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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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사전소련공산당·볼셰비키

페테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치카

Пётр Иванович Стучк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65–1932 ○ 자연사

계급적 법 개념을 정식화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건설자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1865년 7월 14일(26일) 리가현 콕네세 볼로스트에서 태어나 1932년 1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고 유골은 붉은광장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과 신문 『디에나스 라파』를 이끌었고, 1897년 체포되어 7개월 구금 후 뱟카현으로 5년 유형되었다.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했으며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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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 1917.10–11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락,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조사위원장 —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 기초
  • 1918–1920RSFSR 법무인민위원·외무부인민위원,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1918.12–1920.1)
  • 1923–1932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1924), 『국가와 법 백과사전』 편집장(1925~1927), 소비에트법연구소 소장(1931)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72–1963 ○ 자연사

1940년 소련 대사관이 정한 라트비아 괴뢰 정부의 총리로 소련 편입을 요청한 미생물학자

리보니아 마즈살라차의 소작인 집안에서 태어나 타르투 수의학교를 마쳤고, 1905년 혁명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로 망명해 다보스의 결핵 연구소에서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세르비아군 수의관으로, 라트비아 독립전쟁에는 수의 부대 대위로 복무했다. 1919년 라트비아 대학교에 미생물학 연구소를 세웠고 1923년 라트비아 최초의 박사 학위 논문을 썼으며, 사회민주주의 지지자였다. 1940년 6월 소련 대사관에 불려 가 새 괴뢰 정부의 수반 자리를 제안받아 총리가 되었고, 7월 21일부터는 대통령 직무도 맡아 라트비아의 소련 편입을 요청했다. 1940~1952년 라트비아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을 지냈고, 1941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1963년 리가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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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901타르투 수의학교
  • 1911다보스 결핵 연구소 조수
  • 1919라트비아 대학교 미생물학 연구소 설립
  • 1940괴뢰 정부 총리, 대통령 직무대행
  • 1940–1952라트비아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

야코프 흐리스토포로비치 페테르스

Яков Христофорович Петер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86–1938 ✕ 처형

체카 창설 부의장, 명예체키스트 제2호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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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LSDRP) 입당
  • 1907–1908체포·기소, 리가 군사법원에서 무죄 판결
  • 1909–1917런던 망명, 영국 사회당 및 라트비아 SD 그룹 활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준비
  • 1917.12–1918.07체카 부의장 (제1대)
  • 1918.07–08체카 권한대행 의장 — 좌파SR 반란 진압
  • 1918.08–1919.03체카 부의장, 카플란 사건·로카트 음모 수사
  • 1920–1922투르키스탄 전권대표·타슈켄트 체카장, 바스마치 소탕
  • 1922–1929GPU·OGPU 동부국장, 국경군 감찰관 겸임
  • 1930–1934모스크바 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7당 통제위원회 위원

얀 에르네스토비치 루주타크

Ян Эрнестович Рудзута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87–1938 ✕ 처형

법정에서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한 라트비아 볼셰비키

흐루쇼프가 1956년 소개한 재판 기록에서, 루주타크는 NKVD의 사건 조작과 강요된 자백을 중앙위원회에 알리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노동조합 지도자. 농업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입당했고 1909년 카토르가형을 선고받았다가 1917년 석방됐다. 교통인민위원과 정치국 정위원,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7년 5월 체포된 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NKVD의 사건 조작을 고발했다. 1938년 7월 29일 총살됐고 1955년 재검토에서 사건이 조작으로 확인돼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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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9리가·빈다바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 체포되어 10년 카토르가형
  • 1917전러시아 섬유노조 서기, 모스크바 노조평의회 간부
  • 1918–1920모스크바 국민경제회의 의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 1920–1921투르키스탄 인민위원회의 의장,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4–1930소련 교통인민위원
  • 1926–1932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1–1934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검열인민위원
  • 1937.05.25'라트비아 민족주의 반소 조직' 혐의로 체포, 법정에서 NKVD 조작 규탄
  • 1938.07.29군사재판 사형 판결, 당일 총살

빌헬름 게오르기예비치 크노린

Вильгельм Георгиевич Кнор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0–1938 ✕ 처형

코민테른 선전기구의 설계자이자 당사(黨史) 편찬자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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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민스크 소비에트 서기, 『즈뱌즈다』 편집자
  • 1920–1922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국 서기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7–1928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보선전부장
  • 1932–1935역사-당 연구소(적색교수양성소) 소장
  • 193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당 선전선동부 부장

로베르트 인드리코비치 에이헤

Роберт Индрикович Эйх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0–1940 ✕ 처형

시베리아 대숙청의 설계자, 고문 속에서도 자백을 철회하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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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라트비아 사회민주당 입당
  • 1908–1911영국 망명: 탄광부·선박 화부
  • 1917–1919리가 소비에트 간부 → 라트비아 소비에트 식량인민위원
  • 1920첼랴빈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25–1929시비르 변경 집행위원회 의장
  • 1929–1930시비르 당 제1서기
  • 1930–1937서시비르 당 제1서기 — 집단화·쿨라크 숙청 지휘
  • 1935정치국 후보위원
  • 1937NKVD 트로이카 위원 → 농업인민위원
  • 1938–1940체포 → 고문 → 자백 철회 편지 → 총살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1–1979 → 수용 10년

벤야민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끈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의 개척자

벤야민은 『일방통행로』(1928)를 이렇게 헌정했다: 「이 거리는 아샤 라치스 거리라 이름 붙여졌다, 기술자로서 이 거리를 저자를 관통해 낸 그녀의 이름을 따서.」

라트비아 출신 연극연출가.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을 개척했고, 1924년 벤야민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끌었으며 브레히트·피스카토어와 협업했다. 수용 10년 후 발미에라 극장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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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모스크바 코미사르젭스키 연극학교 수학; 라트비아 난민학교 교사
  • 1918–1920오룔 실험아동극장 설립·운영, 프롤레타리아 아동극 방법론 개척
  • 1920–1924리가 인민대학 연극스튜디오 책임자; 뮌헨에서 브레히트 『에드워드 2세』 조연출; 카프리에서 벤야민과 만남
  • 1925–1930리가·베를린·모스크바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아동영화관·소련 영화 수출 활동
  • 1930–1935피스카토어 영화 『산타바바라 어부들의 반란』 조감독; 라트비아 국립극장 연출; 『독일 혁명연극』 출간
  • 1938–1948체포되어 카자흐스탄에서 10년간 수용·유형
  • 1950–1957발미에라 드라마극장 주임연출; 1955년 복권, 1956년 당적 회복

혁명 군사평의회의 젊은 반대파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크렘린 맞은편 자택에서 레닌·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초상화와 '레닌의 유언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이 난입해 파괴했고, 거리에서 구타당해 체포되었으나 그날 탈출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경제가. 열네 살에 입당하여 1917년 24세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레닌의 핀란드 은신 시기 핵심 협력자였고, 10월혁명 당시 핀란드 주둔군을 페트로그라드로 수송했다. 내전기에는 동부·남부·서부·캅카스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붉은군대 정치총국장을 지냈다.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로 1927년 11월 마지막 공개 시위를 주도했고, 1930년 트로츠키주의 결별 선언 후 복권되었으나 이반 스미르노프의 지하 조직에 계속 가담했다. 1937년 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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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혁명·내전기 당과 군사 지도부
  • 1923–1927좌익 반대파 활동
  • 1937체포와 처형

카를 야노비치 바우만

Карл Янович Баума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2–1937 ○ 옥사

집단화를 밀어붙인 당 조직가

1930년 그는 집단농장 편입률 82.4%를 보고받고도 “너무 적다”고 답했다.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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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불법 정치활동 시작
  • 1917키예프에서 10월혁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
  • 1920–1923쿠르스크 губерния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쿠르스크 губком 책임서기
  • 1928–1930중앙위원회 농촌사업 담당, 모스크바 당위원회 제1서기
  • 1929–1930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1931–1934중앙아시아국 중앙아시아국 제1서기
  • 1934–1937중앙위원회 과학·기술 및 계획·재정·무역 부서 책임자
  • 1937체포 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 1955년 복권

발레리 이바노비치 메즐라우크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Межлау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3–1938 ✕ 처형

계획경제의 숫자를 만들다 숙청된 관료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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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년대라트비아계 볼셰비키로 내전과 경제 행정에서 성장
  • 1931–1934중공업·경제 행정에서 5개년계획 지표 관리
  • 1934–1937고스플란 의장, 공업화 숫자와 배분을 조정
  • 1937대숙청 속에서 체포
  • 1938처형, 계획기관도 숙청의 대상이 됨을 보여줌

야니스 에두아르도비치 칼른베르진슈

Ян Эдуардович Калнберзинь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3–1986 ○ 자연사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자이자 발트 3국 최장기 집권 공화당 제1서기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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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33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및 붉은교수양성소에서 수학
  • 1925–1939라트비아 내 지하 공산주의 운동 활동, 수차례 체포·투옥
  • 1940–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40–1951라트비아 공산당 리가 시위원회 제1서기 (겸임)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7–1961CPSU 중앙위 정치국(간부회) 후보위원
  • 1959–1970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겸임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 자콥스키

Леонид Михайлович Зак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4–1938 ✕ 처형

레닌그라드의 해머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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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라트비아 볼셰비키 활동, 체포와 유형
  • 1918–1921체카 전권대표, 전선 특별부서장
  • 1921–1925우크라이나 포돌·오데사 GPU 의장, 몰도바 전권대표
  • 1926–1932시베리아·서시베리아 OGPU 전권대표, 특별3인조 의장
  • 1932–1934벨라루스 OGPU 전권대표, 벨라루스 NKVD 인민위원
  • 1934–1938레닌그라드 NKVD 수장, 키로프 사건 수사·대규모 추방
  • 1938.01–04내무부인민위원·모스크바 NKVD 수장
  • 1938.04–08해임·체포·총살, 복권 거부

에두아르트 페트로비치 베르진

Эдуард Петрович Берз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4–1938 ✕ 처형

콜리마 금광의 굴라그를 설계한 라트비아 출신 체키스트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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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 1915–19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7–19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 1918.11RKP(b) 입당
  • 19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 1926–19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 1931.11달스트로이(Дальстрой) 초대 국장 임명
  • 1932.02나가예바 만에 상륙, 마가단 건설과 콜리마 금광 개발 개시
  • 1935.03금 채굴 계획 달성으로 레닌 훈장 수훈
  • 1937.04사단인텐단트(дивинтендант) 특별계급 수여
  • 1937.12휴가차 모스크바行, 12월 19일 체포

로베르트 페트로비치 에이데만

Роберт Петрович Эйдем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라트비아인 1895–1937 ✕ 처형

투하쳅스키 재판의 피고인이 된 라트비아 출신 내전 영웅

1920년 8월 7일 밤, 에이데만이 이끄는 우안집단은 드네프르 강을 도하해 카홉카 교두보를 점령했고, 페레코프에서 60km 떨어진 이 교두보는 브란겔군의 측면과 후방을 겨누는 창끝이 되었다.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와 브란겔군 격퇴에 결정적 역할을 한 내전 영웅이었다. 이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의장으로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으나,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인으로 총살되고 1957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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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키예프 군사학교 졸업, 16시베리아 예비연대 소위
  • 1917–1918중앙시베리아 집행위원회 부의장, 볼셰비키 입당
  • 1918–1920내전: 제16·41·46소총사단장, 제13군 사령관, 카홉카 방어
  • 1924–1925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25–1932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겸 군사위원
  • 1932–1937오소아비아힘 중앙평의회 의장
  • 1937체포(5.22), 투하쳅스키 재판 피고, 총살(6.12)

이반 아다모비치 크라발

Иван Адамович Краваль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7–1937 ✕ 처형

스탈린에게 불만족스러운 인구를 센 통계학자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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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라트비아계 볼셰비키로 입당
  • 1924–1930최고국민경제회의(ВСНХ) 간부로 노동경제·통계 기반 구축
  • 1930–1932소련 노동부인민위원회 부위원장
  • 1933–1935TSUNKHU 제1부국장 겸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
  • 1935–1937TSUNKH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전연방 인구총조사 책임
  • 1937인구총조사 결과를 이유로 체포·처형, 1956년 복권

야코프 이바노비치 알크스니스

Яков Иванович Алксни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7–1938 ✕ 처형

세계 최대 폭격기 전력을 구축하고, 자신이 선고한 죽음과 같은 죽음을 맞다

「그는 비행 장교들을 직접 점검했다… 오늘날 소비에트 공군이 강력한 무기로 존재하는 것은 주로 그 덕분이다」 ― 망명자 알렉산드르 바르민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붉은 군대 공군을 세계 최대의 폭격기 전력으로 키운 인물. 1931년 공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직접 비행사 자격을 취득해 거의 매일 비행했으며, 죄수들을 동원한 샤라슈카 설계국에서 폴리카르포프 I-5 전투기를 탄생시켰다. 1937년 6월 투하쳅스키 등 여덟 장군에게 사형을 구형한 특별재판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형을 주장했다. 그해 11월 라트비아 작전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간첩 혐의를 자백했고, 1938년 7월 콤무나르카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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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발미에라 사범학교에서 볼셰비키당 입당
  • 1919–1921제55소총사단 정치위원; 돈 지역 군사위원
  • 1924–192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붉은 군대 참모부 조직 편성 근무
  • 1926–1931공군 부사령관; 1929년 카차 비행학교에서 전투기 조종사 자격 취득
  • 1931–1937붉은 군대 공군 사령관 겸 국방인민위원회 군사평의회 위원; 세계 최대 폭격기 전력 구축
  • 1937.06투하쳅스키 등 8명에게 사형 선고한 특별재판부 최대 강경파
  • 1937.11라트비아 작전으로 체포, 1938.07.29 콤무나르카에서 총살
  • 1956사후 복권

얀 에르네스토비치 스텐

Ян Эрнестович Стэ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라트비아 1899–1937 ✕ 처형

스탈린의 철학 교사에서 우익 반대파로 전락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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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라트비아에서 RSDLP 입당
  • 1921–1924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1기 수학
  • 1925–1928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 개인교습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28–1930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부소장
  • 1932당 제명,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체포·유배
  • 1934–1936석방,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
  • 1937재체포되어 사형

아르비트 야노비치 펠셰

Арвид Янович Пельше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9–1983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의 당 규율 수호자, 라트비아 출신 정치국원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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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76차 당대회 대의원, 10월혁명 참가
  • 1918모스크바 체카 직원
  • 1919–1929적군 및 해군에서 정치·교육 업무
  • 1941–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3정치국 정위원 겸 당통제위원회 의장

빌리스 테니소비치 라치스

Вилис Тенисович Лацис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04–1966 ○ 자연사

울마니스의 총애를 받은 작가에서 라트비아 소비에트화의 설계자로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 국회에서 소련 편입 동의안을 직접 상정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던 소설가 라치스였다.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의 아들』(1933)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가가 되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지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갔고, 1940년 소비에트 합병 후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19년간 재임하며 농업 집단화와 1949년 대규모 추방을 주도했다. 정치인으로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한편, 『폭풍』과 『새로운 기슭으로』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소비에트 문학계에서도 정점에 섰다. 1954~1958년 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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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리가 시립도서관 사서
  • 1935–1940신문 『야우나카스 지냐스』 기자
  • 1940.06–08라트비아 SSR 내무장관
  • 1940–1959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52–196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54–1958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6라트비아 작가동맹 부의장·이사

야니스 볼데마로비치 페이베

Ян Вольдемарович Пейв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06–1976 ○ 자연사

미량원소에서 연방 정치까지: 라트비아 농화학자가 민족소비에트 의장이 되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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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티미랴제프 농업대학 졸업, 전연합 아마연구소에서 연구 경력 시작
  • 1940농업학 박사 학위 취득, 볼셰비키당 입당
  • 1944–1950라트비아 농업대학 초대 총장
  • 1951–1959라트비아 SSR 과학아카데미 원장
  • 1958–1966소련 최고소비에트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2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66–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간사장, 이후 일반생물학부 학술서기
  • 1969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 수여, 레닌상(1964) 등 다수 훈장

므스티슬라프 브세볼로도비치 켈디시

Мстислав Всеволодович Келдыш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11–1978 ○ 자연사

우주과학을 조정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길어진 회의에서 켈디시가 눈을 감고 잠든 듯 고개를 숙이면 모두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던진 질문은 언제나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고, 그는 모든 정보를 놓치지 않고 있음이 드러났다.

응용수학자이자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1961–1975). 1930년대 항공기 플러터와 시미 현상을 수학적으로 해결했고, 1946년 스테클로프 연구소에 특별계산국을 조직해 핵무기 개발의 수치해석을 총괄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수석 이론가'로서 인공위성·유인우주비행의 궤도 계산을 조정하며 코롤료프와 함께 소련 우주계획의 핵심 지도부를 이루었고, 소련 전자계산기 개발의 실질적 국가 발주자였다. 이론과 계산, 연구기관과 국가 결정을 하나의 체계로 묶은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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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1975과학아카데미 총재 · 우주과학 조정

비탈리스 페트로비치 루벤스

Виталий Петрович Рубе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라트비아 1914–1994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민족소비에트를 10년간 이끈 라트비아인

1983년 12월 8일, 인권의 날 기자회견에서 루벤스는 고리키에 유배된 사하로프에 대해 "재능은 있지만 아픈 사람"이며 유배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정신적 평화를 위해 필요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출신의 라트비아계 소비에트 정치인으로,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과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 민족소비에트 의장(1974~1984)을 10년간 지냈다. 비러시아 공화국 출신 간부가 연방 의회 핵심직을 안정적으로 장기 수행한 보기 드문 사례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이후 아르비트 펠셰가 발탁한 충성파 기술관료의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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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1농업전문학교 졸업 후 농학자로 근무
  • 1942–1943리빈스크 지구신문 《스타하노프 노동》 편집장
  • 1947–1948라트비아 공산당 다우가프필스 군위원회 제2서기
  • 1958–1960라트비아 SSR 국가계획위 농업·조달부장
  • 1960–196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농업부장
  • 1962–1970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
  • 1970–1974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 1974–1984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916–1994 ↓ 퇴임 1989

라트비아 당 지도자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88년 5월 28일,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19차 전연방 당대회 대표 선출이 진행되었다. 보스는 가장 많은 반대표를 받았지만 어쨌든 당선되었다. 모스크바로 항의 편지가 쇄도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라트비아인 부모를 둔 시베리아 출신으로, 1959년 '민족주의자' 숙청 이후 라트비아 공산당을 이어받아 18년간 제1서기를 지낸 '인테르나치오날리즘'의 집행자였다. 모국어를 완벽히 구사하면서도 공개 석상에서 단 한 번도 라트비아어로 말하지 않았던 이 모순이 그의 시대를 상징했다. 말년에는 민족소비에트 의장으로 올랐지만, 페레스트로이카의 민족운동 속에서 구질서와 함께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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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년대–1950년대라트비아 공산당 조직에서 성장
  • 1966–1984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 정체기 발트 공화국 관리 담당
  • 1984–1989민족소비에트 의장, 말기 소련 연방대표제의 보수적 얼굴
  • 1988–1989발트 민족운동과 페레스트로이카 속에서 영향력 약화
  • 1989 이후중앙정치에서 퇴장

알프레드스 페테리스의 아들 루빅스

Alfrēds Pētera dēls Rubiks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라트비아 라트비아인 1935–

소련 말기 라트비아 공산당의 완고한 수호자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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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소련군 복무
  • 1957–1961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기사
  • 1982–1984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방산업부 장관
  • 1984–1990리가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90–199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19971991년 쿠데타 시도 관련 수감, 1995년 8년형 선고
  • 1999–2015라트비아 사회주의당 의장
  • 2009–2014유럽의회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