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아나키스트 사상가이자 바이에른 혁명 정부의 교육 담당자로, 1919년 진압군에 살해되었다.
국가는 사회적 관계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때 국가는 다른 사회적 관계로 대체된다.
란다우어는 국가를 단순히 전복할 권력기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보고, 자발적 공동체를 만들어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08년 사회주의자 동맹을 세워 협동조합과 공동체를 통한 사회주의 실천을 모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으며, 카를 아이스너의 요청으로 1918년 뮌헨에 와 혁명 정부를 지원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에 참여해 계몽·공교육 담당 인민위원을 맡았고, 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5월 2일 스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살해되었다.
『골로스 트루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합법화하면… 국가와 인민의 삶을 위에서부터 운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반대를 철권으로 분쇄할 권위주의적 정치·국가 기구를 발전시킬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이자 마흐놉시치나의 지도적 이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골로스 트루다』를 편집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했으며,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아나키스트 통합 이론을 발전시켜 공산주의·개인주의·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들의 협력을 주창했다.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1917–1921년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결정판인 『미지의 혁명』을 저술했으며, 동지 마흐노가 추진한 플랫폼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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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 중퇴, 사회혁명당 입당, 노동자 학습 모임 조직
1905피의 일요일 행진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참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07오흐라나에 체포, 시베리아 유배; 탈출하여 프랑스 망명
1911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 전향, 파리에서 '자유 공산주의자 형제단' 가입
1915–1916반전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추적 피해 미국 도피; 뉴욕에서 『골로스 트루다』 편집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골로스 트루다』를 주요 아나코생디칼리즘 기관지로 재창간
1918–1920우크라이나 나바트 연합 공동 창설;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체카에 두 차례 체포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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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군복을 입는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 행동이 내 성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벽돌공으로 CNT 건설노조를 이끌다 내전 직전 투옥되었고, 반란 발발과 함께 풀려나 과달라하라·쿠엥카에서 봉기를 진압하는 종대를 조직했다. 제14사단을 거쳐 제4군단장이 된 그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격퇴하며 공화국 진영에서 손꼽힌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되었다. 1939년 3월 네그린 정부의 공산당 의존에 반발해 카사도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공산군이 마드리드를 장악해 가던 순간 메라의 제4군단 예비대가 시내로 진입해 3일 만에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전쟁의 종결 경로를 결정지었다.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1936년 11월 장관직을 수락했다. 정부 참여를 둘러싼 에마 골드만과의 논쟁은 같은 혁명을 지지하는 아나키스트들 사이에도 전략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이자 작가. CNT 계열 활동가로서 1936년 11월부터 1937년 5월까지 공화국 정부의 보건·공공부조 장관을 지냈다. 전쟁 중 의료와 구호 정책을 추진했지만, 국가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의 원칙과 장관직 수행 사이의 긴장은 운동 내부의 논쟁을 낳았다. 에마 골드만과의 서신은 반파시즘 전쟁과 사회혁명의 관계를 둘러싼 이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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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열다섯 살에 첫 단편소설 『비극의 시간』을 발표하며 집필 활동 시작
1927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에 가담
1931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 CNT에 가입, 연설가로 두각을 나타냄
19367월 쿠데타 이후 FAI 반도위원회와 CNT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193611월 공화국 정부의 보건·사회부조 장관으로 임명
19375월 바르셀로나 5월 사건 뒤 내각 총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남
1939프랑스로 망명, 이후 툴루즈를 거점으로 망명 CNT 재건과 아나키스트 언론 활동을 이어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