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광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유혈 사태 없이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 1986년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을 요구한 카자흐 당 지도부의 명령을 거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련군 최고 직책인 총참모장까지 오른 직업군인. 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시절인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을 위해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카자흐 당 지도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혈 사태 없이 사태를 해결했다.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군사개혁 초안을 두 차례 작성했으며, 복무 기간 단축·여단제 전환·방어적 군사 태세를 주장했으나 야조프 국방장관 및 이후 러시아 군 수뇌부와 충돌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4개월 뒤 소련 자체가 해체되면서 소련군 마지막 총참모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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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소련군 징집, 투르키스탄 군관구 포병연대 복무
1967–1968주독 소련군 차량화소총대대장 — 프라하 인근 비행장 및 주요 거점 장악
1979–1981제28연합군 사령관, 벨로루시 군관구
1984–1987중앙아시아 군관구 사령관 — 1986년 12월 알마아타 시위 진압 병력 투입 거부
1987–1988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 군사개혁 초안 작성, 야조프와 충돌 후 해임
우스티노프가 박격포 생산을 지시하자 그의 장관 아파나시예프는 '하나라도 만들면 검찰에 넘기겠다'고 경고했다. 벨리치코는 '영웅적인 돌격 작업'으로 결국 납품하고 '신경질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조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레닌그라드 '볼셰비크' 공장 선반공에서 시작해 공장장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에너지·중공업·수송기계 부문 장관과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지냈다. 그가 이끈 부처들은 아톰마시 원자력 설비 단지, 12기 이상의 원전용 반응로·터빈 시스템, 대륙간탄도미사일 지상 장비, 우주왕복선 부란의 발사대 등 소련 후기 핵심 에너지·군수 인프라를 구축했다. 1980년대 후반 다른 공업 부처들이 흔들릴 때 그의 부처들은 안정적으로 계획을 완수해 정부가 두 차례나 문제 부처들을 그에게 통합시켰다. 소련 해체 후에도 '탸제네르고마시' 그룹을 이끌며 러시아 산업정책에 원로로 참여했다.
1990년 3월 11일 밤, 독립 회복법이 반대 없이 가결되자 의장석의 그가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국가라고. 소련에서 걸어 나간 첫 공화국이었고, 크렘린이 받은 첫 탈퇴 통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음악학자로 화가이자 작곡가 추를료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1988년 개혁운동 사유디스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켜 소련에서 이탈을 선언한 첫 공화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제 봉쇄와 1991년 1월의 유혈 진압 시도를 버텨 내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세이마스(국회) 의장과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리투아니아 우파의 원로로 남았다.
1991년 8월 모스크바 터널에서 그가 지휘한 장갑차 행렬과 시위대의 충돌로 세 명이 사망했다.
세르게이 수로비킨은 소련 말기 장교로 출발해 러시아군 최고위 지휘관으로 올라선 군인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타만 사단 BMP 대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터널에 진입했으며, 충돌로 시위대 세 명이 사망한 뒤 구금됐지만 상부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기소가 취하됐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체첸, 시리아에서 지휘했고,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는 군사적 성과와 민간인 피해를 함께 낳은 강경한 작전 방식으로 알려졌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국가의 명령 체계가 해체 뒤 러시아의 군사국가적 권력으로 이어지는 한 경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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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옴스크 고등 제병지휘학교 졸업, 타만 근위 자동차화소총사단 소대·중대 지휘관
1989–1991아프가니스탄 복무, 타만 사단 제1자동차화소총대대장
19918월 쿠데타 때 모스크바 투입 BMP 대대 지휘, 터널 충돌 뒤 구금 및 기소 취하
타만 근위차량화소총사단 전차대대 참모장이던 소련군 소령.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모스크바 백악관 앞에 배치된 10대의 전차를 이끌고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만난 뒤 전차 방향을 돌려 옐친 측을 방어했다. 그의 대대 소속 110호 전차 위에서 옐친이 역사적 연설을 했으며, 이 장면은 쿠데타 진압의 상징이 되었다. 쿠데타 후 사단 내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떠났고, 1990년대 내내 경비직과 장례업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1991년 8월 26일 최고회의에서 아카예프는 신연방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국가연합을 요구했다.
물리학자이자 키르기스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출신의 정치가인 아카예프는 당 관료가 아니었던 인물로서 1990년 공화국의 첫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소련 말기의 민족 갈등과 주권 요구 속에서 다당제와 시장 개혁을 내세웠고, 1991년 쿠데타를 신속히 비판하며 키르기스스탄의 독립을 이끌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도 공화국의 주권을 중시해 8월 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국가연합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임 후반에는 대통령 권한의 연장과 가족·측근 중심의 통치, 부패 의혹이 커졌고 2005년 대중 봉기로 실각했다.
안드레이 그라초프는 동방학을 전공한 국제문제 전문가이자 기자로, 소비에트 개혁의 국제적 의미와 내부 정치에 관여했다. 그는 1991년 8월 쿠데타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겸 마지막 대통령 공보비서가 되어, 연방을 보존하려는 협상과 국가기구의 해체를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의 회고록과 공개한 개인 문서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주화 약속이 연방 붕괴의 가속과 맞물린 긴장을 증언한다.
1989년 5월 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고르바초프의 유일 후보에 맞섰고, 대의원 1,415 대 689로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오룔 출생의 지구물리학 엔지니어로, 콜라반도 극지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며 1987년 최초의 비공식 개혁단체인 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를 아파티티에 결성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제1차 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자진 출마, 소련사 최초의 현직 서기장 대안 입후보라는 정치적 파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의회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진상 규명을 주도했으며, 벨로베시 협정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끝까지 소련 해체에 반대했다.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반알코올 캠페인은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넴초프가 25년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모스크바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에서 평생을 연구한 알코올 역학의 개척자다.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을 계기로 실제 알코올 소비량과 그로 인한 사망 규모를 추계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캠페인이 약 10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추정치를 제시해 국제적 논의의 기준점을 만들었다. 고르바초프 시기와 소련 붕괴 이후의 알코올 관련 초과 사망을 추적하며 알코올 정책과 공중보건의 관계를 실증한 그의 연구는 러시아 인구위기의 핵심적 설명틀로 자리 잡았다.
1978년 2월 니코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인민연대 회의 도중 '검은 9월' 대원들이 그를 인질로 잡았지만, 40분 만에 이집트·팔레스타인 대표를 뺀 모두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르 자소호프는 청년조직과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운동에서 경력을 쌓은 소련의 당·외교 정치가였다. 시리아 대사를 거쳐 북오세티야 당 조직을 이끌었고, 소련 말기의 민족문제와 국제정치를 함께 다루는 위치에 올랐다. 제2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과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었으며, 연방의 개혁과 해체가 교차한 마지막 소비에트 권력층의 한 인물이었다. 이후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을 거쳐 북오세티야 공화국 대통령이 되어 지역의 연방관계와 민족 간 긴장을 관리했다.
1988년 INF 조약 비준 청문회 직후, 베스메르트니흐는 크렘린궁 복도에서 미국 기자와 편안한 영어로 조약의 정치적 의미를 논했다. 소련 고위 관료로서는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셰바르드나제 사임 후 소련 외무장관이 된 직업외교관으로, MGIMO 졸업생 가운데 처음으로 외무부 수장에 올랐다. 워싱턴 대사관에서 13년 근무하며 미국 전문가로 성장했고, 재임 7개월 동안 START-I 조약 서명과 마드리드 중동평화회의 준비를 주도했다. 소련 외무장관 최초로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주변국과의 '우호 협력의 띠' 구상을 제시했으나, 8월 쿠데타 때 GKChP 불참과 공개 침묵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협회를 설립해 분석가로 전향했다.
취임 사흘 만인 1991년 1월 13일 소련군이 빌뉴스에 진입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시골로 피신했고, 의회는 그의 부재 속에서 새 총리를 뽑았다.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경제학자로 활동하다 리투아니아 독립 회복 운동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의 서명자였다. 그는 1991년 1월 소련군이 빌뉴스의 핵심 시설을 포위한 시기에 정부를 이끌었고, 3일 뒤 실종 상태에서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에게 총리직이 넘어갔다. 이후 경제장관과 국회의원으로 일하며 독립국가의 경제 개혁과 제도 정비에 관여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폴랴니치코는 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정에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메도프는 "저항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부의장으로서 민족독립운동의 선봉에 섰고, 1990년 1월 19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빅토르 폴랴니치코를 만나 바쿠 진입을 경고받았다. 그날 밤 폴랴니치코로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저항을 예고했으며, 이후 크렘린의 바쿠 유혈 진압에 대한 핵심 증언자가 되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을 창당해 1998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고, 독립 아제르바이잔에서 장기간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1990년 당이 갈라졌을 때 실라리는 소련 공산당과의 연계를 유지하는 세력의 제1서기가 되었다.
엔아르노 실라리는 공장 기술자에서 출발해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중앙·도시 조직을 거친 당 관료였다. 1990년 당이 에스토니아의 주권 노선을 택한 다수파와 소련 공산당에 남은 세력으로 갈라지자, 그는 후자를 이끌며 소비에트 연방의 제도와 에스토니아 공산주의 운동의 존속을 함께 지키려 했다. 그는 1990~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이자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1서기였으며,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그 정치적 기반을 잃었다. 이후에도 당을 이끌었지만 1992년 선거 패배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나 사업가로 전환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발족되자 스트로예프는 이를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 페레스트로이카기 정치국원 중 쿠데타에 동조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오룔 지역 집단농장의 목동으로 일을 시작해 미추린스크 원예대학을 졸업한 농업 테크노크라트다. 30년간 오룔 주 당조직에서 성장하여 1985년 주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비서로 발탁되어 1990년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농공복합체 개편과 식량 위기 대응 등 페레스트로이카기 농업 정책의 최고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국가비상사태위원회 승인을 거부했다. 소련 해체 후 오룔 주지사(1993~2009)와 연방평의회 의장(1996~2001)을 지내며 탈소비에트 러시아 지역 엘리트로 재편에 성공했다.
예지 보로프차크는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자유노조 운동의 문을 연 젊은 노동자였다. 그는 보그단 펠스키와 루트비크 프론지뉴스키와 함께 8월 14일 파업을 시작했고,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복직과 임금 인상, 1970년 희생자 추모비를 요구했다. 계엄령 뒤에도 저항을 이어 가다 수감과 해고를 겪었으며, 1989년 조선소로 돌아왔다.
유리 프로코피예프는 모스크바의 당·행정 조직에서 성장한 소비에트 당 간부였다. 그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서 개혁과 당의 해체가 충돌한 마지막 시기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들어갔다.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 활동에 관여했지만 위원은 아니었으며, 소련과 공산당의 금지 뒤에는 회고록과 기술 기업 활동으로 전환했다.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그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법적으로 무효였다고 주장했다.
이고르 그랴진은 에스토니아의 법학자이자 정치가로, 법철학과 법이론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회에 진출한 그는 야코블레프 위원회에서 비밀 의정서와 발트 국가 병합의 법적 의미를 검토한 에스토니아 측 법률가였다. 그의 활동은 학술적 법률 논증을 소비에트 해체기의 주권과 역사 기억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에 연결했다.
1991년 1월 20일 밤, 소련 특수부대가 라트비아 내무부 청사를 습격해 다섯 명이 사망했다. 고드마니스는 즉시 소련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에게 전화를 걸었고, 푸고는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라트비아의 물리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고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라트비아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87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에 합류해 1990년 라트비아 최고회의 선거 승리 후 초대 총리에 취임, 독립 회복을 선언한 정부를 이끌며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당시 전략 거점 방어를 지휘하고 소련 내무장관 푸고에게 직접 전화해 공격 개입을 추궁했다. 2007년 다시 총리가 되어 금융위기 속에서 사임할 때까지 라트비아의 시장경제 전환과 유럽 통합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