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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발렌티노비치 노보질로프

Виктор Валентинович Новожи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70 ○ 자연사

마르크스 가치론과 수리 최적화를 접목한 소비에트 경제수학파의 공동 창시자

1942년, 독일군 점령하의 퍄티고르스크에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해 강제노동 이송을 피했다. 독일 측 경제학자 슈타켈베르크가 통계국장직을 제안하자 '현재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서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함께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에 기초해 자원 희소성을 반영하는 '차등적 비용' 개념을 정식화, 계획경제 최적화 이론의 토대를 세웠다. 1965년 레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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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하리코프 출생 (아버지는 현직 참사관)
  • 1911–1915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금메달), 정치경제학·통계학 강좌 교수장학생으로 잔류
  • 1922–1951레닌그라드 폴리테크닉 연구소 교수, 1938–1951 기계제작 경제학 주임
  • 1941경제학 박사학위: 「계획·설계 변수의 국민경제적 효율 비교측정 방법」
  • 1951–1966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통계학 주임
  • 1961레닌 훈장 수훈
  • 1965레닌상 공동 수상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선형계획법·경제모형 개발)
  • 1966–1970TsEMI 레닌그라드 분소 체계적 경제평가 연구실장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페딘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д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77 ○ 자연사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출발해 18년간 소비에트 문학의 최고 문지기가 된 소설가

20년간 친구이자 이웃이었던 페딘이 처음으로 친구가 아니라 '관리'로서 찾아왔을 때, 파스테르나크는 충격을 받았다 — 그날 페딘은 그에게 노벨상 거부를 요구하러 왔던 것이다.

『도시와 해』(1924), 『형제들』(1928)로 혁명기 지식인의 운명을 형식적 실험과 함께 그려낸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였다. 1940년대에는 스탈린상 수상작인 3부작 『첫 기쁨』·『이상한 여름』·『모닥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을 구축했다. 1959년 작가동맹 제1서기가 된 이후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기를 관통하며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거부 설득, 솔제니친의 『암병동』 출판 저지 등 당의 문학 정책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가로 군림했다. 젊은 날 '세라피온 형제단'에서 예술의 자유를 주창했던 작가가 소비에트 문학 제도의 수문장이 된 궤적은 해빙기 문화 정치의 모순을 응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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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노비 사티리콘』에 첫 풍자 소품 발표
  • 1914–1918독일에서 민간인 억류자로 1차대전 기간 체류
  • 1919–1921적군 복무, 입당 후 전업 작가를 위해 탈당
  • 1924『도시와 해』 발표 — 초기 소비에트 문학의 기념비적 장편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로 선출
  • 1949『첫 기쁨』과 『이상한 여름』으로 스탈린상 1등급 수상
  • 1959–1971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71–1977소비에트 작가동맹 이사회 의장

악셀 이바노비치 베르그

Аксель Иванович Берг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핀란드·스웨덴·독일계 1893–1979 ○ 자연사

소련 레이더를 세우고 사이버네틱스를 부흥시킨 과학자-제독

"사이버네틱스의 주된 목표는 인간이 복잡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을 통제하는 효율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1959년 4월 10일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보고

1893년 오렌부르크에서 스웨덴·핀란드·독일계 루터교 군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97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정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1919년 잠수함 판테라의 항해장으로 영국 구축함을 격침한 뒤 군 통신 연구와 레이더 개발을 지휘했다. 1937년 12월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유죄 판결을 받지 않고 1940년 석방되었고, 1991년에야 사후 복권되었다. 194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55년 제독-기사, 1953년부터 1957년까지 국방차관을 지냈고, 1959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를 이끌며 생물학적·기술적 사이버네틱스와 인공지능 연구를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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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전함 체사레비치 항해사, 영국 잠수함 E8 연락장교 (제정 러시아 해군)
  • 1918–1922잠수함 판테라 항해사, 잠수함 리스·볼크·즈메야 함장 (붉은 함대); HMS 비토리아 격침 (1919)
  • 1925–1937해군공병학교 교관, 무선연구소 설립 → 해군통신·원격기계연구소장 (NIMIST)
  • 1937–1940체포, NKVD 특별설계국(샤라슈카)에서 군 통신체계 개발; 증거불충분 석방
  • 1943–1944전기공업 부인민위원; 전연방 레이더 과학연구소 창설·초대 소장
  • 1943–1947국방위원회 레이더 위원회 부위원장 (위원장: 말렌코프)
  • 1953–1957소련 국방차관
  • 1953–1955과학아카데미 무선공학·전자공학연구소 초대 소장
  • 1959–1979과학아카데미 사이버네틱스 과학위원회 의장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넴치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Немчи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4–1964 ○ 자연사

수리경제학으로 계획의 과학화를 꿈꾼 학술 조직자

1948년 8월 VASKhNIL 총회. "염색체 유전 이론은 인류 과학의 황금 기금에 들어갔다"고 말한 넴치노프에게 누군가 "사임하시오!"라고 외쳤다. 그가 답했다. "아마도 사임해야겠지요. 나는 내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그는 정말 해임되었다. 전체 회의장에서 리센코에 맞선 유일한 공개 연설이었다.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1917년 모스크바 상업대학 졸업 후 1920년대 농촌 계급구조 연구로 주목받았다. 1948년 VASKhNIL 8월 총회에서 리센코의 유전학 탄압에 맞서 유일하게 공개 반대 연설을 했고, 다음날 티미랴제프 농업대학 학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다. 1958년 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을 조직, 1963년 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로 발전시켰다. 스탈린상(1946)·레닌상(1965) 수상. 칸토로비치·리베르만과 함께 해빙기 경제개혁 논의의 지적 삼각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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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펜자현 그라보보 마을에서 출생
  • 1917모스크바 상업대학 경제학부 졸업
  • 1917–1922첼랴빈스크 현 젬스트보 통계국장
  • 1923–1926우랄주 통계청장 (스베르들롭스크)
  • 1926–1934소련 중앙통계국·고스플란 인민경제회계 이사국 위원
  • 1940–1948티미랴제프 모스크바 농업대학 학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경제·통계)
  • 1948VASKhNIL 총회 리센코 반대 연설 — 다음날 학장직 해임
  • 1949–1963소련 과학아카데미 생산력연구회의(SOPS) 의장
  • 1953–1962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경제·철학·법학부 학술서기
  • 1958소련 최초의 경제-수학 연구실험실 창설
  • 1962–1964모스크바대학 경제분석 수리방법 학과 창설·학과장
  • 1963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창설, 학술지 창간
  • 1964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오파린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Опа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80 ○ 자연사

원시 수프에서 생명의 기원을 탐구한 소비에트 생화학자

"살아 있는 유기체와 무생명 물질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다." — 1922년, 훗날 『생명의 기원』으로 출판된 초기 논고에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제도적 기초를 닦은 생화학자이자 과학행정가이다. 1924년 지구상 생명이 무생물적 화학 진화를 통해 발생했다는 '원시 수프' 가설을 제창하여 생명기원 연구의 패러다임을 열었고, 이는 훗날 밀러-유리 실험으로 이어졌다. 1935년 알렉세이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1946년부터 34년간 소장으로서 소비에트 생화학의 중심 축을 이끌었다. 1970년 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으로서 이 분야의 국제적 제도화에도 기여했으나, 한편으로 리센코와 레페신스카야의 유사과학을 지지하여 과학과 정치의 긴장을 자신의 경력 속에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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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국립대학교 물리수학부 자연과학과 졸업
  • 1925–1942모스크바국립대학교 생화학 강사·교수
  • 1935A. N. 바흐와 함께 소련 과학아카데미 생화학연구소 공동 창설
  • 1935–1946바흐 생화학연구소 부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2–1960모스크바국립대학교 식물생화학과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46–1980바흐 생화학연구소 소장
  • 1948–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생물학부 아카데미크-서기
  • 1951–1958전연방 '즈나니예' 협회 회장
  • 1970–1977국제생명기원연구학회(ISSOL) 초대 회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불가닌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улган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75 ↓ 실각 1958

군복을 입은 총리, 흐루쇼프에게 밀려나다

1941년 서부전선. 독일 폭격기들이 모스크바로 날아가자 불가닌은 "왜 격추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쳤다. 지도에서 눈을 든 주코프는 "진정하시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여기서 쏘면 아군 진지가 폭격당하니 후방 부대에 맡기시오"라고 답했다.

체카에서 출발한 행정가로 모스크바 시 행정과 MELZ 공장장, 러시아연방 총리를 거쳐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1938년부터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국가은행을 맡았고, 전쟁 중에는 서부전선 등 여러 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일했다. 1947년 11월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이는 열병식 사열관의 지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군사 전략가가 아니라 실무형 집행자로 평가되었다. 스탈린 사후 국방장관을 거쳐 1955년 총리가 되어 흐루쇼프와 'B&K'로 불리며 유고·인도·영국을 방문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한 채 패배했고, 1958년 총리직과 원수 계급을 잃었다. 197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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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7체카에서 일하다 모스크바 전기신탁과 MELZ 공장장을 거쳐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 1944–1947국가방위위원회와 군 행정에서 전시 관리자로 활동
  • 1947–1949국방부 장관, 전후 군 조직 재편에 관여
  • 1953–1955국방장관,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부의 군사 담당 축
  • 1955–1958각료회의 의장, 흐루쇼프와 함께 말렌코프 이후 정부 운영
  • 1957–1958반당 그룹 사태에서 어느 편에도 확실히 서지 못했고, 패배 뒤 총리직을 잃었다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Анастас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95–1978 ○ 자연사(폐렴)

소련의 식탁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일리치에서 일리치까지」의 협상가

1942년 11월 6일 오후 2시 55분경,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 드미트리에프가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소총 세 발을 쐈다. 미코얀과 동승자들은 다치지 않았다.

191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23년부터 50년 넘게 중앙위원을 지낸 소련의 정치가다. 1926년 최연소 인민위원(대외·국내상업), 1935년 정치국원이 되었고 식품공업인민위원(1934~38)으로서 1936년 미국을 시찰했다. 1937년 사형명단에 서명했고 예레반에 파견되어 아르메니아 숙청을 주도했으며, 1940년 폴란드 장교 2만 6천 명 처형 명령에 서명했다. 1956년 헝가리 투입을 유일하게 반대했고, 1960년 쿠바를 방문한 첫 소련 관료였으며 1962년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설득해 미사일을 철수시켰다. 1965년 정치국과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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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 1934–19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 1938–1949대외무역인민위원, 전시 렌드리스 수령 총괄
  • 1953–1964무역·소비재 담당 부총리, 흐루쇼프의 해빙 지원
  • 1956헝가리 개입 반대
  • 1962아바나에서 카스트로 설득
  • 1964–1965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명목상 국가원수), 이후 은퇴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샬린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Шал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70 ○ 자연사

스탈린-흐루쇼프 이행기 정보총국(GRU)을 지휘한 참모, 판문점 정전 전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1근위전차군 사령관 카투코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샬린은 비정상적으로 일벌레였고, 정확하고 페달틱할 만큼 꼼꼼한 참모였다. 언제 사령부에 들여다봐도 그는 항상 책상 앞이었다.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지도 위에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었다."

오렌부르크 농민 출신으로 교원양성소를 나온 뒤 제정군 소위, 내전기 적군 중대·대대장을 거쳐 소련군 정보총국장까지 오른 상장. 1근위전차군 참모장으로 쿠르스크에서 베를린까지 주요 공세를 기획했고, 종전 후 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51–1952년 한국전쟁에 파견되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수석 군사고문으로 복무했다. 1952–1956년과 1957–1958년 두 차례 GRU 국장을 지내며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소련 군사정보를 총괄했고, 1954년에는 주코프 원수가 서방과 접촉해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보고를 올려 군부 내 긴장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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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정군 105보병예비연대, 빌나 군사학교 졸업 후 소위 임관, 17시베리아소총예비연대 중대장
  • 1918–1921적군 자원입대, 공산당 입당, 내전 종군 — 오르스크 연대 중대·대대장, 여단장 대리,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및 크론시타트 진압 참가
  • 1922–1931오르스크 현·튜멘 군관구 병무위원, '비스트렐' 과정 수료, 바시키르 자치공화국 영토관구 국장
  • 1931–1936제13소총군단 부참모장, 프룬제 사관학교 동방학부 졸업
  • 1936–1939정보총국(Razvedupr): 일본 주재, 제2(동방)과 과장 대리, 정보지휘관 중앙학교장, 제5국 부국장 대리
  • 1940–1941제16군 참모장 — 스몰렌스크 방어전 참가
  • 1941–1943제22군 참모장 — 모스크바 전투, 르제프 전투
  • 1943–1946제1전차군·제1근위전차군 참모장 — 쿠르스크, 르보프-산도미에시, 비스와-오데르, 베를린 공세
  • 1946–1949군사외교아카데미 원장
  • 1949–1951GRU 제1국장 겸 부국장
  • 1951–1952GRU 제1부국장 겸 한국전쟁 파견 —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
  • 1952–1956GRU 국장 (제1차)
  • 1956–1957GRU 제1부국장 (쉬테멘코 체제)
  • 1957–1958GRU 국장 (제2차)
  • 1958–1960국방부 감찰장군단 군사고문, 이후 질병으로 퇴역

블라디미르 바실리예비치 쿠라소프

Владимир Васильевич Кура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897–1973 ○ 자연사

참모의 예술로 1발트전선군을 설계한 소비에트 군사 지성

1941년 12월, 바투틴이 작전과장 레드뇨프 대령의 즉결 처형을 명령했을 때 — 독일군이 사단 방어선을 뚫었는데 그가 잠들어 있었다는 이유로 — 쿠라소프는 바투틴의 머리 위로 모스크바에 직접 보고하여 총살 명령을 철회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적군의 해군 파견대 지휘관을 거쳐 대장까지 오른 소비에트 군사 엘리트다.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제4충격군과 칼리닌·제1발트전선군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스몰렌스크, 벨라루스, 발트 작전을 설계했고, 특히 토로페츠-홀름 공세에서 한 달도 안 되어 300㎞를 진격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에는 중부군집단 총사령관과 참모본부 군사과학 부문 부참모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작전술의 이론적 토대를 다듬었고, 두 차례에 걸쳐 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으로서 전후 세대의 고급 지휘관들을 양성했다. 1963년부터 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로 동독 주둔 국가인민군을 지도하며 냉전기 동맹 체제의 작전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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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 제국군에 징집, 준위 학교 졸업 후 서부전선에서 소대장 복무
  • 1918붉은 군대 입대, 발트함대 해군 파견대 지휘관으로 페트로그라드 방어전 참가
  • 1921–1932군사교육기관 교관 복무,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벨라루스 군관구 참모
  • 1936–1940참모본부 아카데미 수석 전술교관 → 작전국 부국장
  • 1941–1942제4충격군 참모장 → 사령관, 토로페츠-홀름 공세 지휘
  • 1943–1945칼리닌·제1발트전선군 참모장, 스몰렌스크·벨라루스·발트·동프로이센 작전 기획
  • 1946–1949중부군집단 총사령관 겸 주오스트리아 소련 최고위원
  • 1949–1956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 (1차)
  • 1956–1961참모본부 부참모장 겸 군사과학국장
  • 1961–1963참모본부 아카데미 원장 (2차), 교수 직함 수여
  • 1963–1968바르샤바 조약군 통합사령부 대표, 동독 국가인민군 지도
  • 1968–1973국방부 총감찰단 감찰고문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고르킨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Гор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7–1988 ○ 자연사

재활의 최고재판소장, 오렌부르크에서 살아남은 자

1957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취임한 고르킨 앞으로, 스탈린 시대에 총살된 옛 당원들의 명예회복 청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자신 오렌부르크에서 동료 전원이 숙청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1916년 입당한 농민 출신 볼셰비키. 오렌부르크 주당 제1서기 시절 동료 전원이 숙청된 후, 1957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5년간 사법적 재활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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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RP(볼셰비키) 입당
  • 1917–1919트베리 시소비에트 서기, 트베리 현집행위원장
  • 1919쿠르스크 현체카 간부, 펜자 현농촌부장
  • 1934–1937오렌부르크 주당위 제1서기
  • 1937–19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서기
  • 1938–1953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서기 (1953–56 부서기)
  • 1956–1957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서기 (재임)
  • 1957–1972소련 최고재판소장
  • 1959–1961CPSU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로디온 야코블레비치 말리놉스키

Родион Яковлевич Малин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98–1967 ○ 자연사

원수이자 1957–1967년 국방장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 그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제2근위군을 멈춰 세워 200km 행군 뒤 진지에서 곧바로 만슈타인의 구원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독일군의 돌파는 저지되었고, 이 결정은 코텔니코보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승리에 큰 몫을 했다.

오데사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이고 아버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열한 살에 집을 떠나 머슴과 점원으로 일하며 프랑스어를 독학했고, 1914년 열여섯도 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입대했다. 기관총수로 복무하다 부상했고 프랑스 전선에서 싸워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받았다. 간첩 혐의로 총살될 뻔한 뒤 1919년 11월 적군에 들어갔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말리노 대령'이라는 가명으로 스페인에서 군사고문으로 일했으며, 이후 원수가 되어 스탈린그라드, 우크라이나, 발칸, 만주 전역을 지휘한 2차대전 최고의 야전사령관 중 한 사람이었다. 1957년부터 죽을 때까지 국방장관으로서 전략 핵무장을 추진하고 당의 지시에 따라 군을 대폭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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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9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 참전, 적군 지휘관으로 성장
  • 1942–1943스탈린그라드 반격과 남부전선 작전에서 핵심 지휘관으로 부상
  • 1944–1945우크라이나·루마니아·헝가리·만주 작전 지휘
  • 1956–1957국방부 차관 겸 육군총사령관, 1956년 11월 헝가리 봉기 진압에는 참여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음
  • 1957–1967국방장관,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을 관리

마트베이 바실리예비치 자하로프

Матвей Васильевич Заха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72 ○ 자연사

전격전을 예견하고 오데사 군관구를 구한 참모, 냉전 소련군의 총참모장

1941년 6월 21일 밤, 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자하로프는 흑해함대로부터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받았다. 상부 승인 없이, 그는 관구 전 부대에 전투경계태세 돌입과 항공기의 야전비행장 분산을 명령했다. 새벽에 전쟁이 터졌을 때, 오데사 군관구는 붕괴를 면한 유일한 국경 군관구였다.

트베리 농민 출신으로 1917년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한 적위대원에서 소련군 총참모장까지 오른 원수. 코네프·말리놉스키 휘하 참모장으로 코르순-셰브첸콥스키 포위전과 야시-키시네프 공세 등 주요 작전을 기획했다. 1960년대 총참모장으로 핵·미사일 시대 소련군의 전략 현대화를 지휘했으며, 흐루쇼프와의 충돌로 1963년 경질되었다가 그가 실각하자 복귀했다. 군사이론 교수이자 다수의 전략 저작을 남긴 학자-군인으로, 1917년 혁명에 참가한 마지막 현역 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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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적위대원으로 겨울궁전 습격, 볼셰비키 입당
  • 1918–1921적군 포병 지휘관으로 내전 종군, 차리친 전투 참가
  • 1924–1937프룬제 사관학교·참모아카데미 졸업, 벨라루스 군관구 작전과장
  • 1938–1940적군 참모부 부참모장
  • 1940–1941오데사 군관구 참모장 — 6월 21일 자발적 경계태세 명령
  • 1941–1944칼리닌·스텝·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참모장, 주요 공세 기획
  • 1945자바이칼 전선군 참모장, 만주 전략작전 기획
  • 1945–1949고등군사아카데미 원장
  • 1949–1952참모부 부참모장 겸 정보총국(GRU) 국장
  • 1953–1957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57–1960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0–1963소련군 총참모장 — 흐루쇼프와 충돌 후 경질
  • 1964–1971총참모장 재임명, 냉전기 전략 현대화 지휘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펠로프

Пёт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пе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79 ○ 자연사

스탈린의 전기를 쓰고, 그 신화를 해체한 역사가

1953년 스탈린 장례식에서 포스펠로프는 주체할 수 없이 흐느꼈다. 베리야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무슨 일이야? 그만해!"라고 외쳤다. 불과 3년 뒤, 바로 그가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된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를 작성했다.

스탈린 공식 전기를 집필하고 『프라우다』를 9년간 이끈 당 역사가. 흐루쇼프 시기에는 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로 스탈린 신화 해체의 기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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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볼셰비키 입당, 트베리에서 노동조합·당 활동, 첼랴빈스크에서 백군 점령 하 지하운동, '죽음의 열차'로 알렉산드롭스크 중앙형무소 수감 후 탈출, 시베리아 파르티잔 활동
  • 1924–1930중앙위 선전선동부 교관, 붉은 교수양성소 경제학부 졸업
  • 1931–1939잡지 『볼셰비키』 및 『프라우다』 편집, 당통제위원회 출판 담당, 「볼셰비키 전연방공산당사 단기강좌」 집필 참여, 아지트프로프 부책임자 (1937–1939), 제1부책임자 (1939–1940)
  • 1940–1949『프라우다』 주필, 전시 스탈린상 수상금을 국방기금에 기부, 증보판 「이오시프 스탈린 약전」 편찬 참여
  • 1949–1952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
  • 1961–1967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소장, 다권본 「소비에트 연방 대조국전쟁사」·「레닌 전기」 편집 주도
  • 1953–1960중앙위 서기, '포스펠로프 위원회' 위원장으로 스탈린 시대 대량 탄압 조사 — 보고서는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기초가 됨
  • 1957–1961중앙위 간부위원회 후보위원, 1959년 제21차 당 대회에서 말렌코프 반당 그룹 비판 연설
  • 1972–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부 아카데미크 서기 대행, 1973년 사하로프 규탄 서한 서명, 말년에 『볼셰비키』 지를 통해 트로츠키주의에 맞선 스탈린의 역할을 옹호하는 복합적 입장 견지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스네고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негов

굴라크 생존자로서 탈스탈린화를 밀어붙인 구볼셰비키

미코얀이 소치행을 권했지만, 스네고프는 당원증을 돌려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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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가입
  • 1918–1921빈니차·포돌리아 지하 당조직과 포돌리아 губер니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3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1–1937자캅카스·이르쿠츠크·첼랴빈스크·차파옙스크·무르만스크의 당·정치 부문 간부
  • 1937–1954대숙청으로 체포되어 굴라크와 유형지에서 15년 이상 복역
  • 1954–1960석방·복권 후 내무부 굴라크 정치부장
  • 1956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과 희생자 복권을 촉구
  • 1967잠시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곧 복권

예핌 파블로비치 슬라프스키

Ефим Павлович Сла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8–1991 ○ 자연사

29년간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한 '위대한 예핌'

부하들이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고, 의료진은 생애 누적 피폭량을 치사량의 세 배에 해당하는 약 1,500뢴트겐으로 추산했다는 회고가 전한다.

도네츠크 마키이우카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품팔이꾼과 목동으로 일했고 교구 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1918년 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해 남북전쟁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싸웠고 1928년 제대한 뒤 1933년 비철금속·금 연구소를 졸업했다. 1946년 제1총국 부국장이 되어 원자폭탄 계획에 들어갔고 1947년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소련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57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핵산업을 이끌며 폐쇄 원자력 도시들을 세웠고 1991년 1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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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지휘 후 강제 퇴임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네스메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Несмея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80 ○ 자연사

원소유기화학을 창시한 과학아카데미 총재

1951년 총재 S. I. 바빌로프가 사망하자 정치국원 말렌코프가 네스메야노프를 불러 총재직을 제안했다. 그는 채식주의 신념과 체포되어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 형제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으나, 말렌코프는 이를 묵살했다.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네스메야노프는 1899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80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소련의 화학자이며 과학 조직가다. 1929년 금속 할로겐화물과의 디아조 반응, 즉 '네스메야노프 반응'으로 아릴수은 할로겐화물을 얻는 방법을 개발했고, 이는 탈륨·주석·납·비소 등 여러 금속의 유기화합물 합성으로 확장되었다. 소련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1939)과 정회원(1943)을 거쳐 유기화학연구소 소장(1939–1954)과 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1954–1980)을 지냈으며,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아카데미 총재로 재임했다. 1961년 이후에는 농업을 우회하는 합성식품 연구를 추진해 인공 블랙 캐비어 등의 공정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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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54유기화학연구소 소장 · AN SSSR
  • 1943화학 부문 정회원(아카데미크) · AN SSSR
  • 1946–1951화학 부문 아카데미크-서기 · AN SSSR
  • 1948–1951모스크바 국립대학 총장
  • 1951–1961과학아카데미 총재 · AN SSSR
  • 1954–1980원소유기화합물연구소(INEOS) 창설 소장
  • 1950–1962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80 ○ 자연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화의 얼굴

1939년 10월 빌뉴스 반환 경축식에서 팔레츠키스는 연단에 올라 스메토나 대통령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 발언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불과 8개월 뒤 소련의 후원 아래 리투아니아의 새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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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1930년대리투아니아 좌파 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
  • 1940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 과정에서 인민정부 수반이 됨
  • 1940–1967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공화국의 공식 얼굴
  • 1966–1970민족소비에트 의장,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
  • 1970 이후명예직과 회고의 영역으로 물러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수르코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р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9–1983 ○ 자연사

〈젬랸카〉를 썼고 파스테르나크 탄압을 지휘한 작가동맹 집행자

1941년 11월 이스트라 전선에서 포화 속 외투가 파편에 찢긴 채 탈출한 수르코프는 말했다. '연대 본부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까지는 네 걸음.' 그 말이 〈젬랸카〉가 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시인이자 문학 관료로, 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1953–1959)를 지냈다. 2차대전의 상징적 노래 〈젬랸카〉의 작가이자 두 차례 스탈린상 수상자로서, 《닥터 지바고》 사건 당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대한 공식 탄압을 주도하고 1957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출판사 펠트리넬리에게 출판 중단을 압박했다. 경직된 문학정치의 집행자이면서도 1937년 빈곤에 시달리던 오시프 만델슈탐의 주머니에 몰래 300루블을 넣어주고, 즈다노프 시기 안나 아흐마토바를 은밀히 후원했던 모순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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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붉은 군대 복무, 내전 참전
  • 1926–1928『세베르니 콤소몰레츠』 편집장
  • 1934–1939『리테라투르나야 우초바』 부편집장, 문학대학 강사
  • 1940–1941『노비 미르』 편집장
  • 1941–1945종군기자, 전선 신문 특파원
  • 1944–1946『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 편집장
  • 1949–1953『오고뇨크』 편집장
  • 1953–1959소비에트 작가동맹 제1서기
  • 1956–196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게오르기 니콜라예비치 자루빈

Георгий Николаевич Заруб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58 ○ 자연사

캐나다·영국·미국, 냉전기 서방 3대 수도에서 소련을 대표한 외교관

1958년 1월 27일 워싱턴에서 자루빈은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문서에 서명했다. 소련과 미국이 영화, 음악, 과학, 스포츠 교류를 정부 간 협정으로 제도화한 것은 양국 관계 사상 처음이었다.

소련 외교관으로, 1944년부터 1958년까지 캐나다, 영국, 미국 대사를 차례로 역임하며 초기 냉전기 소련 외교의 핵심적인 대서양 창구였다. 1958년 1월 27일 윌리엄 레이시와 함께 「미소 문화·기술·교육 교류 협정」(레이시-자루빈 협정)에 서명하여 양국 간 최초의 정부 간 문화교류 틀을 수립했으며, 이 협정은 소련 붕괴 시까지 연장되며 볼쇼이 발레단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냉전 문화외교의 상징적 장면을 만들어냈다. 1952년부터 1958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복귀한 지 10개월 만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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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붉은 군대 복무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35산업아카데미 원장
  • 1935–1938경공업인민위원부 교육기관 총국장
  • 1938–1940뉴욕 세계박람회 소련관 부총감독·예술위원회 의장
  • 1940–1941외무인민위원부 영사국장
  • 1941–1944외무인민위원부 중남미국장
  • 1944–1946주캐나다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46–1952주영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2–1958주미국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52–1958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8소련 외무부 차관

콘스탄틴 안드레예비치 베르시닌

Константин Андреевич Вершин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0–1973 ○ 자연사

소련 공군을 제트·핵 시대로 이끈 두 번의 공군 총사령관

쿠반 공중전에서 베르시닌은 항공자산을 분산 배속하던 기존 교리를 깨고,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켰다. 에이스 포크리시킨은 베르시닌이 주재한 전투기 조종사 전군 회의를 '전쟁 2년 동안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회고했다.

소련 공군 총사령관을 두 차례(1946~1949, 1957~1969) 역임하며 항공전력을 제트기와 핵무장 체제로 재편한 군사 지도자다. 빈농 출신으로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해 보병 장교로 내전을 겪었고, 1930년 항공대로 강제 전속된 후 급속히 성장했다. 독소전쟁에서는 제4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반 공중전에서 전선 항공대를 결정적 축선에 집중시키는 혁신적 운용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벨라루스 공세에서의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제트기 전환과 핵폭격기 부대 창설을 진두지휘했으나, 1949년 돌연 강등되어 바쿠 방공군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57년 흐루쇼프에 의해 복귀해 1969년까지 재임하며 전략항공 역량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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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남부전선 공군 사령관
  • 1942–1943제4항공군 사령관
  • 1943북캅카스전선 공군 사령관
  • 1943–1945제4항공군 사령관 (재임)
  • 1946–1949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 1953–1954소련 방공군 사령관
  • 1957–1969소련 공군 총사령관 · 국방부 차관 (재임)
  • 1969–1973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

미하일 클라프디예비치 티혼라보프

Михаил Клавдиевич Тихонрав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74 ○ 자연사

패킷 로켓으로 우주 가는 길을 연 이론적 개척자

1948년 여름, 학술회의에서 '1000킬로미터가 로켓 사거리의 한계'라는 통념을 깨고 패킷 로켓으로 인공위성을 쏠 수 있다고 발표하자 회의장은 조소와 야유로 들끓었다. 9년 후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소련 우주개발의 이론적 아버지. 1933년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를 설계하고, 1948년 여러 로켓을 묶은 '패킷' 방식으로 궤도 도달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했다. 당시엔 조롱받았으나 코롤료프의 지지로 연구를 이어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 계획의 설계 기반을 닦았다. 1956년 OKB-1 제9설계국장을 맡아 인공위성과 유인우주선 설계를 총괄했으며, 라틴어에 능통한 고전적 교양인으로 '코스모넛'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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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3GIRD 여단장, 최초의 소련 액체연료 로켓 GIRD-09 설계
  • 1934–1938반응연구소(RNII) 부서장, 액체연료 로켓·상층대기 연구
  • 1940–1943로켓 요격기 '302' 및 카추샤 발사체 설계팀 지휘
  • 1946–1956NII-4 부소장 겸 과학고문, '티혼라보프 그룹' 지도 — 패킷 로켓 궤도 도달 이론 입증(1948)
  • 1956–1974OKB-1 제9설계국장,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행성 탐사선 설계 총괄
  • 1962–1974모스크바 항공대(MAI) 교수

니콜라이 데먀노비치 프수르체프

Николай Демьянович Псурц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0–1980 ○ 자연사

모스크바 전투 통신을 책임지고 27년간 소련 통신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체신장관

1945년 9월 2일, 스탈린은 대일전 승리 명령에서 '프수르체프 휘하 통신부대'를 특별히 지목했다. 3년 뒤 스탈린이 그를 체신장관으로 직접 지명했다.

니콜라이 프수르체프는 1948년부터 1975년까지 27년간 소련 체신장관을 지내며 전화·전신·우편·방송 인프라를 총괄한 최장수 장관이다. 키예프의 러시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전신기사가 되었고, 내전기에는 제9군과 제12군의 통신을 책임졌다. 위대한 조국전쟁 당시 서부전선 통신부장으로서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 전투에서 사령부 통신망을 유지했으며, 1945년 대일전에서는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을 지휘했다. 체신장관 시절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 케이블 간선과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망 '오르비타'를 건설하고 국제위성통신기구 '인테르스푸트니크' 창설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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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붉은 군대 통신병, 제9군 및 제12군 통신국 위원
  • 1924고등군사통신학교 졸업, 시베리아 군관구 통신 부책임자
  • 1927–1930제10독립통신연대장 겸 정치위원
  • 1934군사전자공학아카데미 졸업, 적군 통신국 보좌역
  • 1936–1937국방인민위원부 통신소장
  • 1937–1939체신인민위원부 시외전화전신국장, 극동지방 전권대표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북서전선 통신부장
  • 1940–1941적군 통신국 부국장
  • 1941–1944서부방면 및 서부전선 통신부장 (벨로루시아·스몰렌스크·모스크바·르제프)
  • 1944–1946적군 통신총국 제1부국장
  • 1945대일전: 극동 소련군 총사령부 통신국장
  • 1946–1948참모본부 통신부장
  • 1947–1948소련 체신장관 제1차관
  • 1948–1975소련 체신장관 (27년 최장수 재임)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75–1980연방급 개인연금 수급자

미하일 알렉세예비치 라브렌티예프

Михаил Алексеевич Лавренть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0–1980 ○ 자연사

시베리아에 아카뎀고로도크를 세운 수학자이자 폭발물 응용의 개척자

대학생들 앞에서 푸앵카레가 항해 과목을 면제받은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도 몇 과목은 면제해줘도 되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강의실 전체가 "공산당사!"를 외쳤다.

소련 수학자·유체역학자로서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시베리아 과학아카데미 분원의 창립 의장을 지내며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건설했다. 준등각사상 이론과 유체역학에서 근본적 성과를 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폭발 물리학 연구로 성형작약탄 이론에 기여했으며 이후 통제폭파를 건설에 응용하는 분야를 개척했다. 1953~1955년 아르자마스-16 핵무기 연구소의 부과학책임자를 맡아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고, 소련 최초의 전자계산기 개발과 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흐루쇼프 해빙기 과학의 동진(東進)을 상징하는 인물로, 20개 연구소와 대학이 하나의 숲속 공동체를 이루는 모델을 현실화한 과학 행정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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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수학연구소장
  •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수학연구소장
  • 1945–194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50–1953정밀기계·계산기술연구소장
  • 1953–1955KB-11(아르자마스-16) 부과학책임자
  • 1957–1975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원 창립 의장
  • 1957–1976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61–1976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9–1966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 교수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예멜랴노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Емелья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1–1988 ○ 자연사

전시 탱크 장갑에서 평화적 원자력 외교까지 이끈 핵행정가

첫 원자폭탄 실험 후 방사능 낙진을 측정하기 위해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바람을 따라 동쪽으로 움직이며, 대중의 공황을 막기 위해 브루셀라증을 조사하는 의사 행세를 했다.

소련 원자력 프로그램의 핵심 행정가로, 군수 금속공학에서 출발해 핵무기 개발과 민간 원자력 이용을 잇는 제도적 가교 역할을 했다. 금속공학자로서 전쟁 중에는 T-34 전차의 주조 포탑 기술로 스탈린상을 받았고, 1945년 원자력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반니코프의 제1총국에서 과학기술 부문을 총괄했다. 1957년부터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을 지휘하며 소련의 평화적 원자력 정책과 IAEA 외교를 주도했고, 흐루쇼프 시기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사회주의권 원자로 건설과 방사선 기술 보급을 진두지휘했다. 저서 『시간과 동지와 나 자신에 대하여』를 통해 스탈린의 의사결정 과정을 생생히 증언한 회고록 작가이기도 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28–1931모스크바 광산아카데미 조교·중앙기계제조기술연구소 연구실장
  • 1932–1934독일 에센·베를린 크루프 공장 소련 중공업인민위원부 전권대표
  • 1935–1937첼랴빈스크 페로합금공장 기술이사
  • 1937–1939방위산업인민위원부 제7총국장 (장갑강)
  • 1940–1946소련 인민위원회의 표준화위원회 부의장·의장
  • 1946–1953제1총국 과학기술부장·부국장 (원자력 프로젝트)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국장
  • 1955–1957중형기계공업부 차관 (신기술 담당)
  • 1957–1960소련 각료회의 원자력이용총국(글라바톰) 국장 · IAEA 소련 상임대표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부의장
  • 1966–1988소련 과학아카데미 군축과학문제위원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