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야노프가 '반헌법적 행위'로 10년형을 경고하자, 뤼텔은 버티며 말했다. '우리는 최고회의를 소집해 독립 선언을 표결에 부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주권 선언'이 아닌 '독립 선언'이라고 말해 버렸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에스토니아 사레마 섬 출신의 농업경제학자로,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과 공산당 간부를 거쳐 1983년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198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투옥 위협을 무릅쓰고 주권 선언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소련 해체의 첫 균열을 냈고, 1990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소련 통치의 불법성을 선언하고 독립 회복 이행기를 이끌었다. 1991년 독립 후 2001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6년까지 재임하며 NATO와 EU 가입을 성사시켰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국제사회 반응은 생각했나?' 나는 답했다. '옐친이 지금 부시와 통화 중입니다. 부시는 찬성하는 눈치입니다!'
민스크에서 태어난 핵물리학자로, 벨라루스 국립대학 교수이자 라디오전자공학 전문가였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조사위원회에서 소련 당국의 은폐에 맞서 진실 공개를 요구하다 해임되었고, 이 경험이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1991년 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비스쿨리 사냥 별장에서 옐친·크랍추크와 회동을 주최했으며, 원래 석유·가스 공급 논의로 시작된 자리에서 소련 해체 선언문에 처음으로 서명 의사를 밝혔고,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이 끝났음을 통보했다. 독립 벨라루스의 첫 국가원수였으나 1994년 루카셴코의 부패 의혹 공세로 실각했고, 말년에는 망명하지 않고 민스크에서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원로로 남았다.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크류치코프에게: '내 성격을 이해하게. 단 한 명이라도 죽으면 나는 살 수 없네.'
고리키주 콤소몰 제1서기와 소련 청년단체위원회 의장(1968~1980)을 거친 후, 1990년 VTsSPS 의장·정치국원·중앙위 서기를 지내고 12월 고르바초프의 강행으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1년 8월 GKChP의 얼굴로서 고르바초프의 '병환'을 명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자처했으나 사흘 만에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 후에는 회고록 『소련을 위한 마지막 전투』를 출간하고 학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3년 10월 백악관 포위 중 옐친이 안전보장을 제안하자, 하스불라토프는 "나는 어떤 보장도 필요 없으며, 오히려 옐친에게 보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답했다.
루슬란 하스불라토프는 체첸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러시아 정치가로, RSFSR 최고소비에트 마지막 의장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에는 옐친의 가장 가까운 동맹으로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맞서 의회를 이끌며 대통령과 충돌했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루츠코이와 함께 의회파를 지휘하다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1994년 사면된 뒤에는 정치에서 물러나 모교에서 세계경제학을 가르쳤다.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