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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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서 이슈트반

Tisza István

제1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총리를 지내고 과꽃 혁명 날 병사들에게 살해된 이중군주국 옹호자

1875~1890년 총리를 지낸 티서 칼만의 아들로, 칼뱅파 하급 귀족 가문에서 자라 부다페스트와 하이델베르크,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1886년 자유당 의원으로 정계에 들어섰고, 1903~1905년과 1913~1917년 두 차례 헝가리 총리를 지냈으며 1912~1913년에는 하원의장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이중군주국 체제를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했고, 보통선거권과 대토지 분할에 반대했다. 1914년 7월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처음에는 홀로 반대했으나 결국 지지로 돌아섰다. 개혁을 내건 카를 왕의 요구로 1917년 5월 사임했다. 1918년 10월 31일 과꽃 혁명 중 부다페스트의 집에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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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자유당 하원의원
  • 1903–1905헝가리 총리
  • 1910국민노동당 창당
  • 1912–1913하원의장
  • 1913–1917헝가리 총리

베린케이 데네시

Berinkey Dénes

빅스 각서를 받고 내각과 함께 물러난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마지막 총리

코마롬 주의 개혁교회 집안에서 태어난 법률가로, 1918년까지 법무부 국제국장을 지냈고 사회과학지 『후서디크 사저드』의 창간 회원이었다. 과꽃 혁명 뒤 1918년 11월부터 카로이 정부의 법무장관을 지냈고, 1919년 1월 총리가 되었다. 3월 20일 프랑스의 페르낭 빅스 중령이 협상국 각서를 건네자 영토 보전을 해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내각과 함께 사임했고, 이로써 평의회 공화국 수립의 길이 열렸다. 그 뒤 정계에서 물러나 1920년부터 변호사로 일하며 국제법·형법·민법에 관한 연구를 냈다. 1944년 부다페스트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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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법무부 국제국장
  • 1918–1919카로이 정부 법무장관
  • 1919헝가리 총리
  • 1920–변호사

카로이 줄러

Károlyi Gyula

1919년 세게드 반혁명 정부를 세우고 1931~1932년 헝가리 총리를 지낸 보수 귀족

니르바크터의 오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카로이 미하이의 사촌이다. 상원 의원이 되었고 1906~1910년 아라드 주지사를 지냈다. 1919년 5월 평의회 공화국에 맞서 아라드에서 반혁명 정부를 세웠으나 루마니아군에 억류되었고, 풀려난 뒤 5월 30일 프랑스군이 점령한 세게드에서 정부를 다시 꾸렸다. 이때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국방장관으로서 국민군을 세워 달라고 청했고, 두 사람은 평생의 벗이 되었다. 1930~1931년 베틀렌 정부의 외무장관을 거쳐 1931년 8월 총리가 되었고, 비어토르바지 고가교 폭파 뒤 계엄을 선포해 공산주의자를 가두었다. 1932년 9월 사임했고, 1939년 제2차 유대인법에 항의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1947년 부다페스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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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0아라드 주지사
  • 1919아라드·세게드 반혁명 정부 총리
  • 1930–1931베틀렌 정부 외무장관
  • 1931–1932헝가리 총리

페이들 줄러

Peidl Gyula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73–1943 ○ 자연사

평의회 공화국 붕괴 뒤 엿새 동안 「노동조합 정부」를 이끈 인쇄공 출신 사회민주당 지도자

죄르 주 러버즈드의 정육점 집안에서 태어난 식자공으로, 인쇄노동자 조합과 소비협동조합을 이끌고 1909년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베린케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고, 공산당과의 합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선포에 반대해 당직에서 물러났다. 1919년 8월 1일 평의회 정부가 사퇴하자 총리가 되어 평의회 공화국을 폐지하고 그 법령을 철회했지만, 8월 6일 루마니아군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에게 쫓겨났다. 그 뒤 사회민주당 재건에 참여했고 1922~1931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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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18인쇄노동자 주간지 『티포그라피아』 편집
  • 1909사회민주당 지도부
  • 1919베린케이 정부 노동·복지장관
  • 1919「노동조합 정부」 총리
  • 1922–1931국회의원

베틀렌 이슈트반

Bethlen István

1921~1931년 총리로서 제한 선거와 국제연맹 차관으로 호르티 체제를 안정시킨 트란실바니아 귀족

트란실바니아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자유주의자로 의회에 들어갔다. 1919년 세게드의 반혁명 세력에 합류했고, 1921년 4월 카를 왕의 첫 복귀 시도 뒤 총리가 되었다. 통일당을 세우고 1922년 선거법으로 농촌에 공개투표를 되살려 집권당의 승리를 굳혔으며, 사회민주당과 협정을 맺고 국제연맹 가입과 차관으로 경제를 안정시켰다. 1931년 대공황 속에 물러났고, 1941년 소련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946년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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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자유주의자로 의회 진출
  • 1919세게드 반혁명 세력 합류
  • 1921–1931총리
  • 1921베틀렌–페이에르 협정
  • 1922통일당 창당 · 선거법 개정
  • 1924국제연맹 차관
  • 1945–1946소련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옥사

카로이 미하이

Károlyi Mihály

과꽃 혁명으로 총리가 되고 헝가리 제1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자유주의 귀족

부유한 가톨릭 대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즉각 강화를 요구한 의회 반전파를 이끌었다. 1918년 10월 과꽃 혁명으로 총리가 되었고, 11월 16일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임시 국가원수를 겸했으며 1919년 1월 대통령으로 인정되었다. 토지개혁의 본보기로 자기 가문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내주었다. 1919년 3월 빅스 각서로 정부가 무너진 뒤 평의회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7월 망명했다. 1946년 귀국해 1947~1949년 주프랑스 대사를 지냈으나 러이크 재판에 항의해 사임했고, 1955년 프랑스 방스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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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립당 하원의원
  • 1918헝가리 국민평의회 결성, 과꽃 혁명으로 총리
  • 1918–1919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대통령
  • 1919–1946망명(프랑스·영국)
  • 1947–1949주프랑스 헝가리 대사

텔레키 팔

Teleki Pál

「붉은 지도」를 만든 지리학자로 두 차례 총리를 지내고 1941년 독일군 통과에 항의하듯 자살한 정치인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트란실바니아 귀족 가문 출신의 지리학자로, 대학 교수이자 학술원 회원, 헝가리 스카우트 연맹 수장이었다. 1918~1919년 1910년 인구조사에 바탕한 민족 분포도 「붉은 지도」를 만들었다. 1920년 외무장관으로 트리아농 조약 조인을 지켜보았고, 7월 총리가 되어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 시기의 정부를 이끌다 1921년 4월 물러났다. 1939년 다시 총리가 되어 제2차 유대인법의 전문을 쓰고 제3차 유대인법을 준비했다. 1941년 4월 3일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통과가 확실해지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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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붉은 지도」 작성
  • 1920외무장관, 트리아농 조약 조인
  • 1920–1921총리
  • 1938교육장관
  • 1939–1941총리
  • 1941자살

거르버이 샨도르

Garbai Sándor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79–1947 ○ 자연사

평의회 공화국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을 지낸 건설노동자 출신 사회민주주의자

키슈쿤할러스의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 벽돌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들어섰고, 1901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건설노동자 조합과 노동자보험기금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21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을 지지했고,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으로서 평의회 공화국의 법적 국가원수 겸 총리가 되었으나 실권은 쿤 벨러에게 있었다.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교육장관을 지냈고, 루마니아군에 붙잡혔다가 클루지에서 탈출해 브라티슬라바, 빈,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전후 귀국이 허락되지 않은 채 1947년 파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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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사회민주당 입당
  • 1903건설노동자 전국연맹 의장
  • 1908노동자보험기금 의장
  • 1919혁명통치평의회 의장
  • 1919페이들 정부 교육장관
  • 1920–1947망명(브라티슬라바·빈·파리)

프리드리히 이슈트반

Friedrich István

1919년 8월 페이들 정부를 몰아낸 쿠데타 뒤 석 달 동안 헝가리 총리를 지낸 공장주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말라츠키에서 독일계 약사 집안에 태어났다. 공학을 공부해 베를린 AEG에서 일한 뒤 부다페스트 근교에서 기계 공장을 운영했다. 1912년 카로이 미하이의 독립당에 들어가 그의 가까운 벗이 되었고, 과꽃 혁명 뒤 국방차관을 지냈으나 점차 우파로 기울어 1919년 2월 해임되었다. 평의회 공화국 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어 탈출했다. 1919년 8월 우익 단체 「백악관 동지회」와 함께 페이들 정부를 몰아냈고, 8월 7일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11월 24일까지 재임했다. 1951년 라코시 정권에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그해 죽었으며, 1990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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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헝가리 축구 국가대표
  • 1912독립당 입당
  • 1918–1919카로이 정부 국방차관
  • 1919헝가리 총리
  • 1919–1920국방장관
  • 1920–1939국회의원

굄뵈시 줄러

Gömbös Gyula

국민군 조직을 주도하고 1932~1936년 총리로서 헝가리를 이탈리아·독일 쪽으로 이끈 우익 급진파 장교

톨너주 무르거에서 마을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 1919년 세게드에서 준군사 단체 MOVE를 만들고 호르티의 국민군 조직을 주도했으며,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무력으로 막는 데 앞장섰다. 1929년 베틀렌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1932년 총리가 되었다. 무솔리니와 손잡고 1934년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히틀러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36년 뮌헨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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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MOVE 결성, 국민군 조직
  • 1921카를 왕 복귀 저지
  • 1929국방장관
  • 1932–1936총리
  • 1934로마 의정서 서명

쿤 벨러

Kun Béla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루마니아 1886–1938 ✕ 처형

133일간의 유럽 두 번째 소비에트 국가 — 그리고 19년 후의 처형장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 공화국 붕괴 직전 마지막 연설, 1919년 8월 1일

옛 트란실바니아 출신 유대계 언론인에서 혁명가로 전향한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실질적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다. 유럽사상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133일간 이끌며 산업 국유화를 추진했으나, 토지 분배 대신 국영농장을 택해 농민의 지지를 잃고 협상국 개입 속에 붕괴했다. 망명 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선전선동부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했고, '제3시기' 좌경노선을 지지하다 1935년 인민전선 전환을 놓고 디미트로프와 대립했다.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이듬해 총살,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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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트란실바니아 지부 조직
  • 1916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됨 — 포로수용소에서 볼셰비키 사상 접함
  • 1917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톰스크 당위원회 활동
  • 1918.03모스크바에서 헝가리 공산주의 그룹 결성 — KMP의 전신
  • 1918.11부다페스트 귀환, 헝가리 공산당(KMP) 창당 및 중앙위원회 의장
  • 1919.03–08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외무인민위원 겸 실질적 지도자
  • 1920크림 혁명위원회 의장
  • 1921독일 3월봉기 지도 — 실패
  • 1921–1936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위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
  • 1924–ECCI 선전선동부장
  • 1937체포 — '반혁명 테러조직 지도' 혐의
  • 1938.08.29사형 선고 및 집행 — 모스크바 콤무나르카

더라니 칼만

Darányi Kálmán

1936~1938년 총리로서 죄르 강령을 발표하고 제1차 유대인법을 의회에 낸 굄뵈시의 후임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9년 페슈트주 공무원으로 출발했고, 혁명 뒤 죄르주·코마롬주의 주지사를 지냈다. 1927년 국회의원이 되었고 1935년 굄뵈시 내각의 농업장관이 되었다. 1936년 10월 굄뵈시의 후임 총리가 되어 베틀렌 노선의 헌정 질서 회복을 내세웠고, 1937년 국민의지당을 금지하고 살러시를 투옥했다. 1938년 3월 죄르 강령을 발표했으나, 오스트리아 병합 뒤 친독 인사를 입각시키고 극우 세력과 협상하다 5월 사임했다. 그의 정부가 낸 제1차 유대인법은 임레디 정부 아래 통과되었고, 그는 1938년 12월부터 죽을 때까지 하원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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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페슈트주 공무원
  • 1920년대죄르주·코마롬주 주지사
  • 1927국회의원
  • 1935농업장관
  • 1936–1938총리
  • 1938죄르 강령 발표
  • 1938–1939하원 의장

뮌니히 페렌츠

Münnich Ferenc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독일계) 1886–1967 ○ 사망

1956년 카다르와 함께 소련 개입을 지지하고 혁명 진압 뒤 총리가 된 헝가리 공산주의자

세레겔리에시의 독일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 포로가 되어 톰스크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해 국제 포로 부대를 이끌었고, 1918년 귀국해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의 군사 인민위원을 지냈다. 1922~1936년 소련에서 살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오토 플라터라는 이름으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전후 부다페스트 경찰청장과 외교관을 지냈다. 1956년 혁명 중 너지 정부의 내무장관이었으나 11월 카다르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소련 무력 개입을 지지했고, 카다르 정부의 군·공안 장관으로 무장 경찰과 노동자 민병대 조직에 참여했으며 1958~1961년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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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군 포로, 톰스크 수용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당 참여
  • 1919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 군사 인민위원
  • 1936–1939스페인 내전 제11국제여단장
  • 1946–1949부다페스트 경찰청장
  • 1956너지 정부 내무장관, 카다르 정부 군·공안 장관
  • 1958–1961헝가리 총리

틸디 졸탄

Tildy Zoltán
독립소농당 농민주의·농민정당 헝가리 헝가리 1889–1961 ○ 봉기 진압 후 수감, 1959년 석방

소련 탱크 앞에서 중립을 선언한 목사 출신 대통령

1956년 11월 1일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재침공 가능성을 묻자 "그런 비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개혁교회 목사에서 독립소지주당 창립자·지도자로 헝가리 전후 민주화의 얼굴이 된 정치인. 1945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오르고 이듬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로 1948년 사위의 조작된 반역 혐의를 빌미로 사임당하고 8년간 연금되었다. 1956년 10월 너지 임레의 혁명 정부에 합류해 11월 1일 바르샤바조약 탈퇴와 중립 선언에 동참했고, 봉기 진압 후 6년형을 받았다. 1989년 대법원이 형을 무효화하며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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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9개혁교회 목사, 교회 정기간행물 편집
  • 1936–1944소지주당 국회의원, 전쟁 탈퇴 압박, 독일 점령 후 은신
  • 1945–1946총리
  • 1946–1948공화국 대통령, 강제 사임
  • 1948–1956가택 연금
  • 1956.10–11너지 임레 혁명정부 국가장관
  • 1958–19596년형 선고, 1959년 사면
  • 1989복권

라코시 마차시

Rákosi Mátyás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2–1971 ○ 사망

헝가리 스탈린화의 설계자, '살라미 전술'로 일당독재를 구축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러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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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통상 인민위원, 적위대·적군 지휘
  • 1921–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25–1940호르티 정권 아래 투옥 (8.5년형 이후 종신형, 1940년 석방)
  • 1940–1945모스크바에서 헝가리 공산당 해외국 지도
  • 1945–1948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1956헝가리 노동인민당(MDP)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3년까지 서기장)
  • 1952–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71소련 강제 망명 (키르기스스탄, 아르자마스, 고리키)

너지 임레

Nagy Imre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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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19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19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19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비밀 재판 후 처형
  • 1989영웅광장 재매장

살러시 페렌츠

Szálasi Ferenc

화살십자당 지도자, 1944년 독일이 세운 「민족 지도자」

커셔(지금의 코시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복무했고, 1925년 참모본부에 들어갔다. 1930년대 초 트리아농 이전 국경 회복을 내건 「헝가리주의」를 주창하며 정치에 뛰어들어 1935년 군을 떠났고, 1937년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을 세웠다. 1938년 투옥된 사이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당은 1939년 선거에서 의석 30석을 얻었다. 1944년 10월 독일이 호르티를 끌어내리자 국가 지도자가 되어 중단된 유대인 이송을 재개했고, 그의 민병대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 붙잡혀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3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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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1차 세계대전 복무
  • 1925–1935헝가리군 참모본부 장교
  • 1937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 창당
  • 1938–1940투옥 중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 1940년 사면
  • 1944–1945「민족 지도자」, 국민통합정부 수반
  • 1946인민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처형

레버이 요제프

Révai József
헝가리 노동인민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59 ○ 심장병

라코시 시대 문화정책의 총감독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고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논의했다. 레버이는 초청받지 못했고, 그달 정치위원회에서도 제외됐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4~44년 소련에 살았고, 귀국 뒤 1945~50년 당 기관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헝가리 문화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1949년부터 문화장관을 겸했다. 1952년부터 라코시에게 밀려나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몰로토프는 그가 이념 분야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쥐었다고 비꼬았다. 1953년 정치위원회에서 빠졌다가 1956년 잠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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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반전 좌파 잡지 「테트」와 후속지 「마」 편집진에 합류했다.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립 모임에 참여하고 당 기관지 「뵈뢰시 우이사그」 편집진에서 일했다.
  • 1930–19341930년 체포되어 1931년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뒤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 1944–19451944년 헝가리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 수립에 참여했고, 1945년 당 선전·언론부장이 됐다.
  • 1945–1950당 중앙 일간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 1949–1953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53–1958대통령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7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회에 복귀했으나, 10월 헝가리 혁명 때 소련으로 이송됐다.
  • 1957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회 고문으로 귀국해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됐고, 6월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뒤 다수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도비 이슈트반

Dobi István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68 ○ 자연사

소농당 출신의 명목상 국가원수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실권이 거의 없던 도비를 헝가리 대표단에 포함했다. 모스크바의 초청은 그의 국가원수직이나 소농당 경력에 대한 오해, 또는 국가 간 회담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쇠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년만 마치고 날품팔이로 일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을 지지했고 농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했다. 소농당 좌파 지도자로 공산당과 손잡아 1948~52년 총리, 1952~67년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되었지만, 라이너는 소련 지도부가 그의 실권이나 농민 사이의 권위를 잘못 짐작한 탓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협동조합의 강제 해산을 두려워해 몰로토프의 해산 제안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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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2헝가리 총리를 지냈다.
  • 1952–1967헝가리 인민공화국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게뢰 에르뇌

Gerő Ernő
헝가리 노동인민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80 ○ 자연사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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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19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19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19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19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19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19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19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너지 페렌츠

Nagy Ferenc

소련의 압박에 사임당한 소농 출신 초대 총리

스위스 국경에서 아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동차 보닛 위에서 사임서에 서명했다.

소농 출신의 정치가로, 소련 점령 하 헝가리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1946~47). 1930년 틸디 졸탄과 소농당을 세워 사무총장을 지내고 1945년 총선 57% 압승 뒤 국회의장을 거쳐 총리에 올라 펭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린트 도입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라코시 공산당이 「살라미 전술」로 소농당 의원을 제거하자 스위스 휴가 중 아들을 인질로 잡혀 사임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회고록 「철의 장막 뒤의 투쟁」(1948)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서방 서술의 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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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45소농당 공동 창립·초대 사무총장, 반전·반나치 활동
  • 1944.04–10게슈타포 투옥, 석방 뒤 화살십자 정권 하 은신
  • 1945–1946복구장관·국회의장·국민최고회의 위원
  • 1946–1947제2공화국 초대 총리: 포린트 도입, 파리 평화조약 서명
  • 1947.06스위스에서 사임 강요, 미국 망명
  • 1947–1970망명 정치, 국제농민연합 부회장·회장

퍼르커시 미하이

Farkas Mihály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4–1965 ○ 자연사

라코시 4인 지도부의 국방장관

1953년 헝가리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소련의 비판을 받고 새 정치위원회에서 밀려났으며,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1961년까지 수감되었다.

아버커우이산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소련에 머물다 1944년 말 귀국해 1945년부터 헝가리 공산당 정치국·서기국원이 되었다. 1948~53년 국방장관으로 라코시·게뢰·레버이와 함께 「4인」 지도부를 이루었다.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부르지 않았고, 불가닌은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군사령관처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새 정치위원회에서 빠진 뒤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61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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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정치위원회·서기국원이 되었다.
  • 1948–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국방장관을 지냈다.
  • 1956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61석방된 뒤 부다페스트에서 편집자·출판인으로 일했다.

러이크 라슬로

Rajk László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9–1949 ✕ 처형

내무장관으로 비밀경찰 ÁVH를 창설했으나 라코시의 첫 희생양이 된 공산주의자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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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 1937–19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
  • 1941–1944헝가리 귀환 후 지하 저항운동, 당 중앙위원회 서기, 헝가리 전선 공동 지도
  • 1946.03–1948.08내무장관 — ÁVH(국가보안국) 창설, 초기 쇼재판·숙청 지휘
  • 1948.08–1949.05외무장관
  • 1949.09–10티토주의 간첩 혐의 쇼재판, 사형 선고 및 집행
  • 1956복권 및 10월 6일 국장 재매장, 10만 인파 운집 → 헝가리 혁명의 도화선

카다르 야노시

Kádár János
헝가리 국가기관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12–1989 ○ 자연사(병사, 사인 미확정)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1956년 진압의 책임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러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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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PV) 및 공산청년동맹 입당, 지하활동
  • 1933–1934체포되어 2년간 투옥, 중형교도소에서 라코시와 마주침
  • 1942–1944KPV 중앙위원·서기, 반파시스트 '헝가리 전선' 창설 주도
  • 1948–1950내무장관 — 러이크 라슬로 체포 관여, 이후 당 조직부장으로 좌천
  • 1951–1954'티토주의자'로 체포, 무기징역 → 1954년 7월 석방
  • 1956.10–11너지 내각 장관 → 소련과 협상, 새 정부 수립
  • 1956–1988MSZMP 서기장 ― 32년간 헝가리 실질적 국가원수
  • 1956–1958총리 겸임
  • 1961–1965총리 겸임 — 경제개혁·대사면, '구야시 코뮤니즘' 확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