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1991

마지막 세대 226명

소련을 개혁하려 한 사람들과 그 종말을 앞당긴 사람들, 마지막 소비에트 세대.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로보프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Лоб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35– ○ 생존

알마아타에 군대 투입을 거부하고 소련 군사개혁을 설계한 마지막 총참모장

“이것은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유혈 사태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1986년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구한 카자흐 당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련군 최고 직책인 총참모장까지 오른 직업군인.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카자흐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혈 사태 없이 사태를 해결했다.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군사개혁 초안을 두 차례 작성했으며, 복무 기간 단축·여단제 전환·방어적 군사 태세를 주장했으나 야조프 국방장관 및 이후 러시아 군 수뇌부와 충돌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4개월 뒤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소련군 마지막 총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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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소련군 징집, 투르키스탄 군관구 포병연대 복무
  • 1967–1968주독 소련군 차량화소총대대장 — 프라하 인근 비행장 및 주요 거점 장악
  • 1979–1981제28연합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 1984–1987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 병력 투입 거부
  • 1987–1988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 군사개혁 초안 작성, 야조프와 충돌 후 해임
  • 1989–1991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겸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장
  • 1991.8소련군 총참모장 — 쿠데타 직후 임명, 소련 해체와 함께 해임
  • 1992–1994군 감찰관·러시아 대통령 군사고문, 이후 퇴역

블라디미르 마카로비치 벨리치코

Владимир Макарович Величко

소련 후기 중공업을 책임진 기술관료

우스티노프가 박격포 생산을 지시하자 그의 장관 아파나시예프는 '하나라도 만들면 검찰에 넘기겠다'고 경고했다. 벨리치코는 '영웅적인 돌격 작업'으로 결국 납품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조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에서 시작해 공장장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에너지·중공업·수송기계 부문 장관과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이끈 부처들은 아톰마시 원자력 설비 단지, 12기 이상의 원전용 반응로·터빈 시스템, 대륙간탄도미사일 지상 장비, 우주왕복선 부란의 발사대 등 소련 후기 핵심 에너지·군수 인프라를 구축했다. 1980년대 후반 다른 공업 부처들이 흔들릴 때 그의 부처들은 안정적으로 계획을 완수해 정부가 두 차례나 문제 부처들을 그에게 통합시켰다. 소련 해체 후에도 '탸제네르고마시' 그룹을 이끌며 러시아 산업정책에 원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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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5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
  • 1955–1962레닌그라드 기계공학대학에서 기계공학 전공
  • 1962–1971'볼셰비크' 공장 기술자 → 부서장 → 생산담당 부공장장
  • 1971–1975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장
  • 1975–1983소련 에너지기계공업부 제1차관
  • 1983–1987소련 에너지기계공업부 장관
  • 1987–1989소련 중공업·에너지·수송기계공업부 장관
  • 1989–1991소련 중공업부 장관
  • 1991.1–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1–2016'탸제네르고마시' 회장 → AO '텐마' 회장 → FPG 회장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셰르바코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Щербак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49– ○ 소련 해체로 퇴임 · 생존

소련 중앙계획을 폐기한 마지막 고스플란 의장

그는 소련 계획경제의 종말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시장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공공재에 다가가게 할 메커니즘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로, 파블로프 내각에서 고스플란을 경제예측부로 개편하면서 초대 장관 겸 제1부총리가 되어 중앙계획에서 시장으로의 이행을 관리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자동차 조립기업 '압토토르'를 설립해 성공한 포스트소비에트 기업가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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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74VAZ 건설 현장 엔지니어 → 톨리아티 콤소몰 간부
  • 1976–1982VAZ 계획경제국 차장·국장
  • 1982–1985KAMAZ 경제·계획 담당 부총책임자
  • 1985–1988국가노동위원회 국장 →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89–1991국가노동위원회 의장
  • 1991.3–1991.5소련 부총리
  • 1991.5–1991.11제1부총리 겸 경제예측부 장관 (고스플란 후신)
  • 1991 이후국제투자기금 설립 → 압토토르 홀딩 회장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Vytautas Landsbergis
리투아니아 독립운동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932–

제국에서 걸어 나간 첫 나라를 이끈 음악학자

1990년 3월 11일 밤, 독립 회복법이 반대 없이 가결되자 의장석의 그가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국가라고. 소련에서 걸어 나간 첫 공화국이었고, 크렘린이 받은 첫 탈퇴 통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음악학자로 화가이자 작곡가 추를료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1988년 개혁운동 사유디스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켜 소련에서 이탈을 선언한 첫 공화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제 봉쇄와 1991년 1월의 유혈 진압 시도를 버텨 내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세이마스(국회) 의장과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리투아니아 우파의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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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리투아니아 음악원(현 리투아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 졸업
  • 1978–1990리투아니아 음악원 및 빌뉴스 사범대학 교수
  • 1988–1990사유디스 평의회 의장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2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 (국가원수)
  • 1993–2003조국동맹(보수당) 당수
  • 1996–2000리투아니아 세이마스(국회) 의장
  • 2004–2014유럽의회 의원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수로비킨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уровикин
반혁명 세력 러시아 러시아인 1966– ○ 현역 지휘관

명령 수행과 강경전을 오간 러시아 장군

1991년 8월 모스크바 터널에서 그가 지휘한 장갑차 행렬과 시위대의 충돌로 세 명이 사망했다.

세르게이 수로비킨은 소련 말기 장교로 출발해 러시아군 최고위 지휘관으로 올라선 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타만 사단 BMP 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터널에 진입했으며, 충돌로 시위대 세 명이 사망한 뒤 구금됐지만 상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기소가 취하됐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체첸, 시리아에서 지휘했고,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사적 성과와 민간인 피해를 함께 낳은 강경한 작전 방식으로 알려졌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국가의 명령 체계가 해체 뒤 러시아의 군사국가적 권력으로 이어지는 한 경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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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옴스크 고등 제병지휘학교 졸업, 타만 근위 자동차화소총사단 소대·중대 지휘관
  • 1989–1991아프가니스탄 복무, 타만 사단 제1자동차화소총대대장
  • 19918월 쿠데타 때 모스크바 투입 BMP 대대 지휘, 터널 충돌 뒤 구금 및 기소 취하
  • 1995–2002프룬제 군사아카데미와 총참모부 아카데미 수학, 타지키스탄·체첸 지휘 보직
  • 2017–2021시리아 러시아군 집단 지휘, 항공우주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진급
  • 2022–202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남부집단군 및 통합군 총사령관
  • 2023–현재통합군 총사령관 대리, 이후 항공우주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국방부 대기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예브도키모프

Серг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Евдоким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인 1955– ○ 2000년 전역, 민간 보안직 종사

8월 쿠데타 당시 전차 10대를 백악관 방어선으로 돌린 타만 사단 대대 참모장

나는 어떤 명령을 받든 아무도 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이던 소련군 소령.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 백악관 앞에 배치된 10대의 전차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만난 뒤 전차 방향을 돌려 옐친 측을 방어했다. 그의 대대 소속 110호 전차 위에서 옐친이 역사적 연설을 했으며, 이 장면은 쿠데타 진압의 상징이 되었다. 쿠데타 후 사단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떠났고, 1990년대 내내 경비직과 장례업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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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 (소령)
  • 1991.08.1910대 전차와 함께 옐친 측으로 전향, 백악관 방어
  • 1991–1992타만 사단 잔류 (1992년 샤포시니코프에 의해 중령 진급)
  • 1992–2000티미랴젭스키 구 군사위원회 근무
  • 2000중령으로 전역
  • 2000년대 이후보안회사·장례업 전전, 모스크바 인근 공장 보안부 근무

공산당 서기 출신으로 라트비아 독립을 이끈 최고회의 의장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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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5기술자(니크라체 국영농장), 리가 농업공학연구소 직원, 소련군 복무
  • 1970–1974리가 공과대학 선임강사, 키로프 구 콤소몰 제1서기
  • 1974–1988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러 직책, 최종 이념 담당 서기
  • 1988–1990라트비아 소비에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90–1993라트비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독립 회복 후 국가원수 대행
  • 1993–1995제5대 사에이마(국회) 의장
  • 1995–2002부총리, 환경보호지역개발장관, 교통장관 역임

아벨 게제비치 아간베갼

Абел Гезевич Аганбегян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장개혁 설계사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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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노동·임금 국가위원회에서 경제학자로 근무
  • 1961–1966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섹터장, 33세에 소장
  • 1966–1984IEiOPP 소장, BAM 과학위원회 의장, 『EKO』 창간·편집장
  • 1974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64년 통신회원)
  • 1985–1989고르바초프 경제 고문, 생산력연구위원회 의장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상임위원
  • 1989–2002소련·러시아 정부 산하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
  • 2002–현재국민경제아카데미 경제이론·정책 학과장, 저술 활동 지속

아스카르 아카예비치 아카예프

Аскар Акаевич Акаев
외국 정치가 키르기스스탄 키르기스인 1944–현재 → 2005년 실각 · 망명

개혁의 얼굴에서 장기 집권자로 변한 과학자 대통령

1991년 8월 26일 최고회의에서 아카예프는 신연방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국가연합을 요구했다.

물리학자이자 키르기스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출신의 정치가인 아카예프는 당 관료가 아니었던 인물로서 1990년 공화국의 첫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소련 말기의 민족 갈등과 주권 요구 속에서 다당제와 시장 개혁을 내세웠고, 1991년 쿠데타를 신속히 비판하며 키르기스스탄의 독립을 이끌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도 공화국의 주권을 중시해 8월 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국가연합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임 후반에는 대통령 권한의 연장과 가족·측근 중심의 통치, 부패 의혹이 커졌고 2005년 대중 봉기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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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1988프룬제 폴리테크닉 연구자·교수, 컴퓨터공학과장
  • 1987–1989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89–1990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90.10–1991.08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 1991.08–2005.03키르기스스탄 대통령
  • 1991.08.26최고회의에서 신연방조약 초안 반대와 국가연합식 개정 요구
  • 2005–현재러시아 체류, 모스크바국립대학교 교수·연구자

안드레이 세라피모비치 그라초프

Андрей Серафимович Грачёв
연구자 소련 러시아 1941– ○ 활동 중

개혁의 붕괴를 기록한 권력 내부의 목격자

그는 자신의 임무를 두고 "소비에트 국가의 역사를 하루 연장했다"고 회고했다.

안드레이 그라초프는 동방학을 전공한 국제문제 전문가이자 기자로, 소비에트 개혁의 국제적 의미와 내부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1991년 8월 쿠데타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겸 마지막 대통령 공보비서가 되어, 연방을 보존하려는 협상과 국가기구의 해체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의 회고록과 공개한 개인 문서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주화 약속이 연방 붕괴의 가속과 맞물린 긴장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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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66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참사관
  • 1966–1973부다페스트 《세계의 청년》 편집부 소련 대표
  • 1973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제1부위원장
  • 1973–1978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참사관
  • 1978–1989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정치선전부
  • 1989–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차장
  • 1991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보좌관 겸 공보비서
  • 1992–현재기자·정치평론가·저술가

알렉산드르 미트로파노비치 오볼렌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трофанович Оболенский

소련사 최초로 현직 서기장에게 선거 대안을 제시한 엔지니어

1989년 5월 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고르바초프의 유일 후보에 맞섰고, 대의원 1,415 대 689로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오룔 출생의 지구물리학 엔지니어로, 콜라반도 극지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며 1987년 최초의 비공식 개혁단체인 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를 아파티티에 결성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제1차 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자진 출마, 소련사 최초의 현직 서기장 대안 입후보라는 정치적 파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의회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진상 규명을 주도했으며, 벨로베시 협정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끝까지 소련 해체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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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5오룔 공장 선반공, 동독 주둔 소련군 복무
  • 1971레닌그라드 광산대학 지구물리학 전공 졸업
  • 1971–1992콜라 과학센터 극지지구물리연구소 기술자·설계기사
  • 1987–1989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DOSP) 아파티티 결성·의장
  • 1989–1992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레닌그라드 농촌 제20선거구)
  • 1990–1994러시아 사회민주당(SDPR) 공동의장·의장
  • 19918월 쿠데타 진상조사 의회위원회 위원장
  • 1993–1996TV·라디오 공사 '보스토크' 사장 겸 편집장, 오룔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루츠코이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цкой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러시아 러시아 1947– ↓ 1993년 체포, 1994년 사면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러시아 유일의 부통령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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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바르나울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 1980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88아프가니스탄: 제378독립공격항공연대장, 제40군 공군 부사령관
  • 1988소련영웅 칭호 수여
  • 1990RSFSR 인민대의원, 최고소비에트 위원
  • 1990소련군 참모본부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91.7–1993.10RSFSR/러시아연방 부통령
  • 1993.9–10의회에 의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 체포
  • 1996–2000쿠르스크 주지사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넴초프

Александр Викентьевич Немц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인 1933–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100만 명이 살았다고 추계한 러시아 알코올 역학의 권위자

"반알코올 캠페인은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넴초프가 25년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모스크바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에서 평생을 연구한 알코올 역학의 개척자다.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을 계기로 실제 알코올 소비량과 그로 인한 사망 규모를 추계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캠페인이 약 10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추정치를 제시해 국제적 논의의 기준점을 만들었다. 고르바초프 시기와 소련 붕괴 이후의 알코올 관련 초과 사망을 추적하며 알코올 정책과 공중보건의 관계를 실증한 그의 연구는 러시아 인구위기의 핵심적 설명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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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모스크바에서 출생
  • 1977의학박사 학위 취득
  • 1982알코올 중독 문제 연구 시작, 1985년부터 역학 조사
  • 1987실제 알코올 소비량 추계 방법론 개발
  • 1990알코올 관련 사망률 추계 방법론 개발
  • 1996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 정보학·체계연구부장
  • 2011『러시아 알코올 현대사』 영문판 출간 (쇠데르턴 대학)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자소호프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Дзасохо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오세티야계 러시아 1934– ○ 현역 원로 정치가

국제주의와 지역 통치를 잇댄 정치가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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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오르조니키제 시 콤소몰위원회 제1서기
  • 1967–1986소련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연대위원회 제1서기, 제1부위원장
  • 1986–1988소련의 시리아 대사
  • 1988–1990북오세티야주 공산당 지역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최고회의 국제문제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서기
  • 1993–1998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 1998–2005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베스메르트니흐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ссмертных
외교 소련 러시아 1933– ↓ 해임 1991

소련 말기의 마지막 정규 외무장관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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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1–8외무장관

알베르타스 시메나스

Albertas Šimėnas
외국 정치가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50– ○ 생존

독립 회복기의 경제학자 정치가

취임 사흘 만인 1991년 1월 13일 소련군이 빌뉴스에 진입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시골로 피신했고, 의회는 그의 부재 속에서 새 총리를 뽑았다.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경제학자로 활동하다 리투아니아 독립 회복 운동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의 서명자였다. 그는 1991년 1월 소련군이 빌뉴스의 핵심 시설을 포위한 시기에 정부를 이끌었고, 3일 뒤 실종 상태에서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에게 총리직이 넘어갔다. 이후 경제장관과 국회의원으로 일하며 독립국가의 경제 개혁과 제도 정비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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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리투아니아 파필리아이에서 출생
  • 1972–1984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기관 경제학자
  • 1984–1989빌뉴스 공학건설대 경제학 강사, 1989년 부교수
  • 1990–1992최고회의 의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 서명자
  • 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 1991–1992경제장관
  • 1996–2000리투아니아 공화국 세이마스 의원, 경제위원회 위원장
  • 2000–2016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 및 부사장

알프레드스 페테리스의 아들 루빅스

Alfrēds Pētera dēls Rubiks
사회주의권 지도자 라트비아 라트비아인 1935– ○ 출소 후 정치 활동 지속

소련 말기 라트비아 공산당의 완고한 수호자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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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소련군 복무
  • 1957–1961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기사
  • 1982–1984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방산업부 장관
  • 1984–1990리가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90–199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19971991년 쿠데타 시도 관련 수감, 1995년 8년형 선고
  • 1999–2015라트비아 사회주의당 의장
  • 2009–2014유럽의회 의원

에티바르 살리다르 오글루 마메도프

Etibar Səlidar oğlu Məmmədov
사회주의권 지도자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55– ○ 자연사 (생존)

프리마코프에게 저항을 예고한 인민전선 부의장

폴랴니치코는 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정에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메도프는 "저항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부의장으로서 민족독립운동의 선봉에 섰고, 1990년 1월 19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빅토르 폴랴니치코를 만나 바쿠 진입을 경고받았다. 그날 밤 폴랴니치코로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저항을 예고했으며, 이후 크렘린의 바쿠 유혈 진압에 대한 핵심 증언자가 되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을 창당해 1998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고, 독립 아제르바이잔에서 장기간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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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1988바쿠국립대학교 역사학 강사
  • 1988–1991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 부의장 · 이사회 위원
  • 1990.01–11레포르토보 교도소 수감 (검은 1월 관련 체포)
  • 1990–2000아제르바이잔 최고 소비에트 · 국민의회 의원
  • 1991국가방위평의회 위원 · 「국가독립에 관한 헌법」 공동 기초
  • 1992–2004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NIPA) 창당자 겸 의장
  • 1998, 2003대통령 선거 출마 (1998년 2위, 11.6% 득표)

엔아르노 아우구스토비치 실라리

Enn-Arno Augustovich Sillari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에스토니아계 1944– ○ 정치적 기반 상실 후 사업가

분열하는 당을 이끈 마지막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공산당 지도자

1990년 당이 갈라졌을 때 실라리는 소련 공산당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세력의 제1서기가 되었다.

엔아르노 실라리는 공장 기술자에서 출발해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중앙·도시 조직을 거친 당 관료였다. 1990년 당이 에스토니아의 주권 노선을 택한 다수파와 소련 공산당에 남은 세력으로 갈라지자, 그는 후자를 이끌며 소비에트 연방의 제도와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운동의 존속을 함께 지키려 했다. 그는 1990~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자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였으며,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그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 이후에도 당을 이끌었지만 1992년 선거 패배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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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카우나스 폴리테크닉 연구소 졸업, 섬유 기계가공 전공
  • 1967–1972탈린 케일라 공장에서 기술자로 근무
  • 1972–1976탈린 레닌구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 1984–1986타르투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89탈린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90–1992소련 공산당계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2–2024에스토니아 사업가, 발테코 공동 소유주

예고르 세묘노비치 스트로예프

Егор Семёнович Строев
농업 소련 러시아 1937–

고르바초프 시기 마지막 농업 정치국원, 페레스트로이카 농정의 실무 책임자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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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84오룔 주당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
  • 1984–1985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 1985–1989오룔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6–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89–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 (농업)
  • 1990–1991소련 공산당 정치국 위원
  • 1993–2009오룔 주지사
  • 1996–2001러시아 연방평의회 의장

예지 보로프차크

Jerzy Borowcza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57– ○ 정치 활동 계속

자유노조를 시작한 조선소 노동자

“파업을 준비한 지 7일이 지나고, 마침내 이곳 조선소에서 시작해야 할 날이 왔습니다.”

예지 보로프차크는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자유노조 운동의 문을 연 젊은 노동자였다. 그는 보그단 펠스키와 루트비크 프론지뉴스키와 함께 8월 14일 파업을 시작했고,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복직과 임금 인상, 1970년 희생자 추모비를 요구했다. 계엄령 뒤에도 저항을 이어 가다 수감과 해고를 겪었으며, 1989년 조선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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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그단스크 조선소 건설기술학교 졸업
  • 1979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 해안 자유노조 협력자
  • 1980보그단 펠스키, 루트비크 프론지뉴스키와 8월 파업 시작
  • 1980–1981연대 조선소 지부 창립위원, 부위원장
  • 1981–1982계엄령 저항, 이와바 구금시설 수감
  • 1982–1989해고 뒤 고소공포 작업협동조합에서 근무
  • 1989–1993조선소 복귀, 직장 연대노조 위원장
  • 2000–2023폴란드 하원의원, 그단스크 연대센터 재단 이사

유리 아나톨리예비치 프로코피예프

Юрий Анатольевич Прокофьев
당 최고 지도자 소비에트 러시아계 1939– ○ 정당 금지 뒤 정치 전환

소련 말기의 모스크바 당 조직자

그의 삶은 공산당 금지 전후로 갈라졌다고 회고되었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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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모스크바 학교 선구자단 지도원
  • 1960소련 공산당 입당
  • 1968모스크바 시당 조직·당무 부문 간부
  • 1977–1985모스크바 쿠이비셰프 구당위 서기·제1서기
  • 1986–1988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서기
  • 1988–1989모스크바 시당 서기·제2서기
  • 1989–1991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정치국원

이고르 니콜라예비치 그랴진

Igor Nikolayevich Gräzin
연구자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인 1952–

법의 언어로 소련의 공식 서사를 흔든 에스토니아 법학자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그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법적으로 무효였다고 주장했다.

이고르 그랴진은 에스토니아의 법학자이자 정치가로, 법철학과 법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회에 진출한 그는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비밀 의정서와 발트 국가 병합의 법적 의미를 검토한 에스토니아 측 법률가였다. 그의 활동은 학술적 법률 논증을 소비에트 해체기의 주권과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에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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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타르투에서 출생
  • 1975타르투 국립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79–1987소련 국가·법 연구기관에서 법학 연구와 박사학위 취득
  • 1988–1989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사회학·법학 연구소 법률부문 책임자
  • 1989–1991소련 인민대회 대의원, 야코블레프 위원회 위원
  • 1990–2000미국 노터데임대학교 법학 교수·연구자
  • 2005–2018에스토니아 리기코구 의원
  • 2018–2019유럽의회 의원
외국 정치가 라트비아 라트비아 1951–

소련에서 라트비아를 걸어내고 바리케이드의 밤을 지휘한 물리학자

1991년 1월 20일 밤, 소련 특수부대가 라트비아 내무부 청사를 습격해 다섯 명이 사망했다. 고드마니스는 즉시 소련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에게 전화를 걸었고, 푸고는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라트비아의 물리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고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라트비아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87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에 합류해 1990년 라트비아 최고회의 선거 승리 후 초대 총리에 취임, 독립 회복을 선언한 정부를 이끌며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당시 전략 거점 방어를 지휘하고 소련 내무장관 푸고에게 직접 전화해 공격 개입을 추궁했다. 2007년 다시 총리가 되어 금융위기 속에서 사임할 때까지 라트비아의 시장경제 전환과 유럽 통합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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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88라트비아대학교 강사, 고체물리학연구소 연구원
  • 1989–1990라트비아 인민전선 부의장
  • 1990–1993라트비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98–1999라트비아 재무장관
  • 2006–2007라트비아 내무장관
  • 2007–2009라트비아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