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홍군과 인민해방군을 창건한 총사령관, 10대 원수 중 제1인자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경력 연표
- 1911윈난군관학교 졸업, 신해혁명 참가
- 1922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공산당 입당
- 1927난창 봉기 공동 지휘 — 인민해방군의 기원
- 1928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 — '주-마오' 제4홍군
- 1930중국 홍군 총사령관, 1~4차 포위섬멸전 승리
- 1934–1935대장정에서 홍군 총사령관
- 1937–1945팔로군 총사령관, 백단대전 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중 제1위
관련 역사 사건
대장정: 쭌이 회의와 장궈타오 분열
1935년 1월, 대장정 도중 구이저우 쭌이에서 열린 확대 정치국 회의는 중국 공산당의 운명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주더는 정치국 위원으로서 마오쩌둥을 지지하며 보구와 오토 브라운의 재앙적 군사 노선을 비판했다. 마오가 주더와 함께 발전시켜온 유격전 전략은 '매 촌의 영토를 사수하라'는 정규전 교리에 밀려나 있었고, 그 결과 홍군은 제5차 포위섬멸전에서 근거지를 상실했다. 회의에서 보구와 브라운은 강등되었고, 주더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군사 지휘권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마오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복귀했다. 서양에서는 수십 년간 알려지지 않았지만, 쭌이 회의는 중국 혁명이 모스크바의 교조적 지도를 벗어나 독자적 길을 찾은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35년 6월, 주더가 지휘하는 중앙홍군은 쓰촨성 마오궁에서 장궈타오의 제4방면군과 합류했다. 장궈타오는 당 창립 멤버이자 8만 병력의 지휘관으로, 중앙의 '북상항일' 결정을 거부하고 쓰촨-시짱 변경으로 남하할 것을 주장했다. 8월, 주더는 장궈타오와 함께 좌로군을 이끌게 되었으나 이는 사실상 인질이었다. 9월 아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장궈타오는 공개적으로 중앙을 비판하며 주더에게 북상 반대를 선언하라고 압박했다. 측근 황차오가 주더를 향해 '늙은 고집쟁이'라고 고함치자, 주더는 탁자 위 찻잔이 깨질 정도로 손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당 중앙의 북상 방침은 옳다. 나는 정치국 회의에서 손을 들었다. 나는 북상을 반대하지 않으며 북상을 찬성한다. 나는 공산당원이며 나의 임무는 당의 결정을 집행하는 것이다.' 그는 사적으로 불만 간부들에게 무단 행동이 더 큰 분열을 초래할 것이라며 인내를 설득하며, 장궈타오를 견제하는 중요한 힘이 되었다. 주더는 결국 1936년 가을, 다른 누구보다도 긴 2만여 리의 행군 끝에 옌안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