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1930년대 중반, 요양소에서 "당원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노인이 답했다. "나는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이오."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이자 혁명적 테러 이론가로, 1880년 『테러 투쟁』을 집필하여 소규모 독립 테러 조직에 의한 전제정 타도를 주장했다. 이 구상은 동시대 동료들에게도 급진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훗날 사회혁명당 테러 전략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25년간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되었고, 출소 후 항공학 개척자·과학 대중화자로 변모하여 193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되었다.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트로츠키는 『이스크라』 시절의 그녀 방을 이렇게 기억했다. 방에서는 늘 종이가 타는 냄새가 났다. 암호 편지를 촛불에 쬐어 읽었기 때문이다. 수백 명 지하 연락원의 가명과 주소가 그녀 머릿속에 있었다.
레닌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동지였지만, 스스로 조직을 세운 혁명가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몰락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노동자들 사이에서 교사이자 선전원으로 활동하다 1898년 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했다. 망명지에서 『이스크라』의 서기로서 암호와 가명, 주소로 이어지는 통신망을 운영하며 당을 묶어냈고, 1917년 이후에는 리크베스 문맹 퇴치와 전국 도서관망으로 소비에트 교육을 세웠다. 1925년 신반대파를 잠시 지지했다가 철회했고, 추콥스키의 동화를 비판한 글은 그를 아동문학에서 사실상 배제했다. '해로운' 도서를 걷어내는 도서관 정화를 주도하면서도 테러의 표적이 된 이들을 위해 탄원했다. 1939년 2월 27일 복막염으로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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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오볼렌스카야 여성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1889–1890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수학, 마르크스주의 서클 가입
1891–1896페테르부르크 넵스카야 자스타바 성인 야간학교 교사, 노동자 선전 활동
1898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 RSDLP 입당
1901–1905뮌헨·런던 망명, 「이스크라」지 서기
1905–1907러시아로 귀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1911롱쥬모 당학교 교사, 여성지 「라보트니차」 창간 참여
1917–192010월 혁명 참여, 콤소몰·피오네르 조직 설계, 글라브폴리트프로스베트 의장
1924–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25년 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 지지 후 철회
1918년 8월 30일, 레닌이 총격을 당해 크렘린으로 이송되자 비노쿠로프가 응급처치를 했다. 의대를 나온 혁명가가 6년 후 소련 사법부의 정점에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을 공부한 볼셰비키 법률가로,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기틀을 세웠다.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 1세대로, 1893년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공동 창립하고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시두마의 첫 볼셰비키 의장을 지냈다. 1918년 레닌 피격 직후 응급처치를 한 의사였으며, 1918–1921년 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으로 복지 행정의 초석을 놓았다. 최고재판소 의장 재임기간 내내 비신스키·크릴렌코와 사법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고, 법의 규칙성을 중시했으나 대숙청에 제도적으로 연루되었다. 1938년 해임 후 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 부서로 밀려났고, 1944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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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902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체포·독방·유배
1903–1917볼셰비키 당원; 예카테리노슬라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보험문제」지 편집
「코바, 그만둬, 창피한 꼴 당하지 말게. 이론이 자네 분야가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네.」 — 당 회의에서 스탈린에게 던진 말.
오데사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자로, 17세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를 창설하여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 문헌 컬렉션을 구축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미발표 원고를 직접 발굴·편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과 《자연변증법》을 최초로 출판했다. 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1929)이자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으나, 제헌의회 해산·브레스트 평화·당내 이견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독립적 성향 때문에 1931년 체포·추방되었고, 1938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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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89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 첫 파리 체류, 플레하노프·라브로프와 교류
1891–1899체포·18개월 구금 후 4년 강제노동형, 이후 키시뇨프 유형; 총 5년을 크레스티 교도소에서 복역
1901–1905그룹 「보르바」 이끌며 RSDLP 제2차 대회 참가; 레닌의 당 중앙집권화·분파주의를 공개 비판
1905–1907러시아로 귀국, 페테르부르크 최초 노동조합 조직; 제2두마 사민당 분파에서 활동
1907–1917해외 망명; 독일 사민당 기록보관소 연구, 카우츠키의 학술비서; 마르크스·엥겔스 미출간 원고 다수 발굴·출판
1917–1918귀국 후 메즈라욘카 합류, 볼셰비키와 통합; 제헌의회 의원 당선; 무장봉기·제헌의회 해산·언론탄압에 반대
1918–1920브레스트 평화 반대로 일시 탈당 후 복당; 국가기록관리총국(글라바르히프) 국장, 과학총국장
1921–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 창설·소장;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1924)·《자연변증법》(1925) 최초 출판
1929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역사학, 27/30표); 적기노동훈장 수훈
1931–1938멘셰비키 연계 혐의로 체포·제명·사라토프 유형; 1937년 재체포, 1938년 1월 21일 총살
1918년 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측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자, 스크리프니크가 속한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비서국은 전보로 반박했다: "우리 행동의 근원은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다."
1872년 1월 13일(구력 25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바흐무트 군 야시누바타 마을에서 철도 전신 기사인 아버지와 젬스트보 병원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2월 레닌의 지시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인 인민비서국 의장을 맡았으며, 1918년 7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체카 반혁명투쟁국 국장을 지냈다. 1927년부터 1933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화를 이끌었고, 1929년 6월 29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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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900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시작, 마르크스주의 문헌 독학
1900–1917페테르부르크 기술원 입학, 이스크라·프라우다 등 당 기관지 편집, 15차례 체포·7차례 유형, 6차례 탈옥
1917.03–12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서기,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917.12–1918.04레닌 지시로 우크라이나 파견,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인민비서국 의장
1918.07–1919.01체카 전연방 위원회 위원 겸 반혁명투쟁국 국장,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비밀정치국 국장
1920년 12월 23일, 페트로그라드의 제8차 소비에트 대회. 크르지자놉스키의 GOELRO 계획 보고를 들은 레닌이 일어나 "당의 제2강령"이라고 선언했다. 거대한 지도 위로 30개 발전소의 붉은 등불이 점멸했다.
레닌의 가장 오랜 동지로, 1893년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고 함께 체포·유배되었다. 부티르카 감옥에서 혁명가 '바르샤뱐카'의 러시아어 가사를 썼다. GOELRO 전력화 계획의 수석 설계자이자 초대 고스플란 의장으로 세계 최초의 종합 국가발전계획을 주도하고 모든 소비에트 5개년 계획의 방법론적 원형을 세웠다.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으로 에너지연구소를 창설, 통합에너지시스템의 과학적 기초를 닦았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비판으로 모든 지도직에서 밀려났으나 숙청은 면했고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복권되었다.
그의 이즈베스티야 사설은 '스테클랴슈키'(유리조각)라 불렸고, 레닌은 직접 쪽지를 보냈다: "스테클로프 동지! 당신 사설을 읽었소. 바로 이렇게 써야 하오, 더 많이!" 스테클로프는 이 쪽지를 액자에 넣어 편집실 벽에 걸었다.
오데사 출신의 볼셰비키 언론인이자 역사가.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 되어 1925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18년 RSFSR 헌법과 1924년 소련 헌법의 공동 기초자였으며 VTsIK 상임간부회 위원을 지냈다. 고리키와 함께 《노바야 지즌》을 편집하고 월간 《노비 미르》 창간을 주도했다. 바쿠닌·체르니솁스키 평전을 비롯해 방대한 사회주의 사상사 저작을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1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 1956년 복권되었다.
「우리의 불행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았고, 권력이 우리 머리를 돌게 했다는 데 있다」, 1938년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
불가리아 민족 출신으로 루마니아 시민권을 지닌 범유럽적 혁명가였고,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다. 1919–1923년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를 세웠고, 주영·주프랑스 소비에트 대사를 지냈다. 스탈린의 민족 정책과 당 관료화를 비판한 좌익 반대파의 이론가로 1927년 제명되었고, 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를 인정하고 1935년 복당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되었으며, 1988년 2월 4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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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896제네바·베를린·몽펠리에에서 의학 수학, 유럽 사회주의 운동 참여
1910루마니아 사회민주당 재건 및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 창설 주도, 제1서기
1919–1923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내무인민위원
1919–1927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 1919–1920년 조직국 위원
1923–1927소비에트 연방 주영·주프랑스 전권대표
1927–1935좌익 반대파 지도자로 당 제명 및 유배 (아스트라한·사라토프·바르나울)
1934–1937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 인정, 1935년 11월 복당, 보건인민위원부 학술연구소 관리국장
1937–19411936년 재제명, 1937년 1월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20년형,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
마리야 에센이 지하 가명을 정할 때 말했다. "차라리 '정언명령'이라 부르고 싶지만 너무 기니까, 그냥 '압솔류트'로 하자." 스타소바는 그 이름대로 임무를 절대 실수하지 않는 당의 연락책이 되었다.
1898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함께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이스크라의 지하 연락책과 위조문서·무기 운반을 도맡아 '아브솔류트'(절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7년부터 중앙위 기술서기와 서기국 의장으로서 합법화된 당의 장부·연락·회의 실무를 체계화했고, 이후 코민테른 독일 담당과 MOPR 의장으로 국제 혁명가 구호 조직을 이끌었다. 초기 당 기구의 조직적 토대를 닦은 몇 안 되는 여성 중앙위원이었다.
1905년 5월, 발라쇼프는 자신의 아파트를 총파업 사령부로 삼아 72일간 7만 직조 노동자의 투쟁을 지휘했고, '콤파니야' 공장 노동자들은 그를 첫 소비에트 대표로 뽑았다.
농민 출신 직조공으로 1898년 RSDLP에 입당해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위원회의 핵심이 되었다. 1905년 프룬제, 아파나시예프와 함께 72일간의 총파업과 러시아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이끌었으며, 아파나시예프가 흑백파에게 살해된 뒤 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1908년 체포되어 9년간 시베리아에 유배됐다가 1917년 3월 귀환해 위원장직을 되찾고 체카에서 활동했다. 내전 후 여러 책임직을 거쳤으나, 누적된 박해와 투옥으로 쇠약해진 끝에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05년 오데사, 전함 포툠킨의 반란 소식이 도시를 뒤흔들자 구세프는 레닌에게 편지를 썼다: 지금 당장 권력을 장악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자.
1896년 레닌의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제2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창립에 참여한 구볼셰비키.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서기로 수도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프룬제와 함께 '군사야당'을 이론적으로 주도하며 트로츠키의 군사노선에 맞섰다. 정치총국장으로 적군의 정치위원 제도를 완성했으며, 이후 중앙통제위원회와 코민테른에서 스탈린 노선의 핵심적 제도 구축자로 활동했다.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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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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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2월 28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카유로프는 병사들 앞에서 "동지들이여, 한 지주를 다른 지주로 바꾸기 위해 사흘 동안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노동자의 피가 흘렀단 말인가?"라고 외쳤다.
1898년 입당한 금속노동자 출신 볼셰비키로,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에서 활동하며 1917년 2월 23일 여성 방직 노동자들의 국제 여성의 날 파업을 당 위원회의 신중론을 뒤집고 혁명적 총파업으로 전환시켰다. 2월 27일에는 무장분견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습격해 소총을 확보하고 감옥을 열어 수감된 혁명가들을 해방시켰으며 경찰서를 공격했다. 혁명 후 5군 정치부장을 거쳐 경제 행정에서 일했고, 1932년 아들과 함께 류틴의 강령을 받든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을 결성하여 스탈린에 공개적으로 맞섰다가 1936년 카자흐스탄 유형지에서 죽었다.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러시아어 표기도 이쪽은 Эльцин, 대통령은 Ельцин으로 다르다.
1876년 키예프현 즈베니고로드카에서 태어났다(1875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189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이듬해 오데사의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를 마친 의사였다. 1910년 혁명 활동으로 우파현에 유배되어 벨레베이에서 위생의사로 일하며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혁명 후 지역 소비에트와 여러 위원회에서 일했고,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에 속해 46인 선언에 서명했다.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이듬해 초 우스티-뷔미로 유배되었고, 1929년에는 수즈달 정치격리소에 수용되었다. 1936년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마가단에서 정치범 단식투쟁을 조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37년 처형되었고 1956년 11월 23일 복권되었다. 아들 빅토르 보리소비치 엘친도 반대파로 활동했다.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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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RSDRP 가입, 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1901이스크라 대리인 — 오데사·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활동
1903–1904중앙위원회 협력, '다수파 위원회 국' 구성원
1905모스크바 위원회 서기, 12월 봉기 지도
1917모스크바 합법 위원회 서기, 10월 로고슈스코-시모놉스키 봉기 지휘
1918–1920제8군·제13군 정치부장, 루간스크 방어전 참가, 최초의 여성 적기훈장 수훈
1928년 6월 6일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고백서를 쓰느니 차라리 사지를 찢기는 편을 택하겠다. 나 홀로 남는다 해도 쓰지 않을 것이다."
농장 그레체스키에 로티에서 태어나 17세에 농업학교로 떠났고, 1903년 포돌스크에서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한 뒤 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내전기에는 동부전선과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3년 46인 성명에 서명해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옹호 연설을 한 뒤 제명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1924년에는 레닌 묘역의 1번 초소를 창설했다. 1936년 4월 17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어 1937년 1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86년 4월 대법원이 판결을 취소하고 사후 복권했다.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1918–19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