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취에 의한 축적
Accumulation by dispossession
데이비드 하비가 『신제국주의』(2003)에서 내놓은 개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출발점에서 일어난 일로 서술한 「본원적 축적」의 약탈, 사기, 폭력, 곧 토지 사유화와 농민 축출, 공유 재산의 사유화, 식민지 수탈, 국채와 신용을 통한 수탈이 과거의 한 단계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계속된다고 보고, 진행 중인 과정을 「본원적」이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며 붙인 이름이다. 하비는 1970년대 이후 확대재생산을 통한 축적이 막히자 사유화, 금융화, 위기의 관리와 조작, 국가의 재분배를 통한 탈취가 신자유주의와 「신제국주의」의 표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상세
마르크스는 『자본』 1권 마지막 편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이른바 본원적 축적」으로 서술했다. 영국 농민이 공유지에서 쫓겨나고, 교회 재산과 국유지가 사유화되고, 식민지가 약탈되고, 국채와 조세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한쪽에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가, 다른 쪽에는 노동력밖에 팔 것이 없는 무산자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일반적인 자본축적 이론은 이 과정이 이미 끝났다고 가정한다. 상품의 생산자이자 교환자로서 자본가는 자리를 잡았고, 노동력은 상품이 되어 대체로 제 가치대로 거래되며, 축적은 공장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확대재생산」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하비는 이 가정의 약점을 지적한다. 약탈과 사기와 폭력에 기댄 축적을 더 이상 의미 없는 「본원적 단계」로 밀어내거나,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로 본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에서 자본축적의 두 측면을 구분했다. 하나는 공장·광산·농장에서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측면으로, 형식상으로는 평화와 재산과 평등이 지배한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관계로, 식민 정책, 국제 차관, 세력권 정책, 전쟁이 주된 방법이며 폭력과 사기와 억압과 약탈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하비는 이 두 측면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룩셈부르크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본원적 축적의 약탈적 관행이 자본축적의 긴 역사지리 속에서 계속 해 온 역할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진행 중인 과정을 ‘본원적’이라 부르는 것은 이상해 보이므로」 이를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는 개념으로 바꾼다고 썼다.
하비는 마르크스가 본원적 축적으로 든 과정을 다시 늘어놓는다.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농민의 강제 축출, 공동·집단·국가 소유 같은 여러 형태의 재산권을 배타적 사적 소유권으로 바꾸는 것, 공유지에 대한 권리의 억압, 노동력의 상품화와 토착적 생산·소비 형태의 억압, 천연자원을 포함한 식민·신식민·제국주의적 자산 수탈, 교환과 조세(특히 토지세)의 화폐화, 노예무역, 그리고 고리대와 국채, 마침내 신용 제도다. 폭력의 독점과 합법성의 정의를 쥔 국가가 이 과정을 뒷받침하고 밀어붙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비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오늘날에도 강하게 살아 있고, 일부는 더 강해졌다. 레닌·힐퍼딩·룩셈부르크가 지적했듯 신용 제도와 금융자본은 약탈과 사기의 주된 지렛대다. 주가 부양, 폰지 사기, 인플레이션을 통한 자산 파괴, 인수합병을 통한 자산 박탈, 선진국 주민까지 빚에 묶는 부채 예속, 기업 사기, 연금 기금의 약탈이 현대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다. 엔론의 붕괴는 많은 사람에게서 생계와 연금을 앗아 갔다. 무엇보다 헤지펀드와 금융자본 기관의 투기적 공격이 탈취의 최전선이다. 1997년 이들이 동남아시아 전역에 유동성 위기를 만들자 이윤을 내던 기업들이 파산했고, 중심부 나라의 잉여 자본이 이를 헐값에 사들였다. 로버트 웨이드와 프랭크 베네로소는 이를 「지난 50년 동안 세계 어디에서도 없었던, 국내 소유자에서 외국 소유자로의 최대의 평시 자산 이전」이라 불렀다.
완전히 새로운 탈취 기제도 열렸다. 세계무역기구의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TRIPS)은 유전 물질과 종자의 특허와 사용 허가를, 그 물질을 가꾸어 온 주민들에게 거꾸로 들이대는 길을 열었고, 생물 해적 행위가 퍼졌다. 땅·공기·물 같은 지구 환경 공유재의 고갈과 자연의 전면적 상품화, 문화와 지적 창조성의 상품화도 탈취다. 대학 같은 공공 자산의 기업화와 사유화, 세계를 휩쓴 물과 공공시설의 민영화는 「공유지 인클로저」의 새 물결이다. 과거의 계급투쟁으로 얻은 국가 연금, 복지, 국민 의료 같은 공동 재산권을 사적 영역으로 되돌리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통의 이름으로 추진된 가장 노골적인 탈취 정책이며, 부시 정부의 사회보장 민영화 계획이 그 예였다.
영어판 위키백과의 정리처럼, 하비는 이 정책들이 주로 네 가지 실천, 곧 사유화, 금융화, 위기의 관리와 조작, 국가의 재분배를 따른다고 보았다. 영국 대처 정부의 공공임대주택 매각이 한 예로 꼽힌다. 처음에는 저소득층이 싼값에 집을 사 자산을 얻는 것으로 보였지만, 곧 주택 투기가 일어나 저소득층은 도심 밖으로 밀려났고, 새 주택 소유자는 장기 주택담보대출의 이자로 소득의 일부를 은행에 넘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탈취에 의한 축적은 하비의 「공간적 조정」과 과잉축적론과 한 묶음이다. 그는 탈취가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확대재생산에서 과잉축적 위기가 일어나 다른 출구가 없어 보일 때 강해진다고 보았다. 1930년대 일본의 타이완 수탈이나 영국의 남아프리카 위트워터스랜드 수탈, 1980년대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시행한 구조조정 프로그램도 확대재생산의 어려움에 대한 처방으로서의 탈취로 해석된다. 하비는 미국 중심의 신제국주의의 표지인 탈취의 물결이 반세계화 운동과 한국 같은 나라의 저항을 낳고 있다고 보았다.
이 개념은 널리 쓰인 만큼 비판도 받았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라주 다스는 2017년 「데이비드 하비의 탈취에 의한 축적 이론: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서, 이 개념이 내적 연관이 없는 과정들을 한데 묶고 함께 다뤄야 할 과정들을 떼어 놓는 「혼란스러운」 개념이며, 하비가 그 인과적 의미를 지나치게 부풀려 탈취를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 계기로 잘못 본다고 비판했다. 또 하비가 생산자의 탈취를 프롤레타리아와 반프롤레타리아의 「착취에 의한 축적」과 잇지 못하고, 제국주의를 생산에 뿌리박은 착취에서 떼어 내 보며, 노동계급의 역할을 낮게 보는 개량주의적 정치적 결론에 이른다고 했다. 우루과이의 정치생태학자 에두아르도 구디나스는 2015년, 자원 수탈과 원주민·농민 탈취라는 문제의식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며, 루이 마우루 마리니 같은 라틴아메리카 사상가들의 전통을 제쳐 둔 채 영국 학자를 인용하는 「하비 유행」은 일종의 지적 식민주의라고 지적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진보 정부들이 자신의 추출주의 정책의 모순을 덮으려고 하비를 인용한다고도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