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동료가 거리의 총격 때문에 10분 지각했다고 설명하자, 파블로프가 외쳤다: '혁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험실에서 할 실험이 있는데!'
소화생리학 연구로 1904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개 실험을 통해 조건반사(고전적 조건형성)를 발견하여 현대 행동심리학과 신경과학의 토대를 놓은 러시아·소비에트 생리학자. 레닌의 찬사와 소비에트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1927년 스탈린에게 지식인 탄압에 대해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고 1934년 키로프 암살 후에는 대숙청을 몰로토프에게 항의했다. 그의 고등신경활동에 관한 유물론적 생리학은 사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정설로 교조화되어, 그 자신의 치열한 독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파블로프 학설' 국가 정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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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87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자연과학 후보 학위 취득
1875–1879제국의과외과학원 수학, 금메달로 졸업
1884–1886독일 라이프치히·브레슬라우에서 카를 루트비히·루돌프 하이덴하인 밑에서 연구
“내 삶의 모든 좋은 것은 나타샤에게 빚졌다. 56년을 마음과 생각을 함께 살았다.” — 1943년 아내의 임종일에 쓴 일기.
광물학자로 출발하여 생지화학이라는 새 학문을 세우고, 생물권(비오스페라)과 지식권(노오스페라) 개념을 정식화해 현대 지구계 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를 지냈고, 소비에트 라듐연구소를 조직해 초기 소련 우라늄·원자력 연구의 제도적 기반을 놓았다. 한때 카데트당 중앙위원이자 임시정부 교육차관이었으나, 혁명 후 아카데미의 보호 속에 과학자로 남아 1943년 스탈린상을 받았다.
1932년 드네프로스트로이 준공식에서: "이렇게 얻은 미국식 기술 경험이 이 나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무학으로 댐 공학을 익힌 휴 링컨 쿠퍼는 나이아가라 급류(1907)와 미시시피 키오콕 댐(1913)을 성공시키며 자력으로 미국 최고의 수력 기술자가 되었다. 1926년 소련의 초청으로 드네프로스트로이 건설 수석 컨설턴트를 맡아 GE 터빈을 공급하고 공정을 총지휘, 1932년 유럽 최대 발전소를 예정보다 8개월 앞당겨 완공했다. 같은 해 소련은 쿠퍼와 미국인 기술자 5명에게 노동적기훈장을 수여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평생 반공주의자로 남았으나, 그의 댐이 없었다면 1차 5개년 계획의 상징적 성취도 없었다.
버논 켈로그는 곤충학자이자 과학 행정가로, 스탠퍼드에서 동물학과 곤충 분류를 연구하고 미국 과학 연구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허버트 후버의 벨기에 구호 활동을 도운 인연은 그를 전후 국제구호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1921년 볼가 유역을 직접 시찰한 그는 아동만이 아니라 부모와 성인도 구호해야 한다고 워싱턴에 보고했고, 이는 미국구호행정의 사업 확대를 뒷받침했다. 그의 경력은 전문 과학자가 기근 앞에서 행정과 윤리적 판단의 주체가 된 사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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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1894캔자스에서 성장하고 캔자스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곤충학을 공부했다.
1894–1920스탠퍼드대학교 동물학 교수로 재직하며 동물학과를 세우고 곤충 분류와 진화를 연구했다.
1915–1916벨기에 미국구호위원회 책임자로 전쟁 난민과 민간인 구호를 조직했다.
1917–1920구호와 전쟁 경험을 저술하고 후버의 식량·국제구호 활동을 지원했다.
1921.09미국구호행정 특수 조사관으로 첫 구호 열차를 타고 볼가 유역을 조사했다.
1921년 말워싱턴에서 후버에게 성인까지 포함하는 구호 확대의 필요성을 보고했다.
1921–1933국가연구위원회 초대 상임 서기로 일하고 과학연구 제도와 대중 과학을 조직했다.
1939년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코마로프는 리센코의 유전학 공격을 공개 지지했고, 회의가 끝난 뒤 바빌로프와 코스토프 앞에서는 리센코의 견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빌로프는 이런 이중성을 두고 그를 '바실리 슈이스키' 같다고 비꼬았다.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 과학아카데미 총재를 지낸 식물학자이자 식물지리학자다. 극동·만주·캄차카·중앙아시아를 탐사하며 방대한 표본을 수집했고, 『만주의 식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주도로 편찬된 30권의 『소련의 식물』은 소련 분류학의 금자탑이며, 형태-지리적 방법론을 체계화하고 극동·우랄·캅카스 등지에 분원을 세워 과학의 지방 분산을 추진했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며 아카데미를 이끌었고, 리센코를 공개 지지하면서 사적으로는 바빌로프에게 비판을 털어놓는 이중적 태도로 스탈린기 과학자의 곤경을 상징했다. 전시 자원동원위원회를 이끌었고, 사후 그의 이름은 코마로프 식물연구소에 헌정되었다.
«예방의학(프로필락티카)이 우리가 가는 길이며, 디스판세리자치야는 그 예방 과제를 푸는 방법이다.»라는 공식으로 소비에트 보건의료의 예방 우위 원칙을 대표하게 되었다.
의사이자 옛 볼셰비키로, 아버지 알렉산드르 세베리노비치 세마슈코는 폴란드 귀족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마리야 발렌티노브나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누이였다. 학생 시절 체포·제적되어 1897년 고향으로 유배되었고, 1901년 카잔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마쳤다. 1904년부터 니즈니노브고로드 사회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고 1905년 소르모보 파업을 함께 조직했다. 1918년 7월 11일부터 1930년 1월 25일까지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으로서 무료 보편의료와 구역 담당의, 디스판세리자치야를 축으로 하는 '세마슈코 모델'을 세웠고, 1921년부터 사회위생학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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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901모스크바대 의대 입학, 맑스주의 서클 참여, 체포·유배 후 카잔대학 의학 졸업
1904–1906니즈니노브고로드 RSDLP 위원회 활동, 1905년 소르모보 공장 파업 조직, 체포 후 스위스 망명
1907–1912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표, 파리 자граничное бю로 ЦК 서기, 롱쥐모 당학교, 프라하 전러시아당대회 보고
1917–1918모스크바 10월 봉기 의료 지원, 모스크바소비에트 의료위생부장
1918–1930초대 RSFSR 보건인민위원, 전 국민 무료의료·중앙집중식 국영 병원·예방의학 체계 구축
1921–1949모스크바대학(후 제1의학원) 사회위생학 교수, 대의학백과사전 편집장(1927–1936)
1930–1936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아동위원회 의장으로 아동보건·부랑아 대책 주도
1944–1949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교육아카데미 회원, 학교위생연구소·보건조직의학사연구소 소장
궁전이 함락되던 순간, 팔친스키는 돌격해 들어온 적위대 앞으로 뛰어들어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의회와 소비에트 대표단이 오는 중이다"라고 외쳤다.
카잔 출신 광산 기술자로, 청년 시절 아나키스트 사상에 공명했으며 1905년 혁명에 가담했다가 망명길에 올랐다. 1917년 임시정부의 통상·산업 차관과 페트로그라드 총독을 거쳐, 10월 25일 키시킨의 보좌관으로서 겨울궁전 방어를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궁전 함락 직전 돌입해 온 볼셰비키 병력에게 각료들의 항복 결정을 전했다. 석방 뒤 소비에트 체제에 협력하며 러시아기술협회 회장, GOELRO 및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자문을 맡았으나, 1928년 샤흐티 재판의 후속 탄압 속에 체포되어 이듬해 '반혁명 사보타주' 혐의로 총살당했다.
드네프르 급류의 여러 소규모 발전소 대신, 당시로서 초대형인 560메가와트 단일 댐 하나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반 알렉산드로프는 철도·교량 기술에서 출발해 수력공학과 경제지역화의 결합을 개척한 러시아·소련의 공학자였다. 그는 대규모 단일 댐이라는 구상으로 드네프르 수력발전소를 설계하고, 전력 생산을 산업 배치와 교통망의 문제로 함께 다루었다. GOELRO 작성에 참여한 그의 작업은 전기화를 기술 사업이 아니라 계획된 국민경제 재편의 틀로 놓았으며, 이후 5개년계획의 공간적 사고에도 흔적을 남겼다. 학술 연구와 국가 계획 사이에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초 고스플란의 에너지 부문을 이끌었지만, 말년에는 다시 과학 연구와 교육에 집중했다.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러시아어 표기도 이쪽은 Эльцин, 대통령은 Ельцин으로 다르다.
1876년 키예프현 즈베니고로드카에서 태어났다(1875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189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이듬해 오데사의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를 마친 의사였다. 1910년 혁명 활동으로 우파현에 유배되어 벨레베이에서 위생의사로 일하며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혁명 후 지역 소비에트와 여러 위원회에서 일했고,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에 속해 46인 선언에 서명했다.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이듬해 초 우스티-뷔미로 유배되었고, 1929년에는 수즈달 정치격리소에 수용되었다. 1936년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마가단에서 정치범 단식투쟁을 조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37년 처형되었고 1956년 11월 23일 복권되었다. 아들 빅토르 보리소비치 엘친도 반대파로 활동했다.
공습 중 대피를 거부하며 말했다. "부상자들은 숨을 수 없소. 의사의 자리는 환자 곁이오."
소비에트 신경외과의 창시자이자 대조국전쟁기 적군 주임외과의로, 네 차례 전쟁에서 야전외과를 혁신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유리예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러일전쟁에 자원해 부상자 후송 중 총상을 입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받았다. 1932년 세계 최초의 중앙신경외과연구소를 모스크바에 창설하고 뇌종양 수술을 대중화했으며 구근절개술을 개발했다. 1937년부터 적군 주임외과의로서 야전의료를 지휘했고, 65세에도 전선에서 수천 건의 수술을 집도하며 페니실린 도입을 주도했다. 그의 지휘 아래 적군 의무대는 부상병 72.3%를 전선에 복귀시켰고 단 한 건의 감염병 유행도 없었다. 1944년 소련 의학아카데미 초대 총재로 취임했으며, 3차례 뇌졸중 끝에 1946년 7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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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러일전쟁 의무병, 부상자 후송 중 총상, 게오르기 십자훈장
1906–1910유리예프 대학 의학부 졸업, 박사학위, 독일·스위스 연수
1910–1917유리예프 대학 외과 교수, 1차대전 북서전선 적십자 외과고문, 2군 외과고문, 주임군사위생감독(1917.3–5)
1918–1923보로네시 대학 외과 교수, 적군 군병원·야전외과 강좌 조직, 피로고프 의학회 창립
헨리 뵈우커스는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보건 행정가로, 국제 구호를 임상과 위생의 조직 문제로 다룬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구호행정의 러시아 의료국장으로 일하며 식량 배급과 병행되는 병원 지원, 의약품 공급, 예방접종과 전염병 대응을 조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1926년 저서에 정리해 기근 구호가 급식소를 넘어 의료·위생 체계의 복구였음을 기록했다. 이후 황열병 연구와 군 의료 행정에도 참여했다.
1905년 뮌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스승 뢴트겐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반동의 시기에 러시아 밖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시민적 의무가 아니라고 보았고,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과학에서 만족을 찾는다고 말했다.
뢴트겐의 제자로 1918년 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소련 물리학의 산실로 키웠고, 쿠르차토프·카피차 등 핵물리학 세대를 길러냈다. 1942년 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를 지냈으며, 1950년 12월 반세계주의 공세 속에 소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2년 반도체 실험실을 세워 1954년 연구소로 발전시켰다.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그는 1942년 처칠에게 도시 폭격으로 노동계급 주거지를 무너뜨리자는 ‘Dehousing’ 논리를 제출했다.
프레더릭 린데만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윈스턴 처칠의 핵심 과학 자문자로, 과학 연구를 국가의 전쟁 수행과 정책 결정에 직접 결합했다. 그는 옥스퍼드 클라렌던 연구소를 이끌며 항공기 스핀 회복과 물리화학을 연구했고, 전시에는 통계 부서를 조직해 전쟁 내각이 보급과 생산을 수치로 판단하도록 했다. 폭격의 효과와 민간 사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도시 지역 폭격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코번트리 이후에도 폭격 지속을 뒷받침하는 정책 논리를 제공했다. 그의 전문성은 처칠에게 신속한 판단의 도구를 주었지만, 계급주의적 인간관과 폭격 정책은 과학 지식이 국가 폭력에 편입될 때 생기는 책임의 문제를 드러냈다.
'전진, 화성으로!'라는 평생 구호를 남기고 1933년 3월 발진티푸스로 숨졌으며, 자신이 설계한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가 6개월 후 발사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발트 독일인 가문 출신의 소비에트 로켓 공학자이자 우주 비행 이론가. 1931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반응 추진 연구 그룹(GIRD)을 공동 창립하고 제1여단장을 맡아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를 설계했다. 우주 온실, 태양 돛, 날개형 로켓, 대기권 제동 등 선구적 개념들을 제안했으며, '전진, 화성으로!'라는 구호로 평생 행성 간 비행의 꿈을 추구했다.
“우리는 화형대에 오를 것이다, 타오를 것이다, 그러나 신념에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 1939년, 레닌그라드에서 리센코의 박해가 절정에 달했을 때.
러시아와 소련의 유전학자·식물학자. 유전적 변이의 상동계열 법칙을 발견하고 재배식물의 기원중심지 이론을 수립했으며, 전 세계 180여 차례의 식물채집 원정을 통해 25만 점 이상의 세계 최대 종자 컬렉션을 구축했다.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VASKhNIL) 초대 총재와 전연방식물재배연구소(VIR) 소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농업과학을 이끌었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 리센코의 유사과학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1943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55년 복권.
수감 중 스물아홉 차례 심장 발작이 일었고, 그중 열 번은 류민의 사무실에서 심문 도중에 찾아왔다.
벨라루스 민스크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한 소비에트 심장병학자. 크렘린 진료국의 오랜 컨설턴트로 키로프, 오르조니키제, 디미트로프, 톨랴티 등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치료했으며, 심전도 진단법의 선구자로 1950년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1950년 11월 '의사 사건'의 첫 체포자가 되어 류민의 고문 속에 1951년 3월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했고, 류민은 그의 죽음을 아바쿠모프 탄핵의 지렛대로 이용해 사건을 전면화했다.
1921년 12월 1일, 흘로핀은 페트로그라드의 실험실에서 소련 최초의 고활성 라듐 제제를 자신의 손으로 얻어냈다.
소련 방사화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1921년 최초의 국산 라듐을 얻어내고 1924년 미량성분 분배 법칙(흘로핀 법칙)을 정립했다. 베르나츠키의 뒤를 이어 라듐연구소장이 되었고, 1940년 6월 베르나츠키와 함께 우라늄 위원회 설립을 제안해 7월 30일 위원회가 발족하자 초대 위원장에 올랐다. 전후에는 라듐연구소에서 플루토늄 분리 기술을 개발해 1949년 첫 핵실험의 산업적 기반을 마련했다.
“뉴턴에게는 과학적 포부와 사색의 깊이 외에도 행정적 재능이 있었다… 막대한 행정·실무 활동이 그를 과학 작업에서 떼어놓았다.” — 바빌로프가 1945년 자신의 뉴턴 전기에서 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린 구절.
소련의 물리광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소비에트 물리광학 학파의 창시자이다. 루미네선스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4년 파벨 체렌코프와 함께 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를 공동 발견하여 훗날 체렌코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의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1945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선출되어 초기 원자력 시대의 소비에트 과학을 행정적으로 이끌었다.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제2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동생으로, 형이 리센코의 박해로 체포·사망한 시기에도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며 물리학을 보호해야 했던 인물이다.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