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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쿠즈네초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0 ✕ 처형

전후 당 서기국의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되다

1950년 9월 29일 법정에서 자백을 거부하며: "나는 볼셰비키이며, 내가 받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할 것이다."

보로비치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당 간부로, 콤소몰 조직가에서 출발해 대숙청기에 레닌그라드 제2서기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특별 삼인조의 일원으로 스탈린적 탄압에 가담한 책임이 있고,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는 도시 방어를 조직했다. 전후에는 중앙위 서기 겸 간부국장으로 즈다노프와 함께 스탈린 사후 승계 구도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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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2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 지역 콤소몰 조직가
  • 1932–1937레닌그라드 시 당 기구에서 승진, 스몰니·제르진스키 구당 서기
  • 1937–1938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 대숙청기 즈다노프의 부관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방어위원회 부의장, 방어시설·식량 위원회 주재, 전선군사평의회 위원
  • 1945–1946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즈다노프의 후임
  • 1946–1949중앙위 서기·간부국장·조직국 위원 — 전후 서기국의 실질적 제2인자로 국가보안기관 감독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복권)

표트르 게오르기예비치 라주틴

Пётр Георгиевич Лазут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0 ✕ 처형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처형된 6인 중 하나

1949년 8월 13일, 라주틴은 동료 레닌그라드 지도부와 함께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되어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늘날 카자흐스탄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을 시작했다. 콤소몰 간부를 거쳐 1937년 레닌그라드로 옮겼고, 포위전 당시 무역·공업 담당 시당 서기로 도시 보급을 책임졌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장으로 재임하며 전후 도시 재건 계획, 텔레비전 방송 재개, 아브로라 순양함 기념화를 진두지휘했다. 1949년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동료 지도부와 함께 체포되어,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인 6인 중 하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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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철도 정비공으로 노동
  • 1925–1931콤소몰 서기·노동부장 등 카자흐 자치공화국 콤소몰·교육인민위원부 간부
  • 1931–1937레닌그라드 냉동공업대학 수학; 프룬제 구당 위원회 지도원
  • 1937–1941레닌그라드 시당 무역부장, 식품·무역부 부장
  • 1941–1944레닌그라드 시당 무역·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도시 보급 책임
  • 1944–1946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제1부의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시 집행위원회 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8월 13일 체포, 1950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일 처형; 1954년 복권

레프 예멜리야노비치 블로지미르스키

Лев Емельянович Влодзимир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3 ✕ 처형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

수감자들은 그를 '돌 손님(카멘니 고스티)'이라 불렀다. 낮고 냉담한 목소리, 굳은 표정으로 심문실에 들어서는 그 앞에서 누구도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베리야의 최측근 수사 책임자로, 스탈린 시대 말기 가장 민감한 정치 사건을 도맡았다. 1939년 NKVD 수사부장, 1943년 NK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으로 적군 공군 지휘부 사건과 메이예르홀트 심문을 지휘했고, 가혹한 심문으로 악명 높았다. 1946년 실각해 6년간 대외재산총국 서류직으로 전락했으며, 1953년 베리야에 의해 MVD 특별수사부장으로 복귀해 의사들의 음모 사건 반전을 맡았다. 베리야 체포 직후 기소되어 그해 12월 총살됐고, 2000년 사후 복권도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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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39NKVD 국가보안총국 수사부 부부장, 이어 부장
  • 1940–1941국가보안총국 제3부장, 수사 부부장
  • 1941–1943NKVD 수사부장
  • 1943–1946NKGB·M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
  • 1946–1947고리키주 MGB 관리국장, 이어 예비역
  • 1947–1953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 부장
  • 1953MVD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에사울로프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Эса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4 ○ 자연사

예조프를 심문한 수사관: 기구가 제 주인을 삼킬 때 조서를 쓴 손

1939년, 어제까지 온 나라가 이름만으로 떨던 '피의 난쟁이' 예조프가 심문 조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조서를 쓰는 손은 에사울로프의 것이었다.

베리야의 수사선에서 몰락한 예조프의 자백을 받아내며 두각을 드러낸 NKVD 수사관. 뱌트카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0세에 고아가 되어 일터로 나갔고, 로도스와 함께 베리야의 '특별 임무'를 수행했으며, MGB 특별협의회 서기국장까지 올랐으나 1954년 자연사하여 흐루쇼프 시기 심판대에 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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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뱌트카·고리키 지역 GPU·NKVD 지구기관 요원·지구장
  • 1937–1939GUGB 중앙학교 수료, 비밀정치·방첩 부서 작전요원
  • 1939–1940NKVD 수사부 선임수사관·부부장 — 예조프 심문 담당
  • 1940–1941NKVD 국가보안총국(GUGB) 수사부장
  • 1941–1944NKVD 제3국 수사부장, NKGB 제2국 11과장
  • 1944–1947벨로루시 SSR 국가보안 부인민위원(후 차관) — 1945년 소장 진급
  • 1947–1952소련 MGB 특별협의회 서기국장, 1952년 1월 예편

니콜라이 막시모비치 루하제

Николай Максимович Руха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5–1955 ✕ 처형

밍그렐리아 사건을 몰아붙이다 스스로 무너진 자

1930년대 말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심문 중 구타를 일상화하며 공공연히 말했다: "때리지 않는 자야말로 인민의 적이다!"

그루지야 보안기관에서 성장한 루하제는 1937년 압하지야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간이 수사' 방식의 대규모 체포를 지휘했다. 전쟁기에는 자캅카스 전선 특별부장과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를 거쳐, 1948년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베리야 파벌을 겨냥한 조작 사건인 '밍그렐리아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수개월 전인 1952년 11월 스스로 체포되었고, 1955년 역설적으로 베리야 집단 일원으로 재판받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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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압하지야 가그라 지구 NKVD 부장
  • 1939–1941그루지야 NKVD 수사과장
  • 1941–1943그루지야 부내무인민위원, 자캅카스전선 특별부장
  • 1943–1945자캅카스전선·군관구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
  • 1948–1952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
  • 1952–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사비츠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авиц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즈베키스탄 1905–1955 ✕ 처형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 1955년의 사형수

트빌리시 처형장에서 사비츠키와 NKVD 간부들은 '사슬에 묶인 개처럼 죄수들에게 달려들어 권총 손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 1954년 목격자 증언.

타슈켄트 출신의 NKVD 장교로, 차르 군대 대령이자 백위대 조직가의 아들이었다. 1931년 그루지야 NKVD에 들어가 보그단 코불로프의 후원 아래 빠르게 승진했으며, 대숙청기에는 제4부에서 수감자 고문과 사건 조작에 직접 가담했다. 이후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로 전속되어 NKGB 서기국, 대외재산관리국을 거치며 베리야 파벌의 핵심 실무자로 활동했다. 대령 계급에 그쳤으나 1953년 베리야 몰락 직후 체포되어 2년 뒤 총살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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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9그루지야 NKVD 제4부 요원, 과장, 부부장
  • 1941–1943NKVD 제4국 과 부책임자
  • 1943–1945보그단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
  • 1945–1953NKGB 서기국 부국장, 이후 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 보좌
  • 1953내무 제1부장관 보그단 코불로프의 보좌관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보리스 로도스

Борис Вениаминович Родо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56 ✕ 처형

대숙청의 수석 심문관: 정치국 위원부터 작가까지 굴복시킨 NKVD 수사부 부국장

흐루쇼프,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1956년 2월 25일): "최근 우리는 수사관 로도스를 심문했다... 그는 보잘것없는 인간, 닭의 시야를 가진, 도덕적으로 말 그대로 타락한 자다. 바로 이런 인간이 당의 저명한 활동가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대숙청 시기 NKVD 수사부 부국장으로 정치국 위원 코시오르·추바르 등 고위 인사들을 직접 고문해 허위자백을 받아낸 국가보안 대령. 흐루쇼프의 1956년 비밀연설에서 실명 규탄된 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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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베리슬라프 지구 OGPU 서기
  • 1932즈나멘스크 지구 OGPU 보좌전권대표
  • 1933–1936오데사 OGPU/NKVD 제4부에서 보좌전권대표, 전권대표, 작전전권대표, 과장보좌 역임
  • 1937모스크바 GUGB NKVD 제4부(비밀정치부) 연수 후 중앙 기관에 잔류
  • 1938–1939GUGB NKVD 제4부 제6과장 보좌 → NKVD 수사부 부장 보좌 → GUGB NKVD 수사부 부국장
  • 1940폴란드 진주 작전 중 리보프 파견: NKVD 작전체키스트반에서 폴란드인 체포·처형 결정 서류 작성
  • 1943–1946NKGB 소련 수사부 부국장 (국가보안 대령)
  • 1947–1952크림주 UMGB 수사부장. 1952년 MGB 해고, 심페로폴 전신국 민방위 참모장으로 좌천

바실리 세묘노비치 그로스만

Василий Семёнович Гроссман
소련 러시아 1905–1964 ○ 자연사

전쟁의 현장과 전체주의의 거울을 쓴 작가

《삶과 운명》 원고 압수는 해빙기의 허용 범위가 어디에서 멈췄는지 보여 준다.

제2차 세계대전기 《붉은 별》의 종군기자로 스탈린그라드·베를린 전선을 취재했다. 전후 소설 《삶과 운명》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폭력을 나란히 바라보았고, 원고는 1961년 당국에 압수되어 해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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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붉은 별》 종군기자
  • 1959–1960소설 《삶과 운명》 완성
  • 1961원고와 사본을 당국이 압수
  • 1980《삶과 운명》 해외 첫 출간

파벨 미하일로비치 제르노프

Павел Михайлович Зер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64 ○ 심장질환

핵무기 설계국 KB-11의 초대 소장이자 소련 원자폭탄의 행정적 기반을 닦은 군수산업 조직자

베리야가 원자폭탄 기한을 못 맞춘다고 압박하자, 제르노프는 "과학자들이 게으른 게 아니라 문제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에서 내연기관을 전공한 공학자 출신 군수산업 조직가. 1946년 4월 KB-11(아르자마스-16)의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폐쇄도시 건설과 설계국 운영의 행정적 기반을 닦았고, 수석설계자 율리 하리톤과 함께 1949년 첫 소련 원자폭탄 RDS-1을 성공시켰다. 전쟁 중에는 전차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공장 대피와 생산 재개를 지휘했고, 이후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으로 핵무기 산업 전반을 관장하며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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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콜추긴스키 공장 노동자, 콤소몰 구위원회 서기
  • 1929–1937바우만 공과대학 졸업, 기술과학 후보학위 취득
  • 1938–1940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전차공업 부인민위원
  • 1940–1942전연방 표준위원회 의장
  • 1941–1945전차공업 부인민위원으로 공장 대피·생산 재개 지휘
  • 1946–1951KB-11(아르자마스-16) 초대 소장
  • 1951–1964제1총국 부서장, 중형기계공업부 차관

아르툠 이바노비치 미코얀

Артём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905–1970 ○ 뇌졸중

미그(MiG)의 아버지: '한순간'에 하늘을 지배한 전투기 설계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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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8로스토프·모스크바 «디나모» 공장 선반공
  • 1931–1937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경비행기 «옥탸브료노크» 설계
  • 1939–1941OKB-155(MiG) 창설, MiG-1·MiG-3 전투기 개발
  • 1946–1953영국서 롤스로이스 닌 도입 → MiG-15; 한국전쟁 제트공중전 주도
  • 1953–1964MiG-17·MiG-19·MiG-21 — 초음속 전투기 시대로 이행
  • 1956–1968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6회, 레닌상, 소련과학원 정회원
  • 1964–1970MiG-23·MiG-25·MiG-27 — 가변익·고속요격기 세대 설계

알렉산드르 세묘노비치 파뉴시킨

Александр Семёнович Панюш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74 ○ 자연사

중국·미국 주재 대사로 정보를 지휘한 소련 대외정보 책임자

1941년 5월, 충칭 주재 파뉴시킨 휘하 정보거점이 독일 무관에게서 입수한 독일 최고사령부의 대소 침공 작전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는 개전 약 한 달 반 전에 전달된, 침공 주공 방향에 관한 정보였다.

1905년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 붉은군대에 자원입대했고, 1927년 당에 입당한 뒤 극동 국경부대에서 복무했다. 1938년 NKVD에 배치되어 제3특별부장을 지냈으며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충칭 주재 대사 겸 정보총책으로 최대 12개 정보거점을 지휘했고, 1941년 5월 독일 무관에게서 입수한 대소 침공 작전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 워싱턴 주재 대사 겸 정보총책을 지냈고, 1953년 내무부 대외정보국장, 1954년부터 1955년까지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외정보를 총괄했다. 197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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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2붉은군대 자원입대, 말라리아로 제대 후 사마라 철도에서 수리공으로 일함
  • 1927–1935극동 국경부대 복무, 초소장 보좌에서 국경구역 사령관까지 진급
  • 1935–193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NKVD 배치
  • 1938–1939NKVD 제3특별부장 (1938년 12월 23일 임명, 예조프 체포에 참여)
  • 1939–1944주중 소련 전권대표 겸 정보총책 (충칭)
  • 1944–1947중앙위원회 국제정보부 제1부장
  • 1947각료회의 정보위원회 주임비서
  • 1947–1952주미 소련 대사 겸 정보총책 (워싱턴)
  • 1952–1953주중 소련 대사 (베이징)
  • 1953–1954내무부 제2총국(대외정보) 국장
  • 1954–1955K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 (1954년 3월 17일~1955년 6월 23일)
  • 1955–1959중앙위원회 해외여행위원회 위원장
  • 1959–1973중앙위원회 외교·대외경제(이후 대외간부) 부장, 1973년 3월까지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딤체프

Александр Ильич Родимц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5–1977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 마마예프 쿠르간을 사수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파블리토는 망설임 없이 포화 속으로 뛰어들어 선두 전차 장갑 위로 올라타 해치를 두드리며 방향을 바꾸라고 외쳤다. 그가 지휘소로 돌아왔을 때, 외투에는 총알과 파편 구멍이 열 개도 넘었지만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구두 수선공 도제로 일하던 로딤체프는 1927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1936년 자원하여 스페인 내전에 '파블리토 대위'라는 가명으로 참전, 공화파 편에서 마드리드 방어전과 하라마·과달라하라 전투에서 뛰어난 용맹을 보여 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2년 9월 13근위소총사단을 이끌고 맹렬한 포화 속에서 볼가 강을 도하, 스탈린그라드 중심부 마마예프 쿠르간을 탈환하여 전세의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이후 32근위소총군단장으로 쿠르스크·비스와-오데르·베를린·프라하 작전을 지휘하며 두 번째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여러 군관구에서 지휘관을 역임하고 회고록 여러 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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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29OGPU 호송대대 적군 병사
  • 1929–193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통합군사학교 생도 (기병)
  • 1932–193661기병연대 소대장·중대장
  • 1936–1937스페인 내전 참전 — '파블리토 대위' (공화파 군사고문)
  • 1937–193861기병연대장
  • 1938–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청강
  • 1939–194036기병사단 부사단장 (서부 벨라루스 진주·겨울전쟁)
  • 1941제5공수여단장 (키예프 방어전)
  • 1941–194287소총사단장 → 제13근위소총사단장
  • 1942–1943제13근위소총사단장 — 스탈린그라드 전투 · 마마예프 쿠르간
  • 1943–1945제32근위소총군단장 (쿠르스크·드네프르·베를린·프라하)
  • 1947–1951제11근위소총군단장
  • 1951–1953동시베리아 군관구 부사령관
  • 1953–1956알바니아 주재 수석 군사고문 겸 무관
  • 1956–1960북부군관구 제1부사령관
  • 1960–1966제1근위군 사령관 (키예프 군관구)
  • 1966–1977국방부 감찰총감단 군사고문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카프타노프

Сергей Васильевич Кафта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5–1978 ○ 자연사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스탈린에게 건의한 GKO 과학 전권위원

회의에서 많은 부처가 반대했지만, 스탈린은 집무실을 서성인 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프타노프의 회고.

소련 고등교육과 과학행정을 관장한 국가관리로, 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으로서 이오페와 함께 1942년 스탈린에게 원자폭탄 연구 재개를 건의해 9월 28일 결의를 이끌어냈다. 전쟁 전에는 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소비에트 고등교육 체계를 총괄했고, 전후 초대 고등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50년대에는 문화부 제1차관과 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을 거쳐 모교인 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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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돈소다 공장 노동자, 콤소몰 조직원
  • 1931–1937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연구원·강사, 카르포프 연구소 당비서
  • 1937–1946전연방 고등교육위원회(VKVSh) 의장
  • 1941–1945국방위원회(GKO) 과학 담당 전권위원
  • 1946–1951소련 고등교육부 장관
  • 1953–1959소련 문화부 제1차관
  • 1959–1962방송·텔레비전 국가위원회 의장
  • 1962–1973멘델레예프 화학기술대학 총장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 네메노프

Леонид Михайлович Немен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인 러시아계 1905–1980 ○ 자연사

전쟁 속에서 원자력 가속기를 세운 물리학자

“우리는 비행기로 호이노야까지 간 뒤 어둠을 기다렸다가 라도가호 상공을 저공비행했다.”

레오니트 네메노프는 핵물리학과 입자가속기 기술을 연구한 소비에트 물리학자였다. 그는 쿠르차토프의 지시로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들어가 피지테흐 사이클로트론의 핵심 부품을 회수했고, 실험실 2에서 1944년 가동한 사이클로트론 건설을 이끌었다. 이 장치는 최초의 미량 플루토늄을 얻어 화학적 분석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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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졸업
  • 1929–1939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 1939–1944대형 사이클로트론 설계와 건설 참여
  • 1943–1944실험실 2 사이클로트론 건설 책임
  • 1949공학박사 학위 취득
  • 1962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교수
  • 1968–1980가속기 물리기술·전파기술 측정 전연방연구소 소장
  • 1980모스크바에서 사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리프시츠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ифшиц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3 ○ 자연사

절대적 진리와 미를 옹호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건설자

「우리 시대의 유행어와 달리 절대적 아름다움은 절대적 진리만큼이나 존재한다」 — 1927년 브후테인 학보

멜리토폴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브후테마스에서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후 마르크스 미학의 체계적 재구성에 평생을 바쳤다. 1930년대 루카치와 함께 '저속사회학'을 논박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예술론을 정립했고,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과 『레닌 예술론』이라는 기념비적 선집을 편찬했다. 전후에는 반세계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었고, 1960년대 모더니즘 비판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말년에는 '존재인식론' 개념으로 독자적 철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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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5브후테마스 회화 수학, 아방가르드와 결별하고 리얼리즘·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25–1929브후테마스 변증법적 유물론 강사; '바그라먄 사건'으로 축출
  • 1930–1933IMEL 선임연구원; 루카치와 공동 작업 시작
  • 1933–1938『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1933/37), 『레닌 예술론』(1938) 편찬; 저속사회학 논박
  • 1938–1941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학술부부장, IFLI 예술론 학과장
  • 1941–1946핀스크 소함대 복무, 부상·포로 탈출; 해군 문예교관, 적성훈장 수훈
  • 1954–1968『샤기냔의 일기』(1954)로 재등장; 『왜 나는 모더니스트가 아닌가』(1964), 『추함의 위기』(1968)
  • 1973–1983철학박사(1973), 예술아카데미 정회원(1975); 일리옌코프와 '이상적인 것' 논쟁

이반 이바노비치 일리초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Ильич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3 ○ 자연사

스탈린에게 직통으로 보고한 전시 GRU 수장, 전략정보로 소련의 승리를 뒷받침한 정찰총국장

한밤 3시, 스탈린의 직통 전화가 울렸다. 손자들이 책상 위 연필을 모두 가져가 버린 탓에, 그는 몇 분 동안 이어진 스탈린의 긴급 지시를 오로지 기억력에만 의존해 받아 적어야 했다.

소련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1942년 8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참모본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베를린 공세에 이르는 모든 주요 작전의 정보 지원을 총괄했다. 농민 출신으로 콤소몰과 군사정치학교를 거쳐 1938년 정보기관에 투입되었고,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된 이력을 지닌 채 33세에 스탈린의 직접 면접을 받았다. GRU 수장으로서 베리야를 거치지 않고 스탈린에게 직통 보고했으며, 해독반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 가능성 발견(1942)과 클라우스 푹스를 통한 원자폭탄 정보 입수 등 전략정보 성과를 거두었다. 전후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주오스트리아·주덴마크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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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칼루가·스몰렌스크주 콤소몰 간부
  • 1929–1938적군 정치일꾼, 레닌 군사정치학교 졸업
  • 1938–1942적군 정보국 정치부장·정치담당 부국장
  • 1942–1945소련 국방인민위원부 정보총국(GRU) 국장
  • 1945–1947GRU 부국장
  • 1948–1953주독 소련통제위원회 부정치고문 → 주동독 외교사절단장
  • 1953–1956주오스트리아 소련 전권대사
  • 1956–1966소련 외무부 제3유럽국장
  • 1966–1968주덴마크 소련 대사
  • 1968–1975외무부 중앙기관 근무 후 퇴직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Шолох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4 ○ 자연사

『고요한 돈강』을 쓴 러시아·소비에트 소설가

“우리 각자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쓴다. 그리고 우리의 심장은 당과 인민의 것이다.” 소비에트 작가 제2차 전연합 대회 연설(1954)에서.

러시아 제국 돈 지방의 비코사크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소설가로, 1925년부터 1940년까지 네 권으로 완성한 『고요한 돈강』은 혁명과 내전이 코사크 마을을 찢어 놓은 10여 년을 그려 냈다. 1932년 콜호스화의 참상을 스탈린에게 서한으로 고발해 곡물 지원과 조사를 이끌어 냈고, 1937~1938년 대숙청기에도 탄원으로 지역 간부들을 구해 냈다. 충성스러운 당원으로서 1932년 입당해 1937년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이 되었으나, 1966년 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지식인들과 갈라섰다. 196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1984년 뵤셴스카야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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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0『고요한 돈강』 연재와 완간
  • 1933콜호스화의 참상을 스탈린에게 서한으로 직접 보고
  • 1965노벨문학상 수상
  • 1966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 옹호 발언으로 지식인들과 결별

표도르 타라소비치 구세프

Фёдор Тарасович Гус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7 ○ 자연사

전시 연합국 정상회담을 누빈 소련 외교관, 몰로토프의 대리인

처칠이 구세프에 대해 묻자, 주소 영국대사 클라크 커는 이렇게 답했다: '무례하고, 경험 없고, 교양 없는 자입니다.'

표도르 구세프는 스탈린 시대 외교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대영국 대사(1943~1946)를 지내며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모두 참가했다. 레닌그라드 법학을 전공하고 1935년 외무인민위원부에 입부한 그는, 캐나다 공사(1942~1943)를 거쳐 전시 동맹 외교의 핵심 실무자로 부상했다. 영국 측은 그를 '무뚝뚝하고 경험 없는 인물'로 평가했지만,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쟁 말기 연합국과의 협상에서 요구를 밀어붙일 강경한 외교관을 원했다. 종전 후 외무차관(1946~1952)을 지내며 냉전 초기 외교 정책에 관여했고, 1956~1962년 스웨덴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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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외무인민위원부 입부
  • 1938–1939외무인민위원부 제3서방과장
  • 1941–1942외무인민위원부 제2유럽과장 (영국·자치령 담당)
  • 1942–1943주캐나다 소련 공사
  • 1943–1946주영국 소련 대사
  • 1946–1952소련 외무차관
  • 1956–1962주스웨덴 소련 대사
  • 1975은퇴

이사크 모이세예비치 잘츠만

Исаак Моисеевич Зальцм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88 ○ 자연사

'탱코그라드'를 세운 전차왕

1942년 2월 새벽 4시, 스탈린이 전화를 걸었다. 'T-34는 깊은 눈밭을 제비처럼 난다. 니즈니 타길로 가서 당장 생산하라.' 33일 만에 개조된 공장에서 T-34가 쏟아져 나왔다.

유대인 재단사 아들로 오데사 공업대학 졸업 후 키로프 공장에 입사, 33세에 공장장이 되었다. KV 중전차 양산을 주도했고 봉쇄 초기 포격 속에서도 생산을 이어갔다. 1941년 공장을 첼랴빈스크로 대피시켜 '탱코그라드'를 건설했으며, 1942년 전차공업 인민위원으로 전국 전차 생산을 총괄했다. 1943년 키로프 공장장으로 복귀해 IS-2를 투입, 전쟁 기간 18,0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생산했다. 1949년 비리와 '레닌그라드 사건' 연루로 당 제명되었으나 체포는 면했고, 평범한 공장 직을 전전하다 1986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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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33제당공장 노동자 → 콤소몰 → 오데사 공업대학 졸업
  • 1933–1938키로프 공장 기술자, 생산직을 거쳐 승진
  • 1938–1941키로프 공장장, KV 중전차 양산 체제 구축
  • 1941–1942공장을 첼랴빈스크로 대피, '탱코그라드' 건설; 전차공업 부인민위원
  • 1942–1943소련 전차공업 인민위원, 전국 전차 생산 총괄
  • 1943–1949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장 복귀, IS-2 중전차 양산
  • 1949비리·'레닌그라드 사건' 연루로 당 제명 및 전직 해임
  • 1955–1986당 복권, 무롬·오룔·레닌그라드 공장 현장직 후 은퇴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페고프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Пег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스탈린 말기 서기국에서 외교로 밀려난 간부 책임자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중 페고프는 인도 외무부를 찾아가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 함대는 이미 인도양에 있으며, 소련은 제7함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탈린 집권 말년에 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 후보위원까지 올랐다가 흐루쇼프 집권 후 외교 일선으로 옮겨간 소련의 당·국가 간부이다. 1952년 10월 스탈린 부재 시 말렌코프·수슬로프와 함께 서기국 회의를 번갈아 주재하는 핵심 3인에 들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 상임위와 서기직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이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로 국가기구 실무를 총괄하다 1956년 이란 대사를 시작으로 알제리·인도 대사를 거쳐 외무차관으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 외무부에 미 제7함대 개입을 막겠다고 공개 약속해 소련 해군의 억지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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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극동지역당위원회 제3서기, 이후 프리모르스키 조직국 제1서기
  • 1939–1947프리모르스키 주당위원회 제1서기 (1940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시당위 제1서기 겸임)
  • 1941–1945극동전선·태평양함대 군사평의회 위원
  • 1947–1952중앙위 당기관검증국 부국장 → 경공업부장 → 당·노조·콤소몰 기관 담당 부장 → 간부선발배치부장
  • 1952–1953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후보위원
  • 1953–195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56–1973주이란 대사 (1956–63) → 주알제리 대사 (1964–67) → 주인도 대사 (1967–73)
  • 1973–1982외무차관 → 중앙위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크루슈코프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Круж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스탈린 전기를 공동 집필하고 즈다노프 노선을 집행한 후 성 스캔들로 몰락한 이념 관료

흐루쇼프가 '검투사 사건'에서 외친 말: "알렉산드로프는 젊으니 이해하겠다. 그런데 너는 그 나이에 거길 왜 갔느냐?" — 크루슈코프와 이념 관료들은 이 한 방에 모조리 직위에서 사라졌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념 관료. 러시아 고전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1944~1949)으로서 스탈린의 공식 단평전(1947)을 공동 집필하고 마르크스주의 정전 편찬을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장(1950~1953)과 선전선동부장(1953~1955)을 역임하며 후기 스탈린 시기 문화 통제와 즈다노프슈치나 노선의 집행자로 활동했다. 1955년 이른바 '검투사 사건'으로 불리는 성 스캔들에 연루되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었고, 우랄 지방으로 좌천된 후 학계로 복귀하여 소련 예술사연구소장(1961~1973)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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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크룹스카야 공산주의 교육 아카데미 졸업
  • 1933공산주의 사회과학 교원대학 철학부 대학원 수료
  • 1940교수 학위 취득
  • 1941–1942대외정책선전국 위원
  • 1942–1943소비에트 정보국 위원
  • 1943–1944잡지 『전쟁과 노동계급』 부편집장
  • 1944–1949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
  • 1947스탈린 공식 단평전 공동 집필
  • 1949–1950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제1부부장
  • 1950–1953중앙위 문학예술부장
  • 1950철학 박사학위 논문 방어
  • 1952–1956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53–1955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55–1961우랄 국립대 교수·『우랄 노동자』 편집장
  • 1961–1973소련 문화부 예술사연구소장

레오니트 로마노비치 크바스니코프

Леонид Романович Квас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05–1993 ○ 자연사

원자폭탄을 훔친 과학자-첩보원

"전쟁 전 정보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내가 과학기술정보과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엔 세 명뿐이었다. 모두 초짜였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 세계에 우리 요원은 고작 5~6명이었다."

화학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정보장교로, 과학기술 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940년 서방 과학저널에서 핵물리학 논문이 사라진 것을 감지해 소련 외국정보부 최초의 원자력 첩보 지령을 기안했고, 뉴욕에서 클라우스 푹스·줄리어스 로젠버그 등 맨해튼 계획 침투 공작망을 지휘해 쿠르차토프의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단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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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NKVD 5부(외국) 10과(미국) 선임작전장교
  • 1939NKVD 5부 16과(과학기술정보) 부과장
  • 1940NKVD/NKGB 과학기술정보과장
  • 1943뉴욕 NKVD/NKGB 부주재관 (과학기술정보)
  • 1945NKGB 1총국 11부 부부장
  • 1947정보위원회(KI) 5총국 4부장
  • 1954KGB 1총국 10부장
  • 1963KGB 1총국장 자문그룹 선임고문
  • 1966은퇴

아마야크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Амаяк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그루지야 1906–1955 ✕ 처형

나치의 역정보를 모스크바로 흘려보낸 베를린 레지덴트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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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가그라 시 NKVD 부장, 이어 압하지야 자치공화국 NKVD
  • 1938–1939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 1939–1941베를린 주재 대사관 참사관, NKVD 합법 레지덴트
  • 1941–1945우즈베크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내무인민위원
  • 1945–1951포로·억류자 관리총국 부국장, 이어 제1부국장
  • 1951–1953포로관리국장 겸 굴라크 제1부수장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알렉산드르 사모일로비치 하잔

Александр Самойлович Хаз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6–1955 ✕ 처형

1938년 풀려나 1955년 총살된 수사관

1937년, 하잔은 17세기 그루지야의 민족 영웅 기오르기 사아카제에 대해 '연계를 파악하고 체포하라'는 지령과 함께 수사 파일을 개설했다. 수감자가 그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오데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33년 OGPU 고등학교에서 퇴교당한 뒤 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SPO) 수사관이 되어 베리야-고글리제 체제 아래 사건 조작과 고문을 일삼았다. 대숙청기에는 동료까지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었고, 1938년 체포됐다가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돼 전역 처리에 그쳤다. 전쟁기 NKVD 중앙기구에서 복무했으며, 1948년에는 역설적이게도 『소비에트 인간의 도덕적 모습』을 출간했다. 1955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트빌리시에서 재판받고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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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3오데사 GPU 관구부 요원, OGPU 고등학교 수학
  • 1933–1937그루지야 NKVD 요원, 이어 과장
  • 1937–1938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 제1과장 겸 부부장
  • 1938체포되었다가 두 달 뒤 석방, 전역
  • 1942–1945NKVD 중앙기구 장교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