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주의 문화정책에 이름을 남긴 이념 관리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세계 정치 세력이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선언하며 냉전기 소련의 공식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1934년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에 올랐고, 대숙청 시기 정치국원으로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1989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 결정은 그를 1930~40년대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규정했다. 전후 당내 2인자로 부상하여 1946년부터 문학·음악·철학을 강타한 즈다노프시나를 주도했고, 1947년 코민포름 창설을 조직하며 '두 진영' 세계관을 정식화했다. 1948년 6월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고 8월 31일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20s니즈니노브고로드 당 조직에서 성장, 스탈린파 지방 간부로 부상
- 1934–1945키로프 피살 뒤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도시와 당 조직 장악 (1945년 1월 쿠즈네초프에게 이양)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시기 도시 방어와 정치동원 책임자
- 1946–1948중앙위 서기, 문학·음악·철학 캠페인을 주도
- 1947코민포름 창설과 두 진영 노선 제시
- 1948사망 뒤에도 「즈다노프주의」가 전후 문화통제의 이름으로 남음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35.02–1939.03
- 정위원 1939.03–1948.08
1948.08 재임 중 사망
관련 역사 사건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 1937–1938대숙청레닌그라드 당 서기
- 1939.11–1940.03겨울전쟁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 개전 추동레닌그라드의 안전을 명분으로 강경한 대(對)핀란드 노선을 밀어붙였고, 군관구 군사평의회의 일원으로 개전과 작전에 관여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레닌그라드 당 지도자872일의 봉쇄 기간 내내 레닌그라드의 당 조직과 방어를 이끌었다.
- 1941–1944레닌그라드 봉쇄레닌그라드 당 조직 책임자안드레이 즈다노프는 봉쇄 기간 레닌그라드 당 조직과 도시 행정을 이끌며 생산, 동원, 배급을 조정했다.
- 1944–1949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코민포름 창립회의 보고자1947년 9월 「두 진영」 보고로 각국의 「독자적인 길」 담론이 끝나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 1944–1949불가리아: 조국전선에서 코스토프 재판까지코민포름 창립회의 보고자1947년 9월 「두 진영」 보고와 1948년 6월 코민포름 결의는 불가리아 공산당이 「자국의 길」 담론을 거두고 유고슬라비아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두 진영」과 코민포름「두 진영」론을 선언하고 코민포름을 세워 진영 대립을 제도화했다.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레닌그라드 인맥의 후원자레닌그라드 간부들의 후원자였으나 1948년 사망하면서 그들이 무방비 상태가 됐다.
- 1952–1953의사들의 음모음모의 구실이 된 죽음1948년 그의 죽음에 대한 고발 편지가 음모 사건의 발단이 됐다.
레닌그라드와 대숙청 (1934-1938)
제17차 당대회 직후인 1934년 2월 즈다노프는 이념을 담당하는 중앙위 서기가 되어 모스크바로 옮겼고, 그해 8월 제1차 소련 작가대회 개회 연설에서 작가를 '인간 영혼의 기술자'라 부르고 소련 문학이 계급문학·경향문학임을 선언했다. 1934년 12월 키로프 암살 뒤 그는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를 이어받아 1945년 1월까지 재임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1935년 초에는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부 책임자 레오니트 자코프스키와 함께 혁명 전 귀족·중간계급 출신인 이른바 '레닌그라드 귀족' 1만 1702명의 강제 이주를 조직했고, 트로츠키나 지노비예프 등 야권 인물을 지지했다는 의심을 받는 당원과 전 당원을 색출했다. 1937년 5월에는 레닌그라드 당 간부들을 불러 제2서기 미하일 추도프와 전 시장 이반 코다츠키의 체포를 통보했고, 옛 볼셰비키 도라 라주르키나가 코다츠키를 변호하러 나서자 '그런 말은 당신에게 나쁘게 끝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체포되어 굴라크에서 17년을 보냈다.
J. 아치 게티는 즈다노프를 대숙청의 핵심 인물로 평가하며, 그가 하급 당원 동원을 장려한 것이 대테러의 추진력을 만들었다고 본다. 몰로토프·스탈린·카가노비치·보로실로프보다 활동 정도는 낮았으나 그는 대숙청의 주요 가해자였고 176건의 사형 명단을 직접 승인했다. 러시아어 자료도 그를 대숙청 시기 사형 명단에 서명한 정치국원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며, 1937년 가을에는 숙청의 발의자이자 추진자였다고 전한다. 그는 앞서 중앙위에 야고다를 대신해 예조프를 내무인민위원부 수장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전보를 보냈고, 1936년 8월 스탈린과의 휴가지에서 야고다 해임을 이끌어낸 전보에 공동 서명했다. 야고다는 즈다노프와 자코프스키의 레닌그라드 당 숙청을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38년 9월 그는 개편된 중앙위 선전·선동국 국장에 임명되어 언론과 예술의 모든 분야를 중앙집권적 당 통제 아래 두었고, 니콜라이 예조프의 몰락과 함께 부상했다. 1939년 3월 제18차 당대회에서 그는 대중적 당 숙청 폐지를 제안하며 국가·노동 규율을 강제하는 데 '탄압 외의 다른 수단'도 쓸 수 있다고 말했고, 숙청이 '적대 세력'에 의해 '정직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파멸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회 폐회와 함께 정치국 정식 위원으로 승진했다. 그가 관여한 탄압에 대한 공식적 책임 규명은 페레스트로이카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1989년 1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A. A. 즈다노프의 기념과 관련된 법적 행위의 취소에 관한」 결정에서 그를 '1930~40년대 죄 없는 소련 시민들에 대한 대량 탄압의 조직자 중 한 사람'이며 '그 시기 저지른 범죄적 행위와 사회주의 법치 위반에 책임이 있다'고 규정했고, 이후 그의 이름은 도시·대학·기업에서 철거되었다. 이 단계의 결과는 그의 죽음 이후까지 이어졌다. 1949~1950년 레닌그라드 사건은 포위전 후 영웅으로 칭송받던 레닌그라드 출신 지도자들, 그중에서도 즈다노프의 옛 동료 쿠즈네초프와 보즈네센스키를 겨냥해 스탈린이 조작한 숙청이었다. 2천여 명이 체포되었고 쿠즈네초프, 보즈네센스키, 포프코프, 로디오노프 등 주요 피고 6명은 1950년 10월 1일 처형되었다. 그는 1948년 6월 코민포름 부쿠레슈티 회의에서 말렌코프보다 유고슬라비아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해 스탈린의 노여움을 샀고, 이후 모든 직위에서 밀려나 말렌코프로 교체되었다. 1948년 8월 31일 사망했으며, 러시아어 자료는 사망 장소를 노브고로드주 발다이의 중앙위 요양소로, 영어 자료는 모스크바로 전한다.
즈다노프시나: 전후 문화 숙청
1946년 8월, 즈다노프는 레닌그라드 문예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에 대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하고 직접 연설했다. 그는 미하일 조셴코를 '문학의 쓰레기(подонок литературы)'로, 안나 아흐마토바의 서정시를 '민중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규정하며 그녀를 '반은 수녀, 반은 창녀'라고 공개 비난했다. 동시에 메레시콥스키, 뱌체슬라프 이바노프, 쿠즈민, 안드레이 벨리, 기피우스, 솔로구프 등 실버 에이지 작가들을 '정치와 예술에서의 반동적 암흑주의와 배신'으로 몰아세웠다. 1947년에는 알렉산드로프의 『서양철학사』를 둘러싼 철학 토론을 지휘했고, 1948년 초에는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등 주요 작곡가들을 '형식주의'로 공격하는 음악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이 숙청의 연쇄는 '즈다노프시나(ждановщина)'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문화사에 각인되었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반응했다: '10년 뒤 우리가 즈다노프 같은 자 앞에 굽신거린다면, 바로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두 진영론과 코민포름
전후 소련의 대외 노선을 정식화한 즈다노프의 두 진영론은 세계정치를 미국이 이끄는 제국주의·반민주 진영과 소련이 이끄는 반제국주의·민주 진영의 대립으로 설명했다. 그는 1947년 9월 슈클라르스카포렝바에서 열린 유럽 공산당 대표 회의에서 이 구도를 제시하며, 마셜 플랜을 미국 독점자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규정하고 공산당들의 국제적 협력을 촉구했다. 이 회의의 결과 창설된 코민포름은 전시 동맹을 대신해 유럽 공산당들의 정보 교환과 정치적 조정을 담당했으며, 동유럽의 사회주의 건설을 소련 중심의 국제 노선과 연결했다. 두 진영론은 제국주의 압력과 전후 권력 재편을 계급적 언어로 파악한 공식 분석이었지만, 국제정세의 복잡성과 각국 공산당의 고유한 조건을 양극 대립으로 압축하는 한계도 지녔다. 즈다노프의 역할은 군사적 지휘관보다 당의 이념과 국제정치를 하나의 전후 전략으로 묶은 조직자에게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