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코마리를 도우러 달려갔다. 사수가 경고 사격을 했지만 우소프는 멈추지 않았고, 곧 유탄이 그를 스쳤다.
농업경제학을 전공하고 모스크바 합작기업 이콤에서 경제학자로 일한 평범한 시민이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에 뛰어오른 드미트리 코마리를 도우려 달려가다 유탄에 맞아 사망했으며, 사흘 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그를 포함한 세 희생자에게 소련 최후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1993년 10월 3일 밤 TV 생방송: "이 시간에 경찰과 보안군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모소베트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소련 작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와 파벨 바조프의 손자. 모스크바국립대 졸업 후 《콤무니스트》와 《프라우다》 경제편집자로 시장개혁을 주장했다. 1991년 11월 옐친 정부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으로 들어가 1992년 1월 2일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를 단행,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설계했다. 1992년 6~12월 총리 대행, 1993년 헌정위기 때 TV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기근과 국가 붕괴를 막았다는 평가와 국민 저축을 쓸어갔다는 비판이 교차하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정책 유산을 남겼다.
제어봉 문서를 공부하던 톱투노프는 친구 사샤 코롤에게 '특정 조건에서는 제어봉이 반응을 늦추기는커녕 가속할 수 있다'고 말했고, 석 달 뒤 그 예감은 그가 직접 누른 AZ-5 버튼에서 현실이 되었다.
레오니트 톱투노프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4호기의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로, 1986년 4월 26일 참사 당시 야간 교대조 제어반을 맡고 있던 불과 25세의 기술자였다. 독립 근무 석 달째 처음 맞은 정지 작업에서 AZ-5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으나 RBMK 제어봉의 설계 결함이 반응도를 급증시켜 폭발을 촉발했고, 사고 직후 통제실로 돌아와 물 공급 밸브를 수동 개방하다 1,300렘의 치명적 방사선을 흡수해 5월 14일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60우크라이나 수미주 니콜라예프카에서 출생
1983오브닌스크 원자력공학연구소 졸업
1983–1986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근무: 블록 제어 기술자, 이후 4호기 원자로 운전 선임기사(SIUR)
1986.04.264호기 안전시험 야간 교대조에서 AZ-5 비상정지 작동, 치명적 방사선 피폭
「노래혁명」의 사운드트랙을 쓴 작곡가, 다섯 조국의 노래로 에스토니아 대중을 하나로 묶었다
밴드의 연주를 멈추고 30만 군중 앞에서 맨손으로 합창을 지휘하며 '나는 에스토니아인이고 에스토니아인으로 남을 것이다'를 불렀다.
에스토니아의 작곡가이자 음악가로, 1980년대 후반 노래혁명 시기 독립 열망을 노래한 〈다섯 조국의 노래〉 연작으로 대중의 감정적 결집을 이끌었다. 1987년 인광석 채굴 반대 운동에 연대해 만든 〈어느 땅도 홀로 있지 않다〉는 노래혁명의 서곡이 되었고, 이듬해 5월 타르투 팝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다섯 곡은 이듬해 9월 30만 명이 모인 〈에스티마 라울〉 공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96년 3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200여 곡을 남겼지만, 역사는 그를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작곡가로 기억한다.
'모든 게 괜찮아졌어. 우리 백 살까지 살 거야'... 방사능이 몸을 파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 병상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블라디미르 프라비크는 체르노빌 원전 소방대(VПЧ-2) 제3교대를 지휘한 소련 내무부 소방 중위였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폭발 2분 만에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했고, 이윽고 대원 넷과 함께 3호기 지붕에 올라 가동 중인 원자로로의 연소 확대를 저지했다. 방사능 위험을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당 6,000뢴트겐 이상의 방사선장에서 작업했으며, 체르노빌 희생자 중 가장 높은 1,520REM(치사량의 약 3배)에 피폭되어 1986년 5월 11일 모스크바에서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비디오 영상 속에서 일리야는 전차 앞에 서서 군인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잖아!'
모스크바건축대학 출신의 건축가이자 시인으로, 그의 시는 사후 옙투셴코의 《세기의 시절》에 실렸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536호에 불이 붙은 뒤 병사들이 후퇴할 때 돌진했다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다. 사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고, 그의 유대식 장례식은 랍비와 정교회 성직자가 함께 집전한 최초의 공적 종교의례로서 신생 러시아의 다민족 상징이 되었다.
BMP 장갑차의 관측창에 방수포를 씌우려고 뛰어올랐다. 사수가 포탑을 돌려 떨어뜨렸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달려가 장갑차에 올라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공수부대 하사로 제대 후 모스크바에서 지게차 기사로 일했다. 1991년 8월 21일 새벽, 루츠코이의 '아프간 동지들' 호소를 듣고 백악관 방어선에 합류했으며 차이콥스키 터널에서 BMP 장갑차의 관측창을 막으려다 깔려 사망, 쿠데타 유일의 세 희생자 중 한 명이 되었고 사후 소비에트연방영웅과 '자유 러시아 수호자' 메달 1호를 받았다.
1991년 6월 20일, 포포프는 미국 대사 잭 매틀록을 은밀히 만나 파블로프 총리, 야조프 국방장관, 크류치코프 KGB 의장이 쿠데타를 준비 중이라고 경고했다. 매틀록은 이를 옐친과 고르바초프에게 전달했고, 두 달 뒤 8월 쿠데타가 실제로 터졌다.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학장을 지낸 경제학자로, 『경제문제』 편집장 시절 소련 체제를 '명령-행정 체제'로 명명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하로프, 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 진영을 이끌었고, 1990년 모스크바 시의회 의장을 거쳐 1991년 6월 모스크바 최초의 민선 시장에 올랐다. 시장으로서 무상 주택 사유화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으며, 같은 해 6월 20일 미국 대사 잭 매틀록에게 파블로프·야조프·크류치코프의 쿠데타 음모를 비밀리에 경고했다. 1992년 6월 가이다르식 급진 개혁에 반대하며 시장직에서 물러난 후, 국제대학교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1989년 1월, 빌뉴스 시당은 보고선거 비판에 대한 답변을 두 번째로 요구했으나 라주몹스키의 답변은 없었고, 그해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1985~1988)과 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위원장(1988~1990)을 맡아 페레스트로이카 최대 규모의 간부 교체를 주도한 당 조직·인사 책임자였다. 농학자 출신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1983~1985)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되었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운 고르바초프 아래에서, 라주몹스키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엄격한 대의원 할당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반발과 분리 독립을 촉발한 연쇄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1990~1992)를 지냈고, 2025년 현재 1986년 정치국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
1991년 12월 8일, 옐친 측이 벨로베즈 숲에서 전화로 합류를 권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돌리지 않았다. 여드레 뒤, 그의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고, 소련의 공식 사망 선고문(알마아타 의정서)은 그의 수도에서 서명되었다.
제철소 용광로 노동자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총리와 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인물로,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1991년 12월 벨로베즈 협정에 불참했고,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핵무기 포기와 수도 이전, 다방면 실용 외교로 신생국의 기틀을 놓았지만, 권위주의 통치와 개인숭배, 세습적 부패의 비판도 함께 남겼다.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을 쥐다 2022년 1월 소요 사태로 완전히 퇴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60–1969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노동자 (용광로, 주조기, 배합원, 가스 담당 등). 1962년 공산당 입당. 1967년 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부설 고등기술학교 졸업.
1969–1973테미르타우 시 당·콤소몰 기관에서 활동.
1973–1978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당위원회 서기 — 3만 명 규모 사업장의 사실상 2인자.
1978–1979카라간다 주 당위원회 서기, 이후 제2서기.
1979–198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산업·운수·통신 담당).
1984–1989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총리). 44세에 소련 최연소 공화국 정부 수반.
1989–1991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90년 카자흐 SSR 대통령 겸임. 1990–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1990–2019카자흐스탄 대통령 (1990년 4월 카자흐 SSR 대통령, 1991년 12월 독립 후 초대 대통령). 1991, 1999, 2005, 2011, 2015년 재선. 2019년 3월 사임.
40~50초짜리 작업을 위해 25~30킬로그램 납 갑옷을 입혔다. '우리가 석기시대에서 온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나는 아직도 멈추지 못한다.
소련 민방위 장군이자 기술과학 박사. 체르노빌 원전 폭발 넉 달 뒤, 원격 로봇이 모두 고장 나자 정부위원회는 그에게 가장 위험한 구역의 수동 제염을 맡겼다. 그는 건물의 납 벽판을 뜯어내 급조한 방호복으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3,828명이 40~90초씩 교대하며 3호기 지붕에서 200톤의 고방사능 파편을 손으로 퍼냈다. 작전 후 루이셴병으로 투병하며 두 권의 책을 썼고, 소련영웅 칭호에 추천되었으나 키예프 군관구 참모장과의 갈등 끝에 명단에서 빠졌다.
그는 재판을 앞두고 안경을 깨뜨려 그 파편으로 손목을 그었다. 법정은 한 번 연기되어야 했다.
니콜라이 포민은 1972년 체르노빌 원전에 입사하여 1981년 주임기사로 승진한 소련의 원자력 기술자였다. 1986년 4월 26일 폭발 직후 현장에 도착한 그는 원자로가 파괴되었다는 보고를 끝내 믿지 않고, 파손된 4호기에 수시간 동안 냉각수를 계속 주입하도록 강행했으며 부하 직원을 치사량의 방사선에 노출되는 정찰 임무에 보냈다. 사고 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재판 전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 수용 끝에 조기 석방되었고 이후 칼리닌 원전에서 근무하다 은퇴했다.
2012년 인터뷰에서 당시 업계 현실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발전 프로그램은 이미 많이 채택되었다. 공작기계 분야만 30개 이상의 정부 문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 파니체프는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의 마지막 장관(1986~1991)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 선반공에서 출발해 25년간 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에서 공장장까지 오른 생산 행정가였다. 장관 시절 CNC 공작기계·유연생산모듈·로봇복합체 등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나, 행정명령 체계와 시장 개혁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공작기계협회 '스탄코인스트루멘트'를 설립해 업계를 대변했고, 전직 소련·러시아 장관 원로 모임인 공공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 회고록 『균열』에서 계획경제의 성취와 개혁 실패를 증언했다.
「다우가바를 지키는 것은 독립 라트비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투쟁이 우리 혁명의 시작이었다.」
라트비아의 언론인·정치인. 1986년 동료 아르투르스 스닙스와 함께 『문학과 예술』지에 실은 기사로 다우가프바 수력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을 촉발했고, 3만 명의 서명을 모은 캠페인은 1987년 소련 각료회의가 공사를 중단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 창립대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대중 동원을 독립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전환시켰다. 1990년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내고 1992년 사임한 뒤 언론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를 거쳐 리가 시의원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1979언론 활동 시작, 연극·문학 비평
1986「다우가바의 운명을 생각하며」 발표,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캠페인 촉발. 올해의 언론인 선정
1987년 8월 23일 정오, 히르베파르크에 아무도 없었다. 열두 시가 되자 2천에서 5천 명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파레크는 회고했다. 「믿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뭔가를 해야만 했어요.」
에스토니아 장교의 딸로 태어나 일곱 살에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건축가로 일하던 중 반체제 사미즈다트 활동으로 1983년 체포되어 4년간 수용소에 갇혔고, 석방 7개월 만에 MRP-AEG를 공동 창립해 히르베파르크 집회를 조직했다. 이 집회가 발트 독립운동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듬해 에스토니아 최초의 비공산 정당 ERSP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독립 회복 후 첫 내각의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1993년 풀라패 위기로 사임했고,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해 스탈린주의 희생자 추모비 건립을 주도했다.
랴베프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체르노빌에 5월 2일부터 한 달 넘게 있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픔과 분함이 가시지 않았다.”
볼로그다 출신의 물리학자로 MIFI를 졸업하고 사로프의 비밀 핵무기 연구소 VNIIEF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1974년 VNIIEF 소장이 되어 신형 핵탄두 개발을 진두지휘했고, 이후 당 중앙위원회 방위산업부에서 중형기계공업 부문을 감독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슬라프스키의 후임으로 중형기계공업 장관에 올라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했으며, 이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연료·에너지 복합체를 총괄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원자력부 제1차관으로 핵무기 단지를 보존하고 《소련 원자력 계획》 문서 시리즈를 편집하며 산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헌신했다.
1988년 10월 라흐바린네 창립대회에서 사회학자 라우리스틴은 사비사르와 함께 연단에 서서 독립운동의 지적 초석을 놓았다.
마리우 라우리스틴은 에스토니아 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로 탈린에서 태어나 타르투 대학에서 언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80년 「40인 서한」에 서명하여 에스토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질식시키는 러시아화 정책에 공개 저항했고, 이 경험은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진로를 결정지었다. 1988년 에드가 사비사르와 함께 라흐바린네를 공동 창립하고 그 창립대회를 조직했으며, 라흐바린네의 지적 리더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 회복 후에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타르투 대학 교수로서 탈사회주의 전환의 사회학을 연구했다.
미하일 세묘노비치 수르코프는 소련군 정치기구에서 경력을 쌓은 당 조직가이자 정치가였다. 군 내부의 당 통제 업무를 맡던 그는 소련 해체 직전 정치국에 들어가 말기 체제의 긴장을 드러냈다. 이후 러시아 공산당과 국가두마, 회계원에서 활동하며 소비에트 당 간부의 경력을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치와 국가감사 제도로 이어 갔다.
1991년 10월 25일, 당 활동 정지 일주일 후 쿱초프는 크렘린에서 옐친을 만나 러시아 공산당 금지령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했다. 옐친은 듣지 않았고, 쿱초프는 이후 1년 반 동안 '지하 제1서기'로서 당을 복원대회까지 이끌었다.
볼로그다주 집단농장과 제철소를 거쳐 올라온 금속공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부터 5년간 볼로그다주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CPSU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어 사회정치조직 담당 부서를 이끌었고, 러시아 공화국 공산당(КП РСФСР) 창립 작업에 참여했다. 1991년 8월 이반 폴로스코프의 후임으로 КП РСФСР 제1서기에 선출되었으나, GKChP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사건 직후 '쿠데타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옐친의 당 활동 금지령 이후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하며 1993년 КПРФ 복원대회를 주도했고, 이후 11년간 쥬가노프의 제1부의장으로서 신생 러시아 공산당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91년 8월 21일, 쿠데타 한복판에서 판킨은 체코슬로바키아 TV에 출연했다. 소련 대사 중 유일하게 '야나예프의 치명적 실수'라며 공개 비판하고, 즉각 철회를 촉구한 순간이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신문을 소련 최고의 청년지로 키운 언론인이자, 국가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외교관으로 전환해 8월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공개 비판한 대사였으며,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수립, 미소 군축 협상 개시를 주도했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 위에서 소련 TV 기자에게 말했다. "내 뒤에는 단 한 명의 소련 군인도 남아 있지 않다."
소련군 장성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세 차례 복무하며 마지막 제40군 사령관(1987–1989)으로 소련군 철수를 지휘했다. 1988년 포위된 호스트를 구출한 '마기스트랄 작전'의 성공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89년 2월 15일 우정의 다리를 걸어 소련 영토로 들어온 마지막 소련 군인이 되어, 9년간 지속된 전쟁의 공식적 종결을 상징했다. 이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소련 내무부 제1차관, 러시아 국방차관을 거쳐 1991년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탈냉전기에는 모스크바주 지사로 12년간 재임하며 러시아 권력구조 안에서 군 엘리트의 정치적 전환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