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문서를 관리하다 그를 배반한 당 기구 수호자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경력 연표
- 1961–65중앙위 기구 근무
- 1969–81《프라우다》 농업부장·경제논설위원
- 1981–87고르바초프 중앙위 서기·서기장 보좌관
- 1987–91중앙위 총무부장
- 1990–91소련 대통령 비서실장
- 1991GKChP 가담·체포·구금
- 1994–2006은행 고문
관련 역사 사건
당의 비밀 금고를 쥔 사나이
1987년 2월, 중앙위 전원회의 휴식 시간에 고르바초프는 차를 마시고 있던 정치국 위원들 앞에서 "여기 새로운 총무부장이 왔군"이라며 볼딘을 지목했다. 볼딘은 자신이 '종이 일'을 모른다며 두 달 전 이미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고르바초프는 "이건 내게 꼭 필요한 일이야"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볼딘은 600명 이상의 직원을 둔 당 최대 부서의 수장이 되었다.
총무부(Общий отдел)는 정치국·서기국·전원회의 문서 전체를 관장했고, 연간 백만 통이 넘는 민원과 각급 기관 보고서가 이 부서를 통과했다. 볼딘은 매일 밤 12시까지 일했고, "서류 회전목마에 질식할 것 같았다"고 훗날 술회했다. 그러나 이 부서의 진짜 핵심은 크렘린 깊숙한 지하실과 스탈린의 옛 거처 일부에 보관된 정치국 아카이브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축적된 이 기록들에는 전원회의 속기록, 정치국 회의록, NKVD-KGB 문서, 외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친서, 그리고 '특별 문서철(особая папка)'과 1930년대 이후 봉인된 채 보관된 비밀 봉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볼딘이 처음 아카이브를 본 뒤 고르바초프에게 일부 공개를 건의하자, 총무부는 곧 《이즈베스티야 중앙위(Известия ЦК КПСС)》를 창간하여 30~40년대 탄압 자료를 비롯한 비밀 문서들을 최초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민감한 문서들은 여전히 볼딘의 손아귀에 남았다. 고르바초프가 야루젤스키를 만나기 직전, 카틴 학살 관련 긴급 지시를 내리자 볼딘은 두 개의 봉인된 '일급비밀' 봉투를 건넸다. 하나는 베리야 서명의 실제 처형 기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시스트 소행"이라는 전후 조사위원회의 위조 결론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내용을 확인한 뒤 직접 봉투를 다시 봉하며 "잘 보관해,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접근시키지 마"라고 말했다. 이후 폴란드 측과 소련 내 개혁파가 거듭 공개를 요청했지만, 고르바초프는 "신뢰할 만한 사실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짓말로 일관했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비밀 의정서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었다. 볼딘이 원본을 발견해 보고하자, 고르바초프는 독일어로 표기된 지도를 펼쳐보며 경계선을 살피고는 "치워둬"라고만 말했다. 그런데 1989년 인민대표대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원본을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전 세계 앞에서 선언했다. 볼딘은 훗날 "도대체 왜 온 세계를 상대로 거짓말을 했는지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 썼다. 1991년 8월, 이 모든 국가 기밀을 지켜온 수문장은 자신이 10년간 보좌한 바로 그 지도자를 전복하려는 쿠데타에 가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