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위에 올라간 남자
1999년 12월 31일, 신년사 생방송에서: "나는 떠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많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로 불러올린 지방 서기 — 그리고 그를 밀어낸 사람. 1987년 당 지도부를 정면 비판해 좌천되었다가 선거로 되살아났고, 1991년 8월 백악관 앞 전차 위에 올라선 사진 한 장으로 러시아의 권력이 되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 숲에서 소련을 서명으로 끝냈고, 1999년 마지막 연설에서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며 물러났다.
경력 연표
- 1976–85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
- 1985–87모스크바 당 제1서기: 특권 비판으로 인기
- 1987지도부 정면 비판 후 해임
- 1989–90인민대의원 압승,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의장, 탈당
- 1991.6러시아 대통령(사상 첫 직선)
- 1991.8/12쿠데타 저지, 벨라베자 합의 서명
- 1999.12.31사임, 국민에게 사과
관련 역사 사건
- 1939.11–1940.03겨울전쟁1994년 겨울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러시아 대통령1994년 핀란드 방문 중 겨울전쟁을 스탈린의 침략전쟁이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지도부가 처음으로 취한 역사적 사과였다.
- 1985–1991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급진 비판자개혁이 너무 느리다며 급진 노선에서 고르바초프를 비판했다.
- 1988–1990제19차 당협의회와 최초의 경쟁 선거모스크바 전역구에서 89%를 얻어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 1988–1991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러시아 대통령직을 국민투표에 추가1991년 2월 7일 러시아 최고회의를 설득해 연방 국민투표와 같은 날 러시아 대통령직 신설을 묻는 투표를 병행하게 했다. 많은 동시대인이 이 쪽이 더 실질적인 결과라고 보았다.
- 1987–1991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발트 독립을 선제 승인한 러시아 대통령국가평의회보다 앞서 1991년 7~8월에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독립 승인 조약을 체결했다.
- 1987–1991경제 개혁 논쟁과 500일 계획러시아공화국 차원에서 500일 계획을 밀었다.
- 1991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러시아 대통령으로서 협상의 실질적 상대역이었고, 조약으로 가장 많은 권한을 얻을 쪽이었다.
- 1991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전차 위의 저항전차 위에 올라 쿠데타에 맞섰고 러시아 대통령으로 해체를 이끌었다.
우랄의 건설 감독, 당 기구의 이단아가 자라난 곳
보리스 옐친은 1931년 2월 1일 우랄의 농촌 마을 부트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집단화 시기에 부농으로 몰려 재산을 잃었고, 아버지는 1934년 반소 선동 혐의로 노동수용소에서 3년을 보냈다. 소년 옐친은 전시의 궁핍 속에서 자랐고, 주운 수류탄을 분해하다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우랄공과대학에서 건설을 전공한 그는 30대 내내 건설 현장의 감독으로 일하며 무엇이든 기한 안에 끝내는 돌파형 관리자로 이름을 얻었다.
1976년 그는 스베르들롭스크주 당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우랄의 공업 심장부를 다스렸다. 상점을 불시에 찾아가 진열대를 점검하고 대중 앞에 즉석 문답으로 나서는 그의 방식은 당 관료의 표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1977년에는 정치국의 결정에 따라 니콜라이 2세 일가가 처형된 이파티예프 저택을 철거했는데, 훗날 그는 이 일을 부끄러운 기억으로 회고했다.
1985년 4월, 고르바초프 지도부는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올렸다. 추천자는 시베리아 시찰에서 그의 추진력을 눈여겨본 리가초프였다. 몇 해 뒤 두 사람이 개혁의 속도를 놓고 전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면충돌하리라는 것은 그때 누구도 알지 못했다.
1987년 10월, 노멘클라투라에서 걸어 나간 첫 사람
1985년 12월 옐친은 그리신을 밀어내고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가 되었다. 그는 전차와 버스로 출근하고, 상점 뒷문의 특권 유통을 파헤치고, 구청 당서기들을 무더기로 갈아치웠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열광했고, 관료들은 이를 갈았다. 1986년 2월 그는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지만, 개혁이 말뿐이라는 조바심과 제2서기 리가초프와의 마찰이 쌓여 갔다.
1987년 10월 21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그는 각본에 없는 발언에 나섰다. 개혁이 더디고, 인민이 얻은 것이 없으며, 지도부 주변에 새로운 찬양의 기운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당 국가의 규율에서 이것은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 연단에는 그를 규탄하는 발언이 줄을 이었고, 그는 11월 병상에서 끌려 나오다시피 한 채 시당 총회에서 해임되었다. 당의 문법대로라면 그의 정치 생명은 그날로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시대의 문법이 바뀌고 있었다. 건설위원회 부의장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난 그는 소문과 복사본으로 떠도는 전설이 되었고, 「옐친이 무슨 말을 했는가」라는 위조 연설문까지 나돌았다. 몰락한 자를 순교자로 만드는 글라스노스트의 역설 속에서, 그는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당 밖에서 권력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아내게 된다.
투표함으로 부활하다, 1989년의 89%
1989년 3월 소련 최초의 경쟁 선거에서 옐친은 모스크바 전역구에 출마했다. 당 기구는 거대 자동차공장 지배인을 맞세우고 온갖 방해를 동원했지만, 결과는 89%의 압승이었다. 500만이 넘는 표는 당이 버린 자에게 인민이 내린 사면장이었다. 인민대의원대회에서 그는 사하로프 등과 함께 지역간대의원그룹을 만들어 사실상의 야당 정치를 시작했다.
1990년 5월 그는 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6월 12일 러시아의 주권 선언을 통과시켰다. 연방의 심장인 러시아가 연방법에 대한 공화국법의 우위를 선언한 순간이었다.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 그는 탈당을 선언하고 대의원들의 야유 속에 회의장을 가로질러 걸어 나갔다. 1991년 6월 12일 그는 57%의 득표로 러시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소련 땅에서 국민 직선으로 뽑힌 첫 최고 권력자였고, 간선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갖지 못한 정당성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대결은 이제 제도의 대결이 되었다. 연방 대통령과 러시아 대통령, 같은 크렘린을 두고 겹쳐 선 두 개의 권력 가운데 어느 쪽이 실재인지를 1991년 8월의 사흘이 판정하게 된다.
1991년 8월 19일, 탱크 위의 연설과 그해 12월의 서명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출신의 보리스 옐친은 고르바초프에 의해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발탁되었다가, 1987년 개혁의 속도를 둘러싼 충돌 끝에 실각했다. 그러나 그는 실각을 발판으로 삼았다. 특권 반대와 급진 개혁을 내걸고 대중 정치인으로 되살아난 그는 1991년 6월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직접선거로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19일 아침,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탱크들이 모스크바에 들어오자 옐친은 러시아 정부청사 앞에서 탱크 위에 올라 저항을 호소했다. 이 장면은 쿠데타를 무너뜨린 상징이 되었고, 권력은 소련 대통령이 아니라 러시아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그는 곧바로 러시아 영토에서 소련공산당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당 재산을 몰수했다.
12월 8일, 옐친은 우크라이나의 크라프추크, 벨라루스의 슈시케비치와 함께 벨로베자 숲의 별장에서 소련의 소멸과 독립국가연합의 창설을 선언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아홉 달 전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에 찬성한 76퍼센트의 표심을 묻는 어떤 절차도 없었다. 세 공화국 정상의 서명으로 하나의 초강대국이 지도에서 지워졌다.
1993년 10월 4일, 포격당한 의회
1992년 1월 2일 가이다르 정부가 가격을 전면 자유화하면서 「충격요법」이 시작되었다. 그해 물가는 공식 통계로도 2500퍼센트 넘게 뛰었고, 시민들의 평생 저축은 휴지가 되었다. 산업 생산은 해마다 무너졌고, 임금과 연금은 몇 달씩 체불되었다. 사유화는 국가 자산을 소수의 손에 몰아주었고, 1995–1996년의 「주식 담보 대출」은 석유와 금속 산업을 헐값에 신흥 재벌들에게 넘겼다.
개혁의 사회적 비용을 둘러싸고 최고소비에트와의 대립이 격화되자, 옐친은 1993년 9월 21일 대통령령 1400호로 의회를 해산했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위헌으로 판정했으나 그는 밀어붙였다. 10월 3일 의회 지지자들과 경찰·군의 충돌이 유혈 사태로 번졌고, 10월 4일 아침 탱크들이 의회 건물을 포격했다. 2년 전 그가 그 앞에서 쿠데타에 맞섰던 바로 그 「백악관」이었다. 공식 집계만으로도 140명 이상이 죽었다. 두 달 뒤 국민투표로 채택된 새 헌법은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1990년대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57–58세까지 떨어졌고, 초과 사망은 수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1996년의 재선은 재벌 소유 언론의 총동원으로 얻어낸 것이었다. 1999년 12월 31일 옐친은 사임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2007년 4월 23일 사망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시작해 의회 포격과 과두정으로 끝난 궤적이었다.
집권의 나날들, 민주주의자인가 차르인가
독립 러시아의 첫 대통령으로서 옐친은 1992년 1월 가격 자유화로 시작하는 급진 시장 개혁, 이른바 충격요법을 밀어붙였다. 진열대는 채워졌지만 물가는 한 해 만에 스물다섯 배가 되었고, 국유재산의 사유화는 훗날 올리가르히라 불릴 소수에게 부를 몰아주었다. 1994년 시작된 체첸 전쟁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았다. 1996년 그는 연초 지지율 한 자릿수에서 출발해 재벌 언론의 총동원 속에 재선되었고, 이 선거는 러시아 민주주의의 전환점이자 변질점으로 함께 기록된다.
건강과 경제가 함께 무너지는 가운데 1998년 국가부도가 왔고, 총리들이 회전문처럼 갈렸다. 1999년 8월 그는 무명의 정보기관 출신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앉혔고, 12월 31일 밤 텔레비전 신년 연설에서 전격 사임을 발표하며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다」라고 말했다. 후임자가 그에게 준 첫 선물은 전직 대통령 불소추 포고령이었다.
그의 유산은 두 얼굴로 남았다. 전차 위에서 쿠데타를 꺾고 당 독재를 끝낸 사람, 그리고 의회를 포격하고 초대통령제 헌법과 올리가르히 체제를 남긴 사람. 2007년 그가 죽었을 때 러시아는 차르 시대 이후 처음으로 교회 국장을 치렀지만, 1990년대의 기억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체첸 전쟁, 대통령의 가장 어두운 결정
1991년 가을, 소련 공군 장성 출신 조하르 두다예프가 체첸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옐친은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최고소비에트가 이를 뒤집었고, 모스크바의 혼란 속에서 체첸은 실질적인 분리 상태로 3년을 보냈다. 1994년 여름까지 옐친은 타타르스탄과는 특별자치협정을 맺었지만, 두다예프는 독립 이외의 어떤 타협도 거부했다.
1994년 가을, 옐친은 체첸 반대파를 은밀히 지원하며 두다예프 전복을 시도했다. 11월 26일 러시아가 배후에서 조종한 대공세가 그로즈니에서 참패로 끝나고 러시아 정규군 포로까지 노출되자, 옐친은 비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전면적 군사 개입을 결정했다. 12월 11일, 4만 명의 병력이 '헌정질서 회복'이라는 명분 아래 체첸에 진입했다. 군 내부에서도 반대가 이어져 지상군 부사령관 보로비요프 장군은 '자국민에게 군대를 보내는 것은 범죄'라며 사표를 냈고, 아프간 참전 영웅 그로모프 장군도 항의하며 물러났다.
1995년 새해 전야, 그로즈니 시가전에 투입된 러시아군은 참혹한 손실을 입었다. 제131 마이콥 차량화소총여단은 거의 전멸했고, 미숙한 징집병들이 체첸 전투원들의 매복에 쓰러졌다. 석 달 뒤 러시아군은 그로즈니를 점령했지만 전쟁은 산악 게릴라전으로 번졌다. 4월 사마시키 마을 학살, 6월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극에서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숨졌다. 옐친의 지지율은 추락했고, 전쟁의 무능과 잔혹성은 그의 민주적 정통성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996년 4월, 러시아군은 위성전화 신호를 추적해 두다예프를 미사일로 제거했다. 그러나 저항은 꺾이지 않았고, 8월 체첸군은 그로즈니를 재탈환했다. 대선을 불과 두 달 앞둔 옐친은 알렉산드르 레베디 장군을 특사로 보내 8월 31일 하사뷰르트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은 적대행위 중단과 러시아군 철수를 규정했고, 체첸의 지위는 5년 뒤로 미뤘다. 공식 사망자는 러시아군 5,500명, 민간인 추정치는 3만에서 10만에 이르렀다. 그로즈니는 폐허가 되었고, 5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협정 서명 몇 시간 후 옐친은 클린턴과의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체첸에서는 군사 작전이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