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비판론
Empirio-criticism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가 세우고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가 널리 알린 인식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감각으로 주어지는 ‘순수 경험’뿐이므로, 물질이나 정신처럼 경험 너머를 가정하는 개념은 형이상학으로 걷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마흐의 이름을 따 ‘마흐주의’라고도 한다. 1900년 무렵 자연과학자들 사이에 크게 퍼졌고 1905년 혁명 뒤 보그다노프·바자로프·루나차르스키 등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를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려 하자, 레닌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에서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상세
경험비판론은 어떤 문제에 답하려 했나?
19세기 후반의 자연과학자들은 묘한 처지에 있었다. 물리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그 바탕에 놓인 ‘원자’, ‘힘’, ‘절대 공간’ 같은 개념은 아무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과학이 정말로 아는 것은 무엇이고, 습관처럼 덧붙여 온 형이상학은 무엇인가? 경험비판론은 이 물음에 ‘경험만 남기고 나머지를 걷어내자’고 답한 철학이다. 이름 그대로 ‘경험의 비판’, 곧 경험에 무엇이 실제로 주어지고 무엇이 덧붙여졌는지를 가려내는 작업이다.
창시자로 꼽히는 리하르트 아베나리우스는 1876년 『최소 힘 소비의 원리에 따른 세계 사유로서의 철학』을, 1888~90년에 『순수경험 비판』을 냈다. 그의 인식론은 사유나 주체에서도, 물질이나 객체에서도 출발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접 겪는 그대로의 ‘순수 경험’에서 출발한다. 같은 무렵 에른스트 마흐가 1886년 『감각의 분석』을 냈다. 두 사람의 책은 1900년 무렵 자연과학자들뿐 아니라 작가와 시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읽혔다. 마흐의 영향이 특히 컸기 때문에 이 흐름은 ‘마흐주의’라고도 불린다. 엄밀히는 마흐주의가 마흐의 학설만 가리킬 때도 있어 두 말은 부분적인 동의어다.
‘물체는 감각의 복합’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마흐의 출발점은 우리가 사과를 안다고 할 때 실제로 주어지는 것이 빨간색, 둥근 모양, 단단함, 단맛 같은 감각뿐이라는 관찰이다. 우리는 이 감각들이 비교적 안정되게 함께 나타나기 때문에 그 묶음에 ‘사과’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다면 감각 뒤에 감각을 일으키는 ‘물체 자체’를 따로 세울 이유가 없다. 마흐는 『감각의 분석』에서 이렇게 썼다. “물체가 감각을 낳는 것이 아니라, 요소의 복합(감각의 복합)이 물체를 이룬다.”
Nicht die Körper erzeugen Empfindungen, sondern Ele- mentencomplexe (Empfindungscomplexe) bilden die Körper.
마흐는 이 감각을 ‘요소’라고 불렀다. 같은 빨간색이라는 요소도 다른 요소들(빛, 다른 물체)과의 관계에서 보면 물리학의 대상이고, 우리 몸(눈, 신경)과의 관계에서 보면 심리학의 대상이다.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은 서로 다른 두 실체가 아니라 같은 요소를 보는 두 방향일 뿐이라는 이 생각을 오늘날 ‘중립적 일원론’이라고 부른다. 같은 논리는 ‘나’에도 적용되었다. 자아 역시 비교적 안정된 요소들의 묶음일 뿐이어서, 마흐는 “자아는 구할 수 없다”고 썼다.
Das Ich ist unrettbar.
여기에 ‘사유의 경제’라는 원리가 더해진다. 과학의 법칙은 세계의 숨은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을 가장 적은 노력으로 요약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아베나리우스가 ‘최소 힘 소비의 원리’라고 부른 것도 같은 생각이다. 이 원리를 따르면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원자는 경제적이지 않은 가설이 된다. 마흐는 1897년 루트비히 볼츠만의 강연을 듣고 “나는 원자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을 비판한 그의 논의는 젊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게 영향을 주어, 아인슈타인은 1930년 마흐를 “일반 상대성 이론의 선구자로 여기는 것이 정당하다”고 썼다.
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기에 끌렸나?
1905년 혁명이 꺾인 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다시 묻는 움직임이 일었다. 엥겔스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은 전자의 발견과 방사능으로 흔들리던 새 물리학 앞에서 낡아 보였고, 마흐는 최신 과학의 철학자로 보였다. 마흐 자신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 빅토어 아들러와 가까웠고 유언으로 당 기관지 《노동자 신문》에 돈을 남긴 사람이었다. 볼셰비키 쪽의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 블라디미르 바자로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멘셰비키 쪽의 파벨 유시케비치, 니콜라이 발렌티노프 등이 경험비판론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보완하려 했다. 1908년 이들이 함께 낸 논집 『마르크스주의 철학 개요』에는 바자로프, 보그다노프, 루나차르스키, 야코프 베르만, 오시프 겔폰드, 유시케비치, 세르게이 수보로프가 글을 실었다.
이들이 경험비판론에서 본 것은 교조를 거부하는 비판 정신과, 지식을 인간 집단의 실천과 연결하는 길이었다. 보그다노프는 여기서 출발해 자기 체계인 경험일원론을 세웠고, 루나차르스키는 인류의 집단적 힘을 새 신앙의 대상으로 삼자는 건신주의로 나아갔다. 반대편에서는 플레하노프와 그의 제자 류보프 악셀로드(오르토독스)가 레닌보다 먼저 이들을 ‘철학적 배교자’로 공격했다.
레닌은 무엇을 비판했나?
레닌은 1908년 제네바와 런던에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써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냈다. 그의 비판의 중심은 간단하다. 물체가 감각의 복합이라면 세계는 내 감각의 복합이고, 그러면 다른 사람도 바깥 세계도 내 감각 속에만 있게 된다. “마흐가 말하듯 물체가 ‘감각의 복합’이라면, 또는 버클리가 말했듯 ‘감각의 결합’이라면, 거기서 불가피하게 세계 전체는 나의 표상일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레닌이 보기에 마흐의 ‘요소’는 18세기 아일랜드 주교 조지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에 새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Если тела суть «комплексы ощущений», как говорит Мах, или «комбинации ощущений», как говорил Беркли, то из этого неизбежно следует, что весь мир есть только мое представление.
레닌은 자연과학의 상식을 증인으로 불렀다. 지구는 인간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감각하는 어떤 생명체도 없을 때부터 있었다. 경험만이 실재라면 이 명백한 사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는 경험비판론에 맞서 물질을 이렇게 정의했다. “물질이란 인간에게 감각으로 주어지며, 우리의 감각이 그것을 복사하고 사진 찍고 반영하지만 감각과 독립해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가리키는 철학적 범주다.” 이 정의는 물질을 원자나 특정한 물리학 이론에 묶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의 발견으로 ‘물질이 사라졌다’는 물리학의 위기 담론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레닌의 논점이었다.
Материя есть философская категория для обозначения объективной реальности, которая дана человеку в ощущениях его, которая копируется, фотографируется, отображается нашими ощущениями, существуя независимо от них.
레닌은 철학에도 당파가 있다고 보았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싸움은 결국 사회의 계급 투쟁을 반영하며, 경험비판론은 아무리 과학의 옷을 입어도 신앙주의에 문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보그다노프는 1910년 『믿음과 과학』으로 반박해, 절대적 진리와 물자체를 고집하는 레닌의 사유야말로 권위에 기대는 종교적 사유라고 맞섰다. 레닌의 책 자체는 이 사전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항목과 문헌에서 다루고, 이 항목은 비판의 대상이 된 철학을 다룬다.
그 뒤 경험비판론은 어떻게 되었나?
소련에서 레닌의 책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전이 되었고, 경험비판론은 오랫동안 그 책을 통해서만 알려졌다. 1938년 『단기강좌』는 레닌의 결론 “마흐와 아베나리우스의 학파 전체가 관념론으로 가고 있다”를 그대로 옮겨 실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레닌의 책이 혁명 뒤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모범으로 떠받들어진 탓에 소련에 이 철학 사조에 대한 편향된 이해가 퍼졌다고 지적한다. 『감각의 분석』 같은 원저가 소련 독자에게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채 경험비판론은 ‘반동 철학’의 대명사가 되었다.
Вся школа Маха и Авенариуса идет к идеализму
서방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마흐의 실증주의는 1920년대 빈에서 ‘에른스트 마흐 협회’를 만든 빈 학단과 논리실증주의에 곧바로 이어졌고, 20세기 과학철학의 한 줄기가 되었다. 다만 경험만을 실재로 보는 그 입장은 과학이 관찰할 수 없는 대상(원자, 전자기장)을 다루면서 거듭 수정되었다. 마흐가 믿지 않던 원자는 20세기 초에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오늘날 이 논쟁을 읽는 방식은 둘로 갈린다. 한쪽은 레닌이 마흐의 섬세한 과학철학을 거칠게 버클리와 동일시했다고 본다. 다른 쪽은 경험비판론이 실제로 바깥 세계의 실재성을 말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었고, 레닌의 물질 정의가 과학의 대상을 특정 이론에 묶지 않는 실재론의 요점을 짚었다고 평가한다. 어느 쪽이든 경험비판론은 ‘과학의 철학’을 둘러싼 20세기의 긴 논쟁이 러시아 혁명운동 안으로 들어온 통로였다.