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i du 31 mai 1850 · 1850.05.31–1851.12.02

1850년 5월 31일 선거법

Electoral Law of 31 May 1850

상위 항목 프랑스 제2공화국

1850년 5월 31일 프랑스 제2공화국 입법국민의회가 433 대 241로 통과시킨 선거법. 같은 코뮌이나 캉통에 3년 넘게 살았음을 증명해야 투표할 수 있게 해, 일자리를 따라 옮겨 다니던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을 중심으로 유권자 약 280만 명을 명부에서 지웠다. 질서당 지도자 17명, 이른바 성주들이 만들어 「성주들의 법」이라고도 불렸고,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때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폐지했다.

상세

1849년 5월 선거 뒤 입법국민의회는 정통왕조파, 오를레앙파, 온건 공화파를 아우른 질서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런데 1850년 3월 10일과 4월 28일 보궐선거에서 산악파가 잇달아 이기고 소설가 외젠 쉬까지 당선되자, 질서당은 겁을 먹고 민중 유권자 상당수에게서 투표권을 빼앗기로 했다. 5월 초 내무장관 바로슈가 17명으로 된 위원회를 불러 법안을 맡겼다. 티에르, 몰레, 몽탈랑베르, 베리에 같은 다수파 우두머리가 들어 있어 이들을 「성주들」이라 불렀다. 레옹 포셰가 보고자를 맡아 5월 8일 법안을 냈고, 의회는 453 대 197로 긴급 처리를 결정했다.

법은 보통선거라는 원칙은 그대로 둔 채 조건을 바꾸었다. 제2조는 같은 코뮌이나 캉통에 적어도 3년 동안 살아온 사람만 선거인 명부에 올리게 했다. 1848년 3월 5일 법령이 요구한 거주 기간은 6개월이었다. 일거리를 따라 이 공사판 저 공사판을 옮겨 다니던 마을 장인, 공장과 농장의 노동자, 프랑스 일주 수련을 하던 직인들이 대거 빠졌다. 이들은 본당 신부와 지방 유지의 영향을 가장 덜 받던 사람들이었다. 거주 기간은 주로 인두세 납부 명부로 증명했으므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밀려났다. 제9조는 반란, 집회법·클럽법 위반 따위로 한 달 넘게 징역을 산 사람도 선거권에서 뺐다.

토론에서 빅토르 위고는 이 법이 “600만 특권층이 300만 배제된 이들을 봉건적으로 다스리게 한다”고 비판했고, 카베냐크, 라마르틴, 쥘 그레비, 피에르 르루, 폴 드 플로트 등도 반대했다. 몽탈랑베르는 로마 원정을 했듯 사회주의와도 전쟁을 해야 한다고 맞섰고, 티에르는 5월 24일 민중을 “천한 무리(vile multitude)”라고 불렀다. 법은 5월 31일 433 대 241로 통과되었다. 유권자는 961만 8,057명에서 680만 9,281명으로 3분의 1 가까이 줄었고, 파리에서는 22만 4,000명이 7만 4,000명으로, 노동자 도시 릴에서는 1만 5,058명이 4,524명으로 줄었다.

대통령 보나파르트는 1850년 6월 3일 이 법을 공포했지만, 1851년 7월 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이 무산되자 이 법을 의회를 칠 무기로 돌렸다. 그는 11월 4일 교서로 폐지를 요구했고, 의회는 11월 13일 355 대 348로 폐지안을 부결했다. 이것이 쿠데타의 구실이 되었다. 12월 2일 보나파르트는 의회 해산과 함께 이 법의 폐지를 포고했다. 그동안 총선거가 없었으므로 이 법이 실제로 적용된 선거는 1851년 11월 30일 파리 보궐선거 하나뿐이었다.

마르크스는 『브뤼메르 18일』에서 “1850년 5월 31일의 법은 부르주아지의 쿠데타였다”고 썼다. “보통선거권은 3월 10일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정면으로 반대한다고 선언했고, 부르주아지는 보통선거권을 추방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니 5월 31일의 법은 계급투쟁의 필연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또 이 법이 유권자는 줄이면서 대통령 선거가 유효하려면 200만 표가 필요하다는 헌법 조항은 그대로 두어, 대통령 선거를 인민의 손에서 국민의회의 손으로 몰래 넘기려 했다고 보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fr.wikipedia.org
  2. fr.wikipedia.org
  3. fr.wikipedia.org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5.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