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비밀 작전은 탁월한 발상이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아프간 덫으로 끌어들였다… 소련이 국경을 넘던 날 나는 카터 대통령에게 썼다: 우리는 지금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를 가졌다.
폴란드 출신의 미국 정치학자이자 외교 전략가로, 카터 행정부(1977–1981)에서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소련 견제를 위한 인권 외교와 대중국 관계 정규화,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주도했으며, 카터 독트린으로 페르시아만 군사 개입 의지를 천명했다. 1979년 7월 3일, 소련 개입을 유발할 위험을 알리는 메모를 대통령에게 보내면서도 무자헤딘 비밀 원조 지시에 서명했으며, 훗날 "소련에게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 평했다. 냉전 후에는 《거대한 체스판》(1997)으로 유라시아 지정학과 NATO 확장을 주창하며 미국 외교에 지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블라디미르 트레믈은 소련 경제에서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소득과 소비를 간접 지표로 추정한 미국의 경제학자다. 그는 사모곤을 포함한 실제 주류 소비량과 국가 재정에서 보드카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을 분석해, 주류 판매 통계만으로는 소련 사회의 음주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음을 보였다. 1982년 저서 《소련의 알코올》은 이 연구를 집약했으며, 소련에서는 도서관 제한 열람 자료로 취급되었다.
매트록은 회고했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보다 더 나은 학생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잭 매트록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러시아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된 미국의 대소 전문가로, 1961년 첫 모스크바 근무 시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의 외교문을 번역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으로서 CIA와 국무부 분석관들을 동원해 '소비에트 101'이라는 24편의 브리핑 문건을 편성하고 모의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역을 맡아 레이건을 훈련시켰다. 1987년 소련 주재 대사로 부임하여 소련의 마지막 4년을 목격했고, 은퇴 후 고르바초프가 제네바에서 SDI 공유 약속을 서면화하지 않은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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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 출생, 듀크대·컬럼비아대 수학
1956–1971외교관 임관, 빈·모스크바·서아프리카·동아프리카 근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케네디-흐루쇼프 서신 번역
1971–1974국무부 소련 담당 국장
1974–1978주소 미국대사관 공사 겸 부대사
1981–198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미국 대사
1983–1986NSC 유럽·소련 담당 선임국장, '소비에트 101' 편성, 제네바·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준비
1987–1991소련 주재 미국 대사, 소련 마지막 4년 목격
1991–컬럼비아대·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제국의 부검』·『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저술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명예교수로 임명됐을 때 그를 소개하며 인용된 말, '진정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오데사 출신 유대인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퀸스 칼리지에서 평생 러시아와 미국의 아나키즘 운동사를 가르친 개척적 역사가였다. 『크론시타트 1921』(1970)으로 볼셰비키가 그 봉기를 반혁명 음모로 규정한 신화를 실증적으로 깨뜨렸으며, 훗날 게츨러의 명부 연구가 더 정밀한 수치를 내놓자 그 우위를 인정했다. 아나키스트를 '부도덕하고 폭력적'으로 보는 편견에 맞서 그들을 '사회정의의 선구자'로 복원하려 했고, 평생 모은 2만 점의 자료를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했다.
1968년 위스콘신대학에서 냉전기 미국 학생들에게 마오 시대 중국을 가르쳤고, 개혁개방기 중국이 관료자본주의로 흘러갔다고 진단하며 1989년 베이징에 있었다.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위스콘신대학 매디슨 교수를 지냈다. 첫 저작 『리다자오와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기원』(1967)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농민에 대한 신뢰가 결합한 방식을 밝혔다. 1977년 초판이 나온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인민공화국사의 표준 교과서로, 마오주의를 사회주의의 이상과 후진국 근대화라는 이중 과제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읽었다. 그는 마오 시대의 억압을 비판하면서도 개혁기의 시장화가 사회주의의 약속을 저버렸다고 보았다.
로버트 팩스턴은 미국의 현대 유럽사 연구자로, 비시 프랑스와 파시즘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을 분석했다. 독일 점령기 문서와 프랑스 자료를 함께 읽어 비시 정권이 독일의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자체적인 국가 재편 구상을 지닌 협력자였음을 밝혔다. 마이클 마루스와 함께 쓴 『비시 프랑스와 유대인』은 비시의 초기 반유대 법령이 독일의 직접 명령 없이 추진된 정책임을 논증해 프랑스의 전후 기억과 역사학을 바꾸었다. 그의 연구는 협력과 저항을 도덕적 신화가 아니라 국가기관, 사회세력, 전쟁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보게 했으며 세부 해석을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레너드 H. 퍼루츠는 미국 공군 장성이자 군사정보 전문가로, 냉전 말기의 핵위기 관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3년 유럽 주둔 미 공군 정보참모차장으로서 소련군의 비정상적 핵 readiness를 관찰했지만 NATO의 경보 수준을 올리지 말도록 권고해 긴장을 더 키우지 않았다. 이후 국방정보국장을 지내며 정보 판단과 군사 의사결정의 관계를 보여 주었고, 말년에는 애이블 아처 83의 위험을 되돌아보는 보고서를 남겼다.
멩기스투 정권 시기, 망명자들의 망명·사면 청원을 도와 수십 명이 고문과 죽음을 피하도록 했고 2018년에는 성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에티오피아 연구자로, 오클라호마주립대학 정치학교수와 명예교수를 지냈다. 평화봉사단 아디스아바바 부단장 부임 시점은 부고·왕실평의회가 1963년, 출판사·도서관 약력이 1964년으로 엇갈린다. 뉴델리 교육자료센터 상주 책임자, 오스틴대학 평생교육원장, 털사대학 선임연구원을 거쳐 1988년부터 2008년까지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서 가르쳤다. 멩기스투 정권 시기 망명자들의 망명·사면 청원을 도와 수십 명이 고문과 죽음을 피하도록 했고, 2018년 성훈장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에티오피아: 냉전 이후의 아프리카 국가》(1999)와 《신대륙의 유다의 사자》(2011)가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국가연구서 《에티오피아: 국가연구》는 그의 저작이 아니다
역사적 기억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어법이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매우 자주 오류에 빠진다.
미국을 대표하는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로, 위스콘신대학에서 37년간 봉직하며 파시즘 유형론과 스페인 내전 연구의 보수적 해석을 정립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제2공화국 붕괴의 일차적 원인이 우파 음모가 아니라 사회당 주도의 혁명적 급진화에 있다는 것으로, 내전을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로 읽는다. 2000년대 이후 프랑코 정권에 온정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비냐스, 프레스턴 등 진보 진영의 주요 논쟁 상대가 되었으나, 그가 세운 수정주의적 틀은 스페인 내전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이다.
나는 오히려 당의 내적으로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며 분권화된 구조와 운영 방식, 그리고 당시 대중의 정서에 대한 민감성을 강조할 것이다.
러시아 혁명사 연구의 수정주의 학파를 대표하는 미국 역사학자. 1960년대부터 소련 기록보관소에서 작업한 최초의 서방 연구자 중 한 명으로, 1976년 저서 『볼셰비키 권력 장악』에서 10월 혁명이 소수 쿠데타가 아니라 평화·토지·빵을 요구한 대중의 폭넓은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실증적으로 밝혀 파이프스의 냉전적 쿠데타 테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1917년 볼셰비키 당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분권화된 조직'이었다는 그의 발견은 혁명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배치되는 결론을 기록 자료에 근거해 기꺼이 받아들인 역사가로서도 평가받는다.
보이테흐 마스트니는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미국 역사학자로, 냉전과 소련 대외정책을 연구했다. 계급 배경 때문에 정규 중등교육 대신 공장 노동과 기록관 실무를 거친 경험은 그의 사료 중심 연구 태도와 맞물렸다. 그는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처음부터 단일한 군사동맹으로 보지 않고, 정치적 협상 수단과 소련의 규율 장치 사이의 긴장 속에서 해석했으며, 공개 기록을 통해 그 실제 작동을 추적했다. 평행사 프로젝트를 이끌며 동구권 군 관계자들의 증언과 문서를 국제 연구 공간에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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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프라하에서 출생
1950년대공장 기계공으로 일하며 노동자학교에서 수학
1950년대 후반–1962국립박물관 보조 기록관, 카를대학교에서 중세사와 기록학 전공
1962미국으로 이주해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수학
1970년대–현재컬럼비아대학교, 일리노이대학교, 보스턴대학교, 존스홉킨스 국제관계대학원 등에서 역사와 국제관계 강의
로널드 라도시는 미국의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공산주의 가정에서 성장해 미국 공산당과 신좌파를 거쳤다. 로젠버그 사건을 재검토하며 소련 간첩 활동에 관한 기존 신념을 바꾸었고, 이 과정은 그의 반공 보수주의적 전환을 굳혔다. 그는 메리 하벡, 그리고리 세바스티아노프와 함께 『스페인 배신』을 편집해 모스크바 архив 문서를 바탕으로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의 정책과 코민테른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부하린 전기로 '잃어버린 대안'을 제기하고 소련 개혁 가능성을 끝까지 주장한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
"역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스탈린의 등장과 흐루쇼프의 몰락과 소련의 종말, 각각에 대안이 존재했다."
스티븐 코언은 소비에트학계에서 소련 체제가 본질적으로 개혁 불가능했다는 통념에 가장 체계적으로 반박한 학자였다. 1973년 『부하린과 볼셰비키 혁명』에서 니콜라이 부하린의 정치노선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제시하며, 소련사가 단선적 필연이 아니라 분기점들의 연쇄였음을 주장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고 부하린의 사후 복권에 기여했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미국의 대러 정책을 '실패한 십자군'으로 비판하면서 냉전 이후에도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워싱턴의 합의에 맞섰다.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게이트를 둘러싸고 친푸틴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미국 언론의 러시아 보도가 냉전기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주장하며 고립을 무릅쓰고 소신을 지켰다.
'쿠바 혁명의 재검토'(2006)에서 혁명 지도자들을 사전에 짜인 계획 없이 독자적 이념 비전을 좇은 자율적 행위자로 제시해 지배적 해석에 도전했다.
쿠바 마리아나오에서 폴란드 출신 유대인 이민자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고교생으로 반바티스타 운동에 참가했으며 1958년 미국으로 이주해 1969년 UC 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브루클린 칼리지(CUNY) 정치학 명예교수로 2007년 은퇴했고,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 정권, 소련사, 미국 정치를 좌파·급진민주주의 관점에서 저술해 왔다. 사망 정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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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쿠바 마리아나오에서 출생
1950년대고교생으로 반바티스타 대중운동에 참가
1958미국으로 이주
1969UC 버클리에서 사회학 박사
1976'Revolution and Reaction in Cuba, 1933–1960' 출간
우리는 지금 케네디가 몰랐던 것을 안다. 소련은 핵탄두 탑재 탄도미사일 외에 전술핵무기 100기를 쿠바에 배치했고, 현지 소련군 사령관은 모스크바의 추가 승인 없이도 이를 발사할 수 있었다.
미국의 정치학자로, 1971년 저서 『결정의 본질』에서 합리적 행위자·조직 과정·관료정치라는 세 분석 모델을 제시하며 외교정책 결정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설립 학장(1977~1989)으로 이 학교를 세계적 공공정책 대학원으로 키웠고,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로 구소련 4개국 비핵화를 주도해 국방부 최고 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케네디가 위기 당시 핵전쟁 확률을 '3분의 1에서 반반'으로 보았다는 그의 분석은 이후 모든 쿠바 미사일 위기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소련이 민족을 파괴했다는 냉전 통념을 뒤집고, 소비에트 정책이 오히려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초등학교 6학년 때 소련이 파시즘을 물리치고 전쟁 이후 샌프란시스코 크기의 도시들을 건설했다는 발표를 했더니 선생님은 얼굴이 하얘졌다. 그날부터 졸업할 때까지 나는 '수니 동무'로 불렸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소련 민족 문제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인물이다. 1993년 저서 『과거의 복수』에서 소비에트 체제가 민족들을 탄압하고 러시아화했다는 기존의 냉전적 통념을 뒤집고, 소련의 민족 정책이 오히려 영토·언어·관료제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제도화하고 구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연방을 파괴할 민족들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이 '과거의 복수' 테제는 소련 해체 이후 소비에트 민족 연구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되었다. 코카서스 3국 각각에 대한 연구로도 저명하며, 2020년 출간된 스탈린 전기로 도이처 기념상을 수상했다.
쓰요시 하세가와는 러시아·소련사와 냉전사, 러시아·일본 관계를 연구한 일본계 미국인 역사가다. 그는 러시아혁명, 일소 관계, 태평양전쟁 종결이라는 세 분야를 넘나들며 국가 간 외교와 사회 변동을 함께 분석했다. 대표작 《Racing the Enemy》는 1945년 8월 일본의 전략적 선택에서 히로시마 원폭만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중립조약 파기가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해 항복 원인에 관한 논쟁을 다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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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도쿄대학교 교양학부 졸업
1969워싱턴대학교 역사학 박사
1970년대뉴욕주립대학교 오스위고 역사학 교수
1980–1981《The February Revolution》 출간
1980년대–1990년대홋카이도대학교 슬라브연구센터 교수
1998《The Northern Territories Dispute and Russo-Japanese Relations》 출간
「흐루쇼프는 조국과 자신 모두에게 승리와 비극을 함께 안긴 복합적 인물이었다」고 토브먼은 서문에 썼다.
윌리엄 토브먼은 소련 정치와 냉전사를 연구한 미국 정치학자이자 역사가다.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삶과 시대를 장기간 연구해 2003년 전기를 출간했고, 이 책은 2004년 퓰리처 전기상을 받았다. 그의 작업은 흐루쇼프를 스탈린주의의 계승자이자 비판자로 함께 다루며,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을 개인의 성격과 제도적 맥락 속에 놓는다. 또한 고르바초프와 스탈린의 대미 정책을 다룬 저서를 통해 소련 지도부와 국제정치의 관계를 추적했다.
인과의 사슬을 최종적으로 고정시킨 것은 자신의 권위주의적·편집증적·자기애적 성향에 예측 가능하게 반응한 스탈린이었다.
미국의 냉전사가로, 1972년 첫 저서로 후기수정주의 학파를 창시했다. 냉전의 책임이 양측에 있다는 틀을 세웠으나, 소련 붕괴 후 기록보관소가 열리자 1997년 『우리는 이제 안다』에서 스탈린이 냉전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정통주의로 회귀했다. 조지 F. 케넌의 공식 전기로 2012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예일대 교수로 『뉴욕타임스』로부터 '냉전사가들의 학장'이라 불렸다. 그의 궤적은 냉전사 서술이 증거에 따라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레고리가 발굴한 1938년 정치국 최종 회의록에서 스탈린은 대숙청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위대한 과업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설명한다.'
폴 R. 그레고리는 미국 경제사가이자 러시아·소련 경제 연구자다. 그는 소련 경제관료제와 계획의 작동을 통계 분석과 현장 인터뷰로 추적했으며, 소련 인터뷰 프로젝트를 이끌어 계획 담당자와 관료의 경험을 연구 자료로 남겼다. 유리 올세비치와 함께 쓴 2000년 소련 계획경제 회고 연구는 코시긴 개혁을 지령적 계획과 이윤 유인의 긴장을 해소하지 못한 시도로 분석했다.
미국의 동아시아사 학자로, 『한국전쟁의 기원』(1981, 1990) 2권을 통해 한국전쟁을 냉전의 국제적 충돌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와 해방 후 사회 갈등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재규정했다. 시카고 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미국 학계의 한국전쟁 이해를 근본적으로 전환시켰고, 이 공로로 미국역사협회 존 K. 페어뱅크상과 김대중 학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업은 전통주의 냉전 서사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현대 한국사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이제 이 법정 앞에서, 이 나라 국민 앞에서, 캘리포니아 주가 나에 대해 제기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 1971년 1월 5일 법정 진술
미국 마르크스주의-페미니스트 철학자이자 감옥 폐지 운동의 핵심 이론가. 1968년 CPUSA 입당, 1980·1984년 부통령 후보 출마. 1970년 체포·16개월 수감 후 무죄 평결로 국제 연대 운동 촉발. 『여성, 인종, 계급』(1981)으로 인종-성별-계급 교차 분석을 정초했고 감옥-산업복합체 개념을 발전시켰다. 1997년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을 공동창립해 폐지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으며, UC 샌타크루즈 석좌교수로 퇴임했다. 반세기 넘게 급진 사상과 실천의 교차점에 서 있는 살아있는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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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앨라배마주 버밍햄에서 출생 — '다이너마이트 힐' 흑인 중산층 이웃에서 성장
1965브랜다이스대학 우등 졸업 —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제자
1968CPUSA 입당, 블랙팬서당 LA 지부에서 정치교육 담당
1969UCLA 철학과 조교수 임용 — 공산당원 자격으로 즉시 해고, 법원 판결로 복직
1970–1972마린 카운티 법정 무장 사건 연루로 체포, FBI 10대 지명수배 — 16개월 수감 후 전면 무죄 평결
1979소련 레닌 평화상 수상
1980CPUSA 부통령 후보 — 거스 홀의 러닝메이트
1984CPUSA 부통령 후보 — 거스 홀의 러닝메이트
1981『여성, 인종, 계급』 출간 — 교차성 분석의 고전
1991CPUSA 탈당,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통신위원회(CCDS) 공동창립
1991–2008UC 샌타크루즈 역사의식·페미니스트 연구 교수 — 2008년 석좌교수 퇴임
1997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 공동창립 —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의 제도적 기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언제나 가져온 것은 상실이었다."
1945년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1975년부터 웰즐리 칼리지에서 소비에트 역사와 기억 정치를 가르쳐 온 미국의 러시아사 학자다. 『레닌은 살아 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레닌 숭배』(1983)로 윌슨상을 수상했고, 결정적 저작 『산 자와 죽은 자: 러시아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 숭배의 흥망』(1994)에서 스탈린이 전쟁 기억을 억압하고 브레즈네프가 숭배로 격상시켰으며 1985년 이후 그 숭배가 흔들렸음을 실증했다. 1985년 제네바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을 브리핑한 6인의 소비에트 전문가 중 한 명이었으며, 클린턴은 1995년 모스크바 승전 기념일 방문에 앞서 그녀의 책을 읽고 '위대한 책'이라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