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1991

마지막 세대 226명

소련을 개혁하려 한 사람들과 그 종말을 앞당긴 사람들, 마지막 소비에트 세대.

이반 쿠지미치 폴로스코프

Иван Кузьмич Полоз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35– ↓ 실각 1991 · 생존

러시아 공화당을 세운 보수파 당간부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폴로스코프를 아주 오래전부터 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지만, 멍청하고 무식하다. 누군가 써주면 그대로 읊을 뿐이다."

러시아 SFSR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준 공산당인 КП РСФСР의 창립 제1서기(1990–1991)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맞서는 당내 보수 반대파의 얼굴이었다. 1990년 5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과 맞붙어 초기 집계에서 앞섰으나 정치국의 명령으로 후보에서 물러났고, 한 달 뒤 창립대회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크라스노다르 당 조직을 5년간 이끈 지방 당료 출신으로,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당내 개혁파와 강경파 양쪽의 압박 속에 1991년 8월 심장마비로 사임했다. 쿠데타 실패와 당 해산 후에도 КПРФ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공산당 운동의 상징적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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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콤소몰 · 쿠르스크주 솔른체보 구 당 간부
  • 1969–1972쿠르스크주 당 부서 부장
  • 1972릴스크 구 집행위원회 의장
  • 1973–1978, 1980–1983CPSU 중앙위 기구 근무
  • 1983–1984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이념 담당 서기
  • 1984–1985CPSU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과장
  • 1985–1990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위원

자한기르 뫼브숨 오글르 무슬림자데

Cahangir Mövsüm oğlu Müslümzadə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아제르바이잔 1945– ↓ 1988년 해임·제명

깃발을 들고 군중 선두에 선 숨가이트 마지막 당 책임자

깃발을 손에 쥔 채 흥분한 군중의 선두에 선 그의 모습이 촬영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으로 보내졌다.

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숨가이트 시당위 제1서기가 된 인물로, 1988년 2월 숨가이트 포그롬 당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아제르바이잔 SSR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무슬림자데는 나중에 군중을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에서 바다 쪽으로 유도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행렬의 후미가 흩어져 아르메니아인 주택가로 번져갔다. 사건 직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어, 포그롬의 희생양이자 실패한 당 간부의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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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1974아제르바이잔 SSR 통신부 출판부 지도원, 콤소몰 26바쿠 코미사르 구위원회 비서
  • 1974–1978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조직부장, 청년단체위원회 의장,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무부 지도원
  • 1978–1985아제르바이잔 레닌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5–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아제르바이잔 합작기업 및 국제연합 협회 부회장
  • 1991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최고회의 인민대표

줌베르 일리치 파티아슈빌리

ჯუმბერ ილიას ძე პატიაშვილი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그루지야 1939– ↓ 1989년 4월 해임

트빌리시 비극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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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73그루지야 콤소몰 간부,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3–1974고리 지구당 제1서기
  • 1974–1985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85–1989.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9–1991과학생산연합·농업연구소 소장
  • 1995, 2000그루지야 대선 출마, 셰바르드나제에 이어 2위

콘드라트 지그문도비치 테레흐

Кондрат Зигмундович Терех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벨라루스인 1935– ○ 정계 은퇴 후 생존

소비자협동조합 출신의 마지막 소련 무역장관

1987년 설탕 비축량 감소를 정부에 보고하며 소비 위기의 수치를 제시했다.

콘드라트 테레흐는 소비자협동조합 현장에서 출발해 연방의 소비 유통을 맡은 소련 국가관료였다. 벨라루스의 협동조합과 공화국 정부에서 쌓은 경험은 그를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무역장관으로 이끌었다. 그는 1987년 설탕 부족을 둘러싼 정부 보고에서 생산과 유통의 긴장이 일상적 소비 위기로 드러나는 과정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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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4농촌 소비자협동조합 수석 회계원
  • 1954–1958소련 해군 복무
  • 1959–1963빌레이카 시 식품무역국장
  • 1967–1977민스크주 무역국장 및 벨코옵소유즈 제1부의장
  • 1977–1984벨코옵소유즈 의장
  • 1984–1986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91소련 무역장관
  • 1992–대외경제협회 회장

콘스탄틴 알렉세예비치 코체토프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еевич Кочет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932– ↓ 1991년 해임·퇴역

트빌리시에서 정치국 승인 없이 무력 사용을 강행한 국방차관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 1989년 4월 8일,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서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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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리보프 보병학교 졸업, 독일 주둔 소련군에서 소대장·중대장
  • 196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북캅카스 군관구 연대장
  • 1973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24 '철의' 사단장
  • 1977–1979제7근위군 사령관
  • 1982–1985남부군집단(헝가리) 사령관
  • 1985–1988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88–1989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89–1991소련 국방부 제1차관

파벨 루슬라노비치 팔라젠코

Павел Русланович Палажченко
연구자 러시아 러시아인 1949– ○ 현역 활동

정상회담의 언어를 조율한 통역자

그는 통역을 ‘두 언어 사이의 실을 찾아 잇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파벨 팔라젠코는 냉전 말기 소련 외교의 핵심 대화 현장을 기록한 통역자이자 저술가다. 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의 영어 통역을 맡아 제네바, 레이캬비크, 몰타 등 미소 정상회담에 참여했다. 회고록은 정상들의 발언뿐 아니라 군축 협상과 신뢰 형성이 작동한 실무 현장을 보여 주며, 평화로운 냉전 종식에 대한 소련 측의 해석을 제시한다. 이후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국제관계와 언론 업무를 맡으며 통역과 정치 분석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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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72모리스 토레즈 모스크바 외국어교육대학에서 통번역을 공부함
  • 1972–1974유엔 통역자 과정 수료 뒤 대학에서 통역과 강의를 함
  • 1974–1979유엔 사무국 러시아어 통역부에서 근무
  • 1980–1985소련 외무부 통역부와 미국·캐나다 부서에서 근무
  • 1985–1991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의 영어 수석 통역관, 미소 정상회담에 참여
  • 1991소련 대통령실에서 근무
  • 1992–현재고르바초프 재단 국제관계·언론 업무 책임자 및 분석가
  • 1997《고르바초프와 셰바르드나제와 보낸 나의 세월》 출간

표트르 루친스키

Petru Lucinschi
사회주의권 지도자 몰도바 몰도바인 1940– ○ 정계 은퇴 후 활동

소비에트 간부에서 독립 몰도바의 대통령으로 이동한 정치가

1996년 결선에서 좌파와 중도 세력의 지지를 받아 미르차 스네구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표트르 루친스키는 몰다비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당 관료로 성장해 소비에트 말기의 공화국 정치와 독립 이후 몰도바 국가 형성을 잇는 인물이다. 그는 1989년 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독립 뒤에는 러시아 주재 대사와 의회 의장을 거쳐 1996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몰도바 제2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제도권의 연속성과 새 국가의 주권·대외노선 조정이 한 정치가에게 겹친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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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71몰다비아 레닌주의 콤소몰 중앙위원회 강사·부서장·서기·제1서기
  • 1971–1976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 1976–1978키시너우 시위원회 공산당 제1서기
  • 1978–1986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서 부부장
  • 1986–1989타지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89–1990몰다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정치국원
  • 1997–2001몰도바 대통령

하랄트 예거

Harald Jäger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독일민주공화국 동독인 1943– ○ 통일 뒤 해임

국경 통제관에서 장벽 개방의 명령자로

“내 부하들에게 장벽을 열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랄트 예거는 동독 국가보안부에 복무한 국경 통제 장교로, 국가의 여행 통제와 정보활동을 집행했다. 1989년 11월 9일 그는 상관의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채 Bornholmer Straße에 몰린 군중과 폭력 위험에 직면했다. 그는 통제 체계의 일부였지만 그날 밤 장벽을 열어 수천 명의 동독 시민이 서베를린으로 건너게 했다. 이후 그는 동독 체제의 내부 모순과 장벽 붕괴의 자유를 함께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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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바우첸에서 출생
  • 1961독일 국경경찰 자원 입대
  • 1964–1989국가보안부 여권통제부대 복무
  • 1976–1981국가보안부 법률고등학교 수학, 법학사 취득
  • 1989Bornholmer Straße 국경통과소 부지휘관
  • 1989.11.09상관의 지시 없이 국경 통과소 장벽 개방 명령
  • 1990국가보안부 해체 과정에서 해임

하인츠 발크

Heinz Valk

「노래 혁명」이라는 이름을 지은 예술가

1988년 9월 11일 「에스티마 라울」 무대에서 30만 명을 향해 외쳤다: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 말은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예술가이자 캐리커처 작가로, 1988년 6월 탈린 노래 축제 광장에서 벌어진 자발적 밤노래 시위 직후 『시르프 야 바사르』에 「노래 혁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 역사적 명칭을 만들어 냈다. 그해 9월 「에스티마 라울」 집회에서는 30만 청중 앞에서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Ükskord me võidame niikuinii!)"라고 선언해 독립운동의 상징적 구호를 남겼다. 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와 라흐바린네(인민전선) 창립에 참여했으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1991년 8월 20일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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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에스토니아 국립미술대학에서 금속공예 전공, 졸업
  • 1972–1976에스토니아 SSR 미술기금 수석 예술가
  • 1979–1987에스토니아 SSR 예술가동맹 이사회 제1서기 (비당원)
  • 1987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 창립 회원
  • 1987–1989탈린 미술대학 강사
  • 1988라흐바린네(에스토니아 인민전선) 공동 창립자, 로고 제작
  • 1990–1992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원, 1991년 8월 20일 독립 회복 선언 찬성

헤이키 아호넨

Heiki Ahonen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에스토니아인 1956– → 1988년 강제 추방, 이후 귀환

소련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발트 독립운동의 첫 공개 집회를 공동 주최한 에스토니아의 전 정치범

히르베파르크 집회가 「의사 표현의 길을 열어젖혔다」고 아호넨은 말했고, 이 역사적 전환을 「쇄빙선 효과」라 불렀다.

헤이키 아호넨은 1956년 에스토니아 페르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NKVD에 처형되고 아버지는 수용소에 갇혔으며 어머니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가족 중 억압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977년 지하 저항운동에 가담해 사미즈다트를 유통하고 서방 기자들에게 소련의 인권 탄압을 알렸으며, 1983년 반소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페름 수용소에서 5년을 복역했다. 1987년 초 석방된 그는 8월 탈린 히르베파르크에서 비밀의정서 공개를 요구하는 최초의 공개 대중집회를 공동 조직해 발트 독립운동의 물꼬를 텄고, 이듬해 KGB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10년간 망명 생활을 한 뒤 귀환해 점령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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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3지하 저항운동, 사미즈다트 유통, 인권 침해 기록
  • 1983–1987페름 교정노동수용소에서 5년 복역 (반소 선동)
  • 1987.08MRP-AEG 공동 창립, 히르베파르크 집회 공동 조직
  • 1988.01에스토니아 민족독립당(ERSP) 공동 창립
  • 1988–1989스톡홀름, 에스토니아 정치범 지원센터 부의장
  • 1989–1998라디오 자유유럽 에스토니아 편집부장 (뮌헨·프라하)
  • 2003–2012에스토니아 점령박물관(Okupatsioonide Muuseum) 초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