌 공중작전 지휘
  • 1988–1989중앙아시아 군관구 공군사령관
  • 1989–1993모스크바 군관구 공군사령관
  • 1993–1997러시아 공군 전선항공대 사령관
  • 2014–2021러시아 연방 국가두마 의원 (통합 러시아당)

루슬란 이므라노비치 하스불라토프

Руслан Имранович Хасбулатов
국가원수 러시아 체첸계 1942–2023 ○ 1993년 체포, 1994년 사면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최고소비에트 의장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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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70–1990모스크바 국민경제연구소(플레하노프) 교수, 국제경제관계학과장
  • 1990.03그로즈니 선거구에서 RSFSR 인민대의원으로 선출
  • 1990.06–1991.10RSFSR 최고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91.07–1991.10RSF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권한대행
  • 1991.10–1993.10RSFSR/러시아연방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4–2023플레하노프 러시아 경제대학교 세계경제학과장

빅토르 페트로비치 두비닌

Виктор Петрович Дубынин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43–1992 ○ 암으로 병사

아프간 손실을 절반으로 줄인 40군 사령관, 러시아군 첫 참모총장

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이 직접 병원으로 찾아와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두비닌은 이미 말기 암으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소련과 러시아 연방의 군인. 1986~87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제40군 사령관으로서 대규모 헬리콥터 강습과 컴퓨터 지휘체계를 도입하는 전술 개혁으로 전년 대비 전사자를 절반으로 줄였고, 실전손실의 은폐 관행에 처음으로 맞섰다. 1989~92년 북부군집단 사령관으로 폴란드 주둔 소련군의 조직적 철수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1992년 6월 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옐친 대통령의 성급한 핵전력 개혁 구상을 저지하고 토폴-M, 보레이급 잠수함, 이스칸데르 등 장기무기 프로그램을 승인받아내 탈소비에트 러시아 방위의 기술적 토대를 남겼다. 임종 직전 병상에서 육군대장 계급장을 받았으며, 사후 러시아연방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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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64극동전차학교(블라고베셴스크) 졸업, 소련군 입대
  • 1964–1978전차소대장·중대장·대대장, 연대 참모장 겸 부연대장, 전차연대장. 비스트렐 과정(1973), 기갑아카데미(1978) 졸업
  • 1979–1984제8근위전차사단장(벨라루스). 참모아카데미 졸업(1984) 후 제32군 제1부사령관(중앙아시아)
  • 1984–1986제40군(아프가니스탄) 제1부사령관
  • 1986–1987제40군 사령관. 전술 개혁으로 전사자 절반 감소. 소련군 부분철수 개시
  • 1987–1989제7전차군 사령관(벨라루스), 키예프군관구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 1989–1992북부군집단(폴란드) 사령관. 소련군 철수 완수
  • 1992러시아 연방군 초대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육군대장 진급(10.5), 11.22 병사

카지미에라 다누테 프룬스키에네

Kazimira Danutė Prunskienė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43–2026 ○ 뇌졸중으로 사망

실용주의 노선으로 독립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퇴로 군사옵션의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졌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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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86빌뉴스대학 산업경제학 강사·부교수
  • 1986–1988리투아니아 SSR 농업경제연구소 부소장
  • 1989–1990리투아니아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90.03–1991.0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 1995–1998리투아니아 여성당 당수
  • 1996–2004세이마스(의회) 의원
  • 2004–2008농업장관

블라디슬라프 알렉세예비치 아찰로프

Влади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Ачалов
군사 · 국방 소련 타타르계 러시아인 1945–2011 ○ 자연사

소련 공수군을 지휘하고 8월 쿠데타의 병력 배치를 조율한 장군

1991년 8월 19일, 아찰로프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쿠데타의 일환으로 오스탄키노 TV 센터를 장악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직접 지휘했다.

타타르족 출신의 소련 군사 지휘관으로, 34세에 소장으로 진급한 소련 최연소 장군 중 한 명이었다. 전차부대와 공수부대에서 경력을 쌓아 소련 공수군 사령관(1989~1990)을 거쳐 소련 국방차관(1990~1991)까지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로의 병력 진입을 조율하고 오스탄키노 TV 센터 장악을 위한 공수부대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1993년 헌정 위기에서 최고회의 측에 서서 루츠코이의 대안정부에서 국방장관직을 수락했으며, 이로 인해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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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73제8근위군 전차소대장·중대장 (주독소련군집단)
  • 1973–1975제44공수훈련사단 제243자주포훈련연대 부지휘관
  • 1975–1977제137근위공수연대장
  • 1977–1978제98근위공수사단 부사단장
  • 1978–1982제7근위공수사단장
  • 1984–1985제2근위전차군 부사령관 (주독소련군집단)
  • 1985–1987제8근위군 사령관 (주독소련군집단)
  • 1987–1989레닌그라드군관구 참모장·제1부사령관
  • 1989–1990소련 공수군 사령관
  • 1990–1991소련 국방차관
  • 1993루츠코이 대안정부 국방장관
  • 2003–2011러시아공수군재향군인연합 의장

겐나디 예두아르도비치 부르불리스

Геннадий Эдуардович Бурбулис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45–2022 ○ 자연사

벨라베자에서 소련의 사망선고 문장을 던진 철학자

벨라베자 숲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를 향해: "소련이 국제법의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옐친의 최측근이자 소련 해체의 지적 설계자. 우랄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으로, 1991년 9월 가이다르 그룹이 쓴 '부르불리스 메모란덤'을 옐친에게 전해 러시아의 경제적 독립 노선을 결정지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에게 "소련이 국제법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그 문장으로 시작된 합의문에 옐친과 함께 서명했다. 1992년 개혁에 쏟아진 비난의 번개 막대가 되어 물러난 뒤 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조용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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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83우랄 공대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 강의
  • 1987–89스베르들롭스크 정치토론클럽 '토론 연단' 창립
  • 1989–90소련 인민대의원, 지역 간 대의원 그룹 참여
  • 1990–91옐친 대선 선거본부장
  • 1991.7–92.5RSFSR 국가서기, 러시아 제1부총리
  • 1991.12벨라베자 합의 공동 서명
  • 1993–99국가두마 의원(1·2기)
  • 2000–07노브고로드 부지사, 연방평의회 의원

줌갈베크 벡술탄 울루 아만바예프

Жумгалбек Бексултан уулу Аманбае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키르기스인 1946–2005 ○ 자연사

소련 말기의 키르기스 공화당 지도자

1991년 4월, 소련의 마지막 정치국에 키르기스 공화국 대표로 합류했다.

아만바예프는 농업 전문가 출신의 키르기스 공산당 간부로, 당 조직과 지역 행정을 거치며 성장했다. 소련이 해체로 향하던 1991년 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두 직책은 연방 붕괴와 함께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는 이후 독립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정부 업무를 맡아 소비에트 당 관료와 새 국가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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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키르기스 농업대학 졸업
  • 1971–1973오시주 국립 종축장장, 알라이 지구당 제1서기
  • 1981–1985키르기스 공산당 오시주위원회 서기
  • 1985–1988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91이식쿨주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이식쿨주 소비에트 의장, 소련 인민대의원
  • 1991키르기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3–1995키르기스 공화국 부총리

위리 미크

Jüri Mikk
비소련 혁명가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948–2010 ○ 사망

민족의 인구적 위기를 외치고 단식으로 맞선 MRP-AEG 공동 창립자

「내겐 양심이 있고, 그래서 내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러 여기 왔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

1987년 8월 라글레 파레크, 티트 마디손 등과 함께 MRP-AEG를 공동 창립하고 히르베파르크 집회에서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집회 후 언론의 인신공격 보도에 항의해 두 달간의 단식 투쟁을 시작했고, 단식 중 붉은 광장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공개를 요구하는 팻말을 들었다가 강제 송환되었다. 이후 에스토니아 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유머 신문 「로사 리프」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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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MRP-AEG 공동 창립
  • 1987.08.23히르베파르크 집회 연설, 에스토니아인의 인구적 위기 경고
  • 1987.09–10언론 비방 보도에 항의하는 두 달간의 단식 투쟁
  • 1987.09.30단식 중 붉은 광장에서 MRP 공개 요구 팻말 시위, 강제 송환
  • 1988반체제 시위 적극 조직, 당국으로부터 활동 중단 경고
  • 1989–1990유머 신문 「로사 리프」 편집
  • 1990에스토니아 회의(Eesti Kongress) 대의원

파벨 세르게예비치 그라초프

Павел Сергеевич Грачё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48–2012 ○ 뇌수막염으로 사망

공수부대 사령관에서 옐친의 국방장관으로, 쿠데타의 열쇠를 쥔 인물

'공수부대 단 하나의 연대로 2시간이면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체첸 전쟁 직전 장담했으나, 그 말은 재앙의 서막이었다.

파벨 그라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소 희생'으로 헤로이 칭호를 받은 공수부대 장군으로, 1990년 12월 소련 공수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106공수사단을 모스크바에 진주시켰으나, 이튿날 백악관 강습 계획을 반대하고 옐친 측에 합류해 수비 병력을 보냄으로써 쿠데타 실패의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러시아 초대 국방장관이 되어 1993년 체제 위기에서 옐친을 지지했고, 제1차 체첸 전쟁을 지휘했으나 참담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파샤-메르세데스'라는 조롱을 받으며 1996년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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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9랴잔 고등공수지휘학교 졸업 (금메달)
  • 1981–1983, 1985–1988아프가니스탄: 345공수연대장 → 103공수사단장
  • 1988소비에트연방 영웅 칭호 수여
  • 1990.12–1991.08소련 공수군 총사령관
  • 1991.08–1992소련 국방부 제1차관
  • 1992.05–1996.06러시아 연방 국방장관
  • 1997–2007로스보루제니예·로소보론엑스포르트 군사 고문

안드리스 슬라핀슈

Andris Slapiņš
작가·예술가 소련 라트비아인 1949–1991 ✕ 촬영 중 피살

독립운동의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1991년 1월 20일 저녁 오몬의 내무부 공격을 세계에 보여 주려 카메라를 들고 바리케이드로 나섰고, 바스테이칼른에서 촬영하다 총에 맞아 숨졌다.

안드리스 슬라핀슈는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라트비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촬영기사였다. 리브인의 문화와 라트비아의 역사·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만들며, 기록영화가 억눌린 기억과 현재의 투쟁을 잇는 매체임을 보여 주었다. 1991년 1월 20일 리가 내무부 공격을 촬영하던 중 사망했고, 그가 남긴 장면은 라트비아 독립운동의 국제적 기억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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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1976리가 영화 스튜디오 촬영기사
  • 1976전연방 국립영화학교 촬영학과 졸업
  • 1978다큐멘터리 《리가》 촬영기사
  • 1983리가 영화 스튜디오 다큐멘터리 감독
  • 1988《희망의 들판》 감독·촬영기사
  • 1989《라트비아에서 온 편지》 감독
  • 1990《고향》 촬영기사, 유리스 포드니엑스 연출
  • 1991리가 내무부 공격 촬영 중 사망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레베디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Лебедь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50–2002 ○ 헬기 추락사

공수군 부사령관으로 옐친의 백악관에 투입된 뒤 편을 바꾸어 쿠데타를 무너뜨린 장군

1991년 8월 20일 밤, 그라초프의 동의를 얻은 레베디는 백악관 수비대를 찾아가 '새벽 2시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은밀히 알렸다.

노보체르카스크의 가난한 목수 가정에서 태어나 열두 살에 노보체르카스크 시위대 학살을 목격한 소련 공수군 장군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했고 1991년 2월 공수군 전투훈련 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다. 8월 쿠데타 당일 파벨 그라초프의 명령으로 툴라 공수대대를 이끌고 백악관을 포위했으나, 다음 날 옐친 진영으로 넘어가 수비대에 새벽 공격 계획을 은밀히 전달하며 쿠데타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역 후 1996년 대선에서 3위에 오르고 안전보장회의 서기로서 제1차 체첸 전쟁 종식을 협상했으며,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로 재직 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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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81리ャ잔 공수사관학교 생도 → 교관 (훈련소대장·중대장)
  • 1981–1982제345독립공수연대 제1대대장 (아프가니스탄)
  • 1985–1988제331근위공수연대장 → 제76근위공수사단 부사단장
  • 1988–1991.02제106근위공수사단장 (툴라)
  • 1991.02–1992.06소련 공수군 부사령관 (전투훈련·군사학교 담당)
  • 1992.06–1995제14근위군 사령관 (트란스니스트리아)
  • 1996러시아 안전보장회의 서기
  • 1998–2002크라스노야르스크 지사

아르툠 미하일로비치 타라소프

Артём Михайлович Тарасов
경제 운영 소련 아르메니아 1950–2017 ○ 심장질환으로 사망

당비 9만 루블로 협동조합법을 두 번 바꾸게 한 소련 최초의 합법 백만장자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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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 1984–1986모스카프스트로이프로옉트 수석 엔지니어
  • 1987협동조합 '테흐니카' 설립
  • 1989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 소련 통합협동조합연합 부회장
  • 1990–1991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대표
  • 1994–1996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1소집)
  • 2003–2017혁신연구소(Институт Инноваций) 이사회 의장

티이트 마디손

Tiit Madisson
비소련 혁명가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950–2021 ○ 자연사

히르베파르크 집회로 침묵을 깨뜨린 에스토니아 반체제 활동가

마디손은 히르베파르크 집회에서 비밀 의정서를 공개하고 그 결과를 청산하자고 연설했다.

티이트 마디손은 에스토니아의 반체제 활동가이자 작가로,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석방 뒤 MRP-AEG를 세우고 1987년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조직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비밀 의정서 공개와 그 결과의 청산을 요구했다. 집회는 소련 말기 에스토니아에서 대중이 공개적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낸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당국은 그를 스웨덴으로 추방했다. 귀국 후에는 에스토니아의 독립 회복 과정과 민족주의 정치에 참여했으며, 말년에는 홀로코스트 부정으로 비판받는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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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중반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히피 운동 조직
  • 1980–1986정치범으로 수감 및 유형
  • 1987MRP-AEG 창립, 히르베파르크 집회 주도
  • 1987–1990스웨덴 망명, 자유유럽방송 협력
  • 1990–1992에스토니아 회의·에스토니아 위원회 의원
  • 1994민족주의자 중앙연맹 창립대회 주재
  • 2002–2005리훌라 읍장
  • 2009에스토니아 민족독립당 재건 추진

에드가르 사비사르

Edgar Savisaar
외국 정치가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인 1950–2022 ○ 자연사

대중운동과 독립정치의 설계자

1988년 4월 13일 생방송에서 인민전선 구상을 제안했다.

에스토니아의 정치가이자 에스토니아 인민전선의 공동 창립자로, 개혁 요구를 대중 정치로 조직한 인물이다. 1988년 4월 13일 생방송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는 인민전선 구상을 제안했고, 이 운동은 곧 민주주의와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을 요구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는 독립 이행기의 첫 총리를 지냈지만, 경제적 곤란과 정치적 논란 속에서 권력의 한계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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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타르투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위 취득
  • 1980–1988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기관에서 경제계획 업무
  • 1988–1989마이노르 컨설팅 회사 학술 책임자,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공동 창립
  • 1989–1990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90–1992에스토니아 공화국 초대 총리
  • 1992–1995리기코구 부의장
  • 2001–2004탈린 시장
  • 2005–2007경제통신부 장관
  • 2007–2015탈린 시장

빅토르 이만토비치 알크스니스

Виктор Имантович Алкснис
이론가 소련 → 러시아 라트비아계 1950–2025 ○ 뇌졸중으로 사망

의회 표결을 헌정 쿠데타로 몰고 간 소유즈파의 지도자

1991년 6월 17일, 회의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알크스니스는 신연방조약이 위헌이며 파블로프 내각을 지지해야 한다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내각은 소련을 위해, 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계 소련 공군 대령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장 노골적인 강경파였다. 소유즈파 공동의장으로서 계엄령을 요구하고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촉구했으며, 1991년 6월 17일에는 파블로프 총리의 비상권한 결의안을 즉각 표결에 부치자고 밀어붙여 '헌정 쿠데타 기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하원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1993년 옐친에 맞서 의회를 방어하다 진압경찰에 구타당했으며, 끝까지 타협 없는 소비에트 애국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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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92소련 공군 복무 (발트 군관구 공군본부 선임공병감독관)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리가 제294선거구)
  • 1990–1991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의원
  • 1990–1991소유즈파 공동의장
  • 2000–2007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3·4기)
  • 2013–2015모스크바주 투치코보 도시정착지 장

발렌틴 보듈

Valentin Bodiul
경제 운영 몰도바 몰도바인 1951–2020 ○ 코로나19로 사망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포도밭 파괴를 증언한 크리코바 와인 공장장

'주말마다 도끼를 들고 나가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

몰도바의 와인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1987년부터 2016년까지 29년간 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의 총책임자를 지냈다. 반알코올 캠페인 당시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이 주말에 도끼로 포도나무를 베도록 강요받았고, 포도밭을 지키려 한 이들은 14~15년형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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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슨제레이 와인 공장 기술자
  • 1974–1975드러게네슈티 와인 공장장
  • 1975–1978슨제레이(라조프스키) 구 콤소몰 지구위원회
  • 1978–1983몰도바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무과장
  • 1983–1985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검열원
  • 1985–1987크리코바 와인 공장 수석 엔지니어
  • 1987–2016크리코바 와인 콤비나트 총책임자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아키모프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Аким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인 1953–1986 ○ 방사선 피폭, 사망

4호기 교대 감독관, AZ-5 비상정지 지시 후 현장에 남아 수습하다 피폭 사망

「나는 모든 것을 옳게 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의 원자력 기술자로, 1976년 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를 졸업하고 1979년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해 1984년 4호기 교대 감독관이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야간 안전시험 중 원자로 출력이 급락하자 출력 회복을 지시했고, 시험 종료와 함께 AZ-5 비상정지 버튼을 누르도록 했으나 제어봉 설계 결함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후 8시간 동안 현장을 떠나지 않고 소방 호출, 급수 밸브 수동 개방 등 수습을 지휘하다 15~20Gy의 치명적 방사선에 피폭되었고,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모스크바 제6병원에서 5월 11일 33세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76모스크바 전력공학연구소 졸업 (열·전력 공정 자동화 전공)
  • 1979–1984체르노빌 원전: 선임 터빈 관리 기술자, 터빈 공장 교대 감독
  • 1984–1986체르노빌 원전 4호기 교대 감독관
  •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중 AZ-5 비상정지 지시, 폭발 후 8시간 현장 수습 지휘
  • 2008우크라이나 대통령령으로 3급 용기훈장 사후 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