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총애한 승리의 원수, 그 명성 때문에 두 번 좌천되다
1945년 5월 9일 0시 43분 모스크바 시각, 베를린 카를스호르스트에서 주코프는 소련 대표로 독일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6월 24일 붉은광장에서 승리 열병식을 주관했다.
칼루가주 스트렐콥카의 가난한 러시아 농가에서 태어나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용기병 연대 하사관까지 올랐고,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1919년 당에 입당했다.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싸웠고 1939년 할힌골에서 관동군을 포위 격파해 소련 영웅이 되었다. 1941년 1월부터 참모총장을 지내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어를 지휘했고, 1942년 8월부터 최고부사령관 대리로서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공세를 이끌었다. 1945년 5월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으나, 1946년 전리품 사건으로 오데사, 1948년 우랄로 밀려났다. 1953년 국방차관으로 복귀해 베리야 체포에 가담했고, 1955년부터 국방장관을 지내다 1974년 사망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39–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39할힌골에서 일본군 격파
- 1941참모총장, 이후 레닌그라드·모스크바 방어 지휘
- 1942–45최고부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베를린
- 1945독일 항복 접수, 소련 점령지구 사령관
- 1946–19481차 실각: 오데사, 이어 우랄 군관구로
- 1953–1957베리야 체포에 가담, 국방장관을 거쳐 1957년 해임
- 1969회고록 출간으로 복권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56.02–1957.06
- 정위원 1957.06–1957.10
1957.10 해임 · 「보나파르트주의」 비난과 함께 실각
관련 역사 사건
- 1914–19181차 세계대전제정군 기병 하사관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용기병 연대 하사관까지 올랐다.
- 1938–1941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제57특별군단 사령관1939년 6월 5일 펙렌코를 대신해 할힌골 지휘를 맡아 제1군집단을 편성, 8월 대공세에서 이중 포위로 일본군 제23사단을 섬멸했다.
- 1941–1945대조국전쟁부최고사령관모스크바 방어전과 스탈린그라드·베를린 작전을 지휘·조율했고, 카를스호르스트에서 독일의 항복 문서를 접수했다.
- 1941–1944레닌그라드 봉쇄레닌그라드 전선 지휘관게오르기 주코프는 1941년 9월 레닌그라드 방어 지휘를 맡아 전선 붕괴와 도시 포기를 막는 조치를 지휘했다.
- 1942–1943스탈린그라드 전투천왕성 작전 공동 기획자게오르기 주코프는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함께 독일군 측면을 겨냥한 천왕성 작전의 협공 구상을 조정했다.
- 1945.02–08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베를린 점령군 사령관으로 포츠담의 무대 뒤에 있었다.
- 1945.08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할힌골에서 관동군을 격파한 사령관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관동군을 궤멸시켜 일본의 북진론을 붕괴시켰다. 이 승리로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고, 일본은 이후 소련과의 직접 충돌을 피하게 되었다.
- 1953베리야의 몰락체포 실행휘하 군 장교들과 함께 회의장에서 베리야를 직접 체포했다.
- 1955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소련 국방장관, 1955–1957조약 준비가 외무성 주도로 진행되는 동안 군대는 배제되어 있었다. 주코프는 4월 1일 회의 개최가 확정된 뒤에야 통합군령 문서 초안을 '아주 짧은 기한'으로 맡았다.
- 1956헝가리 혁명국방장관국방장관으로 군사 개입을 뒷받침했다.
- 1957반당 그룹 사건결정적 지원군용기로 중앙위원들을 소집해 흐루쇼프를 지지하게 한 뒤, 몇 달 뒤 자신도 해임됐다.
1937~1939년 숙청과 1941년의 균열
주코프는 1941년 참패의 원인을 직접 설명했다. 인민위원도 자신도 그런 전쟁을 앞두고 군대를 준비할 경험이 없었고, 1937~1939년에 숙련된 군사 간부들이 파괴되었으며, 전쟁 전 국방인민위원부와 총참모부의 고위 지휘 인사가 자주 바뀌어 건실한 계획과 전문가 집단이 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숙청의 시대는 그 자신에게도 닿아 있었다. 군관구 당회의에서 제3기병군단장으로서 그는 「인민의 적을 가려내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근시안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스탈린과 보로실로프에게 전보를 보냈으나 답은 없었다.
1941년 2월부터 7월까지 그는 총참모장 겸 국방인민위원 대리로서 1941년 5월 15일 이후로 연대가 잡히는 「독일 및 그 동맹국과의 전쟁 시 소련군 전략 전개 계획에 관한 고려」 작성에 참여했다. 이 문서는 독일군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않고 전개에서 앞서 독일군을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티모셴코와 주코프가 그 내용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계획의 운명은 확정적이지 않다. 서명란이 표시되었을 뿐 문서는 서명되지 않았고, 1965년 5월 26일 면담에서 주코프는 스탈린이 이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전쟁이 시작될 때 실제로 어떤 계획이 유효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6월 22일 독일의 공격 뒤 주코프는 국방인민위원 명령 제2호(07시 15분 발송)와 제3호(23시 50분 발송)를 작성해 반격을 지시했다. 국경 군관구 사령부들은 부대를 제때 전투준비에 넣지 못해 이를 수행할 수 없었고, 6월 23~28일의 공세는 효과 없는 일련의 반격으로 끝났다. 7월 말 스몰렌스크 상실 뒤인 1941년 7월 29일 스탈린은 주코프를 총참모장에서 해임하고 예비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그곳에서 주코프는 옐냐 공세를 수행했다. 옐냐는 개전 이래 붉은군대의 첫 성공적 공세였고, 투입 103,200명 가운데 31,853명의 손실을 냈다.
9월 11일 명령으로 그는 레닌그라드 방면군 사령관이 되었다. 9월 17일 그는 제42·제55군 군사평의회에 명령 없이 방어선을 버린 지휘관, 정치공작원, 병사를 즉시 총살하라고 지시했고, 9월 22일 제8군에 보낸 암호전문에서 군 지휘부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설 것을 요구하며 페테르고프를 버린 지휘관들을 「겁쟁이와 반역자」로 총살하겠다고 경고했다. 일부 출판물은 9월 28일 그가 레닌그라드 방면군 부대에 암호전문 제4976호를 보내 적에게 항복한 사람의 가족을 총살하고 본인도 포로에서 돌아오면 총살하라고 설명하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한다. 지휘 방식에 대한 평가는 갈렸다. 포크롭스키는 주코프 아래에서 군 사령관들에 대한 대우가 무례해졌고 일을 바로잡는다는 말보다 「목을 자른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다고 적었고, 로콧소프스키는 자존심 있는 지휘관은 부하를 모욕할 권리가 없지만 주코프에게는 그런 감각이 없었고 그의 개인적 「나」가 흔히 공동 이익을 앞섰다고 썼다. 동시에 슈테멘코는 그가 재능이 크고 대담하며 결정을 관철하는 데 단호해 자신이 옳다고 느낄 때 스탈린에게 꽤 날카롭게 반박할 수 있었고 그것을 감행한 사람은 그뿐이었다고 기록했다.
승리의 지휘와 그 대가
게오르기 주코프의 군사적 중요성은 단순히 전투에서 이겼다는 데 있지 않다. 그는 할힌골에서 기갑부대와 항공 전력을 결합한 포위 작전을 실행했고, 1941년 독일의 침공 뒤에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어를 조정하며 붕괴 직전의 전선을 붙들었다. 이후 최고사령부의 일원으로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공세에 관여하면서 병력과 물자를 집중해 전쟁의 주도권을 소련 쪽으로 옮겼다. 이 지휘 방식은 작전의 규모와 속도를 중시했지만, 병사와 민간인의 희생을 크게 만든 가혹한 동원 체계와 분리될 수 없었다. 따라서 주코프는 유능한 작전 지휘관이면서도 승리를 위해 인간적 비용을 감수한 소련 전쟁 수행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해야 한다.
전후 그의 명성은 군사적 권위와 정치적 불안의 원천이 동시에 되었다. 스탈린은 그를 변방 지휘관으로 돌려세웠고, 흐루쇼프는 1953년 베리야 체포와 권력 재편에 그의 군사적 권위를 활용했다. 그러나 1957년 당 지도부와의 충돌 뒤 주코프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고,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전쟁 경험과 지도부와의 긴장을 서술했다. 그의 생애는 전쟁에서 독자적 판단을 발휘한 지휘관이 당국가의 정치적 통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구조를 보여준다.
1953년 6월 26일 — 베리야를 체포한 날
1953년 6월 26일, 크렘린 정치국 회의. 라브렌티 베리야는 자신만만하게 회의실에 들어섰다. 스탈린이 죽은 지 3개월, 베리야는 이미 KGB와 내무부(MVD)를 통합했고, 수용소 수감자들을 사면했으며, 동독 반란을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모두에게 위협적이었다.
말렌코프의 사전 신호에 따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 장교들이 무기를 숨긴 채 회의실 밖에서 대기했다. 회의 도중 말렌코프가 갑자기 테이블 아래의 벨을 눌렀다. 주코프가 무장한 장교들과 함께 들어가 베리야에게 다가갔다: 「일어서시오. 당신은 체포되었소.」
베리야는 잠시 놀라며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지만, 곧 무장 해제되었다. 그는 말렌코프의 집무실에 구금되었다가, 그해 12월 재판 없이 총살되었다. 주코프는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물리친 사람이었지만, 그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크렘린의 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