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한 '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이런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계급 앞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을 실추시키는 일이다」.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1931년 12월 집필, 1932년 발표
툴라주 모스타우시카 마을의 러시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도장공으로 일했고, 1905년 혁명 운동에 들어가 1912년 볼셰비키가 되었다. 10월 혁명 후 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소인민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민주중앙집권파'를 이끌며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으나 1927년 제15차 당 대회에서 제명되어 유배되었고, 이후 좌익 반대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31년 12월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를 써서 소련 체제를 '기형적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으며, 1937년 9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정치·당 지도 · 소련공산당·볼셰비키
- –1926 정치·당 지도 · 민주집중파
- 1918 사회운동·조직 · 좌익공산주의자
- 1923– 사회운동·조직 · 좌익반대파
경력 연표
- 1905–1916모스크바에서 도장공 노동자 조직, 건설노조 결성
- 1917–1919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0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및 집행위원회 의장
- 1920–1921'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당내 민주화 투쟁
- 1921–1923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 1923–1925소(小)인민위원회 의장, 전러시아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의장
- 1926–192715인파 성명 주도, '국가자본주의' 테제 제출
- 1927–1937당 제명, 유배,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집필, 체포 및 총살
관련 역사 사건
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사프로노프가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 오신스키 등과 함께 이끈 '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는 1919년 3월 제8차 당 대회에서 결성되었다. 이들은 내전기 당이 급속히 관료화되고 중앙집권화되면서 '민주집중제'의 민주적 측면이 사라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산업·지방행정·당 기구에서 중앙의 엄격한 통제가 지역의 자율성을 질식시키고 있으며, 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신하는 '당 독재'로 변질되고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당내 비판과 토론의 자유, 선출직의 보고 의무와 소환권, 지방 당 조직의 실질적 권한 회복을 요구했다. 1920년 3~4월 제9차 당 대회에서 톰스키 등 일부 노동조합 지도자의 부분적 지지를 얻었으나 제안은 부결되었다. 1920년 말~1921년 초 '노동조합 논쟁'에서 사프로노프는 노동조합이 국가기구에 흡수되는 것을 반대하며 독자적 입장을 견지했다. 1921년 3월 제10차 당 대회는 레닌 주도로 크론시타트 봉기 직후 '당 통일에 관한 결의'를 채택해 분파 활동을 전면 금지했고, 데치스트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사프로노프는 이 결의가 당내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관료적 중앙집권을 영구화했다고 보았으며, 이후 트로츠키의 좌익 반대파에 합류해 '15인파'를 거쳐 스탈린 체제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제46인 성명에서 제15인 강령으로: 1923~1927년 좌익 반대파 시기
1923년 가을 제46인 성명을 내놓은 반대파 집단에는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이끄는 트로츠키 지지자들과 사프로노프가 이끄는 데치스트(민주중앙집권파)가 함께 있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아직 쓰이지 않았기에 이 반대파는 '사프로노프와 프레오브라젠스키의 지지자들'로 불렸고, 데치스트는 1923년 반대파의 결성과 운영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n\n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사프로노프를 1923~1924년 가을과 겨울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록한다. 그는 당 언론과 수많은 회의에서, 그리고 1924년 1월 제13차 당 대회에서 발언했다. 사프로노프는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오신스키, 스미르노프, 드로브니스와 함께 1923년 10월 제46인 성명에 서명했고, 이후 독자적인 극좌 그룹으로서 좌익 반대파에 가담해 1926년 연합 반대파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n\n1923~1924년의 당내 논쟁에서 반대파는 패배했다. 1924년 1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제13차 당 대회는 반대파를 '소부르주아적 편향'의 담지자로 규정했고, 이를 계기로 반대파에 대한 새로운 제재 물결이 일었다. 1923년의 패배 이후 데치스트는 관망하는 입장을 취해 1924년 '문학적 논쟁'이나 1925년 스탈린 대 부하린·지노비예프의 충돌에서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1925년 필리펜코·드로브니스 사건은 당 지도부가 조직적인 반대파의 부활을 계속 단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 무렵 오신스키, 막시몹스키, 부브노프 등 일부 데치스트는 반대파를 떠났다.\n\n1926년 연합 반대파가 기업들에서 공개 연설에 나서자 사프로노프도 그 대열에 섰다. 1926년 9월 그는 랴잔·우랄 철도 노동자 회의에서 이틀에 걸쳐 발언했는데, 기업 행정과 당 기구가 그를 맞섰다. 사프로노프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구역위원회 위원들이 그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고 주먹을 휘두르며 그를 둘러쌌으며, 회의는 자신의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인터내셔널을 제창하며 끝났다. 10월 1일에는 포드모스코브나야 철도 차량기지의 당 세포 회의에서 발언이 저지당했고, 그날 밤 아비아프리보르 공장 회의에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스밀가, 라데크, 퍄타코프와 함께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는 '총노선' 결의가 반대파에 78 대 27로 앞섰다.\n\n좌익 반대파 지도부가 1926년 10월 16일 성명으로 분파적 행동의 책임을 인정하고 분파 투쟁을 중단하겠다고 밝히자, 데치스트는 이를 항복으로 규정하고 반대파 블록에서 탈퇴했다. 사프로노프는 1927년 순회 서한에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그룹이 '길들여진 궁정 반대파'로 변하고 있다고 규정했고, 이 결론은 데치스트의 새 강령인 1927년 '제15인 강령'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반대파'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구세프의 연구는 트로츠키파와의 접근이 짧았음을 지적하며, 데치스트가 1926년 10월 연합 반대파 블록에서 탈퇴해 '프롤레타리아 반대파'로 발전하면서 당·국가 지도부와도,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의 '자유주의'와 '타협'과도 거리를 두었다고 평가한다.\n\n1926년 사프로노프는 V. M. 스미르노프와 함께 자신의 그룹을 결성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1927년 12월 제15차 당 대회에서 제명되었고, 1928년(공식 사건 기록에는 1927년 12월 31일 OGPU 콜레기움 산하 OSO의 판결로) 스미르노프와 함께 3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정치국 위원회 사건 기록도 두 사람이 1923~1927년 활동한 반대파 인물로서 1927년 '제15인 성명'에 서명했고 '분파 활동과 불법 회의 조직'을 이유로 제명된 뒤 1927년 12월 31일 같은 기구에서 3년 유배형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