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José Carlos Mariátegui
페루 페루 1894–1930 ○ 병사

안데스의 현실로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쓴 독학자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는 모사도 복제도 아닌 영웅적 창조여야 한다.” — 『아마우타』(1928)

페루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이탈리아에서 그람시 사상을 접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안데스 현실에 맞게 재창조했다. 『7개 에세이』에서 원주민 문제를 토지 문제로 분석, 페루사회당을 창립했다. 35세로 사망.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후안 크로니쿠르에서 아마우타까지 — 한 독학자의 형성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는 1894년 페루 남부 모케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가족을 떠났고, 어머니가 홀로 삼남매를 키웠다. 여덟 살 때 학교에서 입은 왼쪽 다리 부상은 평생 낫지 않았고, 결국 1924년 절단 수술로 이어졌다. 부상으로 학교를 그만둔 그는 독학으로 백과사전적 지식을 쌓았다.

열네 살에 신문사 『라 프렌사(La Prensa)』에 심부름꾼으로 들어가 활자공 보조를 거쳐 기자로 성장했다. '후안 크로니쿠르(Juan Croniqueur)'라는 필명으로 리마 상류사회의 경박함을 비꼬는 칼럼을 쓰며 전위적 문학계와 교류했다. 훗날 그는 이 시절을 '석기시대'라며 자조했지만, 이 시절의 방대한 독서(소렐, 우나무노, 니체)는 그의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1918년 전환점이 찾아왔다. 동료 언론인 세사르 팔콘과 함께 잡지 『누에스트라 에포카(Nuestra Época)』를 창간해 군국주의와 기성 정치를 공격했고, 1919년에는 『라 라손(La Razón)』을 창간해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쟁취 투쟁과 대학 개혁 운동을 지지했다. 이 무렵 그는 스스로 '크레올레 정치에 진절머리가 나서 결정적으로 사회주의로 방향을 틀었다'고 기록했다.

정부는 1919년 그를 사실상 추방했다. 표면적 명목은 유럽 학습이었지만, 실상은 노동운동 조직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스물다섯 살, 학교를 졸업하지도 못한 독학자는 이렇게 유럽으로 건너가 안토니오 그람시를 만나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배운 것 — "사회주의는 영웅적 창조여야 한다"

1919년, 25세의 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는 페루 정부에 의해 사실상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보내졌다. 표면적 명목은 유럽 학습이었지만, 실상은 그가 노동운동을 조직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인생을 바꾸는 두 가지를 목격했다. 하나는 토리노의 공장평의회 운동, 노동자들이 공장을 직접 점거하고 운영하는 비엔나로 로소(붉은 2년)의 절정기였다. 다른 하나는 안토니오 그람시와 『신질서(L'Ordine Nuovo)』 그룹. 마리아테기는 그람시의 사상을 직접 접한 거의 유일한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이탈리아에서 얻은 가장 결정적인 통찰은 마르크스주의가 유럽의 이론을 그대로 복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유럽의 마르크스주의를 라틴아메리카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창조해야 한다."

1923년 귀국 후, 그는 이 통찰을 페루의 구체적 현실에 적용했다. 원주민 문제를 단순한 '인종 문제'나 '문화적 후진성'이 아니라 토지 문제로 파악한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7개 에세이』(1928)는 이 분석의 결정판이다.

1928년 그가 창립한 페루사회당은 '공산당'이라 이름 붙이지 않았다. 코민테른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람시가 감옥에서, 마리아테기는 병상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대륙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안나 키아페 — "당신에게 부족한 삶은 당신이 내게 준 삶"

안나 키아페 이아코미니(Anna Chiappe Iacomini, 1898~1990)는 토스카나 루카 출신의 이탈리아 여성으로, 1921년 피렌체에서 마리아테기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의 삶은 마리아테기를 만난 순간부터 죽음 이후까지 오직 한 사람과 한 사상의 보존에 바쳐졌다. "호세 카를로스에게는 특별한 매력이 있었다. 내가 동시대 어떤 사람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정신적 힘이 흘러나왔다"고 그녀는 술회했다.

안나의 첫 번째 결정적 개입은 1924년이었다. 마리아테기의 오른쪽 다리 괴저가 악화되어 절단 수술이 불가피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시어머니 아말리아 라 치라는 '절단은 신체 훼손'이라는 교리에 따라 수술을 거부했다. 안나는 외과의에게 단호히 말했다. "나는 그의 아내이고 아이들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방도가 없다면 수술을 진행하십시오." 이 결정으로 마리아테기는 목숨을 건졌고, 이후 휠체어 위에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 『아마우타』 창간, 『7개 에세이』 집필, 페루사회당 창립을 맞았다.

리마 워싱턴가의 집에서 안나는 집안을 관리하고 긴급한 소식을 걸러내며 마리아테기가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붉은 구석(Rincón Rojo)'의 방문객 응접과 밤샘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경찰이 수차례 가택을 급습했을 때도 안나는 원고와 서신을 감추고 지켜냈다.

1930년 마리아테기가 죽은 후 안나는 세 가지 임무를 스스로 부과했다. 네 아들의 생계와 교육, 아마우타의 사상과 인간적 모범을 살아 있는 기억으로 유지하는 것, 그리고 원고와 기록을 온전히 보존하여 출판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들들과 함께 '아마우타 출판사(Empresa Editora Amauta)'를 설립, 1969년에는 『7개 에세이』 기념판을 1만 부 발행하는 등 페루의 주요 출판사로 키웠다. 1975년 페루 정부는 마리아테기에 태양 훈장을 추서했고, 1986년 리마시는 안나에게 시민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안나는 1990년 6월 16일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해는 프레스비테로 마에스트로 묘지의 마리아테기 묘 옆에 묻혔다. 마리아테기가 그녀에게 바친 시구처럼, "당신에게 부족한 삶은 당신이 내게 준 삶"이었다.

파시즘의 생물학 — "반혁명이자 혁명의 패배에 대한 대가"

마리아테기는 이탈리아 체류 시절(1919-1923)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권력을 향해 치닫는 과정을 목격했고, 귀국 후 『현대의 정경』(1925)의 첫 장 「파시즘의 생물학」에서 이를 분석했다. 당시 유럽의 많은 좌파 지식인이 파시즘을 단순한 폭력배 집단이나 자본가의 도구로만 보았던 데 반해, 마리아테기는 파시즘에 고유한 사회적 기반과 역사적 논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의 핵심은 계급적 토대에 있었다. 파시즘의 구조적 중추는 도시와 농촌의 쁘띠 부르주아지(중간계급)라는 것이다.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계층은 "본능적으로 부르주아지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적인" 이중의 적의를 품었고, 무솔리니는 이 계층의 혼란스러운 정념을 조직했다. 마리아테기는 또한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같은 인물을 파시즘의 문화적 선구자로 읽어내며, 피우메 점령 같은 모험주의적 행동이 어떻게 파시즘적 '행동의 숭배'로 전화하는지 추적했다.

더 결정적인 통찰은 파시즘을 혁명의 함수로 파악한 점이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반혁명, 더 정확히 말해 반혁명의 공세를 대표한다. 파시스트의 공세는 혁명의 후퇴 또는 패배의 결과로 설명되고 실현된다." 이는 파시즘이 단순히 자본주의의 폭력적 본성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좌파가 혁명적 기회를 상실했을 때 그 공백에서 솟아나는 정치형태라는 인식이었다. 1920년 토리노 공장평의회가 고립되고 이탈리아사회당(PSI)이 혁명을 지도하지 못한 것이 무솔리니의 길을 열었다는 그의 진단은, 파시즘 분석인 동시에 좌파의 자기비판이었다.

「파시즘의 생물학」은 레닌이나 트로츠키, 그람시 같은 유럽 혁명가들의 파시즘 분석과 거의 동시대에, 유럽 밖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쓴 최초의 체계적 파시즘론 중 하나였다. 마리아테기는 이 작업을 페루 분석과 직접 연결하지는 않았지만, 위기 속에서 혁명이 실패할 때 반동이 어떤 형태로 오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페루 사회주의자들에게도 본질적인 과제였다.

멕시코 혁명 — "라틴아메리카 변혁의 첫 빛"

1923년 12월, 마리아테기는 곤살레스 프라다 인민대학에서 「세계 위기의 역사」 강좌의 일부로 멕시코 혁명을 다루었다. 청중 앞에서 그는 멕시코 혁명을 포르피리오 디아스 독재의 전복에서 시작된 '범초월적 혁명기'로 규정하며, 농업 문제가 혁명의 실체적 핵심임을 밝혔다. 마데로의 민주적 봉기, 우에르타의 반혁명 쿠데타와 마데로 암살, 카란사의 집권, 그리고 1917년 헌법(특히 토지개혁을 규정한 제27조와 노동권을 명시한 제123조)까지의 과정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재구성했다.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호세 바스콘셀로스의 교육 사업이었다. 마리아테기는 바스콘셀로스를 '높고 순수한 이상주의'의 소유자로 격찬하며, 멕시코 혁명이 단지 토지와 노동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정신적 재생의 과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연 말미에 그는 노동자들에게 "멕시코 혁명에서 라틴아메리카 세계 변혁의 첫 빛을 목격하라"고 호소했고, 청중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마리아테기가 멕시코 혁명에서 읽어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농업 문제(토지와 원주민 공동체의 문제)가 모든 혁명의 중심축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혁명은 개혁의 가능성과 더불어 타협과 배반의 위험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냉철한 인식이었다. 이 통찰은 5년 후 APRA와 결별하고 페루사회당을 창립하는 그의 정치적 궤적을 예고했다. 멕시코 혁명은 그에게 '영웅적 창조'의 살아 있는 실험실이었고, 그 실험실의 성과와 한계 모두가 그의 안데스 마르크스주의를 벼리는 숫돌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교훈 — "평화, 토지, 빵"에서 안데스까지

마리아테기는 1923년 페루 귀국 직후, '세계 위기의 역사'라는 제목의 강연 시리즈를 통해 유럽에서 목격한 러시아 혁명의 교훈을 체계적으로 소개했다. 첫 강연은 2월혁명에서 10월혁명,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하며 이중권력, 소비에트의 역할, 볼셰비키의 '평화·토지·빵' 슬로건이 가진 힘을 설명했다. 두 번째 강연에서는 소비에트 제도의 구조(구·주·지역 평의회 체계, 소환 가능한 대표제, 직접민주주의 원리)를 분석하며 "부르주아 의회와는 전혀 다른 노동자 민주주의"로 규정했다.

이 강연들은 단순한 역사 소개가 아니었다. 마리아테기는 러시아 혁명을 페루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가 주목한 핵심 교훈은 두 가지였다. 첫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업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완수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변혁으로 나아간다는 것. 둘째, 혁명은 유럽의 발전 단계를 그대로 답습할 필요가 없이 구체적 현실에서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아마우타』 17호(1928년 9월) 사설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라틴아메리카 혁명은 세계 혁명의 한 단계, 한 국면일 뿐이다. 그것은 단순하고 순수하게 사회주의 혁명이 될 것이다."

마리아테기는 레닌을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가장 정력적이고 심오한 복원자"로 평가했고,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혁명의 행위자일 뿐 아니라 철학자·역사가·비평가"라고 썼다. 1924년 3월 그가 편집한 『클라리다드』 제5호는 레닌 추모 특집호로 꾸며졌다. 그는 루나차르스키의 교육 개혁, 지노비예프의 선동 능력, 붉은 군대의 조직화 과정을 『현대의 정세』(1925)에서 상세히 다루며 러시아 혁명을 단일 사건이 아닌 살아 있는 제도적 실험으로 분석했다.

그의 러시아 혁명 독해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적용'이 아닌 '창조'였다. 마리아테기는 볼셰비키가 마르크스를 러시아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했듯, 라틴아메리카 혁명가들도 안데스의 현실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주민 공동체의 집단적 전통은 후진성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태형(胎形)으로 재해석되었다. 이 전환은 이후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스주의의 방법론적 원형이 되었다.

여성과 페미니즘 — "계급이 성별보다 개인을 더 구별한다"

마리아테기가 10대 후반 '후안 크로니쿠르'로 활동하던 시절, 그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조롱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연애 한 번 못 해본 히스테리컬한 간호사들일 것이다." 『라 프렌사』의 칼럼에서 리마 상류층 여성의 '매혹적인 무용함'을 찬양하던 이 젊은 저널리스트가, 불과 몇 년 후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선구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1924년 12월, 이미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환한 마리아테기는 「페미니즘의 요구들(Las reivindicaciones feministas)」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페미니즘이 하나의 통일된 운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페미니즘 안에는 세 가지 근본적 경향 — 부르주아 페미니즘, 소부르주아 페미니즘, 프롤레타리아 페미니즘 — 이 존재한다. 부르주아 여성은 자신의 페미니즘을 보수 계급의 이익과 결합시키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자신의 페미니즘을 혁명적 대중의 미래 사회에 대한 신념과 일체화한다."

그의 결론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다: "계급이 성별보다 개인을 더 구별한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반동적, 중도적, 혁명적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같은 전투를 함께 싸울 수 없다." 이는 모든 여성이 성별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단결할 수 있다는 당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핵심 가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마리아테기는 여성 해방의 조건을 자본주의 극복과 분리하지 않았다. 1924년 같은 시기에 쓴 「여성과 정치(La Mujer y la Política)」에서 그는 "우리 시대에 사회의 삶을 연구하면서 그 기초 — 가족의 조직, 여성의 상황 — 를 규명하고 분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다. 그가 보기에 여성 문제는 '인간 문제의 일부'였으며, 진정한 여성 해방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의 개인적 궤적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진술이었다. 192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 안나 키아페와 결혼한 그는 평생 동지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고, 아내는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저작을 보존하고 출판하는 데 헌신했다. '석기시대'의 경박한 연대기 작가에서 여성 해방을 계급투쟁의 불가분한 일부로 정식화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이 변모는 마리아테기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영웅적 창조' 정신이 가장 개인적인 차원에서 구현된 사례였다.

혁명의 미학 — "예술의 자율성은 옳지만, 예술의 폐쇄는 옳지 않다"

마리아테기는 정치사상가이자 문학비평가였으며, 미학은 그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분리할 수 없는 구성요소였다. 『7개 에세이』의 마지막 장 「문학의 재판」에서 그는 "어떤 비평가도 철학적·정치적·도덕적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선언하고, "나의 정치는 철학이자 종교"라고 썼다. 이 주장의 전제는 인간 정신의 불가분성이었다. 미적 판단과 정치적 신념은 결코 분리되어 작동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그의 비평의 출발점이었다.

마리아테기는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하면서도 예술의 폐쇄는 거부했다. 예술은 정치에 예속되어서는 안 되지만, 예술가가 미학 속에 은둔하여 시대의 도덕적·정치적 요구로부터 도피하는 것 역시 퇴폐라고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초현실주의를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들 중 가장 진지한 경험으로 평가했다. 미래파가 스펙터클과 파시즘에 흡수된 것과 달리, 초현실주의는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고 하나의 당, 하나의 교리에 가담'했으며, 마르크스주의 혁명의 강령을 예술 바깥에서는 그대로 수용했다고 마리아테기는 분석했다. 『초현실주의의 결산』(1930)에서 그가 남긴 정식은 유명하다. '예술의 자율성은 옳지만, 예술의 폐쇄는 옳지 않다.'

1926년 발표한 에세이 「현실과 허구」에서 그는 더 나아가 리얼리즘의 독단을 공격했다. "낡은 리얼리즘은 우리를 현실로부터 소외시켰다. 우리는 오직 환상의 길을 통해서만 현실에 도달할 수 있다." 피란델로, 발도 프랑크, 보리스 필냐크를 초현실주의자로 묶어내면서, 그는 환상이 허무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현실을 드러내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1926년 「예술, 혁명, 퇴폐」는 그의 미학 선언에 가장 가까운 텍스트다. "모든 새로운 예술이 혁명적인 것은 아니며, 진정으로 새로운 것도 아니다. 현재 세계에는 혁명의 정신과 퇴폐의 정신이라는 두 정신이 공존한다. 시나 그림에 새로운 예술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전자뿐이다." 기술적 새로움만으로는 혁명적 예술이 될 수 없으며, 새로운 정신이 새로운 기법과 일치해야 한다는 이 통찰은 형식주의에 대한 그의 근본적 비판이었다. 자본주의 문명의 퇴폐가 예술의 분열과 원자화로 나타나는 것은, 절대적 가치(신화)의 상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아테기는 이 위기 속에서 미래 예술의 요소들이 "입체주의, 다다, 표현주의 등으로 분리되어 출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해체는 재구축의 전조였다.

이 모든 실천의 총체가 잡지 『아마우타』의 편집 방침이었다. 마리아테기는 보르헤스의 시, 사보갈의 토착주의 회화,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케추아어 민담을 한 지면에 평등하게 배치했다. 그에게 이 병치는 단순한 에큐메니즘이 아니라, 예술과 혁명이 하나의 정신적 통일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회복해야 한다는) 실천적 증명이었다.

『아마우타』— 대륙을 연결한 혁명의 인쇄소

1926년 9월, 마리아테기는 잡지 『아마우타』를 창간했다. 제호는 케추아어로 '스승' 또는 '현자'를 뜻하는 말로, 원주민 문명에 대한 경의이자 지식의 탈식민화 선언이었다. 마리아테기는 절단 수술을 받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휠체어에 앉아 편집실을 운영했다. 『아마우타』는 단순한 정치 선전지가 아니었다. 마리아테기가 구상한 것은 미학·문학·철학·사회분석이 하나의 지면에서 만나는 대륙적 포럼이었다. 실제로 이 잡지에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파블로 네루다, 디에고 리베라, 앙드레 브르통, 지그문트 프로이트, 미겔 데 우나무노 등 라틴아메리카·유럽·북미의 지식인 수십 명이 기고했다. 표지는 화가 호세 사보갈이 도맡아 원주민의 얼굴과 안데스의 기하학 문양을 전위적 그래픽으로 배치했고, 내부 지면은 표현주의·초현실주의·벽화운동 같은 국제적 아방가르드와 페루 토착 예술을 평등하게 병치했다. 케추아어 기고문도 실렸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발행된 32호는 각각 3천에서 4천 부가 찍혀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배포되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놀라운 발행 부수이자 도달 거리였다. 마리아테기는 창간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 잡지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를 대표한다. 우리는 페루와 아메리카의 모든 혁신적 정신을 한데 모으고자 한다." 『아마우타』는 마리아테기의 '영웅적 창조' 명제가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된 실험이었다. 하나의 잡지가 하나의 당보다 먼저 대륙을 연결했고, 미학과 정치의 분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이 짧은 4년의 출판 프로젝트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좌파 문화정치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1927년 탄압 — "공산주의 음모"와 산 바르톨로메 군병원

1927년 6월, 레기아 정권은 '공산주의 음모'를 빌미로 지식인·노동운동가에 대한 탄압을 개시했다. 마리아테기는 체포되어 리마의 산 바르톨로메 군병원에 강제 수용되었다. 경찰은 그의 출판사 미네르바와 잡지 『아마우타』의 사무실을 폐쇄했고, 발행이 중단되었다.

군병원 감금은 마리아테기의 신체적 조건을 고려하면 가혹한 조치였다. 그는 이미 1924년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상태였고 휠체어 없이는 이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레기아 정권은 그가 조직한 노동자·원주민 네트워크의 확장을 두려워했고, '공산주의 음모'라는 기소는 대중적 지식인을 고립시키기 위한 구실이었다.

몇 주 후 마리아테기는 가택 연금으로 전환되어 풀려났지만, 감시와 검열은 계속되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나 몬테비데오로 이주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리마에 남아 투쟁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1927년 12월, 6개월 만에 『아마우타』는 복간되었다. 마리아테기는 복간사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잠시 침묵해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28년은 오히려 그의 가장 생산적인 해가 되었다. 『7개 에세이』의 출간, 노동자 신문 『라보르』의 창간, 페루사회당의 결성: 이 모든 것이 1927년의 탄압이 끝난 직후 불과 1년 만에 이루어졌다.

1929년 9월, 경찰은 다시 마리아테기의 자택을 급습했다. 이번에는 '유대인 음모'라는 더욱 황당한 구실이 동원되었다. 『라보르』는 폐간되었다. 그러나 마리아테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로의 이전과 반제국주의 연맹 총평의회 참석을 계획하고 있었다. 병상의 사상가에게 국가 권력의 지속적 탄압은 장애물이었지만, 결코 그의 작업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APRA와의 결별 — "라틴아메리카 국민당은 없다"

1923년 귀국한 마리아테기는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의 초청으로 곤살레스 프라다 인민대학에서 강연했고, 아야가 멕시코로 추방된 후에는 그의 잡지 『클라리다드』 편집을 맡았다. 아야가 구상한 아메리카 인민혁명동맹(APRA)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광범위한 반제국주의 전선을 표방했고, 마리아테기도 처음에는 『아마우타』 지면에서 이에 협력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는 곧 드러났다. 아야 데 라 토레는 라틴아메리카에 '중국의 국민당 같은' 다계급 민족주의 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리아테기는 이것이 환상이라고 보았다. 페루의 백인 지배계급과 메스티소 중간층은 원주민 대중과 역사적·문화적 유대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미국 자본과 기꺼이 협력한다는 것이 그의 냉철한 분석이었다. "크레올레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국민적 요소를 경멸한다. 그들은 무엇보다 백인이다."

결정적 결별은 1928년이었다. 아야가 APRA를 정당으로 전환하고 멕시코에서 페루 조직에 일방적 지시를 내리자, 마리아테기는 서한을 통해 "우리는 APRA를 정당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당신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다"고 통보했다. 같은 해 10월 그는 페루사회당을 창립하고, 「반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민족 부르주아지가 이끄는 반제국주의 투쟁은 실패할 경우 사회주의 혁명의 가장 위험한 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결별은 단지 두 정치인의 대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후 라틴아메리카 좌파를 관통하는 두 노선(다계급 민족주의 포퓰리즘과 계급 독립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적 분기점이었다. 마리아테기가 죽은 후 APRA는 우경화하여 페루 기성 정치의 일부가 되었고, 페루사회당은 공산당으로 개칭되어 코민테른의 규율 아래 놓였다. 마리아테기 자신이 두 노선의 진정한 종합체로 남았다는 평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완성되지 않은 국가 — "페루 민족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마리아테기의 페루 분석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는 페루 공화국이 독립 100년이 지나도록 '국민국가'로 완성된 적이 없다는 진단이었다. 그는 『7개 에세이』에서 스페인 식민 체제가 잉카의 집단적 경제 조직을 파괴하고 봉건적 라티푼디움을 이식했으며, 1821년 독립 이후에도 크리오요(스페인계 백인) 지배계급이 식민지적 사회구조를 그대로 계승했다고 분석했다. 공화국은 헌법상으로만 존재했을 뿐,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은 국민으로 통합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아테기는 "민족 문제는 원주민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원주민 문제'는 인종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토지 문제였고, 토지 문제는 곧 페루 국가의 존립 기반 자체에 관한 물음이었다. 가모날리즘(토착 지배계급의 농민 착취)은 단순한 농촌의 후진성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권력 구조가 응축된 현장이었다.

이 진단은 실천적으로 두 가지 함의를 가졌다. 첫째, 페루의 변혁은 민족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국민혁명'일 수 없으며, 오직 노동자·원주민 농민의 계급적 동맹에 기초한 사회주의 혁명만이 진정한 국민국가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 둘째, 크리오요 엘리트의 '백인다움'에 기초한 국민 정체성 대신, 원주민 대중의 집단적 전통과 토지에 뿌리내린 대안적 국민 공동체를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1928년 APRA의 아야 데 라 토레와 결별한 이론적 토대이기도 했다. APRA의 다계급 민족주의는 기존 지배계급과의 타협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리아테기의 판단이었다. "크레올레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국민적 요소를 경멸한다. 그들은 무엇보다 백인이다." 그의 이 한 문장에는 식민주의·인종주의·계급착취가 하나의 구조로 결합된 페루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응축되어 있다. '완성되지 않은 국가'라는 명제는 오늘날까지 페루와 안데스 지역에서 국민국가의 정당성 자체를 묻는 급진적 질문으로 남아 있다.

잉카 공산주의 — 원주민 공동체에서 안데스 사회주의로

마리아테기가 『7개 에세이』에서 제시한 가장 도발적인 주장 중 하나는 잉카 문명의 집단적 경제 조직이 '원시적 공산주의'의 한 형태였으며, 이것이 페루 사회주의 혁명의 토착적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라틴아메리카를 봉건적 후진성으로만 보던 시절, 마리아테기는 정반대 방향에서 질문을 던졌다. "페루에는 실천적 사회주의가 존재하는가? 나는 농업과 원주민 생활에 실천적 사회주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잉카 제국은 중앙집권적 신정정치였지만, 그 경제의 기층은 아이유(ayllu)라는 씨족 기반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토지를 경작하고 생산물을 분배하는 체계였다. 스페인 정복은 이 체계를 파괴하고 봉건적 라티푼디움을 이식했지만, 아이유의 집단적 관행과 상호부조 정신은 안데스 고원에서 수세기 동안 살아남았다. 마리아테기는 이 생존을 낭만적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미래를 위한 물질적·문화적 자원으로 읽었다.

이 주장은 두 전선에서 공격받았다. 아야 데 라 토레의 APRA는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유럽의 이식물로 간주하며 거부했고, 코민테른의 정통파는 마리아테기의 '잉카 공산주의'를 소부르주아적 포퓰리즘과 낭만주의로 규정했다. 그러나 마리아테기는 양쪽 모두를 거부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성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유럽의 발전 단계를 기계적으로 적용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동체는 토지의 사회화를 위한 자연적 요소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원주민 공동체의 집단적 전통이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결합할 때 비로소 현대적 사회주의로 전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통찰은 20세기 후반 라틴아메리카에서 강력하게 재발견되었다. 볼리비아의 원주민 운동, 에콰도르의 토착 공동체 투쟁, 사파티스타의 자치 공동체 실험, 그리고 볼리비아의 가르시아 리네라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마리아테기의 '잉카 공산주의' 명제와 대화했다. 마리아테기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박물관에나 보관할 만한 유물로 치부했던 안데스의 집단적 전통에서 미래 사회주의의 가장 생생한 예감 중 하나를 읽어낸 것이다.

"영웅적 창조" — 모사도 복제도 아닌 마르크스주의 방법론

마리아테기의 가장 독창적인 기여는 '사회주의는 영웅적 창조여야 한다'는 명제다. 이 짧은 선언에는 그가 이해한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

그가 이 명제에 도달한 경로는 이중적이다. 첫째, 이탈리아 경험에서 비롯된 교훈. 그람시와 크로체의 '실천의 철학'에서 배운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독일이나 프랑스의 전통에만 의존할 수 없으며, 각 민족의 지적·문화적 토양에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크로체의 이탈리아적 역사주의가 그람시의 마르크스주의로 꽃피었듯, 안데스의 현실에서도 독자적 마르크스주의가 창조되어야 했다.

둘째, 페루의 구체적 현실이 유럽의 발전 단계론과 맞지 않는다는 냉철한 인식. 마리아테기는 페루에서 봉건제·자본주의·잉카 공동체 경제의 잔여가 삼중으로 공존한다고 보았다. 이런 복합적 현실에는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기계적 이식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럽의 마르크스주의를 라틴아메리카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창조해야 한다."

여기서 '영웅적(heroica)'이라는 수식어는 결정적이다. 마리아테기는 혁명을 단순한 경제적 필연의 산물로 보지 않았다. 조르주 소렐에게서 빌려온 신화(myth) 개념은 마르크스주의를 인간 의지와 집단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도구였다. 소렐의 '총파업 신화'를 마리아테기는 계급의식과 혁명적 실천을 추동하는 도덕적 힘으로 재해석했다. 공산주의는 과학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라는 그의 역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19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회의에서 코민테른이 그의 노선을 공격했을 때, 마리아테기가 지키려 했던 것은 바로 이 방법론적 원칙이었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완성된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 현실과의 창조적 대면 속에서 매번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 살아있는 방법이었다. 이 원칙은 이후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이 되었다. 미하엘 뢰비의 표현대로, 마리아테기는 마르크스주의를 두 가지 위험, 즉 보편성을 거부하는 토착주의와 지역적 특수성을 무시한 채 보편을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교조주의로부터 동시에 구출하려 한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사상가였다.

종교와 혁명적 신화 —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마리아테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스티사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열네 살까지는 사제가 되기를 꿈꿨다.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이 종교적 기원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반종교적 독단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7개 에세이』의 「종교적 요인」 장에서 마리아테기는 종교를 단순한 '아편'이나 지배계급의 기만으로 환원하는 태도를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반성직자주의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의 취미"에 불과하며, 진정한 혁명은 종교가 인간 정신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이해하고 새로운 신화로 채워야 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은 조르주 소렐에게서 빌려온 '혁명적 신화'다. 마리아테기는 사회주의 혁명이 대중의 의식을 '옛 종교적 신화만큼이나 완전히' 점유할 수 있는 신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원주민 문제와 직결된다. 마리아테기는 "인디오의 영혼은 백인의 문명이나 알파벳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신화, 그 이념에 의해 고양된다"고 썼다. 안데스 원주민의 집단적 영성과 공동체 의식은 사회주의가 파괴해야 할 미신이 아니라, 혁명이 접속해야 할 문화적 자원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의 전투적 무신론과 긴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테기는 교회의 정치권력과 원주민 착취에 가담한 성직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종교 자체를 타도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해방신학이 등장하기 수십 년 전, 그는 이미 마르크스주의와 종교적 감수성이 공존할 수 있는 지적 공간을 열어놓고 있었던 셈이다.

당의 개념 — "먼저 낳는 자가 아니라, 결과여야 한다"

마리아테기는 죽기 2년 전인 1928년에 페루사회당을 창립했지만, 그가 구상한 당의 개념은 볼셰비키 모델의 단순한 복제도, 아야 데 라 토레의 다계급 민족주의 정당도 아니었다. 그는 당을 '대중 속에 뿌리내린 유기체'로 이해했으며, 정통 레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이 먼저 만들어지고 대중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기층의 여러 집단(노동조합, 원주민 공동체, 학생회, 지식인 서클)이 활동하는 과정에서 당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아르헨티나의 마르크스주의자 호세 아리코는 이 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당의 사회주의적 정의는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1) 동맹에 대한 특수한 개념, (2) 코민테른의 입장과 다른 계급 구성에 대한 견해, (3) 구성 과정에 대한 이단적 비전 — 당은 먼저 낳는 자가 아니라 기층 집단들의 활동의 결과여야 한다는 — 과 연결되어 있었다."

마리아테기는 코민테른이 '제3시기' 초좌파 노선으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을 조직하라고 압박할 때도, 광범한 농민-원주민 대중을 당의 구성적 일부로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당명에 '공산당'이 아니라 '사회당'을 고집한 것은 단순한 탄압 회피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이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 원주민, 진보적 지식인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기반' 위에 서야 하며, 그럼에도 혁명적 사회주의 지도부를 유지해야 한다는 구상의 표현이었다.

조르주 소렐의 '신화' 개념에서도 마리아테기는 중요한 통찰을 얻었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과 도덕적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신화'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의 임무는 이 신화를 조직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노동자들을 그토록 극단적인 에너지와 절대적 확신으로 고양시키기에, 이론적·철학적 도덕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유물론적 신조를 들이밀기는 우스꽝스럽다."

마리아테기의 당 개념은 그가 죽은 지 몇 달 만에 무너졌다. 페루사회당은 페루공산당으로 개칭되었고, 전 APRA 당원 에우도시오 라비네스가 당권을 장악하여 그의 구상을 코민테른의 규율 아래 종속시켰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질문(당은 어떻게 대중으로부터 태어나면서도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 수 있는가)은 이후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가장 근원적인 숙제로 남았다.

『7개 에세이』― 안데스의 마르크스주의 선언

1928년 출간된 『페루 현실에 대한 7개의 해석적 에세이』는 마리아테기의 주저이자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스주의의 기원 텍스트다. 책은 경제 발전사, 원주민 문제, 토지 문제, 공교육, 종교, 지역주의와 중앙집권제, 문학이라는 일곱 주제를 역사유물론의 렌즈로 분석한다.

가장 급진적인 주장은 '원주민 문제'가 인종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토지 문제라는 것이다. 마리아테기에 따르면 스페인 정복은 잉카의 집단적 생산 체제를 파괴하고 봉건적 라티푼디움(대토지소유제)을 이식했으며, 공화국 수립 후에도 가모날리즘(토착 지배계급의 농민 착취) 형태로 그 구조가 존속했다. 따라서 원주민 해방의 유일한 길은 토지 개혁, 곧 봉건적 토지 관계의 철폐다.

마리아테기는 페루에 봉건제·자본주의·잉카 공동체 경제의 잔여가 삼중으로 공존한다고 보았다. 이는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단계론적 발전 도식을 라틴아메리카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졌다. 잉카의 집단적 경제 조직에서 원시적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읽어낸 그의 시도는 이후 라틴아메리카 좌파가 마르크스주의를 토착적 전통과 접합시키는 실천의 선례가 되었다. 『7개 에세이』는 단지 페루에 관한 책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보편 이론이기 위해서는 구체적 현실과 영웅적으로 창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선언이었다.

『라보르』와 CGTP — 병상에서 조직한 노동운동

1928년, 마리아테기는 『아마우타』와는 별도로 노동자 신문 『라보르(Labor)』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노동조합 조직화, 임금 투쟁, 작업장 조건, 농업 노동자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실천적 매체였다. 『아마우타』가 대륙적 이론지였다면, 『라보르』는 페루 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에 밀착한 조직지였다. 마리아테기는 휠체어에 앉아 직접 편집을 지휘했고, 공장과 농장에서 올라오는 제보를 지면에 반영했다.

1929년, 마리아테기는 페루 노동자 총연맹(CGTP)을 창립했다. 이는 페루 최초의 전국적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 연합체였다. CGTP는 페루사회당(PSP)의 대중 조직으로 설계되어, 광산 노동자·방직 노동자·농업 노동자·항만 노동자 등 분산되어 있던 노동자 집단들을 하나의 계급적 전선으로 묶고자 했다.

같은 해 5월 몬테비데오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노동조합 회의에 마리아테기는 건강상 직접 참석할 수 없었지만, 가장 가까운 동지 우고 페세를 비롯한 5인 대표단을 파견했다. 대표단에는 상선 조종사 출신으로 페루 선원 연맹을 창립한 호세 브라카몬테, 이카 지역의 농민 지도자 후안 페베스, 방직 노동자 지도자 카를로스 살디아스 같은 현장의 노동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식인 정당이 아닌 노동자 정당을 지향한 마리아테기의 의도가 반영된 구성이었다.

『라보르』는 1929년 정부의 탄압으로 폐간되었으나, CGTP는 페루 노동운동의 중추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페루 최대 노동조합 연맹으로 존속하고 있다. 이론가 마리아테기의 마지막 2년은, 병상에서도 계급 조직화를 멈추지 않은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코민테른과의 충돌 — "영웅적 창조"를 지키다

1929년 6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제1차 라틴아메리카 공산당 회의는 마리아테기와 코민테른 사이의 긴장이 표면화된 장면이었다. 마리아테기는 병세가 악화되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대표단을 위해 두 편의 핵심 문서인 「라틴아메리카의 인종 문제」와 「반제국주의적 관점」을 준비했다. 그의 가장 가까운 동지인 우고 페세가 이를 대독했다.

문제는 코민테른의 '제3시기' 노선이었다. 모스크바의 남미 사무국을 장악한 이탈리아 출신 요원 비토리오 코드빌라는 라틴아메리카 공산당들에 원주민과 흑인을 위한 분리 공화국 수립을 요구할 것을 압박했다. 이는 미국에서의 '블랙벨트' 이론과 동일한 구도였다. 마리아테기는 이를 두고 "인종 문제에 대한 유토피아적 해결"이라며 거부했다. 그에게 원주민 문제의 핵심은 토지와 계급이었지, 분리 독립이 아니었다.

코드빌라는 페루 대표단이 타크나-아리카 문제에서 '노동자 통제 하의 자결권' 구호를 내걸지 않은 점도 비판했다. 마리아테기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민족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반제국주의가 실패할 경우 사회주의 혁명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오직 사회주의 혁명만이 제국주의의 진격에 항구적으로, 진정으로 맞설 수 있다."

코드빌라의 지휘 아래 회의는 페루 대표단의 입장을 공격했고, 마리아테기의 문서들은 사실상 기각되었다. 그러나 마리아테기는 코민테른과의 단절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의 기계적 지시를 거부했을 뿐, 국제적 공산주의 운동의 일원으로 남고자 했다.

그가 죽은 지 몇 달 후, 페루사회당은 페루공산당으로 개칭되었고, 전 APRA 당원이자 스탈린주의자인 에우도시오 라비네스가 당권을 장악했다. 마리아테기가 쌓아올린 독자적 마르크스주의 노선은 순식간에 코민테른의 규율 아래 종속되었다. 마리아테기의 마지막 싸움은 병상에서 치른 이 투쟁: '모사도 복제도 아닌 영웅적 창조'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죽음 이후 — 망각, 왜곡, 재발견

1930년 4월 16일, 마리아테기가 35세로 사망했을 때 수만 명의 노동자와 원주민이 리마 거리를 메워 장례 행렬을 이뤘다. 북미 지식인 왈도 프랭크는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지성이 죽었는데, 뉴욕은 아무도 모르고 제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썼다.

죽음 직후 그의 유산은 두 방향에서 훼손되었다. 페루사회당은 몇 달 만에 페루공산당으로 개칭되었고, 전 APRA 당원 에우도시오 라비네스가 당권을 장악하며 마리아테기의 독자 노선을 코민테른 규율 아래 종속시켰다. 소련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그의 사상을 '포퓰리즘'과 '낭만주의'로 규정하며 수십 년간 공식적으로 폄훼했다.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 신좌파의 부상과 함께 마리아테기는 재발견되었다. 종속이론, 해방신학, 제3세계 해방운동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의 저작에서 영감을 얻었다. 해방신학의 창시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마리아테기가 "사회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방법"을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왜곡은 1980년대였다. 마오주의 게릴라 조직 '빛나는 길(센데로 루미노소)'은 마리아테기를 자신들의 선구자로 내세우며 페루 국가에 대항한 무장투쟁을 정당화했다. 학살과 타 좌파에 대한 폭력으로 점철된 이 운동은 마리아테기가 평생 주창한 대중 노선·원주민 공동체 연대·민주적 사회주의와 정반대였다. 학자 마크 베커는 "아비스마엘 구스만이 마리아테기를 전유한 것은 마리아테기가 실제로 말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이후 '핑크 타이드'의 도래, 볼리비아와 에콰도르 원주민 운동의 약진, 그리고 21세기 반신자유주의 투쟁 속에서 마리아테기는 다시 한 번 현재적인 사상가로 부상했다. 그가 남긴 질문(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유럽의 복제가 아닌 대륙의 현실에서 창조할 것인가)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가장 생생한 화두로 남아 있다.

체 게바라와 쿠바 혁명 — "영웅적 창조"의 계승자들

마리아테기와 체 게바라의 관계는 20세기 라틴아메리카 혁명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세대 간 연결이다. 두 사람은 같은 날인 6월 14일에 태어났다.

1952년, 23세의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 여행 중 리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이는 마리아테기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의사 우고 페세였다. 페세는 마리아테기의 사상을 대리했던 인물로, 192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회의에서 마리아테기의 문서를 대독하고 코민테른에 맞서 그의 입장을 옹호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페세의 집에서 젊은 게바라는 마리아테기의 사상과 밤새 대화를 나누었고, 『7개 에세이』를 손에 넣었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이 순간을 게바라가 나병환자촌에서 『7개 에세이』를 읽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쿠바 혁명 승리 후, 산업부 장관이 된 체 게바라는 마리아테기의 복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쿠바는 1959년과 1961년에 걸쳐 『7개 에세이』를 사회주의 국가 최초로 전면 출판했고, 이 출판은 바로 게바라가 이끄는 산업부 소관이었다. 당시 마리아테기는 페루 공산당과 소련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마리아테기주의적 일탈'로 규탄받고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쿠바 혁명은 그를 망각에서 구출해냈다.

마리아테기의 "모사도 복제도 아닌 영웅적 창조"라는 명제는 쿠바 혁명의 정신과 공명했다. 두 혁명적 사상의 만남은 하나의 생일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 즉 유럽 이론을 라틴아메리카 현실에 맞게 재창조하는 방법의 전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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