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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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콩데

Louis Joseph de Bourbon, prince de Condé

망명군 콩데군을 지휘한 부르봉 왕족

부르봉 왕가의 왕족이자 콩데 공으로, 혁명 초 프랑스를 떠나 콩데군을 이끌며 혁명 프랑스와 싸웠다.

부르봉 왕가의 콩데 공으로 혁명 직후 프랑스를 떠났다. 망명귀족으로 구성된 콩데군을 조직해 오스트리아군 등과 함께 혁명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 나폴레옹 몰락 뒤 프랑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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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36–1740부르봉 왕가 방계로 태어나 1740년 아버지 루이 앙리 1세 사망으로 콩데 공위를 계승했다.
  • 1753베르사유에서 샤를로트 드 로앙과 혼인해 왕실 내 지위를 굳혔다.
  • 1750년대–1760년대루이 15세와 루이 16세의 왕실에서 그랑 메트르 드 프랑스를 지냈고, 7년 전쟁에 육군 장성으로 참전했다.
  • 1791코블렌츠에 근거를 두고 망명귀족 부대를 조직해 지휘했다.
  • 1792–1801콩데군을 이끌며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싸웠고, 이후 영국·러시아의 지원을 받았다. 부대는 1801년 해산되었다.
  • 1814–1818나폴레옹 몰락 후 파리로 돌아와 루이 18세의 왕실에서 다시 그랑 메트르를 맡았고, 1818년 사망했다.

루이 16세

Louis XVI

혁명으로 폐위되고 재판받은 프랑스 국왕

국민공회는 1792년 12월 3일 루이 16세를 직접 재판하기로 결정했고, 반역죄 유죄 표결 끝에 1793년 1월 21일 그를 단두대로 처형했다.

1774년 즉위한 프랑스 국왕으로 재정 위기 속에서 1789년 삼부회를 소집했다. 1791년 헌법을 받아들였지만 바렌 도주와 대외전쟁 속에서 왕실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1792년 왕권이 정지되고 국민공회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1793년 1월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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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4–1792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해 1792년 9월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재위했다.
  • 1789재정 위기 속에서 삼부회를 소집했고, 바스티유 함락 뒤 국민의회의 입법 권한을 인정했다.
  • 17916월 바렌 도주가 실패했고, 같은 해 9월 제정된 헌법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가 선포됐다.
  • 17928월 10일 봉기로 체포되어 탕플 감옥에 갇혔고, 9월 21일 국민공회가 왕정을 폐지했다.
  • 1792–1793국민공회가 12월 3일 그를 재판하기로 결정했고, 12월 11일부터 재판이 열려 반역죄 유죄가 선고됐다.
  • 17931월 21일 파리 혁명 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됐다.

샤를 10세

Charles Philippe, comte d’Artois
프랑스 왕정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57–1836 ○ 망명 중 사망

혁명기 망명왕당파를 이끈 아르투아 백작

1825년 랭스 대관식에서 성왕(聖王) 치유 의식까지 되살리며 왕권의 신성을 내세웠지만, 1830년 7월 칙령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검열하자 파리 시민이 봉기해 8월 2일 퇴위했다.

루이 16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으로 1789년 바스티유 함락 직후 망명했다. 국외에서 왕정복고를 추진하고 망명귀족 세력의 정치적 구심이 됐다. 부르봉 왕정복고 뒤 1824년 샤를 10세로 즉위했으나 1830년 7월혁명으로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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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5아버지 도팽 루이 사망
  • 1773사부아의 마리 테레즈와 결혼
  • 17897월 17일, 바스티유 함락 사흘 뒤 출국
  • 1791–1792트리어 선제후국에 망명 궁정을 두고 반혁명 침공을 준비
  • 1814왕국 총독 대리로서 왕정복고를 주도
  • 1824–1830프랑스 국왕. 1825년 랭스에서 대관식
  • 18307월 칙령 발표, 8월 2일 퇴위

자크 카틀리노

Jacques Cathelineau
가톨릭 왕당군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59–1793 ✕ 전상으로 사망

방데 봉기의 첫 총사령관

레팽앙모주 출신의 행상인이자 성당 사무원. 징병과 성직자 시민법을 둘러싼 반발로 1793년 3월 무장 봉기에 나섰고, 6월 12일 수뮈르에서 방데 지도자들의 회의로 총사령관에 추대됐다. 6월 29일 낭트 공격 중 치명상을 입고 7월 14일 숨졌다.

앙주 지방의 행상인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1793년 징병 반대 봉기에 가담했다. 여러 농민 부대를 결집시키며 가톨릭 왕당군의 첫 총사령관으로 선출됐다. 낭트 공격에서 입은 총상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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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3.03.12생플로랑 르 비에유에서 봉기가 일어난 뒤 이웃 주민을 모아 잘레로 행군했고, 27명이 그를 따랐다.
  • 1793.03.13잘레에서 첫 전투를 치러 성과 대포를 빼앗았고, 이어 스토플레와 함께 셀레를 점령했다.
  • 1793.04.23–1793.05.05보프레오를 점령하고 투아르 전투에서 승리했다.
  • 1793.05.16–1793.06.09퐁트네르콩트에서 패했으나, 몽트뢰유벨레와 수뮈르를 점령하며 만회했다.
  • 1793.06.12수뮈르 함락 뒤 방데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가톨릭 왕당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됐다.
  • 1793.06.294만 명을 이끌고 낭트를 공격하다 창문에서 쏜 총에 치명상을 입었다.
  • 1793.07.14생플로랑 르 비에유로 옮겨져 부상으로 숨었다.

프랑수아 드 샤레트

François Athanase de Charette de la Contrie

방데 남부의 왕당파 유격전을 이끈 지휘관

브르타뉴 하급 귀족 출신 해군 장교로 공화국에 맞선 방데 봉기의 상징적 지휘관이 됐다. 그의 선택과 지휘권 다툼은 왕당파 안에서도 그를 가장 논쟁적인 지휘관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해군 장교 출신으로 1793년 방데전쟁에서 가톨릭 왕당군 지휘관이 됐다. 방데 남부에서 유격전을 이끌었고 1795년 조네 조약을 맺었다가 다시 봉기했다. 1796년 체포되어 낭트에서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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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9–1790브레스트에서 해군 근위병으로 복무를 시작해 1787년 해군 중위로 승진했고 1790년 사직했다.
  • 1793마슈쿨 반군의 지휘를 맡았고 12월 가톨릭 왕당군 바포아투 부대의 장군으로 선출됐다.
  • 17952월 조네에서 조약을 맺고 공화국을 인정했으나 5월 다시 무기를 들었고, 7월 루이 18세에게 총사령관으로 인정받았다.
  • 17963월 라 샤보트리에서 체포되어 낭트에서 총살됐다.

장 조제프 아마블 앙베르

Jean Joseph Amable Humbert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67–1823 ○ 뉴올리언스에서 사망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여단장, 1798년 아일랜드 원정 지휘관

1798년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 전투에서 레이크 경 휘하 영국군을 격파했다.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1767년 생낭보르(로렌 보주)에서 태어나 1792년 자원 입대해 급속히 승진했고 1794년 여단장이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원정을 지휘해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에서 영국군을 격파했으며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 선포에 관여했으나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항복하고 포로 교환으로 귀국했다. 이후 생도맹그 원정에 참전하고 1813년 미국으로 이주해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을 도왔으며 만년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다 182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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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213대대 자원병으로 입대
  • 1794여단장(général de brigade) 임명
  • 1798아일랜드 원정 지휘, 킬랄라 상륙과 캐슬바 승리
  • 1802생도맹그 원정 참전
  • 1813미국 뉴올리언스로 이주
  • 1815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 지원

샤를로트 코르데

Charlotte Corday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68–1793 ✕ 혁명재판소 판결 후 처형

지롱드파를 지지한 귀족 출신으로 마라를 암살한 인물

1793년 7월 13일 ‘지롱드파 반란 음모를 안다’고 속여 마라의 면담을 얻어, 약용 목욕 중이던 그를 부엌칼로 찔러 죽였다.

프랑스 혁명기 인물로 지롱드파를 지지했다. 1793년 7월 13일 자코뱅 지도자 장폴 마라를 암살했다. 그녀는 마라를 1792년 9월 학살의 책임자로 보았고 급진화한 자코뱅파 때문에 혁명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

Henri de La Rochejaquelein

스물한 살에 방데군 총사령관이 된 귀족 장교

1793년 방데 봉기의 지휘관으로 부상해 숄레 패전 뒤 스물한 살에 왕당군 총사령관이 됐다. 1793년 말 루아르강 북쪽 원정을 이끌었고 1794년 1월 게릴라전 중 전사했다.

왕실군 장교 출신으로 1793년 방데 봉기에 합류해 주요 전투를 지휘했다. 숄레 패전 뒤 스물한 살에 가톨릭 왕당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됐고 루아르강 북쪽 원정에 참여했다. 1794년 공화국군과의 교전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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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7부친이 대령으로 있던 왕실 폴란드 연대에 입대
  • 1792입헌위병대 장교로 8월 10일 튈르리궁 방어전에 참전
  • 1793징집 거부 뒤 레스퀴르와 함께 봉기에 합류해 퐁트네르콩트·소뮈르 등에서 승리
  • 1793.10숄레 패전 뒤 가톨릭 왕당군 총사령관으로 선출
  • 1793.11루아르강 북쪽 원정에서 그랑빌 공략에 실패하고 앙제로 후퇴
  • 1793.12르망과 사브네 전투에서 패해 부대가 궤멸
  • 1794.01.28누아예 부근에서 정찰 중 공화국군 병사에게 사살

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
독립 활동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97–1877 ○ 뇌졸중

7월 왕정의 총리로, 1871년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제3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정치가

1871년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한 티에르는 1873년 독일군의 프랑스 영토 철수를 앞당긴 뒤 왕당파 의회의 반대 속에 사임했다.

마르세유 출신 변호사·언론인으로 『프랑스 혁명사』를 써 이름을 알렸고, 1830년 7월 혁명에서 루이 필리프를 옹립한 뒤 7월 왕정의 내무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1834년 리옹 견직공 봉기와 파리 봉기를 진압했다. 제2제정기에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였다. 1871년 2월 국민의회가 그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 회수가 실패하자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겨 5월 피의 주간에 코뮌을 진압했다. 1871년 8월 대통령이 되었고 독일 배상금을 조기에 갚았으나 1873년 왕당파 의회에 밀려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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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3–1827『프랑스 혁명사』 10권을 출간해 역사가로 이름을 알렸다.
  • 18367월 왕정에서 총리를 지냈다.
  • 18407월 왕정에서 총리를 지냈다.
  • 1871–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Patrice de Mac Mahon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08–1893 ○ 자연사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베르사유군을 이끌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도덕 질서」의 대통령이 된 원수

1871년 5월 베르사유군 사령관으로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대통령이 된 뒤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공화파가 의회 다수당이 되자 1879년 사임했다.

아일랜드계 귀족 가문 출신 군인으로 알제리 정복과 크림 전쟁의 말라코프 공격, 1859년 마젠타 전투로 원수와 공작이 되었다. 1870년 샬롱군을 이끌고 메스를 구하러 가다 스당에서 부상당해 황제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독일에서 풀려난 뒤 티에르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1871년 5월 파리에 진입했고, 피의 주간의 진압과 대량 처형이 그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1873년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왕정복고를 기다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의회와의 충돌에서 패한 뒤 187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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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7프랑스군에 입대했다.
  • 1855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 1859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해 원수와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 1864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됐다.
  • 1870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다 스당 전투에서 부상당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포로가 됐다.
  • 1871티에르 대통령 아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지휘했다.
  • 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돼 「도덕 질서」 정책을 추진했다.
  • 1877–1879의회와의 대립 뒤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1879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레옹 도데

Léon Daudet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7–1942 ○ 병사

악시옹 프랑세즈의 목소리, 추문을 날마다 지면에서 거리로 밀어 올린 논객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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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1890파리 출생,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의학 수학
  • 1900–1908왕당파로 전향, 악시옹 프랑세즈 합류
  • 1908–1942《악시옹 프랑세즈》 공동 창간자이자 주필
  • 1919–1924파리 선출 하원의원
  • 1923–1927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둘러싼 소송, 명예훼손 유죄로 벨기에 망명
  • 1930사면으로 귀국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로 2월 6일 시위를 조성
  • 1942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사망

막심 베강

Maxime Weygand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7–1965 ○ 자연사

승리의 참모에서 패배와 협력의 장군으로

1940년 6월 12일, 베강은 프랑스 정부에 항복을 권고했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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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88생시르 군사학교와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
  • 1914–1918포슈의 참모장 및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
  • 1918콩피에뉴 휴전 협상에서 조건 낭독
  • 1920폴란드 국제연합군사사절단 군사 고문
  • 1923–1924레반트 고등판무관
  • 1931–1935프랑스 최고전쟁위원회 부의장 겸 육군 감찰관
  • 1940.05–06프랑스군 총사령관, 휴전 권고
  • 1940.06–1941.11비시 국방장관 및 북아프리카 총대표
  • 1942–1945독일에 억류, 이터성에 수감
  • 1948반역 혐의 무혐의 처분

샤를 모라스

Charles Maurras

악시옹 프랑세즈의 두뇌, 「통합민족주의」의 이름으로 공화국 자체를 부정한 왕당파 이론가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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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90마르티그 출생, 청력을 잃고 파리에서 문필 활동 시작
  • 1899–1908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악시옹 프랑세즈에 합류, 1908년 일간지 창간
  • 1908–1939「통합민족주의」의 이론가로 프랑스 극우 전체에 영향
  • 1926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 2월 6일 시위 호소
  • 1938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선출
  • 1940–1944비시 지지,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
  • 1945.01대적 협력으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 선고
  • 1952병으로 석방된 해에 투르에서 사망

프랑수아 코티

François Coty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74–1934 ○ 병사

향수 재벌의 돈으로 극우 동맹과 대중지를 함께 사들인 후원자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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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1904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생, 파리에서 향수 사업 시작
  • 1905–1920향수 산업에서 당대 최대급 재산 축적
  • 1922《르 피가로》 인수
  • 1925–1928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에 자금 지원
  • 1928대중지 《라미 뒤 푀플》 창간
  • 1933연대 프랑스 창설과 자금 지원
  • 1934.07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사망

장 시아프

Jean Chiappe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78–1940 ✕ 격추사

좌파에 엄격하고 동맹에 관대했던 파리 경찰청장, 그 해임이 2월 6일의 도화선이 되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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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코르시카 아자시오에서 출생
  • 1900년대–1926경찰 행정의 요직을 거치며 승진
  • 1927–1934파리 경찰청장
  • 1934.02.03달라디에가 해임, 모로코 총감 제안을 거부
  • 1935–1940파리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음
  • 1940.11비시의 레반트 고등판무관 임명, 부임 길에 격추되어 사망

프랑수아 드 라 로크

François de La Rocque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5–1946 ○ 억류 후유증

의사당 앞에서 대열을 돌린 불의 십자단의 대령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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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로리앙에서 장군의 아들로 출생
  • 1907–1918생시르 졸업, 모로코 근무와 1차 대전 복무
  • 1919–1928참모 근무를 거쳐 중령으로 예편
  • 1929–1931불의 십자단 가입, 회장 취임
  • 1931–1936불의 십자단을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확대
  • 1934.02.06의사당 앞에서 대열을 해산시킴
  • 1936.06동맹 해산령 뒤 프랑스사회당(PSF) 창당
  • 1936–1939PSF를 프랑스 최대 우파 정당으로 키움
  • 1940–1942페탱 지지, 비시 국민평의회 참여
  • 1942–1943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 운영, 1943년 3월 게슈타포에 체포
  • 1943–1945독일로 이송되어 억류
  • 1945–1946해방 후 프랑스 당국에 구금, 이듬해 병사
  • 1961저항 강제이송자로 사후 인정

피에르 테탱제

Pierre Taittinger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7–1965 ○ 병사

청년애국단을 세운 의원, 거리의 부대와 의사당 의석을 함께 가진 사람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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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918파리 출생, 1차 대전 참전
  • 1919–1940하원의원
  • 1924청년애국단 창설
  • 1925–1936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동맹을 지휘
  • 1934.02.06청년애국단이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로 참가
  • 1940.07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
  • 1943–1944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
  • 1944–1945해방 후 구금되었다가 석방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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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조르주 티에리 다르장리외

Georges Thierry d'Argenlieu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9–1964 ○ 자연사

고등판무관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워 인도차이나 전쟁의 길을 연 수도사 출신 제독

1946년 6월 1일,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일 때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일방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과의 충돌을 격화했다.

브레스트 출신의 해군 장교로 1차 대전 뒤 카르멜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돌아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해군을 이끌었다. 1945년 10월 31일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식민 행정의 복구를 맡았다. 1946년 베트민 지도부가 프랑스에서 협상하는 동안, 3월 6일 호–생트니 협정을 어기고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세워 사실상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하이퐁 포격 등 강경책을 이끌다 1947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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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카르멜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 1940드골 휘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 1945드골에 의해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지명되었고, 10월 31일 현지에 도착했다.
  • 19466월 1일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11월 랑선과 하이퐁의 무력 장악을 지지했다.
  • 19473월 4일 프랑스 정부가 그를 소환하고 직위에서 해임했다.

자크 도리오

Jacques Doriot
프랑스 공산당 파시스트·나치 프랑스 프랑스 1898–1945 ✕ 기총소사로 사망

인민전선을 가장 먼저 요구하고 파시스트로 끝난 생드니의 공산주의자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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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우아즈 브렐에서 노동자 집안에 출생
  • 1915–1922생드니의 금속노동자, 공산주의 청년운동에 투신
  • 1923–1924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지도부, 1924년 하원의원 당선
  • 1925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
  • 1927코민테른 특사로 중국 파견
  • 1931–1937생드니 시장
  • 1934.02–06사회당과의 공동행동 공개 요구, 모스크바 소환 거부, 6월 27일 제명
  • 1936프랑스인민당(PPF) 창당
  • 1941–1944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 참여, 독일군복으로 동부전선 종군
  • 1945.02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로 사망

앙리 나바르

Henri Navarre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98–1983 ○ 자연사

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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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 1956육군에서 퇴역하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한 저서 《인도차이나의 고통》을 출간했다.

라울 살랑

Raoul Salan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99–1984 ○ 자연사

인도차이나 전쟁의 프랑스군 사령관이자 OAS 지도자였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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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3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58–1960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
  • 1961–19624월 쿠데타 가담, 이후 OAS 지도자
  • 1962체포되어 종신 구금형 선고
  • 1968사면·복권

크리스티앙 드 카스트리

Christian de Castries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902–1991 ○ 자연사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를 지휘하다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된 프랑스 장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패전 뒤 포로가 되었다. 석방 후 사단장과 기업 경영자를 거쳐 군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로,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12월 디엔비엔푸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되어 비행장이 포격으로 부서지고 우기로 보급이 끊기자 요새는 3개 거점만 남았다. 5월 7일 하노이의 코니 장군은 백기를 들지 말고 사격을 멈춘 뒤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카스트리는 요새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 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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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육군에 입대해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했다.
  • 1926기병 장교로 임관했다가 승마 스포츠를 위해 군을 떠났다.
  • 1940–1945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복귀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와 독일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제3 모로코 스파히 기병대를 지휘했다.
  • 1946인도차이나에 파견되어 모로코 구미에르 대대를 지휘했다.
  • 1953–1954부상으로 프랑스에서 1년간 요양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대령으로 디엔비엔푸 방어를 맡았고, 포위전 막바지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패배했고, 그는 제네바 휴전 협정이 마련되는 동안 4개월간 포로로 억류됐다.
  • 1954–1959귀국 후 서독 주둔 제5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959년 교통사고 뒤 군에서 은퇴했다.
  • 1991파리에서 사망했다.

르네 부스케

René Bousquet

점령자와 협상한 비시 경찰 수장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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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홍수 때 구조 활동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음
  • 1931내무부 차관 피에르 카탈라의 보좌관
  • 1933부지사
  • 1939–1942마른현 지사 및 지역 지사
  • 1942–1943비시 경찰 사무총장
  • 1950년대–1993금융·언론계 사업가 및 정치적 영향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