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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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데멘테이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Дементе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30–2018 ○ 자연사

연방의 보존과 벨라루스 주권 사이에 선 의장

“내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면 소련은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니콜라이 데멘테이는 농업 전문가에서 벨로루시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최고회의 의장으로 올라선 소련·벨라루스 정치가였다. 그는 1990년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주권 선언을 주재했지만, 연방을 해체하지 않는 개혁을 지지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위원회의 쿠데타를 공개 지지한 뒤 사임하며, 소련 질서의 마지막 국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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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2비쳅스크주 당위원회 강사, 비쳅스크 구역 당위원회 제2서기, 비쳅스크 구역 집행위원회 의장
  • 1974벨로루시 공산당 비쳅스크주위원회 서기
  • 197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79–1989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농업 담당
  • 1989–1990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부의장
  • 1990–1991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7–2000벨라루스 공화국 국민회의 공화국 평의회 의원
  • 2005회고록 「삶의 교훈」 출간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루키야노프

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Лукья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 러시아 러시아인 1930–2019 ↓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동창에서 비판자로: 소련 의회의 마지막 의장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내가 제5차 인민대표대회를 주재하면, 의원들이 8월 민주주의 승리의 모든 성과를 무효화할까 봐 두려워했다.” — 체포 이유에 대한 루키야노프의 설명.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헌법적 틀을 설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한 법률가이자 정치가였다. 고르바초프의 대학 동기로 1977년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 중앙위 총무부장과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1991)에 올랐다. 초기 개혁을 지지했으나 연방 해체를 우려하며 보수파로 돌아섰고, 1991년 8월 쿠데타 동조 혐의로 체포되어 15개월 수감되었다. 석방 후 주가노프와 함께 러시아연방 공산당을 창당했고 2003년까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다. 법학 박사이자 '아나톨리 오세네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소비에트 제도에 끝까지 충성한 마지막 지식인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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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1961소련 각료회의 법률위원회 수석 컨설턴트
  • 1961–197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선임 레페렌트, 부서 부장
  • 1977–198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사무국장
  • 1983–1985CPSU 중앙위 총무부 제1부부장
  • 1985–1987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87–1988CPSU 중앙위 서기 (법률·행정 담당)
  • 1988–1990CPSU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1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
  • 1993–2003러시아연방 국가두마 의원 (CPRF)

조레스 이바노비치 알표로프

Жорес Иванович Алфё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30–2019 ○ 자연사

반도체 헤테로구조로 IT 시대를 연 공산주의 물리학자

2000년대 러시아의 사회적 양극화를 설명하며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잔의 내용물은 안타깝게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잔을 받치고 있는 다리가 나머지 인구입니다.»

조레스 알표로프는 반도체 헤테로구조 물리학의 창시자로, 1968년 세계 최초의 상온 연속발진 반도체 레이저를 실현해 광섬유 통신과 CD 기술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한 소련의 응용물리학자이다. 2000년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87년 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1989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을 지내며 소련 붕괴 후에도 기초과학의 명맥을 지켰다. 1995년부터 공산당 명단으로 국가두마 의원을 지내며 과학 예산을 옹호했고, 2013년 과학아카데미 개혁에 맞서 싸웠다.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딴 그는 평생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냉전기 광전자공학 경쟁의 한복판에서 국제 과학계를 이끈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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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61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최초의 소련 트랜지스터 개발 참여
  • 1963이중 헤테로구조 반도체 레이저 특허 출원
  • 1970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이오페 연구소)
  • 197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레닌상 수상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 1987–2003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 1989–2017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
  • 1995–2019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공산당 연방명단)
  • 2000노벨 물리학상 수상 (헤르베르트 크뢰머와 공동 수상)

압두라흐만 할릴 오글루 베지로프

Əbdürrəhman Xəlil oğlu Vəzirov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0–2022 ○ 자연사

고르바초프가 카라바흐 위기에 투입했으나 검은 1월 속에 도망친 마지막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25일 밤 베지로프가 전화를 걸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모스크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 회고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8~1990)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고르바초프에 의해 임명되었다. 카라바흐 출신이었고 10년 이상 외교관으로 해외에 체류해 현지 정치 부패와 무관했으나, 오히려 그 공백 탓에 아제르바이잔 내 권력 집단이나 거리 정치 어느 쪽도 장악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바쿠에서 소련군이 민간인을 향해 발포한 검은 1월 사태 직전 상황을 완전히 상실하고 모스크바로 떠났으며, 이후 중앙정부와 헤이다르 알리예프 양쪽으로부터 비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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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6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2서기
  • 1956–1959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9–1970전연방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0–1976키로바바트 시당위 제1서기, 이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공업부장
  • 1976–1979주캘커타 소련 총영사
  • 1979–1985주네팔 소련 대사
  • 1985–1988주파키스탄 소련 대사, 아프간 철수 협상 참여
  • 1988–1990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이반 스테파노비치 실라예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Сила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23 ○ 자연사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 항공장관에서 제국의 청산인으로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소련 정부 수반이 된 실라예프는 옐친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연방 재산을 러시아로 이전하는 포고령을 정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달 뒤 그는 해임되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고리키 항공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20년 만에 공장장이 된 항공산업 관료였다. 1981년 항공공업장관으로 취임해 MiG-29, Su-27, Tu-160, 부란 우주왕복선 등 소련 항공·우주 기술의 정점을 총괄했고,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으로 현장을 지휘했다. 1990년 옐친에 의해 RSFSR 각료회의 의장으로 발탁되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이후 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으로서 사실상 소련의 마지막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러나 옐친이 연방 기관을 일방적으로 접수하자 이를 저지하려다 한 달 만에 해임되었고, 소련 해체라는 결과에는 결국 맞서지 못한 과도기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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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74고리키 항공공장: 기술자 → 공장장
  • 1974–1977소련 항공공업 차관
  • 1977–1980소련 항공공업 제1차관
  • 1980–1981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 장관
  • 1981–1985소련 항공공업 장관
  • 1985–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기계제조 담당)
  • 1986체르노빌 사고 정부대책위원장
  • 1990–1991RSFSR 각료회의 의장
  • 1991.08–12소련경제운영위원회 의장 ― 사실상 소련 마지막 정부 수반
  • 1991–1994유럽공동체 주재 러시아 상임대표 (대사)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시카바르드냐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Шкабардня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0–2025 ○ 자연사

정밀 계측으로 미사일과 우주왕복선을 통제한 장관

1991년 2월, 새 내각에서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직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했다. '그러한 지도부에 나는 필요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련 기기제조·자동화·제어시스템부 장관(1980~1989)으로서 전략미사일과 에네르기아-부란 우주왕복선의 핵심 제어 체계를 총괄한 군수산업 행정가다. 부란 프로그램의 성공적 시험 비행을 이끈 공로로 1990년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관리국장으로서 정부 운영을 책임지다 1991년 신내각 참여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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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노보체르카스크 공과대학 졸업, 크라스노다르 전자계측기 공장에서 엔지니어 경력 시작
  • 1954–1968크라스노다르 ZIP 공장에서 기술실험실장·특별설계국장 거쳐 주임기사까지 승진
  • 1968–1974기기제조부 중앙기구에서 전자계측기 총국 주임기사, 이후 소유즈엘렉트로프리보르 국장
  • 1974–1980기기제조부 기술국장·과학기술국장 거쳐 차관
  • 1980–1989소련 기기제조·자동화·제어시스템부 장관
  • 1981–1986CPSU 중앙위원 후보위원
  • 1986–1990CPSU 중앙위원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관리국장
  • 1991 이후연금 생활,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제어문제연구소 전문가 고문 및 회고록 집필

아나톨리 스테파노비치 디야틀로프

Анатолий Степанович Дят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31–1995 ○ 방사선 후유증

체르노빌 4호기 안전시험을 지휘한 부수석기사, 사고 후 설계 결함을 주장한 핵공학자

비상시 핵분열을 멈추도록 설계된 원자로 보호계통이 원자폭탄 기폭장치 역할을 했다.

시베리아 빈농가 출신으로 14세에 집을 나와 노릴스크 기술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를 우등 졸업했다. 14년간 아무르의 조선소에서 핵잠수함 원자로를 설치하며 경력을 쌓은 뒤 1973년 체르노빌 원전으로 옮겨 3·4호기를 총괄하는 부수석기사가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을 현장 지휘했고, 사고 후 설계 결함이 원인임을 주장했으나 1987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90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도 RBMK 노형의 구조적 결함을 입증하려 애쓰며 『체르노빌.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집필했고, 1992년 IAEA 자문보고서는 그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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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52노릴스크 광업야금 기술학교 전기공학과, 전기기사로 근무
  • 1953–1959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 졸업 (자동화·전자공학, 우등)
  • 1959–1973콤소몰스크나아무레 조선소 23연구소, 핵잠수함 원자로 설치
  • 1973–1986체르노빌 원전 부수석기사(2차 구역 운영), 3·4호기 담당
  • 1987–1990안전규정 위반으로 징역 10년 선고, 건강 악화로 1990년 조기 석방
  • 1990–1995『체르노빌. 어떻게 일어났는가』 집필, 설계 결함 주장 지속

겐리흐 안드레예비치 포고샨

Հենրիկ Անդրեյի Պողոսյան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1–2000 ○ 자연사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 쪽으로 기울게 한 최후의 당 제1서기

1988년 7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1931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88년 2월 24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불과 4일 전 지역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를 통과시킨 직후의 폭발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임기 중 3월 당 플레넘을 주재해 모스크바에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이관을 공식 요청했고, 7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해임하고 아르카디 볼스키의 특별관리위원회로 대체했으며, 해임 후 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 200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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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경–1988.02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집행위원회 부의장·농공위원장
  • 1988.02–1989.01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스테파나케르트 선거구)
  • 1989–2000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전차 위에 올라간 남자

1999년 12월 31일 모스크바 시간 낮 12시 신년사 방송에서: "여러분, 나는 사임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우리의 많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1931년 우랄 부트카에서 집단화로 몰락한 부농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2007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건설 기술자로 일하다 1961년 입당해 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1976–85)와 모스크바 당 제1서기(1985–87)를 지냈고, 1987년 10월 21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지도부를 비판한 뒤 해임되었다. 1990년 러시아 연방 인민대의원, 이어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91)이 되었고 1991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9년까지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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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1985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
  • 1985–1987모스크바 당 제1서기: 특권 비판으로 인기
  • 1987지도부 정면 비판 후 해임
  • 1989–1990인민대의원 압승, 러시아 최고소비에트 의장, 탈당
  • 1991.06러시아 대통령(사상 첫 직선)
  • 1991.08쿠데타 저지
  • 1991.12벨라베자 합의 서명
  • 1999.12.31사임, 국민에게 사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1991년 이후 러시아 시민권 보유) 러시아 (우크라이나계 어머니) 1931–2022 ○ 자연사

체제를 고치려다 체제를 끝낸 사람

1985년 3월 11일 서기장 선출을 앞둔 새벽, 정치국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포로스 별장에 사흘간 연금되었다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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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1978스타브로폴 지방 당 제1서기
  • 1978–1985농업 담당 서기, 49세에 정치국원
  • 1985.03서기장 선출
  • 1986–1988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체르노빌 대응
  • 1987–1989중거리핵조약, 아프간 철군, 동유럽 불개입
  • 1990초대 대통령, 노벨평화상
  • 1991.12.25사임 연설, 소련 국기 하강

1988년 6월 니카라과에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 주권 선언을 이끈 공산당 제1서기

「우리 대의원들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내에서 주권적이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주권 선언 직후

에스토니아 히우마섬 출신으로 1950년대부터 콤소몰과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아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까지 올랐다.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1980년 모스크바에 의해 외교직으로 밀려나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대사를 지냈다. 1988년 6월 16일 강경파 카를 바이노의 후임으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인민전선과 협력하며 그해 11월 에스토니아의 주권 선언을 이끌었다. 1991년 8월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고, 독립 후에는 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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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5콤소몰 각급 기관 근무; 타르투국립대학교 졸업(1955)
  • 1955–1961에스토니아 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ELKNÜ)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71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시위원회 제1서기
  • 1963–1967에스토니아 SSR 제6기 최고회의 의장
  • 1971–198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0–1988소련 대사, 베네수엘라(1980–1986) 및 니카라과(1986–1988)
  • 1988–199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2–1995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판킨

Борис Дмитриевич Пан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스탄 1931–

쿠데타 이후 붕괴 직전의 외무장관

1991년 8월 21일, 쿠데타 한복판에서 판킨은 체코슬로바키아 TV에 출연했다. 소련 대사 중 유일하게 '야나예프의 치명적 실수'라며 공개 비판하고, 즉각 철회를 촉구한 순간이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신문을 소련 최고의 청년지로 키운 언론인이자, 국가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외교관으로 전환해 8월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공개 비판한 대사였으며,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수립, 미소 군축 협상 개시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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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1.08–11외무장관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이바시코프

Владимир Антонович Ивашк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1932–1994 ↓ 당 해체 1991

해체 직전 공산당의 마지막 부서기장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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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90–1991공산당 부서기장
  • 1991.08고르바초프 사임 뒤 며칠간 서기장 대행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Vytautas Landsbergis

제국에서 걸어 나간 첫 나라를 이끈 음악학자

1990년 3월 11일 밤, 독립 회복법이 반대 없이 가결되자 의장석의 그가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국가라고. 소련에서 걸어 나간 첫 공화국이었고, 크렘린이 받은 첫 탈퇴 통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음악학자로 화가이자 작곡가 추를료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1988년 개혁운동 사유디스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켜 소련에서 이탈을 선언한 첫 공화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제 봉쇄와 1991년 1월의 유혈 진압 시도를 버텨 내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세이마스(국회) 의장과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리투아니아 우파의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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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리투아니아 음악원(현 리투아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 졸업
  • 1978–1990리투아니아 음악원 및 빌뉴스 사범대학 교수
  • 1988–1990사유디스 평의회 의장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2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 (국가원수)
  • 1993–2003조국동맹(보수당) 당수
  • 1996–2000리투아니아 세이마스(국회) 의장
  • 2004–2014유럽의회 의원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볼스키

Аркадий Иванович Воль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932–2006 ○ 백혈병

소련 기계공업을 총괄하고 탈소비에트 자본을 조직한 실무자

1991년 8월 쿠데타 때, 가택연금 중인 고르바초프와 전화 연결에 성공한 볼스키는 쿠데타파가 퍼뜨린 '고르바초프 건강 이상설'이 거짓임을 세상에 알렸다.

중앙위 기계제작부장,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경제 보좌관, 그리고 소련 말기 산업 관료에서 탈소비에트 기업 로비로 이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의 창립자이자 15년간 회장을 맡으며 '붉은 디렉터'들을 조직화된 로비 세력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러시아 시장경제 이행의 조건을 크게 규정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고르바초프와 접촉하여 쿠데타파가 내세운 '건강상 무능'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장(1988~1990)과 체첸 평화협상 부대표(1995)를 지냈으며, 1986년 체르노빌에서 석 달간 산업 대응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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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9ZIL 자동차 공장: 보조 직장 → 주물공장장 → 당위 서기
  • 1969–1983중앙위 기계제작부: 자동차산업 부문장 → 부부장 → 제1부부장
  • 1983–1984안드로포프 서기장 경제 보좌관
  • 1984–1985체르넨코 서기장 경제 보좌관
  • 1985–1990중앙위 기계제작부장
  • 1988–1990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회 위원장
  • 1990–2005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 회장
  • 1991.08–12소련 부총리 (산업·군수복합체 담당)

아벨 게제비치 아간베갼

Абел Гезевич Аганбегян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장개혁 설계사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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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노동·임금 국가위원회에서 경제학자로 근무
  • 1961–1966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섹터장, 33세에 소장
  • 1966–1984IEiOPP 소장, BAM 과학위원회 의장, 『EKO』 창간·편집장
  • 1974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64년 통신회원)
  • 1985–1989고르바초프 경제 고문, 생산력연구위원회 의장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상임위원
  • 1989–2002소련·러시아 정부 산하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
  • 2002–현재국민경제아카데미 경제이론·정책 학과장, 저술 활동 지속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블라소프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Вла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2–2002 ○ 폐암

OMON을 창설하고 옐친에게 패한 마지막 공산당 RSFSR 총리

내무부에서 블라소프를 부르던 별명은 「티샤이시」였다 — 가장 조용한 자. 조직범죄를 방치한다는 비판 속에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부랴티야의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체첸-인구시 공화국과 로스토프 주의 당 제1서기를 지낸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였다. 1986년 1월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특수경찰부대 OMON을 창설했으나, 조직범죄 대응에 소극적이란 비판을 받으며 2년 8개월 만에 바카틴으로 교체되었다. 1988년 10월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으로 옮겼고, 1990년 5월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게 535 대 467로 패배했다.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당 조직의 적응 논리를 체현했으나 결국 양쪽에 밀려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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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5체렘호보 탄광 5호 갱부 감독; 콤소몰 체렘호보 시위원회 선전부장, 제2서기
  • 1955–1961이르쿠츠크 주 콤소몰 제2서기, 제1서기
  • 1961–1965이르쿠츠크 주 지민스키 구당 제1서기; 이르쿠츠크 공업주당 제2서기; 이르쿠츠크 주 집행위 제1부의장
  • 1965–1972야쿠트 주당 서기, 제2서기
  • 1972–1975CPSU 중앙위 감찰원
  • 1975–1984체첸-인구시 공화국 당 제1서기
  • 1984–1986로스토프 주당 제1서기
  • 1986–1988소련 내무장관 (중장, 재임 중 상장 진급)
  • 1988–1990RSFSR 각료회의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1988.9–1990.7)
  • 1990.05RSFSR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 패배 (467:535)
  • 1990–1991CPSU 중앙위 사회경제부장
  • 1994–2002이르쿠츠크 향우회 「바이칼」 회장

당을 모스크바에서 분리해 낸, 독립 리투아니아의 첫 대통령이 된 공산주의자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NATO·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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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리투아니아 SSR 건설자재공업부 장관
  • 1967–1977리투아니아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의장
  • 1977–1987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89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독립 리투아니아공산당(소련공산당에서 분리) 제1서기
  • 1990리투아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3–1998리투아니아 공화국 대통령
  • 2001–2006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스테판 카라페티 포고샨

Ստեփան Կարապետի Պողոսյան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2012 ○ 자연사

붕괴 직전 아르메니아 공산당의 마지막 지도자

1990년 말, 그는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당을 이끌었지만 그 당의 통치 기반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스테판 포고샨은 역사학자 출신의 아르메니아 공산당 정치가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대중매체와 출판 행정을 오래 맡았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진행되던 시기에 당의 국가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90년 말부터 1991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한 뒤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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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8예레반 국립대학교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58–1962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간부, 예레반 시 콤소몰 제1서기
  • 1962–1967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1서기
  • 1967–1970아라라트 지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8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 의장
  • 1988–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산하 정보통신사 사장, 국가출판위원회 의장
  • 1990–1991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아르놀트 바실리예비치 보일루코프

Арнольд Васильевич Войлуков

개혁의 이면을 증언한 소비에트 은행가

그는 1991년 개혁의 발상이 국가보안위원회와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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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금융대학 졸업
  • 1955–1960년대국립은행 지역 기관에서 근무
  • 1960년대–1970년대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 국립은행 현금유통·출납업무 부장
  • 1980년대소련 국립은행 중앙기구 고위 간부
  • 1990–1991소련 국립은행 이사회 부의장
  • 1992–1994러시아 중앙은행 제1부총재

카호르 마흐카모비치 마흐카모프

Қаҳҳор Маҳкамович Маҳкам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타지크 1932–2016 ○ 자연사

소련 말기 타지키스탄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

사임하던 1991년 8월 회의장을 나서며 그는 "나는 떠나지만, 훗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후 정치를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라고 불렀다.

카호르 마흐카모프는 광산 기술자 출신의 타지크 공산당 관료로, 계획경제와 공화국 행정을 오래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민족적 자기의식과 정치적 동요를 키우던 시기에 그는 체제를 개혁하려 했지만 대중의 불신과 민족주의적 압력에 부딪혔다. 1990년 타지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1년 모스크바의 8월 쿠데타를 지지한 뒤 사임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제도적 연속성과 해체기의 정치적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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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슈라브 탄광 기술자로 일하기 시작
  • 1963–1982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각료회의 부의장
  • 1982–1986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85–1991타지키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90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0–1991타지키스탄 초대 대통령
  • 2000–2016타지키스탄 국민회의 종신 의원

올레크 드미트리예비치 바클라노프

Олег Дмитриевич Бакл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2–2021 ○ 자연사

우주산업을 이끈 최후의 GKChP 생존자

1991년, 나는 우리 국가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하리코프 계기공장의 조립공으로 출발해 소련 로켓·우주산업 전체를 총괄하는 일반기계공업부 장관까지 오른 기술관료로, 에네르기야-부란 왕복우주선 계획을 진두지휘하며 소련 우주개발의 마지막 대역사를 이끌었다. 1988년 CPSU 중앙위원회 국방산업 담당 서기로 당의 군수정책을 주관했고, 1991년 8월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8인 중 한 명으로 소련 붕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 후 1년 반 동안 수감되었다. 2021년 사망 당시 GKChP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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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2하리코프 계기공장에서 조립공·무선기기 조정사로 근무
  • 1963–1972하리코프 계기공장 주임 엔지니어
  • 1972–1975하리코프 계기공장 공장장
  • 1975–1976생산연합 '모놀리트' 총괄책임자
  • 1976–1981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차관
  • 1981–1983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제1차관
  • 1983–1988소련 일반기계공업부 장관
  • 1988–1991CPSU 중앙위원회 국방산업 담당 서기

비톨트 파블로비치 포킨

Вітольд Павлович Фокін

소련 경제관료에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첫 총리로

소련 해체 협정에 서명했던 포킨은 2016년 인터뷰에서 '남자로서 부끄럽지만 크림반도가 병합됐을 때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고 고백했다.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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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3루한스크 지역 탄광 기술자·관리자
  • 1963–1971돈바스 무연탄 산업 관리자
  • 1971–1987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부서장·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1–1992우크라이나 초대 총리
  • 1991벨로베시 협정 우크라이나 서명자
  • 2020우크라이나 삼자접촉그룹 대표단 제1부대표

콘스탄틴 알렉세예비치 코체토프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еевич Коче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32–

트빌리시에서 정치국 승인 없이 무력 사용을 강행한 국방차관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 1989년 4월 8일,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서

수보로프 학교 출신의 직업군인으로, 1988년 육군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1월 국방부 제1차관이 되었다. 1989년 4월 트빌리시로 파견되어 그루지야 국방평의회에 '모스크바는 위기의 규모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결정은 현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압박해 정치국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길을 텄다. 이 진압으로 21명이 사망했고, 이후 문서 연구는 코체토프가 야조프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으며 고르바초프에게는 사전 보고가 없었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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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리보프 보병학교 졸업, 독일 주둔 소련군에서 소대장·중대장
  • 196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북캅카스 군관구 연대장
  • 1973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24 '철의' 사단장
  • 1977–1979제7근위군 사령관
  • 1982–1985남부군집단(헝가리) 사령관
  • 1985–1988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88–1989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89–1991소련 국방부 제1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