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제나흐파 창립자, 고타 통합강령의 기초자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상세 이력 보기
- 1848–1849바덴 봉기 참가, 패배 후 스위스로 망명
- 1850–1862런던 망명 — 마르크스·엥겔스와 교유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담
- 1869베벨과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전쟁공채 반대로 체포,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통합강령을 기초해 라살레파와 합당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을 지키다
- 1890–1900당 기관지 『전진(Vorwärts)』 편집장
- 1900샤를로텐부르크에서 사망
40년간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SPD 공동 창립자, '그림자 황제'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 1867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 첫 당선 — 이후 1913년까지 의원직 유지
- 1869리프크네히트와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보불전쟁 전쟁공채 반대, 파리코뮌 옹호 연설로 반역죄 유죄 —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라살레파와 합당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출범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자』 발행, 지하 조직 지휘
- 1891에르푸르트 강령 채택 주도 — 유럽 사민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확립
- 1899–1906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어, 정치적 총파업 논쟁 중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독일 노동운동의 원로 이론가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846포메른 주 슐라베 출생
- 1884–1890『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자
- 1891SPD 입당; 『노이에 차이트』 주요 필자 (1913년까지)
- 1902–1907『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 편집장
- 1906–1911SPD 중앙당학교 강사
- 1916스파르타쿠스단 공동 창립
- 1917–1918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19독일 공산당(KPD) 공동 창립
수정주의의 창시자, 진화적 사회주의 이론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저자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수석 이론가,『신시대』창간 편집자, 마르크스『자본론』제4권 편집자
「우리에게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물론 사회적 생산은 비민주적 체제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수단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1918)
제2인터내셔널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에르푸르트 강령을 집필하고 베른슈타인 수정주의를 논박했으며, 혁명 후 볼셰비키 독재 비판으로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5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자당 입당, 초기 저작 『다윈과 사회주의』 발표
- 1880–1883취리히 이주, 번스타인과 교류; 런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개인적 친교
- 1883–1917『신시대(Die Neue Zeit)』 창간 및 35년간 편집장 — 제2인터내셔널의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지
- 1885–1890런던에서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마르크스 유고 『잉여가치학설사』 편집 착수
- 1891–1892에르푸르트 강령 이론부 집필, 주해서 『계급투쟁』 출간 — 독일 사민당의 마르크스주의 정립
- 1899–1909베른슈타인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옹호; 『권력에의 길』 출간
- 1917전쟁 반대 입장으로 사민당 탈당, 독립사회민주당(USPD) 공동 창립
- 1918–1922『프롤레타리아 독재』 출간으로 볼셰비키 비판, 레닌의 반박서 촉발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영구혁명론을 공동 창안하고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한 '혁명의 상인'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상세 이력 보기
- 1891바젤대 박사학위, 독일 사민당 입당
- 1894–1897『디 노이에 차이트』 필진, '파르부스' 필명 채택
- 1897–1898『젝지셰 아르바이터차이퉁』 편집장
- 1900레닌·마르토프와 『이스크라』 창간 지원
- 1904–1905트로츠키와 영구혁명론 공동 정식화
- 1905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전략가, 「재무선언」 기초
- 1915독일 외무부에 러시아 혁명 계획 제출, 코펜하겐 작전망 구축
- 1917레닌의 '봉인열차' 귀환 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